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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해심밀경

출처 수집자료

해심밀경(解深蜜經)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김달진 번역

 

 

 

심밀경 제1권

  

 

1. 서품(序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께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칠보장엄에 머물며 큰 광명을 놓아 일체 끝없는 세계의 한량없는 방소(方所)를 널리 비추니, 묘한 장엄이 사이사이에 펼쳐지고 보편하고 원만함이 끝이 없었다. 그 한량은 헤아리기 어려워 삼계(三界)를 뛰어넘었으며, 행하는 곳마다 세간을 수승하게 벗어났으니, 선근(善根)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최고로 자재(自在)하였다. 맑은 식(識)으로 모습을 삼은 여래의 도읍이었으며, 모든 보살이 구름같이 모이는 곳이고, 한량없는 천(天)․용(龍)․약차(藥叉:야차)․건달바(健達婆)․아소락(阿素洛:아수라)․게로다(揭路茶:가루라)․긴나락(緊那洛:긴나라)․모호락가(牟呼洛伽:마후라가)․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한 이[人非人] 무리가 항상 따르고 모시는 곳이었다.

 

광대한 법미(法味)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어 모든 중생에게 일체 의리(義利)가 되고 모든 번뇌․재앙․횡액․얽매임․때[垢]를 없앴으며, 뭇 마군을 멀리 벗어나고 모든 장엄을 뛰어넘는 여래의 장엄이 의지하는 곳이었다. 큰 생각[念]과 지혜[慧]와 수행[行]으로 노니는 길을 삼았으며, 큰 지(止)와 묘한 관(觀)으로 수레[乘]를 삼았으며, 큰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해탈로 들어가는 문을 삼았으며, 온갖 무량 공덕으로 장엄하고 온갖 크고 보배로운 꽃으로 세워진 큰 궁전에 머무셨으니, 이는 박가범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었다.

 

둘 없음이 현행(現行)하여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갔으며, 불주(佛住)에 머물러 일체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얻고 장애가 없는 곳에 이르렀다. 누구도 굴릴 수 없는 법은 가는 곳마다 장애가 없고, 그것이 세워 놓은 것은 불가사의했으며, 3세(世)의 평등한 법성에 노닐었다. 그 몸은 일체 세계에 널리 퍼졌으며, 일체 법에 대해 그 지혜는 막힘이 없었다. 일체 행에 대해 대각(大覺)을 성취하고, 모든 법지(法智)에 대해 의혹이 없으며, 나타난 그 몸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일체 보살이 구하는 바로 그 지혜로 부처님의 둘 없음[無二]을 얻어 훌륭한 ‘저 언덕’에 머물며 서로 섞이지 않았으며, 여래의 해탈과 묘한 지혜를 끝까지 하여 중간도 가도 없는 불지(佛地)의 평등함을 증득하였으며, 법계를 다하였고 허공의 성품을 다하고 미래의 세상을 다하였다.

 

한량없는 큰 성문과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을 조복 받고 수순한 그들은 모두 불자(佛子)였다. 그들은 마음이 잘 해탈하였으며, 지혜가 잘 해탈하였으며, 계행이 매우 청정하였으며, 법의 즐거움을 나아가 구하였으며, 많이 듣고 들은 것을 기억해 그 들은 것이 쌓이고 모였으며,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고 지어야 할 것을 잘 짓는 자들이었다. 민첩한 지혜[捷慧]ㆍ재빠른 지혜[速慧]ㆍ날카로운 지혜[利慧]ㆍ벗어나는 지혜[出慧]ㆍ수승하게 결택하는 지혜[勝決擇慧]ㆍ큰 지혜[大慧]ㆍ넓은 지혜[廣慧]ㆍ같은 것 없는 지혜[無等慧] 등 지혜의 보배를 성취하였으며, 3명(明)을 구족하였으며, 제일의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얻었으며, 크고 청정한 복밭[福田]이었다. 위의(威儀)와 고요함이 모두 원만하였으며, 큰 인욕과 부드러운 화목을 성취하여 손상함이 없었으며, 이미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잘 받들어 행하는 자들이었다.

 

또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이 갖가지 불국토에서 찾아와 모였다. 그들은 모두 대승에 머물러 대승법에 노닐고 모든 중생에게 그 마음이 평등하였으며, 모든 분별과 분별 않음과 갖가지 분별을 여의었으며, 일체 마군과 원수를 무찌르고 항복 받았으며, 일체 성문과 독각(獨覺)이 가진 작의(作意)를 멀리 벗어난 자들이었다. 광대한 법의 맛인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고 다섯 가지 두려움을 초월해 물러나지 않는 지위로 한결같이 들어갔으며, 일체 중생을 괴롭히는 일체 괴로움을 쉰 자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 앞에 있었으니, 그 이름은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마하살ㆍ여리청문(如理請問)보살마하살ㆍ법용(法涌)보살마하살ㆍ선청정혜(善淸淨慧)보살마하살ㆍ광혜(廣慧)보살마하살ㆍ덕본(德本)보살마하살ㆍ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ㆍ관자재(觀自在)보살마하살ㆍ자씨(慈氏)보살마하살ㆍ만수실리(曼殊室利)보살마하살 등이 상수가 되었다.

 

 

 

2. 승의제상품(勝義諦相品)

 

 

그때 여리청문(如理請問)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最勝子)여, 일체 법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체 법이 둘이 아니라 할 때, 어떤 것이 일체 법이며, 왜 둘이 없다고 합니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여리청문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함이 있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함이 없는 무위(無爲)입니다. 이 가운데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역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여리청문보살이 다시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여, 왜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고 유위도 아닙니까?”

 

“선남자여, 유위란 곧 본사(本師)께서 거짓으로 시설(施設)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인 말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 하신 말씀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인 말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유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유위와 무위를 벗어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 없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法性)에서 남들도 현전에 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유위라 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역시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의 말로 말한 것이어서 진실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무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유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무위와 유위를 떠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한 것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없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일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무위라 한 것입니다.”

 

그때 여리청문보살마하살이 다시 해심심의밀의보살마하살에게 물었다.

 

“최승자여, 저 모든 성자가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유위라 하고 무위라 한다는 이 일은 무엇과 같습니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솜씨 좋은 요술쟁이[幻師]나 혹은 그의 제자가 네거리에서 기왓장이나 풀잎이나 나무 등을 쌓아 놓고 요술로 갖가지 사업(事業)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코끼리의 몸과 말의 몸과 수레와 걷는 몸과 마니(摩尼)ㆍ진주(眞珠)ㆍ유리(琉璃)ㆍ나패(螺貝)․벽옥(碧玉)․산호(珊瑚)와 갖가지 재물과 곡식의 창고라는 몸입니다.

 

만일 우치(愚痴)하고 완둔(頑鈍)하고 악한 지혜를 가진 부류라서 깨우쳐 아는 바가 없는 중생이라면, 그들은 모두 기왓장․풀잎․나무 등에서 요술로 변화한 모든 일들을 보고 듣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대로 진짜 코끼리 몸이 있는 것이고, 진짜 말의 몸과 수레와 걷는 몸과 마니․진주․유리․나패․백옥․산호 그리고 갖가지 재물과 곡식의 창고 등의 몸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 대로 들은 대로 굳게 집착하고는 이어서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어리석고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뒤에 다시 관찰해야만 합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우치하지 않고 둔하지 않고 지혜로운 부류라서 깨우쳐 아는 바가 있다면, 그는 기왓장․풀잎․나무 등에서 요술로 변화한 모든 일들을 보고 듣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보이지만 실제 코끼리 몸은 없는 것이고, 실제 말 몸과 수레 몸과 걷는 몸과 마니․진주․유리․나패․벽옥․산호 그리고 갖가지 재물과 곡식의 창고 등의 몸은 없는 것이다. 요술로 나타낸 형상이 눈을 속여 그 가운데서 큰 코끼리의 몸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혹은 큰 코끼리 몸이 차별된다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며, 나아가 갖가지 재물과 곡식의 창고 따위의 몸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것들이 갖가지로 차별된다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굳게 집착하고는 이어서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어리석고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을 표현하여 알리려는 까닭에 그들 역시 이 가운데서 말을 일으키기는 합니다. 그들은 뒤에 다시 관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만일 어떤 중생이 어리석은 무리 즉 이생(異生)의 무리로서 아직 모든 성인의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일체 법의 말을 떠난 법성을 밝게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일체 유위와 무위를 보고 듣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얻은 대로 실제 유위와 무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굳게 집착하고는 이어서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어리석고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뒤에 다시 관찰해야만 합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어리석은 무리가 아니어서 이미 성제(聖諦)를 보았고, 이미 모든 성인의 세간을 벗어난 지혜를 얻어 일체 법의 말을 떠난 법성을 여실히 안다면, 그는 일체 유위와 무위를 보고 듣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얻었지만 실제 유위와 무위는 없는 게 분명하다. 분별에서 일어난 행상(行相)이 있어서 마치 요술이 깨닫는 지혜를 속이는 것처럼 그 가운데서 유위와 무위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며, 혹은 유위와 무위가 차별된다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굳게 집착하고는 이어서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어리석고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을 표현해 알리려는 까닭에 그들 역시 이 가운데서 말을 일으키기는 합니다. 그들은 뒤에 다시 관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선남자여, 저 모든 성자는 이 일 가운데서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여의는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는 까닭에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유위라 하고 무위라 한 것입니다.”

 

그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말을 벗어나 둘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

깊고 또 깊어 어리석은 자 행할 것 아니건만

어리석은 범부들 어리석음에 속아

둘에 집착하기 좋아하고 말에 의지해 희론한다.

 

그들은 부정취(不定趣) 아니면 사정(邪定)이니

긴긴 세월 유전하며 생사의 고통 받았네.

이제 다시 이러한 바른 말씀 어기면

오는 세상에는 소나 염소 무리로 태어나리라.

 

그때 법용(法涌)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동쪽으로 72항하사 세계를 지나면 구대명칭(具大名稱)이란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여래는 광대명칭(廣大名稱)이십니다. 저는 며칠 전 그 불토(佛土)에서 떠나 여기로 왔습니다. 저는 그 불토에서 언젠가 7만 7천의 외도와 그의 스승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모든 법의 승의제(勝義諦)의 모습을 생각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하고 헤아리고 관찰하고 두루 추구했지만 일체 법의 승의제의 모습은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갖가지 의견과 해석, 별다른 의견과 해석, 변하여 달라진 의견과 해석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데, 그들은 서로를 등지고 함께 어울려 쟁론하며 입에서 창을 꺼내 서로를 때리고 찌르고 괴롭히고 파괴하고는 제각기 흩어졌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속으로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매우 희유(希有)한 일이다.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심사(尋思)의 행을 뛰어넘은 이런 승의제의 모습 역시 통달하고 증득하고 얻으셨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자, 그때 세존께서 법용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렇다, 그렇다. 그대의 말과 같다. 나는 일체의 심사를 뛰어넘는 승의제의 모습에서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는 남들에게 널리 말하고 밝게 나타내고 풀어 이해시키고 시설하고 비춘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승의(勝義)는 모든 성자 스스로가 안으로 깨친 것이고, 심사(尋思)의 행은 이생(異生)이 이리저리 구르며 증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 도리에 의하여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또 법용이여, 내가 말하는 승의는 무상(無相)으로 행하는 것인데 심사는 유상(有相)의 경계만 행한다.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 도리에 의하여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의 모습을 뛰어넘는다.

 

또 법용이여, 내가 말하는 승의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심사는 말의 경계만 행한다.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 도리에 의하여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또 법용이여, 내가 말하는 승의는 모든 표시(表示)를 끊은 것인데 심사는 표시의 경계만 행한다.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 도리에 의하여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의 모습을 뛰어넘는다.

 

또 법용이여, 내가 말하는 승의는 모든 논쟁이 끊어진 것인데 심사는 시비의 경계만 행한다. 그러므로 법용이여, 이 도리에 의하여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법용이여, 마땅히 알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토록 맵고 쓴맛만 보았다면, 그는 꿀이나 엿의 가장 묘하고 가장 훌륭한 맛을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혹 어떤 이는 긴 세월 탐욕(貪慾)의 승해로 말미암아 모든 욕심의 치성한 불길에 태워진 까닭에, 안으로 일체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의 모습을 제거한 묘원리(妙遠離)의 즐거움을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다. 혹 어떤 이는 긴 세월 말의 승해로 말미암아 세간의 비단 같은 말들을 즐기고 집착한 까닭에, 안의 고요하고 잠잠한 즐거움을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다. 혹은 긴 세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표시의 승해로 말미암아 세간의 모든 표시를 즐기고 집착한 까닭에, 영원히 일체 표시를 끊어 없애고 살가야(薩迦耶)가 없어진 열반을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다.

 

법용이여, 마땅히 알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긴 세월 갖가지 아소(我所)와 섭수(攝受)와 쟁론(諍論)의 승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모든 시비를 즐기고 집착한 까닭에, 아소가 없고 섭수가 없고 쟁론이 없는 북구로주(北拘盧洲)를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법용이여, 생각으로 찾는 자는 일체 심사의 행을 초월한 승의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고 믿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증(內證)과 무상(無相)이 행하는 것

말할 수 없고 표시가 끊어졌네.

모든 논쟁을 그친 승의제

일체의 심사(尋思)를 뛰어넘는다.

