선가귀감 우리말 본문
한 물 건 1 ~ 4
{01}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뚜렷히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생긴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으니,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도다.
{02}
부처님과 조사스님 세상에 출현하시니
바람 없는데 물결 일어남이라!
{03}
그러함에도
법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듯
사람도 다양한 근기가 있으니
베풀어주신 방편들을 마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04}
구태여 갖가지 이름과 글자를 세워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였으니,
개념으로 붙잡으려 해도 알 수 없다.
그대로가 다 옳은지라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어그러지느니라.
{05}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으로 전하신 것은 선문禪門이 되고
한 평생 설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는지라.
그러므로 말하자면
참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학은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교외 별전 5 ~ 8
{0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로 인해 잃는 것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것이나 가섭이 빙그레 미소지은 것도
모두가 교의 자취만 될뿐이지만,
마음으로 얻는 것이 있다면
세간의 거친말이나 사소한 이야기도
모두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이다.
{07}
나에게 한 마디 말이 있어,
생각이 끊어지고 인연있는 모든 것들을 잊게 한다.
우두커니 일 없이 앉아있으니
봄이 옴에 풀은 절로 푸르구나.
선문 교문 8 ~ 11
{08}
교문에서는 오로지 한마음 일심의 가르침을 전하고
선문에서는 오로지 깨달음 견성의 가르침을 전한다.
{09}
그러나
여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은
먼저 온갖 법들을 분별하고나서
이후 결국 공한 이치를 설하는데,
조사스님들께서 보이신 언구는
자취가 생각머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근원에서 드러난다.
{10}
모든 부처님은 활처럼 유연하게 설하시고
조사 스님들은 활줄처럼 곧바로 설하신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걸림없는 법은
바야흐로 근본의 한가지 맛으로 돌아가는데,
이 한가지 맛의 흔적마저도 떨쳐버려야
조사스님이 보이신 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씀하셨다.
“<뜰앞의 잣나무> 같은 화두는 용궁의 장경각에도 없다.”
{11}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진실된 가르침으로써
변치 않는 것과 인연 따라 변하는 것의 두 가지는
바로 각기 자성(근본 성품)과 심상(마음 상태)이며,
단박에 깨닫는 돈오와 점차 닦아가는 점수의 두 갈래 문은
바로 수행의 시작과 끝임을 제대로 알아야한다.
그러한 연후에 가르침의 의미까지 내려놓고
내 마음에 한 생각, 일념만이 오롯이 현전하게 되어서
선지를 면밀하고도 면밀하게 참구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니,
말하자면 육신을 벗어나서도 사는 길인 것이다.
화두 수행 12 ~ 26
{12}
무릇 참선을 배우는 이는
살아있는 활구를 참구해야 하니,
죽어있는 사구로 참구하지 말라.
{13}
무릇 본래 참구하던 공안 위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되,
암탉이 알을 품듯
고양이 쥐를 잡아채듯
굶주린 사람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 마실물 찾듯
어린 아이 엄마찾듯 하면
반드시 사무치게 통하는 때가 온다.
{14}
참선에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는 크게 믿는 마음이요,
둘째는 크게 분한 마음이요,
셋째는 크게 의심하는 마음이다.
그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결국 망가진 물건이 된다.
{15}
일상생활 가운데, 인연처에 응하면서도
다만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했을까?”
“어째서???”
라고 무자 화두를 들어야한다.
오나 가나 화두를 들고 들어,
오나 가나 의심하고 또 의심함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의 길마저 사라져서,
아무런 맛조차 없어서
마음에 들어앉은 화두가 들끓어 답답하게 되는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뚱이와 목숨까지 내던질 곳이며,
또한 이곳이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자리이다.
{16}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곳을 알아 맞히려 하지 말고
생각으로 헤아려서 어떤 경계도 바라지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려서도 안된다.
생각할 수조차 없는 곳에 나아가면
생각하려해도 마음이 갈 곳이 없게된다.
마치 늙은 쥐가 소 뿔에 들어가면 곧 고꾸라져 끊어진 길을 보는 것과 같다.