 

그때 선청정혜(善淸淨慧)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잘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승의제의 모습은 미세하고 매우 깊어서 모든 법의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을 뛰어넘어 통달하기 어렵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곳에서 승해행지(勝解行地)를 바르게 수행하는 여러 보살들이 한 곳에 모여 앉아 함께 승의제의 모습을 의논하고, 모든 행상(行相)의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모임 가운데 한 무리의 보살은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한 무리의 보살은 또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나머지 보살들은 의심하고 망설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보살 가운데 누구의 말이 진실하며 누구의 말이 허망한가, 누가 이치대로 행하고 누가 이치대로 행하지 않은 것인가?’ 혹 어떤 이는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차이가 없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어떤 이는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다르다’고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들을 보고 속으로 ‘이 모든 선남자는 어리석고 완고하고 밝지 못하고 착하지 못하고 이치대로 행하지 못한다. 승의제는 미세하고 매우 깊어 모든 행의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선청정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렇고 그렇다. 그대의 말과 같다. 그 모든 선남자는 어리석고 완고하고 밝지 못하고 착하지 못하고 이치대로 행하지 못한다. 승의제는 미세하고 매우 깊어 모든 행의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청정혜여, 모든 행에 대하여 이렇게 행하는 때를 두고 승의제의 모습을 통달하였다고 하거나 승의제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선청정혜여,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면 지금 일체 이생(異生)이 모두 이미 진리를 보았어야 하며, 또 모든 이생이 모두 위없는 방편과 편안한 열반을 이미 얻었거나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미 얻었어야 한다.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다르기만 하다면 이미 진리를 본 자라 하더라도 모든 행의 모습은 제거하지 못해야 할 것이다. 만일 모든 행의 모습을 제거하지 못했다면 모습의 속박[相縛]에서 해탈을 얻지 못해야 할 것이며, 이 진리를 본 자는 모든 모습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한 까닭에 거칠고 무거운 속박[麤重縛]에서도 해탈을 얻지 못해야 할 것이다.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한 까닭에 이미 진리를 본 사람이라 해도 위없는 방편과 편안한 열반을 얻지 못해야 할 것이다.

 

선청정혜여, 지금 모든 이생(異生)은 다 이미 진리를 본 것이 아니며, 모든 이생은 이미 위없는 방편과 편안한 열반을 얻은 것이 아니며, 또한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이 가운데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이러한 도리를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그런 것 일체는 이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바른 이치와 같지 않다.

 

선청정혜여, 지금 진리를 본 자는 모든 행의 모습을 제거해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진리를 본 자는 모습의 속박에서 해탈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해탈할 수 있다. 진리를 본 자는 거칠고 무거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해탈할 수 있다. 두 가지 장애에서 해탈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위없는 방편과 편안한 열반을 얻을 수 있으며,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다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이 가운데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이러한 도리를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그런 것 일체는 이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바른 이치와 같지 않다.

 

또 선청정혜여,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행의 모습이 잡염(雜染)의 모습에 떨어지는 것처럼 이 승의제의 모습 역시 잡염의 모습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선청정혜여,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다르다고 한다면, 응당 일체 행상의 공상(共相)을 승의제의 모습이라 하지 못할 것이다.

 

선청정혜여, 지금 승의제의 모습은 잡염의 모습에 떨어지지 않으며, 모든 행의 공상을 승의제의 모습이라 한다. 그러므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해도 도리에 맞지 않고,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다른 모습이라 해도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이 가운데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이렇게 말하거나 혹은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그런 것 일체는 이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바른 이치와 같지 않다.

 

또 선청정혜여,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승의제의 모습은 모든 행의 모습에 있어 차별이 없는 것처럼 일체 행의 모습 또한 이와 같이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관행을 닦는 사람은 모든 행 가운데서 그가 본 바와 같이, 그가 들은 바와 같이, 그가 깨친 바와 같이, 그가 안 바와 같이 하며 뒤에 다시 수승한 뜻을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한결같이 다르다고 한다면, 모든 행의 오직 무아인 성품과 오직 자성 없는 성품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승의제의 모습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응당 동시에 다른 모습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니, 이른바 잡되고 물든 모습과 청정한 모습이다.

 

선청정혜여, 지금 일체 행은 모두 차별이 있지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관행을 닦는 사람은 모든 행 가운데서 그가 본 바와 같이, 그가 들은 바와 같이, 그가 깨친 바와 같이, 그가 안 바와 같이 하고는 뒤에 다시 수승한 뜻을 구해야만 한다. 또 모든 행의 오직 무아인 성품과 오직 자성이 없는 성품에서 나타나는 것을 승의제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 동시에 염(染)과 정(淨) 두 가지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거나 혹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이 가운데서 ‘승의제의 모습과 모든 행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이렇게 말하거나 혹은 ‘한결같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그런 것 일체는 이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바른 이치와 같지 않다.

 

선청정혜여, 마치 소라 껍데기의 새하얀 빛깔과 그 소라 껍데기가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소라 껍데기의 새하얀 빛깔처럼 금덩이의 누런 빛깔 또한 마찬가지다. 공후(箜篌) 소리의 아름답고 묘한 곡조의 성품이 공후 소리와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흑침(黑沈)에 있는 묘한 향기의 성품이 그 흑침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호초(胡椒)의 매콤한 성품이 그 호초와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호초의 매콤한 성품처럼 가리(訶梨)의 담담한 성품 또한 마찬가지다. 두라면(蠧羅綿)의 부드러운 성품이 두라면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숙소(熟酥)에 든 제호(醍醐)가 그 소락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또 일체 행의 무상한 성품과 일체 유루법의 괴로운 성품과 일체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無我)의 성품이 그 행 등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또 탐욕의 고요하지 못한 모습과 잡되고 물든 모습이 저 탐욕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으며, 탐욕에서와 같이 성냄과 어리석음에서도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선청정혜여, 승의제의 모습은 모든 행의 모습과 같은 모습인가 다른 모습인가를 시설할 수 없다.

 

선청정혜여, 나는 이렇게 미세하고 극히 미세하며, 매우 깊고 극히 매우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극히 통달하기 어려우며, 모든 법의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을 뛰어넘은 승의제의 모습에서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는 남들에게 널리 말하고 밝게 나타내고 풀어 이해시키고 시설하고 비춘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행(行)과 계(界)의 승의제의 모습은

같고 다른 성품과 모습 벗어났으니

만일에 같고 다름을 분별한다면

그 사람은 이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은 모습에 속박되거나

거칠고 무거움에 속박됐나니

반드시 부지런히 지관(止觀) 닦아야만

비로소 해탈을 얻게 되리라.

 

그때 세존께서 장로(長老) 선현(善現)에게 말씀하셨다.

 

“선현이여, 그대는 유정세계에서 증상만(增上慢)을 품고 증상만에 사로잡힌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記別)하는 유정이 얼마나 된다고 알고 있는가? 그대는 유정세계에서 증상만을 여의고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 유정이 얼마나 된다고 알고 있는가?”

 

그때 장로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유정세계에서 증상만을 여의고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 유정은 적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유정세계에서 증상만을 품고 증상만에 사로잡힌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 유정은 무량․무수․불가설(不可說)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언제가 아련야(阿練若:아란야) 큰 숲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많은 필추(苾芻:비구)들이 또한 그 숲에서 지내며 저와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필추들이 날이 저물 무렵 서로서로 모여들더니 얻은 바가 있는 현관(現觀)에 의지하여 제각기 갖가지 모습의 법을 말하고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온(蘊)을 얻은 까닭에, 온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온의 일어남을 얻은 까닭에, 온의 다함을 얻은 까닭에, 온의 멸함을 얻은 까닭에, 온이 멸했다는 깨달음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어떤 무리가 온을 얻음과 같이 다시 또 어떤 무리는 처(處)를 얻은 까닭에, 다시 또 어떤 무리는 연기(緣起)를 얻은 까닭에 또한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무리는 식(食)을 얻은 까닭에, 식(食)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식의 다함을 얻은 까닭에, 식의 멸함을 얻은 까닭에, 식이 멸했다는 깨달음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또 어떤 무리는 제(諦)를 얻은 까닭에, 제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제의 변지(遍知)를 얻은 까닭에, 제의 영원히 끊음[永斷]을 얻은 까닭에, 제라는 깨달음을 얻은 까닭에, 제의 닦음[修習]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또 어떤 무리는 계(界)를 얻은 까닭에, 계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계의 갖가지 성품을 얻은 까닭에, 계의 같지 않은 성품을 얻은 까닭에, 계의 멸함을 얻은 까닭에, 계가 멸했다는 깨달음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또 어떤 무리는 염주(念住)를 얻은 까닭에, 염주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염주가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을 얻은 까닭에, 염주의 닦음을 얻은 까닭에, 염주가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을 얻은 까닭에, 염주가 생기고 나서는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는 것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어떤 무리가 염주(念住)를 얻은 까닭과 같이 다시 또 어떤 무리는 정단(正斷)을 얻은 까닭에, 신족(神足)을 얻은 까닭에, 모든 근(根)을 얻은 까닭에, 모든 힘[力]을 얻은 까닭에, 각지(覺支)를 얻은 까닭에, 아셔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무리는 8지성도(支聖道)를 얻은 까닭에, 8지성도의 모습을 얻은 까닭에, 8지성도가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을 얻은 까닭에, 8지성도의 닦음을 얻은 까닭에, 8지성도가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을 얻은 까닭에, 8지성도가 생기고 나서는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는 것을 얻은 까닭에 이해한 것을 기별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들을 보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모든 장로들은 얻은 것이 있는 현관(現觀)에 의지해 제각기 갖가지 모습의 법을 말하며 이해한 것을 기별하는구나. 저 장로들은 모두 다 증상만을 품고 증상만에 사로잡힌 까닭에 승의제가 일체 처소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존은 매우 기이하시며 나아가 세존께서는 잘 말씀하신다. 세존의 말씀처럼 승의제의 모습은 미세하고 가장 미세하며, 매우 깊고 가장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이구나.’

 

세존이시여, 이 성스러운 가르침 가운데 수행하는 필추들도 승의제의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은 통달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여러 외도이겠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장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선현이여, 나는 미세하고 가장 미세하며, 매우 깊고 가장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가장 통달하기 어려운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인 승의제에서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었고,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는 남들에게 널리 말하고 밝게 나타내고 풀어 이해시키고 시설하고 비춘다. 무슨 까닭인가? 선현이여, 내가 이미 일체 온(蘊) 가운데서 청정의 소연(所緣)이 바로 승의제라고 나타냈으며, 내가 이미 일체 처(處)와 연기(緣起)와 식(食)과 제(諦)와 계(界)와 염주(念住)와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와 도지(道支) 가운데서 청정의 소연이 바로 승의제라고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 청정의 소연은 일체 온 가운데 한맛인 모습으로서 다른 모습이 없다. 온 가운데서와 같이 일체 처(處) 가운데서나, 나아가 일체 도지 가운데서도 한맛의 모습으로서 다른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 도리를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승의제는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이다.

 

또 선현이여, 관행을 닦는 필추는 한 온(蘊)에서 진여(眞如)․승의법(勝義法)․무아의 성품[無我性]을 통달하고 나면, 다시 각기 다른 나머지 온과 모든 처와 연기와 식과 제와 계와 염주와 정단과 신족과 근과 역과 각지와 도지의 진여․승의법․무아의 성품을 찾고 구하지 않더라도, 오직 이 진여․승의를 따라 둘이 없는 지혜를 의지한 까닭에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인 승의제를 살피고 증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 도리를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승의제는 일체에 보편한 한맛[一味]의 모습이다.

 

또 선현이여, 저 모든 온(蘊)이 다른 모습으로 계속 변하는 것처럼, 모든 처․연기․식․제․계․염주․정단․신족․근․역․각지․도지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변하는 것처럼, 만일 일체 법의 진여․승의법․무아의 성품 또한 모습이 달라진다면 이는 곧 진여․승의법․무아의 성품도 응당 인이 있어야 하며, 인으로부터 생겨야 할 것이다. 만일 인으로부터 생긴다면 그것은 유위여야만 하고, 만일 그것이 유위라면 승의가 아니어야 하며, 만일 승의가 아니라면 다시 다른 승의를 찾고 구해야만 할 것이다. 선현이여, 따라서 진여․승의법․무아의 성품은 인이 있다고 하지 못하며, 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유위가 아니니, 이것이 승의제이다. 이 승의를 얻으면 다시 다른 승의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항상 언제나 모든 법의 법성은 편안히 세워져 법계에 편안히 머문다. 그러므로 선현이여, 이 도리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라. 승의제는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이다.

 

선현이여, 비유컨대 같지 않은 갖가지 품류와 서로 다른 색(色) 가운데서 허공은 모습이 없고, 분별이 없고, 변함이 없고,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인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성품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일체 법 가운데서 승의제는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임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일체에 보편한 한맛의 모습

승의제는 다름없다고 부처님들 말씀하시네.

만일 그 가운데 다르다고 분별한다면

그가 바로 어리석고 증상만에 의지하는 자.

 

 

 

3.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그때 광혜(廣慧)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심(心)․의(意)․식(識)의 비밀에 공교함[善巧]을 말씀하시고, 보살은 심․의․식의 비밀에 공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을 어디에 한하여 심․의․식의 비밀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어디에 한하여 여래께서는 그들이 심․의․식의 비밀에 공교하다고 시설하십니까?”

 

보살이 이렇게 말하자, 그때 세존께서 광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광혜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사람․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심․의․식의 비밀한 뜻을 말하리라.

 

광혜여, 마땅히 알라. 여섯 세계[六趣]의 나고 죽음에서 이런 저런 유정은 이런 저런 유정의 무리에 떨어지니, 난생(卵生)이나 태생(胎生)이나 습생(濕生)이나 화생(化生)으로 태어나 신분(身分)이 생긴다. 그 가운데서 최초의 일체 종자인 심식(心識)이 성숙하고, 차례로 화합해 자라고 넓어져서는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한다.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根)과 그것들이 의지하는 집수요, 둘째는 모습[相]․이름[名]․분별(分別)의 말과 희론인 습기(習氣)의 집수이다. 유색계(有色界)에는 두 가지 집수가 구족하지만 무색계(無色界)에는 두 가지 집수가 구족하지 않는다.

 

광혜여,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르니, 무슨 까닭인가? 이 식이 몸을 따르고 집착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르니, 무슨 까닭인가? 이 식이 몸을 받아들이고 갈무리하며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한다는 뜻 때문이다. 또한 심(心)이라 부르니, 무슨 까닭인가? 이 식이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 등을 쌓아 모으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광혜여, 아타나식을 의지하고 건립하는 까닭에 여섯 가지 식신(識身)이 구르니, 이른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다. 이 가운데 식이 있어 눈과 빛깔을 반연해 안식이 생기고, 안식과 함께 따라 행하며 동시에 같은 경계에 분별의식(分別意識)이 구르게 된다. 식이 있어 귀․코․혀․몸과 소리․냄새․맛․감촉을 반연해 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이 생기고, 이식․비식․설식․신식과 함께 따라 행하며 동시에 같은 경계에 분별의식이 구르게 된다.

 

광혜여, 만일 그때 안식 하나만 구르면 곧 이때는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만 있어서 안식이 행하는 것과 함께 구른다. 만일 그때 둘․셋․넷․다섯의 모든 식신이 구르면 곧 이때도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있어서 다섯 식신이 행하는 것과 함께 구른다.

 

광혜여, 비유컨대 큰 폭포수의 흐름과 같다. 만일 한 물결이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오직 한 물결만 구르고, 둘이나 많은 물결이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많은 물결이 구른다. 그러나 이 폭포수 자체는 항상 흘러 끊임없고 다함이 없다. 또 매우 맑은 거울의 표면과 같다. 만일 하나의 그림자가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오직 하나의 그림자만 일어나고, 둘이나 많은 그림자가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많은 그림자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거울의 표면이 변해 그림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수용하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광혜여, 폭포의 물과 같은 아타나식을 의지하고 건립한 까닭에, 만일 그때 하나의 안식이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곧 그때 하나의 안식이 구르고, 만일 그때 나아가 다섯 식신이 생길 인연이 나타나면 곧 그때 다섯 식신이 구르는 것이다.

 

광혜여, 이와 같아서 보살이 비록 법주지(法主智)를 의지하고 건립한 까닭에 심․의․식의 비밀에 공교하다 해도, 그러나 모든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를 일체 심․의․식의 비밀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광혜여, 만일 모든 보살이 안으로 각각 다른 것들에 있어서 여실하게 아타나를 보지 않고, 아타나식을 보지 않고,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고, 쌓이고 모임을 보지 않고, 심(心)을 보지 않고, 눈과 빛깔과 안식을 보지 않고, 귀와 소리와 이식을 보지 않고, 코와 냄새와 비식을 보지 않고, 혀와 맛과 설식을 보지 않고, 몸과 감촉과 신식을 보지 않고, 의(意)와 법(法)과 의식(意識)을 보지 않으면 이를 승의에 공교한 보살이라 부르며, 여래는 그를 승의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광혜여, 이에 한하여 심․의․식 일체의 비밀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고, 여래가 이에 한하여 그를 심․의․식 일체 비밀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아타나식(阿陀那識) 매우 깊고 미세해

일체 종자 폭포의 흐름 같도다.

내가 어리석은 이들에겐 말하지 않나니

그들이 분별하여 아(我)라 할까 두렵구나.

 

 

 

 

해심밀경 제2권

 

 

4. 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

 

 

그때 덕본(德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법상(法相)에 공교한 보살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란 어디에 한하여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께서는 어디에 한하여 그들을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덕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사람․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모든 법상을 말하리라.”

 

이른바 모든 법상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인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게 세워진 일체 법의 자성과 차별이고, 나아가 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나아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덩어리를 부르고 모은다. 무엇이 모든 법의 원성실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를, 모든 보살들은 용맹 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생각하고 잘못됨 없이 사유하는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통달할 수 있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바야흐로 원만하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여, 눈병 난 사람의 눈에 생긴 눈병의 허물처럼, 변계소집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눈병 난 사람은 눈병으로 여러 모습 즉 머리털이나 바퀴, 벌과 파리와 거승(巨勝)과 혹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따위의 차별이 나타남과 같이,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눈에 눈병의 허물을 여의고 이 맑은 눈의 본성으로 행하는 바에 어지러운 경계가 없음과 같이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청정한 파지가(頗胝迦)보배는 푸르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제청(帝靑)이나 대청(大靑)의 마니(摩尼)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붉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호박(琥珀)의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호박의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초록으로 물든 빛과 합하면 곧 말라갈다(末羅羯多) 마니보배와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말라갈다 마니보배라고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일 노랗게 물든 빛깔과 합하면 곧 금의 모습과 비슷하니, 삿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진짜 금의 모습인 양 집착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저 파지가보배에 상응하는 물든 빛깔이 나타나는 것처럼, 청정한 의타기상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상의 말과 습기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청정한 파지가를 두고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금 따위가 있다고 여기는 삿된 집착처럼, 의타기상에 변계소집상을 집착하는 것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보배처럼 의타기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저 맑은 파지가에 나타난 제청과 대청과 호박과 말라갈다와 진금 따위의 모습은 언제나 진실함이 없고 자성이 없는 성품인 것처럼, 의타기상에 나타난 변계소집상은 항상 언제나 진실함이 없으며 자성이 없는 성품이다. 원성실상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또 덕본이여, 상(相)과 명(名)이 상응하는 것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변계소집상을 알 수 있다. 의타기상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상은 집착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의타기상을 알 수 있다. 의타기상에 변계소집상의 집착이 없음을 인연으로 삼는 까닭에 원성실상을 알 수 있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변계소집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 모습 없는 법[無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의타기상을 깨닫는다면 곧 여실히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雜染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원성실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一切淸淨相法]을 깨달을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다면 곧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을 것이요, 만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다면 곧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모든 보살은 여실히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깨닫는 까닭에, 여실히 모든 모습 없는 법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과 청정한 모습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 까닭에 온갖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고,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 까닭에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한다. 이에 한하여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들은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에 모습 없는 법을 깨치지 못하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을 수 없나니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 끊지 못하는 까닭에

미묘하고 맑은 모습의 법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행의 뭇 허물을 관찰하지 않으면

방일(放逸)하는 허물이 중생을 해치리라.

게으름은 머무름과 움직이는 법에서

없음과 있음의 실수가 있느니라.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그때 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예전에 고요한 곳에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무량한 문으로 모든 온(蘊)에 있는 자상(自相)과 나는 모습[生相]과 멸하는 모습[滅相]과 영원히 끊음[永斷]과 변지(遍知)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모든 온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처(處)와 연기(緣起)와 모든 식(食)에 대해서도 그러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모든 제(諦)에 있는 자상과 변지와 영원히 끊음과 작증(作證)과 닦고 익힘[修習]을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모든 계(界)에 있는 모습과 갖가지 계(界)의 성품과 하나가 아닌 계(界)의 성품과 영원히 끊음과 변지를 말씀하셨다. 무량한 문으로 일찍이 염주(念住)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염주(念住)를 말씀하심과 같이,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셨고, 무량한 문으로 8지성도(支聲道)에 있는 자상과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닦고 익힘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함과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고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을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또 일체 법이 모두 자성(自性)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다. 잘 모르겠구나. 세존께서는 무슨 밀의(密意)에 의지해 이와 같이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제가 이제 여래께 이 뜻을 여쭙니다. 바라건대 여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밀의를 해석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승의생이여, 그대가 생각한 것은 이치에 매우 합당하니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렇게 깊은 뜻을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사람․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에게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말한 밀의(密意)를 해석해 주리라.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선남자여, 무엇이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거짓된 이름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이 된 것이요, 자상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다른 연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요,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는 까닭에 무자성성이라 부르니, 즉 인연으로 생긴 법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이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라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의타기상은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부른다. 또 모든 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을 승의(勝義)라 하며, 또는 무자성성(無自性性)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 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며, 무자성성에서 나타난 것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지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상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꼭두각시의 모형과 같아서 생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1분(分)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허공은 오직 모든 색(色)이 없는 성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일체 처소에 두루 함과 같이, 1분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법무아의 성품이 나타난 것인 까닭이며, 일체에 보편한 까닭이다.

 

선남자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무자성성의 밀의(密意)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하노라.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승의생이여, 유정의 세계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는 따로따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또 그들이 따로 따로 의타기(依他起)의 자성과 원성실(圓成實)의 자성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을 세운 것이 아니다. 유정들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 변계소집의 자성을 더하는 까닭에 내가 세 가지 무자성성을 세운 것이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의 모습에 의지해 모든 유정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여여하다[如如]’고 하고,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이와 같다[如是]’고 한다. 이처럼 언설(言說)로 훈습하는 마음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에 따른 깨달음[隨覺]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의 수면(隨眠)을 말미암는 까닭에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서 변계소집의 모습을 ‘여여하다’고 집착하고 ‘이와 같다’고 집착한다.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나 방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이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또 승의생이여, 만일 모든 유정이 본래로부터 아직 선근을 심지 않고, 아직 장애[障]를 맑히지 못하고, 아직 상속(相續)을 익히지 못하고, 아직 많은 승해(勝解)를 닦지 못하고, 아직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資糧)을 모으지 못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는 까닭에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에 의지해 모든 법을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듣고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행 가운데서 분수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항(無恒)하며 편안치 못하고 변해 무너지는 법임을 깨닫고, 일체 행상에 대하여 마음에 두려움을 내며, 깊이 싫어하는 생각을 낸다.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깊이 싫어하고, 모든 악을 막고 그치며, 모든 악한 법을 짓지 않으며, 모든 선법은 부지런히 닦고 익힌다. 착한 인을 익히는 까닭에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는 능히 선근을 심고, 아직 업장을 맑히지 못한 이는 능히 업장을 맑히며, 아직 상속이 성숙하지 않은 이는 능히 성숙시킨다. 이러한 인연으로 승해(勝解)를 많이 닦고, 또한 복덕과 지혜 두 가지의 자량을 많이 쌓고 모으게 된다. 그들이 비록 이러한 모든 선근을 심고, 나아가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모았다고 해도,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 가운데서 아직은 상무자성성과 두 가지 승의무자성성을 여실히 깨닫지는 못한다. 또한 일체 행(行)에서 아직은 바르게 싫어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욕심을 여의지 못하며, 아직은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번뇌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모든 업의 잡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아직은 두루 생의 잡염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그래서 법요(法要)를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과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그들로 하여금 일체 행에서 능히 바르게 싫어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욕심을 버리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르게 해탈케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번뇌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업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며, 일체 생의 잡염을 뛰어넘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러한 설법을 들으면 생무자성성에서 능히 바르게 상무자성성과 승의무자성성을 믿고 간택하며 생각하고 실답게 통달한다. 의타기의 자성 가운데 능히 변계소집자성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말[言說]로 훈습되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을 따라 깨닫지 않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말의 수면(隨眠)을 떠난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능히 의타기상을 멸하고 현재의 법 가운데서 지혜의 힘을 유지해 오는 세상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 버릴 수 있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 행에서 바르게 싫어하고, 바르게 욕심을 여의며, 바르게 해탈하고, 번뇌잡염․업잡염․생잡염 세 가지에서 두루 해탈할 수 있다.

 

또 승의생이여, 모든 성문승종성(聲聞乘種性)의 유정(有情)도 또한 이 도(道)와 이 행적(行迹)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하며, 모든 독각승종성(獨覺乘種性)의 유정과 모든 여래승종성(如來乘種性)의 유정도 또한 이 도와 이 행적을 말미암는 까닭에 위없고 편안한 열반을 증득한다. 일체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모두 이 하나의 묘하고 청정한 도[一妙淸淨道]를 같이하고, 모두 이 하나의 끝끝내 청정함[一究竟淸淨]을 같이하는 것이니, 다시 두 번째는 없다. 내가 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밀의로써 오직 일승(一乘)만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체 유정계(有情界) 가운데 갖가지 유정의 종성(種性)이 없는 것은 아니니, 둔근성(鈍根性)이나 중근성(中根性)이나 이근성(利根性)의 유정으로 차별된다.

 

선남자여, 만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종성의 보특가라(補特伽羅)라면,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시설하여 갖가지 용맹한 가행(加行)과 방편(方便)으로 교화하고 인도하더라도, 끝내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치게 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본래 하열(下劣)한 종성만 가졌기 때문이며,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이며, 매양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양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그들은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만일 보리로 회향(廻向)한 성문종성의 보특가라라면, 나는 또한 다른 문으로써 그를 보살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하였으니, 만일 모든 부처님들의 깨우쳐 주심을 입으면 소지장(所知障)에서도 그 마음이 분명 해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초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행을 닦아 번뇌장을 해탈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그를 시설하여 성문종성이라 한다.

 

또 승의생이여, 이와 같아서 나의 좋은 말이며 좋은 제도의 법인 비나야(毘奈耶)와 가장 청정한 뜻과 즐거움을 말한 좋은 교법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은 갖가지로 차별되는 뜻과 알음알이를 얻을 수 있다. 선남자여, 여래는 다만 이와 같은 세 가지 무자성성에 의지해 깊은 밀의를 말미암아 이미 말한 불요의경(不了義經)에서 은밀한 모습으로 모든 법요(法要)를 말하니, 이른바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니라.

 

이 경 가운데서 만일 모든 유정들이 이미 상품(上品)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청정히 하고, 이미 상속을 이룩하고, 이미 많은 승해를 닦고, 이미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았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설법을 여실히 깨닫고 이러한 법에 깊은 마음과 신해(信解)를 낼 것이며, 이러한 뜻에 뒤바뀜이 없는 지혜로써 여실히 통달할 것이다. 이 통달에 의지해 잘 닦는 까닭에 능히 빠르게 가장 극진한 구경(究竟)을 증득할 것이며, 또한 나에게 청정한 믿음을 깊이 일으키고, 이것이 여래․응공․정등각이 일체 법에서 현전에 등정각을 이룬 것임을 알 것이다.

 

만일 모든 유정이 이미 상품의 선근을 심고 이미 모든 업장을 맑히고 이미 상속을 성숙시키고 이미 많은 승해(勝解)를 닦았지만 아직 상품의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쌓지는 못했다면, 그 성품이 강직[質直]하다면, 이 강직한 무리가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가려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없지만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지는 않는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나의 매우 깊고 비밀한 말에 비록 여실히 깨달을 힘과 능력은 없어도 이 법에 대해 승해를 낼 것이며, 청정한 믿음을 내어 ‘이 경전은 여래의 말씀이며, 이는 매우 깊은 이치를 드러낸 것이며, 매우 깊은 공의 성품과 상응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심사(尋思)로 행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미세하고 자세하게 살피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고 믿을 것이다. 이 경전의 말씀에 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가장 깊으며, 모든 법의 법성 또한 가장 깊어서 오직 부처님만 요달하실 수 있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갖가지 승해로 유정들을 위해 바른 법의 가르침을 펴시니, 모든 부처님은 무변한 지견(知見)이시고, 우리들의 지견은 소 발자국의 물과 같다.’