또한
평소 좋다 별로다 따지고 드는 것이 식정 인데
나고 죽음을 따라 변하는 것도 식정이며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도 역시 식정이니,
요즘 사람들은 이런 병통을 알지 못하고
좁은 소견에만 들어박혀 허우적거릴 뿐이다.
{17}
이 일은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이렇다 저렇다 묻지도 말라.
주둥이를 꽂을 데가 없다해도
한 목숨 떼어놓고 한결같이 덤벼들면
몸뚱이째로 사무쳐 들어가리라.
{18}
공부는 거문고 줄 고르는 방법처럼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애를쓰면 집착하게 되고, 놓치면 어리석음에 떨어지니
또렷또렷 성성역력하게 깨어있으면서
찰나찰나 면면밀밀하게 빈틈없이하라.
{19}
공부를 지어감에
걸으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으면서도 앉는 줄 모르면,
이러한 때가 되어 팔만사천 마구니들이
눈, 귀, 코, 혀, 몸뚱이, 머리의 여섯개의 감각기관인
육근 문턱에서 빈틈을 엿보다가
마음따라 온갖 경계를 일으키니
마음이 일지 않으면 무슨 상관있겠는가.
{20}
일어나는 마음이 천상의 마구니이며
일지않는 마음은 오온의 마구니이며
때론 일어났다 잦아들었다 하는 마음이 곧 번뇌의 마구니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에는 그런 일들이 본래는 없다.
{21}
공부가 충분히 두드려져서 한 조각을 이루면
금생에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악업에 끌려가지 않는다.
{22}
무릇 참선하는 사람이
국가, 부모님, 스승님과 시주님의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돌아볼 줄 아는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거친 몸뚱이가
찰나 찰나 녹슬어 썩어감을 아는가?
사람 목숨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음을 아는가?
살아오며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을 뵈었는가?
그리하여 위없는 가르침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내었는가?
선방을 떠나지 않고 절개를 지켰는가?
주위 사람들과 한데 뭉쳐 잡담이나 하지는 않았는가?
시비를 일삼아 들쑤시고 다님을 절실히 경계했는가?
화두가 12시진 하루종일 또렷하여 어둡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 끊어짐은 없는가?
무엇을 보고 듣고 깨우쳐 알게되는 때에도
화두가 타성일편으로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자신을 돌이켜 관함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을 붙잡아 볼 만큼 공부가 되고 있는가?
이번 생에는 결정코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것인가?
일어서고 앉으며 편히 지낼 때 지옥 중생들의 고통을 떠올리는가?
이번에 받은 몸뚱이로 윤회를 벗어나겠는가?
세상의 온갖 팔풍의 경계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이 일상생활중에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사람이 이른다.
“이 몸뚱이로 금생에 건지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건지겠는가.”
{23}
말만 배우는 무리들은
말해 줄 때는 깨친 듯 하다가
경계를 만나면 도로 헤메인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24}
만일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그 한 생각이란 놈을 ‘탁’ 깨뜨려 부숴버려야
비로소 생사를 요달할 수 있는 것이다.
{25}
그러나 일념이란 것도 탁 깨부순 다음에는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 바른 안목인지 점검 받아야 한다.
{26}
옛 어른이 이르셨다.
“그대의 안목이 바른 지가 중요할 뿐이지,
그대의 수행이 어디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성 청정 27 ~ 36
{27}
원하건대 모든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혀 물러서지 말고, 스스로를 높이지 말지어다.
{28}
어리석은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그저 무명만 더할 뿐이다.
{29}
수행의 핵심은
그저 범부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지,
따로 성인들의 해법이란 것은 없다.
{30}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도 없으며
그저 자성을 더럽히지 않으면 된다.
정법을 구한다는 것도 삿된것이다.
{31}
번뇌를 끊어내면 성문 연각의 이승이라 하고
번뇌가 더 이상 생기지 않으면 대열반이라 한다.
{32}
모름지기 텅 빈 마음이 스스로 환하게 밝혀져야
일념의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생멸이 없는 줄을 믿는다.