 

그들은 이 경전을 공경하고, 남을 위해 말하고, 쓰고, 지니고, 읽고, 널리 퍼뜨리고, 소중히 여겨 공양하고, 외우고, 익히기는 하지만 그 닦는 모습[修相]으로써 가행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매우 깊은 밀의로써 말한 가르침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지해 모든 유정들이 또한 능히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더할 것이며, 그가 아직 상속이 성숙하지 않은 자라면 또한 성숙할 것이다.

 

만일 모든 유정들이, 널리 말하건대 내지 아직 상품(上品)의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쌓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다면,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선택할 힘과 능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말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법에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그 뜻을 말을 따라 집착해 ‘일체 법은 단정코 모두 자성이 없으며, 단정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단정코 본래 고요하며, 단정코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을 것이다.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었음으로써 일체 모습은 모두 무상(無相)이라고 부정해 버리며,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비방하고 부정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는 까닭에 변계소집상도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없는 모습이라고 본다면 그는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세 가지 모습을 비방하고 부인한다’고 말하니, 비록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 가운데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가운데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까닭에, 옳은 법 가운데서 옳은 법이라 지니고 잘못된 뜻 가운데서 옳은 뜻이라고 지닌다. 그는 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킨 까닭에 복덕이 증장하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 까닭에 지혜를 잃으며, 지혜를 잃는 까닭에 광대하고 무량한 좋은 법에서 물러난다. 다시 어떤 유정이 법을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뜻이라고 하는 말을 남에게서 듣고 그 소견에 따른다면, 그는 곧 법에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것에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켜, 법을 집착하여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집착하여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라, 그들은 함께 선법(善法)에서 물러나리라.

 

만일 어떤 유정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남에게서 홀연히 ‘일체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는 말을 듣고는 문득 두려움을 내고, 두려움을 내고는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군의 말이다’고 말하며, 이러한 소견을 내고는 이 경전에 대하여 비방하고 헐뜯고 욕한다면, 이런 인연으로 큰 쇠퇴와 손해를 얻고 큰 업장(業障)을 범하리라.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일체 모습에 대하여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뜻이 아닌 것을 뜻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가 있으면 이는 광대한 업장을 일으키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무량한 중생을 구렁에 빠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큰 업장을 얻게 하는 까닭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유정이 선근을 심지 못했고, 업장을 맑히지 못했고, 상속을 익히지 못했고, 승해를 많이 닦지 못했고,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으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한 무리로서 버리고 세울 것을 가릴 힘과 능력이 있으나 항상 자기의 견취 가운데 안주한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密意)의 말을 여실히 알지 못할 것이며, 또 이 법에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며, 옳은 법 가운데 잘못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옳은 뜻 가운데 잘못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킬 것이며, 옳은 법을 잘못된 법이라 집착하고 옳은 뜻을 잘못된 뜻이라고 집착하며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는 마군의 말이다’고 소리 높여 말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는 이 경을 비방하고 욕하고 거짓이라고 부정하며 무량한 문으로써 이러한 경전을 헐뜯고 무시할 것이며, 이 경전을 믿는 모든 이들을 원수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예전부터 모든 업장에 장애되었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다시 이러한 업장에게 장애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장은 처음에 시설하기는 쉬우나 백천 구지(俱胝) 나유타(那由陀)겁을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나의 좋은 말이며 좋은 제도의 법인 비나야와 가장 청정한 뜻의 즐거움으로 말한 좋은 가르침 가운데서 이와 같은 여러 유정들의 무리가 갖가지로 차별되는 견해를 얻는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 법은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멸함도 없고 본래 적멸이며

모든 법의 자성은 언제나 열반이니

지혜로운 자 뉘라서 밀의(密意)가 없다 말하리오.

 

상(相)․생(生)․승의(勝義)의 무자성

이와 같이 내가 이미 드러냈으니

만일 부처님의 이러한 밀의 모르고

바른 길을 잃어버린다면 가지 못하리라.

 

모든 맑은 도에 의지해 청정하려면

이 하나만 의지할 뿐 두 번째는 없나니

그러므로 그 가운데 1승(乘)을 세웠건만

유정들의 성품은 차별이 없지 않더라.

 

중생계의 무량한 중생들

한 몸만 제도하고 적멸로 나아가니

대비(大悲)와 용맹으로 열반 깨치고

중생들 버리지 않을 자 매우 얻기 어려워라.

 

미묘하여 알 수 없는 무루세계

그곳의 해탈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뜻 이루어져 혹(惑)과 고(苦)가 없거늘

두 가지 종성 달리 말해 상(常)과 낙(樂)이라 하네.

 

그때 승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의 밀의(密意)의 말씀은 매우 기이하고 희유하고 극히 미묘하며 매우 깊으며, 지극히 통달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혹은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行相) 중에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색온(色蘊)이라 하고, 혹은 자성의 모습이나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며, 거짓 이름을 세워 색온의 생함[生]을 삼고 색온의 멸함[滅]을 삼으며, 색온의 영원히 끊어짐[永斷]과 변지의 자성의 모습과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니, 이것을 변계소집상이라고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을 시설하셨습니다. 만일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이 되는 행상이라면 이는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가운데서는 변계소집상이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이 자성의 무자성성(無自性性)과 법무아(法無我)와 진여(眞如)인 청정의 소연(所緣)을 원성실상이라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색온에서와 같이 이렇게 다른 온에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온에서와 같이 이렇게 12처(處)의 낱낱 처에 대해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12유지(有支)의 낱낱 지에 대해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4식(食)의 낱낱 식에 대해서도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6계(界)와 18계(界)의 낱낱 계에 대해서도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거짓 이름을 세워 고제(苦諦)와 고제의 변지(遍知)와 혹은 자성의 모습과 혹은 차별의 모습을 삼으니, 이것이 변계소집상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을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변계소집상이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곧 이 자성의 무자성성과 법무아와 진여인 청정의 소연을 원성실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고제(苦諦)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른 제(諦)에서도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성제(聖諦)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모든 염주(念住)와 정단(正斷)과 신족(神足)과 근(根)과 역(力)과 각지(覺支)와 도지(道支)에서도 낱낱이 모두 널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거짓 이름을 세워 정정(正定)을 삼고, 또 정정의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림과 바른 닦음과 생기지 않은 것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견고히 머물러 잊지 않으며 곱으로 닦아 더하고 넓어지게 함이라 하며, 혹은 자성의 모습이라 하고 혹은 차별의 모습이라 하니, 이를 변계소집상이라 부릅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상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이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을 의타기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과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분별로 행해진 변계소집상의 의지하는 대상인 행상 위에서 변계소집상은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곧 이 자성의 무자성성과 법무아와 진여인 청정의 소연을 원성실상이라 합니다. 세존께서는 이에 의지해 모든 법의 1분의 승의무자성성을 시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비습박약(毘濕縛藥)은 일체 산약(散藥)과 선약(仙藥)의 방문에 모두 상응하여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了義)의 가르침은 두루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림의 바탕은 일체 그림 그리는 사업에 보편하여 모두가 한맛이며 청․황․적․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채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가르침은 두루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서도 모두 한맛이며, 또 그 모든 경전의 요의가 아닌 뜻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요리한 모든 진수(珍羞)와 모든 떡과 과일에 숙소(熟酥)를 넣으면 더욱 훌륭한 맛을 내는 것처럼, 세존께서는 이 모든 법의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가르침을 일체 요의가 아닌 경전에 두어 수승한 환희를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허공이 모든 일체 처소에 보편하되 모두 한맛이어서 일체 짓는 바를 장애하지 않는 것처럼, 세존의 이 모든 법은 모두 자성이 없고 널리 말하면 나아가 자성이 열반이며, 무자성성에 의지한 요의의 말씀은 일체 요의가 아닌 경에 보편하며 모두 같은 한맛이어서 일체 성문과 독각과 모든 대승의 수행하는 사업을 장애하지 않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지금 여래가 말한 매우 깊은 밀의(密意)의 말과 뜻을 잘 알았고 또 이 뜻의 비유를 잘 들었으니, 이른바 세간의 비습박약과 채색의 그림 바탕과 숙소와 허공이다. 승의생이여, 그렇고 그렇다. 틀림없으니 이와 같이 그대는 받아 지녀라.”

 

그때 승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처음 언젠가 바라니사(婆羅尼斯) 선인이 떨어진 곳, 사슴에게 베푼 동산에서는 오직 성문승으로만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위해 4제법으로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셨습니다. 매우 기이하고 매우 희유한 일로서 일체 하늘과 인간에서 누구도 일찍이 굴린 이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때 굴린 법륜은 그보다 나은 것이 있고 용납할 것이 있어 요의가 되지 못하였으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옛날에 두 번째로 오직 대승을 향해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의지해 은밀한 모습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비록 훨씬 기이하고 매우 희유하였사오나 그때 굴린 법륜 또한 그보다 나은 것이 있고 용납할 것이 있어 요의가 되지 못하였으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세 번째로 널리 일체승을 향하는 이들을 위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인 무자성성이라 말씀하시고, 이에 의지해 뚜렷한 모습으로 바른 법륜을 굴리십니다. 제일 기이하시고 가장 희유하십니다. 지금 세존께서 굴리신 법륜은 그보다 나은 것이 없고 용납할 것도 없어 참으로 요의이니, 모든 시비가 발을 붙일 곳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인 것에 의지해 말씀하신 매우 깊은 요의의 교법을, 선남자ㆍ선여인이 듣고 믿고 쓰고 지니고 공양하고 퍼뜨리고 받아 외우고 닦고 이치대로 생각하고 그 닦는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킨다면 복덕이 얼마나 생기겠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승의생이여, 그런 선남자ㆍ선여인에게 생기는 복덕은 무량하고 무수하여 알기가 어려우니, 내가 지금 그대에게 조금만 말하리라. 손톱 위의 흙을 대지의 흙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수(數)․산(算)․계(計)․유(喩)․오파니살담(鄔波尼殺曇)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함과 같다. 소 발자국의 물을 4대해의 물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널리 말하자면 나아가 오파니살담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아서 모든 요의가 아닌 경을 듣고 믿고, 나아가 그 수행하는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켜 얻은 공덕을, 지금 말한 요의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서 모인 공덕이나 나아가 그 닦은 모습으로써 가행을 일으켜 모인 공덕과 비교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널리 말하면 나아가 오파니살담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때 승의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해심밀법에서 이 교법을 저희들이 무엇이라고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는 승의요의(勝義了義)라는 교법이니, 그대들은 이렇게 받들어 지녀라.”

 

이 승의요의의 교법을 말씀하셨을 때 큰 모임 가운데 있던 60만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30만 성문이 티끌[塵垢]을 멀리 벗어나 모든 법에 법안(法眼)이 맑아졌으며, 15만 성문이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해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으며, 7만 5천의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6.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그때 자씨(慈氏)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머물러 대승의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행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보살은 법을 거짓으로 세움[法假安立]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의지를 삼고 머무름을 삼아서 대승에서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닦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네 가지 소연경사(所緣境事)가 있으니, 첫째는 유분별영상소연분별경사(有分別影像所緣分別境事)요, 둘째는 무분별영상소연경사(無分別影像所緣境事)요, 셋째는 사변제소연경사(事邊際所緣境事)요, 넷째는 소작성판소연경사(所作成辦所緣境事)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모두에게 소연경사입니까?”

 

“선남자여, 한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이다. 한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이다. 두 가지는 모두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사변제(事邊際)와 소작성판(所作成辨)이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네 가지 소연경사에 의지해 어떻게 사마타를 구하며 비발사나에 능통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말한 거짓으로 세운 법과 같으니, 이른바 계경(契經)․응송(應誦)․기별(記別)․풍송(諷誦)․자설(自說)․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방광(方廣)․희법(希法)․논의(論議)이다. 보살은 이것들을 잘 듣고 잘 받아 말을 잘 통하고 뜻을 잘 생각하며 소견을 잘 통달하니, 이렇게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이 홀로 비고 고요한 곳에 앉아 뜻을 지어 생각한다.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에 대하여 안의 마음으로 상속하며, 뜻을 지어 생각한다. 이렇게 바른 수행에 많이 머무르기 때문에 몸의 가벼움[輕安]을 일으키니 이것이 ‘사마타’이다. 이러한 보살은 능히 사마타를 구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서 얻은 가벼움으로 의지할 대상을 삼는 까닭에 곧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은 안의 삼마지(三摩地)로 행하는 영상(影像)에 대하여 관찰하고, 수승하게 깨치고, 마음의 모습[心相]을 버린다. 곧 이러한 삼마지의 영상에서 안 뜻 가운데 능히 바르게 생각하여 선택하고, 가장 극진히 생각하여 가리고, 두루 찾아 생각하고, 두루 살펴 생각하는 인(忍)이나 혹은 즐거움이나 소견이나 관찰을 바로 ‘비발사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보살은 비발사나에 능통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보살이 마음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고 안으로 생각하는 마음이긴 하지만, 나아가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다면 그때의 작의(作意)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남자여, 사마타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사마타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이 나아가 아직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고,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있는 모든 법의 안의 삼마지로 소연인 영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사유한다면 이런 작의는 무엇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비발사나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비발사나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의 도와 비발사나의 도는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는가? 비발사나의 소연경계에 마음으로써 소연을 삼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지 않은가? 유분별영상은 소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비발사나와 삼마지가 행하는 대상인 영상(影像)은 이 마음과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저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 행하는 대상인 영상이 이 마음과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도리어 이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 가운데는 조그마한 법을 볼 수 있는 조그마한 법도 없다. 이 마음이 이렇게 생길 때에 곧 이러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남자여, 마치 잘 닦여진 청정한 거울의 표면에 의지해 본질로써 반연을 삼고 도리어 본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이제 영상을 보았다’고 말하며, 또는 ‘본질을 떠나서 따로 영상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아서 마음이 생길 때에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유정이 자성에 머물러 마음의 대상인 영상으로 색(色) 등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이 마음과 또한 차이가 없습니까?”

 

“선남자여, 또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잘못된 깨달음에 의지해 모든 영상이 오직 식뿐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잘못된 알음알이를 짓는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비발사나를 닦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고 심상(心相)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사마타를 닦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며 무간심(無間心)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합쳐 함께 굴린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바르게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상(心相)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과 비발사나의 소연(所緣)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무간심(無間心)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저 영상을 반연하는 마음과 사마타의 소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일경성(心一境性)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오직 식임을 통달하거나 혹은 이렇게 통달하고 다시 진여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비발사나는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상비발사나(有相毘鉢舍那)요, 둘째는 심구비발사나(尋求毘鉢舍那)요, 셋째는 사찰비발사나(伺察毘鉢舍那)이다. 무엇이 유상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순전히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만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체 법 가운데서 잘 알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이미 잘 깨친 일체 법 가운데서 극진한 해탈[極解脫]을 얻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는 모두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저 무간심(無間心)을 따르는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또한 세 가지가 있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의 정려(靜慮)부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無量) 가운데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다시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이전에 배우고 생각한 법상(法相)에 따라 그 뜻에서 사마타․비발사나를 얻는다면, 그것을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비발사나라고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배우고 생각한 법상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다른 훈계와 가르침만 믿고 그 뜻에서 사마타․비발사나를 얻는다면, 이른바 푸르게 굳어가는 모습[靑瘀]을 관찰하고 나아가 고름으로 문드러지는 모습[膿爛]을 관찰하며, 혹은 일체 행은 모두가 무상함과 모든 행은 괴로움과 일체 법은 아(我)가 없음과 열반은 끝끝내 고요함을 관찰한다면, 이러한 무리의 사마타․비발사나를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비발사나라고 한다.

 

법에 의지하여 사마타․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법을 따라 행하는 보살[隨法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영리한 성품이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사마타․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믿음을 따라 수행하는 보살[隨信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둔한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별법(別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총법(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들이 각각 다른 계경(契經)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받은 것과 같은 생각한 것과 같은 법에서 사마타․비발사나를 수행한다면 이를 별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일체 계경 등의 법을 반연하여 뭉뚱그려 한 덩이, 한 더미, 한 갈피, 한 무더기로 삼고, 뜻을 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일체 법은 진여를 수순하고 진여로 향하며 진여로 들어간다. 보리를 수순하고 열반을 수순하고 전의(轉依)를 수순하며, 또한 그것들로 향하고 그것들로 들어간다. 이 일체 법은 무량․무수한 선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마타․비발사나를 닦는 것을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라 한다.”

 

“세존이시여, 소총법(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대총법(大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무량총법(無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각각 다른 계경(契經)과 나아가 논의(論議)를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면, 마땅히 알라. 이는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이다. 만일 나아가 받고 생각한 계경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되 각각 다르게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무량한 여래의 가르침과 무량한 법구(法句)의 문자와 무량한 등등의 지혜로 비추는 것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며, 나아가 받고 생각한 것을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를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총법을 반연하여 사마타․비발사나를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반연을 말미암을 경우에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사유할 때에 찰나 찰나에 일체 추중번뇌의 의지하는 대상을 녹이는 것이요, 둘째는 갖가지 망상을 여의고 즐거운 법락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시방의 차별 없는 모습과 무량한 법의 광명을 아는 것이요, 넷째는 해야 할 일을 원만히 이루어 청정한 무분별상(無分別相)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법신을 원만히 이루어 점점 더욱 훌륭하고 묘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는 어디서부터를 통달이라 하오며, 어디서부터를 얻는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처음의 극희지(極喜地)부터를 통달이라 하며, 제3 발광지(發光地)부터를 얻는다고 한다. 선남자여, 처음으로 업을 닦는 보살도 또한 이 가운데서 따라 배우고 뜻을 지으니, 비록 칭찬할 것은 못되나 응당 게을리 하여 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에서 어떤 것을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어떤 것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 합니까?”

 

“선남자여, 취하여 찾고 살피는 법상(法相)에 대하여 만일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비발사나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일 저 모습에 대하여 비록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은 없을지라도 미세한 광명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사마타․비발사나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약 저러한 일체 법상에 대하여 도무지 작의(作意)와 받아들임과 관찰이 없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비발사나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또 선남자여, 만일 찾고 구함이 있는 사마타․비발사나면 이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살핌이 있는 사마타․비발사나면 이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비발사나면 이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지상(止相)이며, 무엇이 거상(擧相)이며, 무엇이 사상(捨相)입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 두려워할 때, 모든 싫어하는 법의 작의(作意)와 무간심(無間心)의 작의를 지상(止相)이라 한다. 마음이 가라앉거나 가라앉을까 두려워할 때, 모든 즐거운 법의 작의와 그의 심상(心相)의 작의를 거상(擧相)이라 한다. 만일 한결같이 그치는 길에서나 한결같이 관찰하는 길에서나 혹은 함께 움직이는 길에서 두 가지 수번뇌(隨煩惱)에 물들었을 때, 모든 공용 없는 작의와 마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 작의를 사상(捨相)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법(法)을 알고 뜻[義]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을 아는 것이며, 무엇이 뜻을 아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이 다섯 가지 모습에 의지해 법을 아니, 첫째는 명(名)을 알고, 둘째는 구(句)을 알고, 셋째는 문(文)을 알고, 넷째는 별(別)을 알고, 다섯째는 총(總)을 안다. 무엇이 명(名)인가? 이른바 일체 염정법(染淨法) 가운데 세워진 자성에 대해 생각으로써 거짓 시설한 것이다. 무엇이 구(句)인가? 이른바 저 이름 따위의 모임 가운데서 능히 모든 염․정의 뜻을 말함에 따라 의지하고 건립한 것이다. 무엇이 문(文)인가? 이른바 저 두 가지가 의지하는 문자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아는 것인가? 이른바 각각 다른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해 총합하여 아는 것인가? 이른바 총합한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합하고 간략히 하여 하나로 하는 것을 법을 안다고 하며,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아는 것이라 한다.

 

선남자여, 저 보살들은 열 가지 모습에 의지해 뜻[義]을 안다. 첫째는 진소유성(盡所有性)을 알고, 둘째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을 알고,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알고,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알고, 다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알고, 여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을 알고, 일곱째는 전도(顚倒)의 뜻을 알고, 여덟째는 무도(無倒)의 뜻을 알고, 아홉째는 잡염(雜染)의 뜻을 알고, 열째는 청정(淸淨)의 뜻을 안다.

 

선남자여, 진소유성(盡所有性)이란 모든 잡염(雜染)과 청정한 법 가운데 있는 일체 품류의 한계[邊際]이니, 이를 이 가운데의 진소유성이라 한다. 5온(蘊)과 6내처(內處)와 6외처(外處), 이것을 일체라 한다. 여소유성(如所有性)이란, 이른바 일체 염․정의 법 가운데 있는 진여이니, 이를 여소유성이라 한다. 여기에 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니 이른바 일체 행의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성품이요, 둘째는 상진여(相眞如)니 이른바 일체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無我)의 성품과 법무아의 성품이요, 셋째는 요별진여(了別眞如)이니 이른바 일체 행은 오직 식의 성품이요,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고성제(苦聖諦)요,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집성제(集聖諦)요,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멸성제(滅聖諦)요,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도성제(道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유전진여와 안립진여와 사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유정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상진여와 요별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법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청정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성문의 보리와 독각의 보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정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바른 법을 듣고 총합한 경계를 반연하는 훌륭한 사마타․비발사나에 포섭되는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취(能取)의 뜻이란, 이른바 안의 다섯 가지 색처(色處)와 혹은 심(心)․의(意)․식(識)과 그리고 모든 심법(心法)이다. 소취(所取)의 뜻이란, 이른바 밖의 6처(處)이다. 또 능취의 뜻이 또한 소취의 뜻이기도 한다. 건립(建立)의 뜻이란, 이른바 기세계(器世界)이다. 그 안에 일체 유정세계를 건립할 수 있으니 이른바 한 마을, 혹은 백 마을, 혹은 천 마을, 혹은 백천 마을, 혹은 하나의 땅덩이의 바닷가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백, 이것이 천, 혹은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섬부주,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4대주(大洲),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이것이 구지(拘胝), 이것이 백 구지, 이것이 천 구지, 이것이 백천 구지, 혹은 이것이 무수(無數), 이것이 백 무수, 이것이 천 무수, 이것이 백천 무수, 혹은 삼천대천세계 무수․백천․미진의 수량이 시방으로 무량․무수한 모든 기세계이다. 수용(受用)의 뜻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유정들이 수용하기 위해 재물[資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顚倒)의 뜻이란, 이른바 그 능취 등의 뜻에 대하여 무상함을 영원한 것으로 헤아리는 생각의 전도․마음의 전도․견해의 전도와 괴로운 것을 계교하여 즐겁다 하며, 부정한 것을 계교하여 맑다 하며, 무아(無我)를 계교하여 아(我)라고 하는 생각의 전도․마음의 전도․견해의 전도이다. 무도(無倒)의 뜻이란 위의 것과 달라서 능히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니 그 형상을 알아야 한다. 잡염(雜染)의 뜻이란, 이른바 삼계의 세 가지 잡염이니, 첫째는 번뇌잡염(煩惱雜染)이요, 둘째는 업잡염(業雜染)이요, 셋째는 생잡염(生雜染)이다. 청정(淸淨)의 뜻이란, 이른바 이 같은 세 가지 잡염에 있는 얽매임을 벗어나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선남자여, 이들 열 가지는,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이 다섯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변지의 일[遍知事]이요, 둘째는 변지의 뜻[遍知義]이요, 셋째는 변지의 원인[遍知因]이요, 넷째는 변지의 결과[遍知果]요, 다섯째는 이들에 대하여 깨달음[覺了]이다. 선남자여, 이 변지의 일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일체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온(蘊)과 모든 내처(內處)와 모든 외처(外處) 등 이러한 일체를 말한다. 변지의 뜻이란, 나아가 존재하는 품류의 차별로서 응당 알아야 할 경계이다. 이른바 세속(世俗)인 까닭이며, 혹은 승의(勝義)인 까닭이며, 혹은 공덕(功德)인 까닭이며, 혹은 과실(過失)인 까닭이며, 혹은 인연인 까닭이며, 혹은 세상인 까닭이며, 혹은 나고 혹은 머무르고 혹은 무너지는 모양인 까닭이며, 혹은 질병 따위와 같은 까닭이며, 혹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진여(眞如)․실제(實際)․법계(法界)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넓고 간략한 까닭이며, 혹은 한결같은 기별(記別)인 까닭이며, 혹은 분별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반문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두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숨고 비밀한 까닭이며, 혹은 드러난 까닭이니, 이러한 따위를 마땅히 알라. 이런 일체를 변지의 뜻이라 한다. 변지의 원인[遍知因]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능히 앞의 두 가지를 취하는 보리분법이다. 이른바 염주(念住)와 정단(正斷) 따위이다. 변지의 결과[遍知果]를 얻는다 함은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영원히 끊어진 비나야(毘奈耶)와 탐욕․성냄․어리석음 일체가 영원히 끊긴 모든 사문(沙門)의 과보와 그리고 내가 말한 성문여래의 공(共)․불공(不共) 세간(世間)․출세간(出世間)에 있는 공덕이다. 이들에 대한 증득, 이들에 대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이 깨달음을 짓는 법[作證法] 가운데서 모든 해탈의 지혜로써 널리 남에게 말하여 드날리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들이 네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심집수(心執受)의 뜻이요, 둘째는 영납(領納)의 뜻이요, 셋째는 요별(了別)의 뜻이요, 넷째는 잡염청정(雜染淸淨)의 뜻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의 뜻은 널리 일체 뜻을 포섭한다.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은 세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말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문(文)의 뜻이요, 둘째는 의(義)의 뜻이요, 셋째는 계(界)의 뜻이다. 선남자여, 문(文)의 뜻이란 이른바 이름의 몸[名身] 따위이다. 의(義)의 뜻이란 마땅히 알라.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모습이요, 둘째는 두루 아는 모습이요, 셋째는 영원히 끊는 모습이요, 넷째는 깨달음을 짓는 모습이요, 다섯째는 닦고 익히는 모습이요, 여섯째는 저 진실의 모습 따위 품류가 차별된 모습이요, 일곱째는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가 서로에게 속하는 모습이요, 여덟째는 두루 아는 모습 따위를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요, 아홉째는 그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요, 열째는 두루 알지 못하는 따위와 두루 아는 따위의 허물과 공덕이 되는 모습이다. 계(界)의 뜻이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기세계(器世界)요, 둘째는 유정의 세계요, 셋째는 법계요, 넷째는 조복의 세계요, 다섯째는 조복하는 방편의 세계이다. 선남자여, 이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일체 뜻을 두루 포섭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사마타․비발사나를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로 그 뜻을 깨닫는다 하시니, 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문자에 의지해 다만 그 말대로만 할 뿐이지, 아직 그 의취(意趣)를 능통하지는 못하며,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역시 문자에 의지하나 꼭 말대로만 하지는 않고 그 의취를 능통한다. 그러나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모든 보살의 닦아서 이룬 지혜는 문자에 의지하기도 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도 하며, 말씀대로 하기도 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의취(意趣)에 능통하고, 알아야 할 일의 동분(同分) 삼마지 의 대상인 영상이 현전하며, 해탈에 아주 잘 수순하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는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 가지 뜻을 아는 차별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이 법을 알고 뜻을 알되 무엇이 지혜[智]이며, 무엇이 소견[見]입니까?”

 

 

“선남자여, 내가 무량한 문으로 지혜와 소견 두 가지 차별을 말하였으니, 이제 그대에게 간략히 그 모습을 말하리라. 총법(總法)을 반연하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아서 얻는 묘한 지혜는 지혜라 하고, 별법(別法)을 반연하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아서 생긴 지혜는 소견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어떤 작의(作意)에 의지해 어떻게 모든 모습을 제거합니까?”