{33}
죽이거나 훔치거나 음란하거나 거짓말하는 것들이
한 마음을 따라 겹겹이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관하라.
일어나는 그 자리 그대로 적적한데, 무엇을 다시 끊어낸다 말인가.
{34}
허깨비 같은 환인줄 알면 벗어나니, 방편을 쓸 것도 없고
환을 벗어나면 그대로 깨달음이니, 차례로 얻을 것도 없다.
{35}
중생들은
애초에 생멸이 없는 가운데에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본다하니,
마치 눈병 걸린 사람이 허공에 꽃이 번쩍 일었다 사라짐을 보는 것과 같다.
{36}
보살은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음을 알아서
중생들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한 적이 없다한다.
수행 계율 37 ~ 49
{37}
이러한 도리는 비록 단박에 깨닫더라도
오랜 습기가 한번에 없어지지는 않는다.
{38}
음행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귀를 막고 소리 듣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을 다듬어서 향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설령 지혜가 많다해도 모두 마구니의 길이 된다.
{39}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 계율에는 의지하지 않고,
몸과 입, 생각의 세 가지로 짓는 행위를 단속하지 않는다.
함부로 풀어져서 게을리 지내며,
남을 가벼이 업신여기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근본으로 여긴다.
{40}
만약 계를 수지하지 않으면,
비루병에 걸린 여우 몸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청정보리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41}
생사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과 모든 갈애를 끊어야 한다.
{42}
걸림없이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으로 인해 생겨난다.
{43}
마음이 정에 들면, 세간의 생멸하는 온갖 모습을 알 수 있다.
{44}
경계를 보아도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이라 하는데
불생을 무념이라 하고, 한 생각도 꿈틀하지 않는 무념을 해탈이라 한다.
{45}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했다면, 이것 역시 참된 것이 아니다.
마음속 모든 것이 뿌리까지 고요해져야
번뇌의 불꽃이 사라진 참된 열반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셨다.
온갖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적멸의 열반상이구나.
{46}
가난한 사람이 구걸하거든 능력껏 베풀어 주어라.
내 몸처럼 여기는 대비심이야말로 참된 보시이다.
{47}
어떤 사람이 와서 해꼬지 해도
마음을 추스려모아서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분심을 일으키면 백만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
{48}
만약 인욕행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49}
본래 진여자성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정진이다.
방편 수행 50 ~ 54
{50}
다라니를 지니는 것은
금생에 지은 현업은 단속하기 쉬워서 자기 수행으로 피할 수 있지만
다겁생동안 지어온 숙업은 없애기 어려워 반드시 신력神力을 빌려야 한다.
{51}
예를 올리고 절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조복받는 것이니,
자신의 진여자성을 공경하고, 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52}
부처님을 항상 떠올리는 염불이란 것은
입에만 있으면 송불이고, 마음에 있어야 염불이니,
다만 소리만 내고 생각에서 놓치면, 도 닦는데 아무 이익이 없다.
{53}
경을 듣는 것은 귀에 스치는 인연과 따라 기뻐하는 복이 있다.
덧없는 몸뚱이는 끝이 있어도 진실한 수행은 없어지지 않는다.
{54}
경을 보되 스스로 돌이켜 공부를 지어가지 않으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본다 해도 아무 이익이 없다.
경책 모음 55 ~ 72
{55}
배움이 도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고
보고 들은 것을 뽐을내어 자랑하거나
한갓 말재주만으로 서로 이기려 함은
변소간을 화려하게 칠하는 것과 같다.
{56}
출가한 사람이 유가 도가 등의 외전을 익히는 것은
마치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진흙은 쓸데도 없는데 칼만 망가진다.
{57}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몸뚱이의 편안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등 따시고 배부르길 원하는 것도 아니며
명성이나 이익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사를 벗기 위함이며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
부처님의 혜명을 잇기 위함이며,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58}
부처님께서 이르셨다.
덧없이 무상한 불꽃이 온 세상을 불태우는구나.