 

“선남자여, 진여의 작의에 의지해 모든 법의 모습과 뜻의 모습을 제거한다. 그 이름[名]과 이름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얻은 바가 없을 때에는 또한 그것이 의지하는 모습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이름에서와 같이 구절[句]에서도 문자[文]에서도 일체 뜻[義]에서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나아가 계(界)와 계의 자성에서도 얻은 모습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깨달아야 할 모든 진여의 뜻과 모습에서 이 진여의 모습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깨달아야 할 진여의 뜻 가운데는 도무지 모습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거늘, 무엇을 버리겠느냐. 선남자여, 진여의 뜻을 깨달을 때 일체 법과 뜻의 모습을 항복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이 깨달음은 다른 이가 항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흐린 물그릇의 비유와 맑지 못한 거울의 비유와 못 물을 휘젓는 비유에서 그런 것에는 자기의 얼굴 그림자를 비추어 관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관찰할 수 있다면 그건 앞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마음을 잘 닦지 못하면 존재하는 진여를 여실하게 관찰할 수 없으며, 마음을 잘 닦으면 관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관찰하는 어떤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어떤 진여에 의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선남자여, 이는 세 가지의 능히 관찰하는 마음을 말하니, 이른바 듣고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생각하여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닦아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이다. 또 알아내는 진여에 의지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법과 뜻을 아는 보살은 모든 모습[相]을 버리기 위해 부지런히 가행(加行)을 닦습니다. 몇 가지 모습이 버리기 어려우며, 누가 이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열 가지 모습이 있으며, 공(空)으로써 능히 제거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법과 뜻을 깨치는 까닭에 갖가지 문자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일체 법공(法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둘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를 깨닫는 까닭에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성품이 상속하여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모습의 공과 앞뒤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깨닫는 까닭에 몸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모습과 아만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의 공과 얻은 바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아는 까닭에 재물을 돌아보고 아끼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외공(外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다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인 남녀의 받들어 섬김과 필요한 도구[資具]가 상응함을 깨닫는 까닭에 안으로 안락한 모습과 밖으로 밝고 묘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과 밖의 공과 본성의 공을 말미암아 제거한다. 여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아는 까닭에 무량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큰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일곱째는 무색(無色)을 아는 까닭에 안으로 고요한 해탈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있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여덟째는 상진여(相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과 법무아(法無我)의 모습과 혹은 유식의 모습과 승의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필경의 공과 성품 없는 공과 성품 없는 자성의 공과 승의의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아홉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함이 없는 모습과 변함없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없는 공과 변역(變易)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열째는 그 모습을 다스리는 공의 성품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까닭에 공의 성품과 모습이 있으니, 이는 공한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열 가지 모습을 제거할 때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모습에서 해탈을 얻습니까?”

 

“선남자여,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잡되고 물든 속박의 모습으로부터 해탈을 얻고는 그것 또한 버린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수승함에 나아가서 이러한 공으로 이러한 모습을 다스림을 말하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일체 모습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무명(無明)이 나아가 노(老)․사(死) 따위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승함에 나아가서 행(行)을 낸다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모든 행이 가장 가까운 연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의 도리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 어떤 공이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입니까? 모든 보살이 이것을 알면 잃어버림이 없이 공의 성품과 모습에서 증상만(增上慢)을 벗어날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와 같이 깊은 뜻을 물어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이는 곧 일체 대승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의타기상(依他起相)과 원성실상(圓成實相) 가운데서는 일체 품류의 잡염과 청정,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 필경에 그 성품을 멀리 벗어난다. 또 그 가운데서는 도무지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을 대승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몇 가지 수승한 삼마지를 포섭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무량한 성문과 보살과 여래에게 무량한 종류의 훌륭한 삼마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라. 일체가 모두 이에 포섭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무엇으로 인(因)을 삼습니까?”

 

“선남자여, 청정한 시라(尸羅)와 청정하게 듣고 생각하여 이룩한 바른 소견으로써 그 인을 삼는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무엇으로 과(果)를 삼습니까?”

 

“선남자여, 훌륭한 청정계(淸淨戒)와 훌륭한 청정심(淸淨心)과 훌륭한 청정혜(淸淨慧)로써 과를 삼는다. 또 선남자여, 일체 성문과 여래가 가진 세간․출세간의 일체 선법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사마타․비발사나로 얻은 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어떤 업을 짓습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른바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얽매임[繫]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고,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몸과 재물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은 사마타의 장애요,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을 뜻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비발사나의 장애이다. 모습을 좋아하는 것, 뒤섞여 지내는 것, 적은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의 장애이다. 첫 번째 때문에 닦아 나아가지 못하며, 두 번째 때문에 닦은 가행이 구경에 이르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5개(蓋)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도거(掉擧)와 악작(惡行)은 사마타의 장애요,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의(疑)는 비발사나의 장애요, 탐욕[瞋]과 성냄[恚]은 모두의 장애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사마타도(奢摩他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혼침과 수면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사마타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비발사나도(毘鉢舍那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도거와 악작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비발사나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사마타․비발사나가 나타났을 때 몇 가지 마음이 산동업(散動業)이라고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의 흔들림[作意散動]이요, 둘째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外心散動]이요, 셋째는 안 마음의 흔들림[內心散動]이요, 넷째는 모습의 흔들림[相散動]이요, 다섯째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麤重散動]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대승에 상응하는 작의을 버리고 성문․독각과 상응하는 모든 작의 가운데 떨어져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작의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의 모든 잡되고 어지러운 모습과 그에 따른 찾고 생각하는 수번뇌 가운데서, 또는 바깥으로 소연 경계 가운데서, 마음이 풀려 산만해진다면, 마땅히 알라. 이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혼침(惛沈)이나 수면(睡眠) 때문에, 혹은 가라앉음[沈沒] 때문에, 혹은 사마발지에 애착하기 때문에, 혹은 어느 하나의 삼마발지에서 모든 수번뇌로 더럽혀진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는 안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모습에 의지해 안의 등지(等持)가 행하는 대상인 모든 모습에 대하여 뜻을 지어 생각하는 것을 모습의 흔들림이라 한다. 만일 안의 작의를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모든 수(受)가 거칠고 무거운 몸[麤重身]을 말미암아 아(我)를 계교하고 거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알라. 이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처음의 보살 지위로부터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장애를 물리칩니까?”

 

“선남자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초지(初地)에서 나쁜 세계의 번뇌잡염(煩惱雜染)․업잡염(業雜染)․생잡염(生雜染)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2지에서는 미세한 잘못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3지에서는 욕심과 탐심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4지에서는 선정에 대한 애착[定愛]과 법에 대한 애착[法愛]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5지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한결같이 등지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6지에서는 모습이 많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8지에서는 모습이 없는 공용(無相)과 모습이 있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9지에서는 일체 종류의 공교한 말에 자재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10지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친다.

 

선남자여, 이 사마타․비발사나는 여래의 지위에서 극히 미세하고 가장 미세한 번뇌장(煩惱障)을 물리친다. 능히 이러한 장애를 영원히 없애기 때문에 마침내 집착 없고 장애 없는 일체 지견(智見)을 증득하고,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에 의지해 가장 청정한 법신을 건립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사마타․비발사나에 의지해 부지런히 수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합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사마타․비발사나를 얻고, 일곱 가지 진여에 의지해 듣고 생각한 법 가운데서 훌륭한 선정의 마음[定心]을 말미암아 잘 살펴 결정하고 잘 생각하고 잘 세우며, 진여의 성품 안에서 안으로 빠르게 생각한다면, 그는 진여에 대해 빠르게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일체 미세한 현행들도 버릴 수 있는데 하물며 거친 모습이리오. 선남자여, 미세한 모습이란, 이른바 마음이 집착하여 받는 모습[心執受相]과 받아들이는 모습[領納相]과 알아내는 모습[了別相]과 물들거나 청정한 모습[雜染淸淨相]이다. 혹은 안의 모습[內相]과 밖의 모습[外相]과 안팎의 모습[內外相]이다. 혹은 ‘나는 수행을 해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리라’고 하는 모습과 바른 지혜의 모습[正智相]과 진여의 모습[眞如相]과 고․집․멸․도의 모습[苦集滅道相]과 유위의 모습[有爲相]과 무위의 모습[無爲相]과 영원한 모습[有常相]과 무상한 모습[無常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있는 모습[苦有變異性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없는 모습[苦無變異性相]과 유위의 이상의 모습[有爲異相相]과 유위의 동상의 모습[有爲同相相]과 일체를 일체라고 알아 일체가 있게 되는 모습[知一切是一切已有一切相]과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補特伽羅無我相]과 혹은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다. 그것들이 나타나도 마음이 능히 버린다. 그들은 이미 많이 이러한 수행에 머문 까닭에 때때로 일체 얽매임과 덮임과 산란과 요동에서 마음을 잘 닦는다.

 

이로부터는 일곱 진여에서 일곱 가지로 각각 차별되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하는 통달의 지혜[通達智]가 생기게 되니 이를 견도(見道)라 한다. 이를 얻는 까닭에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들어가 중생을 벗어나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 초지(初地)를 증득하며, 또 이 지위의 훌륭한 덕을 수용한다. 그는 이미 지난 세상에서 사마타․비발사나를 얻은 까닭에 이미 두 가지 소연(所緣)을 얻으니, 이른바 유분별영상소연(有分別影像所緣)과 무분별영상소연(無分別影像所緣)이다. 그는 이제 견도를 얻은 까닭에 다시 사변제소연(事邊際所緣)을 증득하고 다시 다음의 일체 지위에서 수도(修道)로 닦아 나아간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소연에서 뜻을 짓고 사유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의 작은 말뚝으로 큰 말뚝을 뽑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은 이 말뚝으로 말뚝을 뽑는 방편에 의지해 안의 모습[內相]을 버리는 까닭에 일체 잡되고 물든 부분에 수순하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 모습을 버리는 까닭에 추중(麤重) 또한 버린다. 일체 모습과 추중을 영원히 버렸으므로 점차 그 다음 다음의 지위에서도 금을 연마하는 기술과 같이 그 마음을 단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또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을 얻는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이 안의 지관(止觀)을 바르게 수행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일 6처(處)를 안다면 곧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끌어 낼 것이니, 마음의 생김을 잘 알고, 둘째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알고, 셋째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알고, 넷째는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알고, 다섯째는 마음의 줄어듦을 잘 알고, 여섯째는 방편을 잘 알 것이다.

 

마음의 생김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을 여실히 알면 이를 마음의 생김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이란, 첫째 지각할 수 없고 굳게 머무는 그릇과 같은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다. 둘째는 갖가지 행상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단번에 일체 색 따위의 경계를 취하는 분별의식(分別意識), 단번에 안과 밖으로 경계를 취하는 각수(覺受), 단번에 한 생각 순식간 잠깐 사이에 현전의 많은 선정에 들어 많은 불토를 보고 많은 여래를 뵙는 분별의식이다. 셋째는 작은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의 식이다. 넷째는 큰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색계의 식이다. 다섯째는 무량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공(空)․식(識)․무변처(無邊處)의 식이다. 여섯째는 미세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식이다. 일곱째는 변제(邊際)의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식이다. 여덟째는 모습 없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세상을 벗어나는 식과 적멸을 반연하는 식이다. 아홉째는 괴로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의 식이다. 열째는 잡수(雜受)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에 행하는 식이다. 열한째는 기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초정려(初靜慮)와 제2 정려(靜慮)의 식이다. 열두째는 즐거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3 정려의 식이다. 열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4의 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식이다. 열넷째는 더러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상응하는 식이다. 열다섯째는 착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믿음 따위와 상응하는 식이다. 열여섯째는 무기(無記)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저들과 함께 상응하지 않는 식이다.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요별진여(了別眞如)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상박(相搏)과 추중박(麤重縛) 이 두 가지 결박에서 벗어났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박과 추중박을 다스리는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라나고 그것이 쌓일 때에 또한 자랄 수 있고 또한 쌓일 수 있으니, 이것을 늘어남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의 줄어짐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다스릴 대상인 모습과 추중에 물든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그것이 쇠퇴할 때와 그것이 물러날 때에 이것도 또한 쇠퇴하고 이것도 또한 줄어드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방편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해탈(解脫)․승처(勝處)․변처(遍處)의 닦고 버림을 여실하게 잘 아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미 이끌어냈거나 미래에 이끌어낼 것이며 현재에 이끌어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는 일체 수(受)가 남김없이 영원히 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수들이 여기에서 영원히 없어집니까?”

 

“선남자여, 대략 말하건대 두 가지 수(受)가 남김없이 멸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麤重受)요, 둘째는 그 결과인 경계수(境界受)이다.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에는, 마땅히 알라.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색(有色)에 의지한 수요, 둘째는 무색(無色)에 의지한 수요, 셋째는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요, 넷째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추중수이다. 결과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란 이른바 현재의 수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수란 이른바 미래의 원인인 수이다. 그 결과인 경계수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여 지니는 수요, 둘째는 살림살이[資具]의 수요, 셋째는 수용의 수요, 넷째는 아끼는 수이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에서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수는 모두 이미 없어지고, 그를 다스리는 명촉(明觸)에서 생긴 수를 받아들여 함께하거나 또는 그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수가 있게 된다. 또 두 가지 수가 이미 없어지고 오직 현전에 명촉에서 생긴 수만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세계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는 그것 또한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의 세계에서는 일체 수가 남김없이 멸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이제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瑜伽道)에 의지해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이미 유가에서 확실히 가장 좋은 방편을 얻었도다.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를 말하였다. 일체 과거와 미래의 정등각(正等覺)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앞으로 하실 말씀 역시 모두 이와 같으니라. 모든 선남자 혹은 선여인들도 모두 이에 의지해 용맹정진하며 바르게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을 거짓으로 세운 유가 가운데

방일한다면 큰 뜻을 잃으리라.

이 법과 그리고 유가에 의지해

바르게 수행하면 대각을 얻으리라.

 

얻을 것 있다 하고 벗어나길 구하며

 

 

 

7. 지바라밀다품(地波羅蜜多品)

 

 

그때 관자재(觀自在)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보살 10지(地)를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극희지(極喜地)․이구지(離垢地)․발광지(發光地)․염혜지(焰慧地)․극난승지(極難勝地)․현전지(現前地)․원행지(遠行地)․부동지(不動地)․선혜지(善慧地)․법운지(法雲地)이며, 다시 불지(佛地)를 열한 번째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지위는 몇 가지 청정과 몇 갈피[分]에 포섭되는 것입니까?”

 

그때 세존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모든 지위는 네 가지 청정과 열한 가지 갈피에 포섭된다. 무엇이 능히 모든 지위를 포섭하는 네 가지 청정인가? 이른바 가장 높은 의락의 청정[增上意樂淸淨]은 초지(初地)를 포섭하고, 가장 높은 계의 청정[增上戒淸淨]은 제2지를 포섭하고, 가장 높은 마음의 청정[增上心淸淨]은 제3지를 포섭하고, 가장 높은 지혜의 청정[增上慧淸淨]은 그 다음 다음 지위로 갈수록 더욱 수승하고 묘한 까닭에 마땅히 알라. 제4지부터 나아가 불지까지를 포섭한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청정이 널리 모든 지위를 포섭한다.

 

무엇이 능히 모든 지위를 포섭하는 열한 가지 갈피인가? 이른바 모든 보살은 먼저 승해행지(勝解行地)에서 열 가지 법행(法行)에 의지해 승해인(勝解忍)을 매우 잘 닦는 까닭에 그 지위를 뛰어넘어 보살의 바른 성품[正性]과 생을 벗어남[離生]에 깨달아 들어간다. 그 모든 보살이 이러한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히 한다. 그러나 아직 미세한 헐뜯음과 잘못이 현행하는 가운데서 바르게 알아 행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히 한다. 그러나 아직 세간의 원만한 등지(等持)와 등지가 원만한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러한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한다. 그러나 아직 얻은 보리분법(菩提分法)에 따라 많이 닦고 익혀 머무르지 못하며, 마음이 아직 모든 등지에 대한 애착[等持愛]과 법에 대한 애착[法愛]를 버리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케 한다. 그러나 아직 모든 제(諦)의 도리를 여실히 관찰하지는 못하며, 또 생사와 열반에 대해 한결같이 등지거나 나아가는 작의(作意)를 버리지는 못하며, 또 방편으로 포섭할 보리분법을 닦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케 한다. 그러나 아직 나고 죽는 유전(流轉)을 여실히 관찰하지는 못하며, 또 그것에 대해 싫어함을 많이 내었으므로 아직은 무상작의(無相作意)가 많질 못하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서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히 한다. 그러나 아직 무상작의로 하여금 반연이 없고 틈이 없게 많이 닦고 익혀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케 한다. 그러나 아직 무상주(無相住) 가운데 능히 공용(功用)을 버리지는 못하며, 또 모습에 대하여 아직 자재함을 얻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서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히 한다. 그러나 아직 다른 이름[異名]과 뭇 모습[衆相]과 훈계하고 꾸짖음[訓訶]과 일체 품류의 설법 가운데서 큰 자재를 얻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히 한다. 그러나 아직 원만한 법신을 현전에 증득하고 받음을 얻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그 모든 보살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케 한다. 그러나 아직 두루 일체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하여 집착 없고 걸림 없는 묘한 지혜와 묘한 소견을 얻지는 못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 가운데 아직 원만치 못하니,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 능히 증득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 갈피를 원만하게 한다. 이 갈피가 원만한 까닭에 일체 갈피가 원만함을 얻는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은 열한 가지 갈피가 널리 모든 지위를 포섭한다.”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최초를 극희지(極喜地)라 하며, 나아가 어떤 인연으로 불지(佛地)라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큰 뜻[義]을 성취하여 일찍이 얻은 적이 없는, 세간을 벗어난 마음을 얻어 큰 환희(歡喜)를 일으키니, 그러므로 최초를 극희지라 한다. 일체의 미세한 파계도 멀리 벗어나니, 그러므로 두 번째를 이구지(離垢地)라 한다. 그가 얻는 삼마지와 문지다라니가 능히 무량한 지혜의 빛으로 의지를 삼으니, 그러므로 세 번째를 발광지(發光地)라 한다. 그가 얻는 보리분법을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태우되 지혜가 불길과 같으니, 그러므로 네 번째를 염혜지(焰慧地)라 한다. 그 보리분법을 방편으로 닦고 익혀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도 바야흐로 자재를 얻으니, 그러므로 다섯 번째를 극난승지(極難勝地)라 한다. 현전에 모든 행의 유전을 관찰하고 또 무상(無相)을 많이 닦는 작의(作意)가 바야흐로 현전하니, 그러므로 여섯 번째를 현전지(現前地)라 한다. 능히 멀리까지 결함 없고 틈이 없고 모습 없는 작의에 깨쳐 들어가 청정한 지위와 서로 가까워지니, 그러므로 일곱 번째를 원행지(遠行地)라 한다. 무상(無相)에서 무공용(無功用)을 얻는 까닭에 모든 모습 가운데서 현행하는 번뇌에 동요되지 않으니, 그러므로 여덟 번째를 부동지(不動地)라 한다. 일체 종류에 대하여 선법에 자재하며 걸림 없고 광대한 지혜를 얻으니, 그러므로 아홉 번째를 선혜지(善慧地)라 한다. 추중신(麤重身)의 넓이가 허공과 같고 법신의 원만함이 비유컨대 모두를 두루 덮을 수 있는 큰 구름과 같으니, 그러므로 열 번째를 법운지(法雲地)라 한다. 가장 지극히 미세한 번뇌와 앎의 장애를 영원히 끊고, 집착 없고 걸림없어서 일체 종류의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해 현전에 정등각(正等覺)을 얻는 까닭에 열한 번째를 불지(佛地)라 한다.”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모든 지위에서 다스려야 할 어리석음은 몇 가지나 있으며, 추중(麤重)은 몇 가지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모든 지위에서 다스려야 할 어리석음은 스물두 가지이고, 추중은 열한 가지이다. 이른바 초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보특가라(補特迦羅)와 법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나쁜 세계에 섞이고 물드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2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미세한 잘못의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갖가지 업의 갈래의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3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욕탐(欲貪)의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문지다라니를 원만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4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등지(等持)를 애착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법을 애착하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5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한결같은 작의로 생사를 버리고 등지려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한결같은 작의로 열반으로 향하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6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현전에 모든 행의 유전을 관찰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모습이 많이 현행하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7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한결같이 무상작의(無相作意)만 방편으로 삼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8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무상(無相)에 공용(功用)을 짓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모습에 대하여 자재하다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9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무량한 설법과 무량한 법과 글귀와 문자와 그 다음 다음의 지혜로운 변재에 대하여 다라니로 자재하다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말재주가 자재하다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10지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큰 신통이 있다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미세한 비밀에 깨달아 들어갔다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여래지(如來地)에 두 가지 어리석음이 있으니, 첫째는 일체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하여 극히 미세하게 집착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극히 미세함에 걸리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그 추중이 다스려야 할 것이다.

 

선남자여, 이 스물두 가지 추중을 말미암은 까닭에 모든 지위를 벌려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 얽매임을 벗어났다.”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매우 기특하고 매우 희유하며, 나아가 큰 이익과 큰 결과를 성취하여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능히 이와 같은 큰 어리석음의 그물을 깨뜨리고, 능히 이와 같은 큰 추중의 숲을 넘어 현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모든 지위는 몇 가지 수승함이 벌려 세운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대략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장 높은 의락(意樂)의 청정이요, 둘째는 마음의 청정이요, 셋째는 자비의 청정이요, 넷째는 저 언덕에 다다른 청정이요, 다섯째는 부처님을 뵙고 공양하며 받들어 섬기는 청정이요, 여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키는 청정이요, 일곱째는 생(生)의 청정이요, 여덟째는 위덕(威德)의 청정이다. 선남자여, 초지에도 가장 높은 의락의 청정과 나아가 위덕의 청정이 있고, 그 다음 다음의 모든 지위 나아가 불지에도 가장 높은 의락의 청정과 나아가 위덕의 청정이 있다. 마땅히 알라. 저 모든 청정은 점점 더 수승해진다. 그러나 불지에서만큼은 생의 청정은 제외된다. 또 초지에 있는 공덕은 그 위의 모든 지위에도 평등하게 모두 있지만, 마땅히 알라. 자기 지위에서 그 공덕이 수승한 것이다. 일체 보살의 10지의 공덕은 모두 그보다 나은 것이 있지만 불지의 공덕은, 마땅히 알라.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보살의 생(生)이 모든 유(有)의 생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네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극히 청정한 선근이 모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고의로 생각하여 간택하는 힘으로 취했기 때문이요, 셋째는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자신도 물듦이 없고 남의 물듦도 없애 주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모든 보살은 광대한 원[廣大願]과 묘한 원[妙願]과 수승한 원[勝願]을 행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네 가지 인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은 열반의 즐거운 머무름[樂住]을 잘 알 수 있고 속히 증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속히 증득할 수 있는 열반의 즐거움을 버리고는 반연하는 것도 없고[無緣] 기다리는 것도 없이[無待] 큰 원력을 일으킨다. 모든 유정에게 이익을 주려는 까닭에 긴 세월 온갖 고통 속에 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저 모든 보살은 광대한 원력과 미묘한 원력과 수승한 원력을 행한다고 말한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이 배워야 할 일은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보살이 배워야 할 일은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정려(靜慮)․혜(慧) 도피안(到彼岸:바라밀다)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배워야 할 일 중에서 몇 가지가 가장 높은 계학(戒學)에 포섭되는 것이며, 몇 가지가 가장 높은 심학(心學)에 포섭되는 것이며, 몇 가지가 가장 높은 혜학(慧學)에 포섭되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앞의 세 가지는 가장 높은 계학에 포섭되는 것이며, 정려 한 가지는 가장 높은 심학에 포섭되는 것이며, 혜는 가장 높은 혜학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진은 일체에 두루 적용된다고 나는 말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배워야 할 일 중에서 몇 가지가 복덕의 자량(資量)에 포섭되는 것이며, 몇 가지가 지혜의 자량에 포섭되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가장 높은 계학에 포섭되는 것이면 이를 복덕의 자량에 포섭되는 것이라 하고, 만일 가장 높은 혜학에 포섭되는 것이면 이를 지혜의 자량에 포섭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정진과 정려 두 가지는 일체에 두루 적용된다고 나는 말한다.”

 

“세존이시여, 여섯 가지 배워야 할 일 가운데서 보살은 어떻게 닦고 배워야 합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모습을 말미암아 닦고 배워야 한다. 첫째는 최초에 보살장(菩薩藏)의 바라밀다와 상응하는 미묘한 바른 가르침 가운데서 열심히 믿고 아는 것이요, 둘째는 다음에 열 가지 법의 행을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이룬 지혜로써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요, 셋째는 보리의 마음을 따라서 보호함이요, 넷째는 참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함이요, 다섯째는 틈이 없이 착한 품류를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이와 같이 배워야 할 일을 여섯 가지만 시설하셨습니까?”

 

“두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모든 번뇌를 물리치는 까닭이다. 마땅히 알라. 앞의 세 가지는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며, 뒤의 세 가지는 일체 번뇌를 물리친다. 앞의 세 가지가 모든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한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보살이 보시하는 까닭에 살림살이[資具]를 받아들여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며, 계행을 지니는 까닭에 손해와 핍박과 어지럽힘을 행하지 않고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며, 인욕하는 까닭에 저들이 해를 끼치고 핍박하고 어지럽히더라도 능히 견디고 참고 받아들여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한다. 뒤의 세 가지가 모든 번뇌를 물리친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정진하는 까닭에 아직 일체 번뇌를 영원히 항복하지 못했고 아직 일체 수면을 없애지 못하였을지라도 능히 용맹하게 모든 착한 품류를 닦아서 저 모든 번뇌가 착한 품류의 가행(加行)을 흔들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정려인 까닭에 번뇌를 영원히 항복 받고, 반야인 까닭에 수면을 영원히 없앤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나머지 네 가지 바라밀다를 시설하셨습니까?”

 

“선남자여, 앞의 여섯 가지 바라밀다와 함께 돕는 짝[助伴]이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은 앞의 세 가지 바라밀다에 포섭되는 유정에 대하여 모든 일로 포섭하는 방편선교(方便善巧)로 그들을 받아들여 착한 품류에 안치(安置)한다. 그러므로 나는 방편선교(方便善巧)바라밀다는 앞의 세 가지와 함께 돕는 짝이 된다고 말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현전의 법에 대하여 번뇌가 많은 까닭에 틈이 없는 수행을 견딜 능력이 없고, 약하고 힘없는 의락인 까닭에 또 낮은 세계의 승해인 까닭에 안으로 마음의 머무름[心住]을 견딜 능력이 없으며, 보살장을 듣지도 이를 반연해 잘 닦고 익히지도 못하는 까닭에 그 정려(靜慮)가 능히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는 곧 적은 부분의 좁고 못난 복덕 자량이라도 받아들이고 오는 세상의 번뇌를 가볍고 적어지게 하기 위해 마음으로 바른 원[正願]을 세워야 한다. 이런 것을 원(願)바라밀다라 한다. 이 원을 말미암는 까닭에 번뇌가 적어지고 엷어져 정진을 닦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원바라밀다는 정진(精進)바라밀다와 더불어 돕는 짝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선사(善士)를 가까이하여 바른 법을 듣고 이치와 같게 뜻을 짓는다면, 이 인연으로 힘없는 의락을 굴려 수승한 의락을 이루며 또한 높은 세계의 승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역(力)바라밀이라 한다. 이 힘을 말미암는 까닭에 안으로 마음의 머무름[心住]을 견디는 능력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역바라밀다는 정려(靜慮)바라밀다와 더불어 돕는 짝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보살장을 이미 듣고 이에 반연해 잘 닦고 익히는 까닭에 능히 정려를 일으킨다면, 이러한 것을 지(智)바라밀다라 한다. 이 지혜에 의지하는 까닭에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를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지바라밀다는 혜(慧)바라밀다와 더불어 돕는 짝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씀하시면서 이런 차례를 두셨습니까?”