또 말씀하셨다.
중생들의 고통의 불길이 사방에서 동시에 타오르는구나.
또 말씀하셨다.
온갖 번뇌의 도적들이 남을 해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구나.
도 닦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스스로를 경책하여 깨우치기를
머리에 붙은 불 끄듯 하라.
{59}
세상의 헛된 명성을 탐하는 것은
보람도 없이 고생만 하는 셈이요
세간의 이익을 꾀어 구하는 것은
업화의 불길에 땔감을 더한다.
{60}
명예와 이익을 찾는 납자는
풀옷 걸친 야만인만 못하다.
{61}
경전에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도적들이 우리 법복 가사를 빌려
여래를 팔아서 가지가지 업을 짓고 있는가.
{62}
아! 불자들이여.
한 벌의 옷과 한 끼 식사가
농부의 피땀과 베짜는 아낙의 고통 아닌 것이 없거늘,
도 닦는 안목은 밝히지도 못하고
어찌 마음 편히 받아서 쓰겠는가?
{63}
그러므로 말하였다.
털가죽 뒤집어 쓰고 뿔을 달고 있는 짐승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지금 신도님들이 주는 것을 거져 받아먹는 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껴입으니
이것은 정말 무슨 심보인가.
눈앞의 즐거움이 바로 다음 생의 고통임을 도무지 생각치 않는구나.
{64}
그러므로 말하였다.
차라리 뜨거운 쇠를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있는 사람이 주는 옷을 받지 않으며,
차라리 구리물을 입에 퍼부을지언정 신심있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지 않으며,
차라리 쇳물 끓는 가마솥에 뛰어들지언정 신심있는 사람이 주는 집을 받지 말라.
{65}
그러므로 말하였다.
도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음에 독약 먹듯하고,
시주물 받음에 화살 받듯하라.
후한 공양과 듣기 좋은 말은 도닦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66}
그러므로 말하였다.
도 닦는 사람은 한 덩이 숫돌과 같다.
장 서방도 와서 갈고, 이 생원도 와서 갈아대니
온갖 사람들이 끊임없이 갈러 와서 갈고 가니
다른 사람 칼은 속 시원히 좋게하되
자기 집 숫돌은 점점 닳아 없어진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남들이 제 숫돌위에서 갈러 오지 않는다고
도리어 역정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67}
그러므로 옛 말에도 이런말이 있다.
삼악도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가사를 걸치고도 다음 생에 사람 몸 잃는 것이야말로 진짜 고통이다.
{68}
우습구나! 이 몸뚱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언제나 더러운 것이 흐르고,46)
백천가지 세균 덩어리에 한 겹 얇은 가죽 뒤집어 썼구나.
또한 말하였다.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하고, 피고름 뭉치라.
구린내 나는데 더러움에 더러움을 더하였으니
탐내고 아낄 것도 없다.
하물며 백년 평생을 잘 길러보아도
호흡 한번에 은혜를 저버리고 죽는 몸뚱이를 어쩌겠는가.
{69}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업을 일으키면 부끄러워 함이
또 대장부의 기상이요,
거듭 허물을 고쳐 자신을 새로이 하면
온갖 죄업들은 마음따라 없어지리라.
{70}
도 닦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고, 곧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한 벌의 바루와 한 벌의 승복이면 나그네처럼 어디를 다녀도 걸림이 없다.
{71}
범부는 마주한 경계를 잡으려하고
도인은 그순간 마음을 잡으려하니,
경계와 마음, 모두를 잊어버려야 이것이 참다운 수행법이다.
{72}
성문은 숲속에 편안히 앉아서도 마왕에게 붙들리고,
보살은 세간을 노닐어도 외도나 마군이 찾지 못한다.
임종 수행 73 ~ 74
{73}
누구든지 임종하는 때에는
오온이 모두 공하여 지수화풍의 사대에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오직 관하라.
참 마음은 모양이 없어 간적도 없고 온적도 없다.
태어날 때 자성은 생겨난 적도 없고,
죽을 때에 자성은 가버린 적도 없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하나인 것이니
오직 이와 같이 할수 있어야만이
당장 그 자리에서 몰록 요달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얽매이지 않고
곧 바로 세간을 뛰쳐나와 자유인이 된다.
여러 부처님을 보더라도 따라가는 마음이 없고,
온갖 지옥상을 보더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으니
저절로 무심하여만이 법계와 하나되는데,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렇기에
평상시 수행이 바로 원인이요
임종시 마음이 바로 결과이니,
도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눈을 딱 갖다붙여 자세히 보아야 한다.
{74}
누구든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만일 한 터럭만큼이라도
범부다 성인이다 헤아림을 그치지 못하고 분별을 잊지 못하면,
나귀나 말의 뱃속을 향해 몸을 의탁하며,
확탕 지옥의 들끓는 가마솥에 튀겨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전처럼 다시 개미나 모기 파리 몸을 받는다.
참선 병통 75 ~ 77
{75}
참선하는 사람이 본지풍광은 밝히지 못하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빗장을 어떻게 뚫어 내겠는가.
때로는 단멸공을 참선으로 삼고
때로는 무기공을 공부길로 삼고
때로는 일체가 모두 없다는 것을 대단한 소견으로 삼는데,
이것은 어리석게 공만 고집하는 것이라 병통에 갇히고 만다.
요즘 세상에서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게 이런 병통에 주저앉아 있다.
{76}
종사 스님에게도 또한 여러 가지 병통이 있다.
병통이 귀와 눈에 있는 사람은
눈에 힘을 주고 눈썹을 실룩거리고 두눈을 부릅뜨거나,
귀를 들이대며 고개를 끄덕대는 것을 참선으로 여긴다.
병통이 입과 혀에 있는 사람은
뒤바뀐 말을 하거나 함부로 할과 방을 외치는 것을 참선으로 여긴다.
병통이 손과 발에 있는 사람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동쪽을 가리키면서 서쪽을 그리는 것을 공부로 삼는다.
병통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아득하고 현묘한 도리에 빠지거나 감정이 넘치거나 견해를 버리는 것을 공부로 삼으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대로 병통 아닌 것이 없다.
{77}
본분을 마친 종사 스님이라면
이러한 구절을 오롯하게 들어보이심이
마치 나무 장승 노래 부르듯이
붉은 화로에 눈송이 떨구듯 한다.
또한 부싯돌의 번갯불과 같아서
도학자가 이를 따라하거나 입을 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은 스승의 은혜를 알라며 말하였다.
앞선 가시는 스승님의 수행이나 덕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스승님께서 우리를 위해 설파해 주셨는지가 중요하다.
선종 오가 78 ~ 88
{78}
무릇, 도학자는 먼저 여러 종파의 방법을 제대로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옛날 마조선사가 한번 ‘할!’하고 고함치니
백장선사 귀가 멀고 황벽선사 혀가 빠졌다.
한번의 이 ‘할’이야말로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대사께서 서쪽에서 처음 오셨다는 본래면목이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연원이구나.
79~83
대강 조사선의 종파 갈래는 다섯이 있으니,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이다.
마 무 리 89 ~ 91
{89}
임제선사의 ‘할’과 덕산선사의 방망이가
모두 무생의 도리를 철저하게 증득하여
밑바닥에서 정수리까지 꿰뚫어버린다.
큰 기틀, 큰 작용이 어디에나 자재하여
온 몸으로 디밀며 온몸으로 짊어지니,
물러나 문수보현의 보살 경계를 지키더라도
사실대로 논하자면
임제선사와 덕산선사 두 분 스승 역시
마음 훔치는 도깨비가 됨을 면치 못한다.
{90}
대장부는 공부 중 경계를 만나
부처가 나타나고 조사가 나타남을 원수같이 해야한다.
부처를 구하는데 붙들리면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고
조사를 구하는데 붙들리면 조사에게 얽매인 것이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은 모두 고통이니
아무 일 없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91}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를 비추는구나.
이 문 안에 들어옴에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