 

“선남자여, 능히 다음 다음으로 이끌어 냄의 의지가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이 만일 몸과 재물에 대하여 돌아보거나 인색함이 없다면 곧 청정한 금계(禁戒)를 받아 지닐 수 있고, 금계를 보호하기 위해 곧 인욕(忍辱)을 닦고, 인욕을 닦고는 능히 정진을 내고, 정진을 일으키고는 능히 정려를 성취하고, 정려를 갖추고는 곧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바라밀다를 이와 같은 차례로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바라밀다에는 각각 몇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각각 세 가지가 있다. 보시의 세 가지란, 첫째는 법의 보시요, 둘째는 재물의 보시요, 셋째는 두려움 없는 보시이다. 계의 세 가지란, 첫째는 더욱 착하지 못함을 버리는 계[轉捨不善戒]요, 둘째는 더욱 착함을 내는 계[轉生善戒]요, 셋째는 더욱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는 계[轉生饒益有情戒]이다. 인욕의 세 가지란, 첫째는 원수와 해침을 참는 인욕[耐怨害忍]이요, 둘째는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욕[安受苦忍]이요, 셋째는 법을 자세히 살피는 인욕[諦察法忍]이다. 정진의 세 가지란, 첫째는 갑옷을 입는 정진[被甲精進]이요, 둘째는 더욱 선법의 가행을 내는 정진[轉生善法加行精進]이요, 셋째는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는 가행의 정진[饒益有情加行精進]이다. 정려의 세 가지란, 첫째는 분별없는 적정과 지극한 적정으로 허물이 없는 까닭에 번뇌의 괴로움을 다스리고 즐거움에 머무르는 정려[樂住靜慮]요, 둘째는 공덕을 이끌어 내는 적정[引發饒益有情精慮]이요, 셋째는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함을 이끌어 내는 정려[引發饒益有情精慮]이다. 지혜의 세 가지란, 첫째는 세속제를 반연하는 지혜요, 둘째는 승의제를 반연하는 지혜요, 셋째는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함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바라밀다를 바라밀다라 부릅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까닭이요, 둘째는 돌아보고 생각함이 없는 까닭이요, 셋째는 죄와 허물이 없는 까닭이요, 넷째는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 다섯째는 바르게 회향하는 까닭이다.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까닭이란, 이른바 바라밀다와 어긋나는 모든 일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돌아보고 생각함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일체 바라밀다의 모든 과보와 이숙(異熟), 그리고 은혜를 갚는 가운데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죄와 허물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이러한 바라밀다에서 빈틈없이 잡되고 물든 법과 그릇된 방편을 벗어나는 것이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바라밀다에서 말과 같이 자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회향한다는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이 지은 바와 모든 바라밀다로써 위없는 큰 보리의 과보를 돌이켜 구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바라밀다와 어긋나는 모든 것입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 일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재물과 부귀에 자재하길 원하고 모든 욕락(欲樂)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또는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둘째는 좋아하는 것에 따라 몸과 말과 뜻을 마음대로 하고 현행하는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셋째는 다른 이가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김을 견디지 못하는 가운데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넷째는 부지런히 닦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는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다섯째는 세간의 잡되고 어지러운 행으로 떠들썩한 곳에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여섯째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말하고 희론하는 것을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일체 바라밀다에는 어떤 과보와 이숙(異熟)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여기에도 또한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재물과 부귀를 얻음이요, 둘째는 좋은 세계에 태어남이요, 셋째는 원수가 없어지고 망가지는 일이 없어지며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많아짐이요, 넷째는 중생의 주인이 됨이요, 다섯째는 몸에 번뇌와 해로움이 없음이요, 여섯째는 가문의 번창이다.”

 

“세존이시여, 바라밀다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잡염법(雜染法)이란 무엇입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대략 네 가지 가행을 말미암으니, 첫째는 비심(悲心)이 없는 가행인 까닭이요, 둘째는 이치와 같지 않은 가행인 까닭이요, 셋째는 영원하지 않은 가행인 까닭이요, 넷째는 신중하지 못한 가행인 까닭이다. 이치와 같지 않은 가행이란, 이른바 다른 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다른 바라밀다에서는 멀어지고 잃어버리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그릇된 방편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바라밀다로써 중생을 넉넉하고 이롭게 할 때에 재물로 포섭하여 중생을 넉넉하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 곧 기쁨과 만족함을 삼을 뿐, 그들로 하여금 착하지 못한 곳을 벗어나 착한 곳에서 지내게 하지는 못하면, 이런 것을 그릇된 방편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중생에게 이런 일만 하는 것으로는 진실로 넉넉하고 이롭게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더러운 똥은 많건 적건 끝내 향기롭고 맑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아서 중생은 행고(行苦)를 말미암는 까닭에 그 성품이 괴로울 것이다. 다만 재물로써 잠시 넉넉하고 이롭게 하여 즐겁게 하는 것을 방편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묘한 선법(善法) 가운데 편안히 처하게 하는 것이라야 바야흐로 제일가는 넉넉하고 이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일체 바라밀다에는 몇 가지 청정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나는 바라밀다에 위의 다섯 가지 모습을 제하고 따로 청정이 있다고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와 같은 모든 일의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에 의지해 바라밀다의 청정한 모습을 말하리라. 총합하여 일체 바라밀다의 청정한 모습을 말하자면, 마땅히 알라. 일곱 가지가 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이 이 모든 법에서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이 모든 법을 보고는 집착을 내지 않음이요, 셋째는 이러한 모든 법에 의혹을 내지 않음이니, 이른바 큰 보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등의 의혹이요, 넷째는 끝내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고 경멸하는 일이 없음이요, 다섯째는 끝내 교만하거나 방일하지 않음이요, 여섯째는 끝내 적은 것을 얻고 곧 기뻐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지는 않음이요, 일곱째는 끝내 이 모든 법을 말미암아 남을 질투하거나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음이다.

 

구별하여 일체 바라밀다의 청정한 모습을 말하자면 또한 일곱 가지가 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이른바 모든 보살은 내가 말하는 것처럼 일곱 가지 보시의 청정한 모습을 수순하고 수행한다. 첫째는 베푸는 물건이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둘째는 계행이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셋째는 보는 것이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넷째는 마음이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다섯째는 말이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여섯째는 지혜가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함이요, 일곱째는 때[垢]가 청정함을 말미암아 청정한 보시를 행하니, 이것을 일곱 가지 보시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또 모든 보살은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제정한 율의(律儀)를 잘 알며, 범한 것을 벗어남을 잘 알며, 영원한 시라[常尸羅]ㆍ견고한 시라[堅固尸羅]ㆍ항상 짓는 시라[常作尸羅]ㆍ항상 굴리는 시라[常轉尸羅]를 갖추고, 배울 만한 모든 것을 배우니, 이것을 일곱 가지 계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자신에게 있는 업과(業果)의 이숙(異熟)을 깊이 의지하고 믿는다면, 이익이 되지 않는 어떤 일이 현재 앞에 나타날지라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또 반항하여 꾸짖지도 않으며 성내지 않고 때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희롱하지 않으며, 갖가지 불이익으로 반대로 해를 끼치지 않으며, 원수 맺을 생각을 품지 않으며, 타이르고 가르칠 때는 성내거나 괴롭게 하지 않으며, 또한 남이 와서 타이르고 가르치기를 기다리지 않으며, 두려움이나 더러운 애착 때문에 인욕을 행하지는 않으며, 은혜를 알게 하려고 용서하지는 않으니, 이것을 일곱 가지 인욕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정진의 평등한 성품에 통달한다면, 용맹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까닭에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남을 능멸하지 않으며, 큰 세력을 갖추고, 큰 정진을 갖추고, 견디는 능력이 있고, 견고하고 용맹하며, 모든 선법에서 끝내 멍에를 벗지 않으니, 이것을 일곱 가지 정진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에게 모습에 잘 통달하는 삼마지정려(三摩地靜慮)가 있고, 원만한 삼마지정려가 있고, 구분(俱分) 삼마지정려가 있고, 움직이고 구르는 삼마지정려가 있고, 의지할 바가 없는 삼마지정려가 있고, 잘 닦고 다스리는 삼마지정려가 있고, 보살장을 들은 인연으로 닦고 익힌 무량한 삼마지정려가 있으면, 이것을 일곱 가지 정려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더함[增益]과 줄임[損減] 두 가지를 멀리 벗어나 중도를 행하면 이를 지혜라 한다. 이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해탈문의 뜻을 여실하게 아니, 이른바 공(空)․무원(無願)․무상(無相)의 3해탈문(解脫門)이다. 자성의 뜻을 여실하게 아니, 이른바 변계소집(遍計所執)․의타기(依他起)․원성실(圓成實)의 3자성(自性)이다. 무자성의 뜻을 여실하게 아니, 이른바 상(相)․생(生)․승의(勝義)의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이다. 세속제의 뜻을 여실하게 아니, 이른바 5명처(明處)이다. 승의제의 뜻을 여실하게 아니, 이른바 일곱 가지 진여이다. 또 분별없고, 희론을 여의고, 순일하여 현재의 세계에 많이 머무는 까닭에, 무량한 총법으로 소연을 삼는 까닭에, 그리고 비발사나(毘婆舍那)인 까닭에 능히 법과 법을 따르는 행[隨法行]을 이룩한다. 이것을 일곱 가지 지혜의 청정한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다섯 모습에는 각각 어떤 업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그 모습에 다섯 가지 업이 있으니, 이른바 모든 보살은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까닭에 현재의 법 가운데서 닦고 익히는 바라밀다에 항상 신중하게 가행을 부지런히 닦아 방일함이 없으며, 돌아보고 생각함이 없는 까닭에 미래에 방일치 않는 원인을 받아들이며, 죄와 허물이 없는 까닭에 가장 훌륭한 원만함․가장 훌륭한 청정함․가장 깨끗한 바라밀다를 바르게 닦고 익히며, 분별이 없는 까닭에 방편선교(方便善巧)바라밀다가 속히 원만해지며, 바르게 회향(廻向)하는 까닭에 태어나는 곳마다 바라밀다와 사랑스러운 모든 과보와 이숙이 모두 다함이 없게 되고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얻게 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 바라밀다에서 무엇이 가장 광대하며, 무엇이 더러움이 없으며, 무엇이 가장 밝고 성하며, 무엇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며, 무엇이 가장 청정합니까?”

 

“선남자여,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성품과 돌아보고 아낌이 없는 성품과 바르게 회향하는 성품을 광대하다고 하며, 죄와 허물없는 성품과 분별없는 성품을 더러움이 없다고 하며, 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을 가장 밝고 성하다고 하며, 이미 물러나지 않는 법의 지위에 든 것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 하며, 10지에 포섭되거나 불지에 포섭된다면 가장 청정하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보살이 얻는 바라밀다의 모든 사랑스러운 과보와 모든 이숙(異熟)은 항상 다함이 없고, 바라밀다 또한 다함이 없습니까?”

 

“선남자여, 차례차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끊어지는 틈 없이 닦고 익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이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바라밀다로 얻는 사랑스러운 모든 과보와 이숙이 아닌, 바라밀다 자체를 깊이 믿고 사랑하고 즐기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바라밀다가 가장 높은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인 까닭이요, 둘째는 바라밀다가 구경이어서 자기와 남 일체를 넉넉하고 이롭게 하는 원인이 되는 까닭이요, 셋째는 바라밀다가 오는 세상의 그 사랑스러운 과보와 이숙의 원인인 까닭이요, 넷째는 바라밀다가 모든 잡염이 의지하는 대상이 아닌 까닭이요, 다섯째는 바라밀다가 필경에 변하고 망가지는 법이 아닌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일체 바라밀다에는 각각 몇 가지 가장 수승한 위력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일체 바라밀다에 각각 네 가지의 가장 수승한 위덕이 있다. 첫째 이 바라밀다를 바르게 수행할 때 다스려야 할 인색함[慳悋]․계율을 범함[犯戒]․마음의 분함[心憤]․게으름[懈怠]․어지러움[散亂]․소견의 갈래[見趣] 따위를 버릴 수 있다. 둘째는 이를 바르게 수행할 때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의 진실한 자량을 얻을 수 있다. 셋째는 이를 바르게 수행할 때 현재의 법 가운데서 스스로 유정을 섭수(攝受)하고 이익을 줄 수 있다. 넷째는 이를 바르게 수행할 때 미래의 생에서 광대하고 다함없고 사랑스러운 모든 과보와 이숙을 얻는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일체 바라밀다는 어떤 인과 어떤 과보와 어떤 의리(義利)가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와 같은 일체 바라밀다는 큰 자비로 인을 삼고, 미묘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과보의 이숙과 일체 유정을 넉넉하고 이롭게 함으로써 과를 삼고, 위없이 광대한 보리를 원만케 함이 큰 의리가 된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 다함없는 재물과 보배를 구족하고 큰 자비를 성취하였다면, 무슨 인연으로 세간에 현전한 중생 중에 빈궁한 자들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는 모든 중생 스스로의 업의 허물일 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보살은 항상 그들을 넉넉하고 이롭게 할 마음을 품고 또 항상 다함없는 재물과 보배를 구족하였으니, 만일 모든 중생 스스로 악한 업의 장애를 없애기만 한다면 어찌 세간에 빈궁한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비유컨대 아귀가 큰 번열과 갈등 때문에 그 몸이 핍박되어 큰 바닷물도 모두 메마른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바다의 허물이 아니라 아귀 스스로의 업의 허물일 뿐이다. 이와 같아서 보살이 베푸는 재물과 보배는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허물이 없으니, 모든 중생 스스로의 업의 허물일 뿐이다. 마치 아귀 스스로 악한 업의 힘으로 과보를 없애는 것과 같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떤 바라밀다로써 일체 법의 무자성성(無自性性)을 취합니까?”

 

“선남자여, 반야바라밀다로써 능히 모든 법의 무자성성을 취한다.”

 

“세존이시여, 만일 반야바라밀다로써 모든 법의 무자성성을 취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유자성성(有自性性)은 취하지 않습니까?”

 

“선남자여, 나는 끝내 무자성성으로써 무자성성을 취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무자성성은 모든 문자를 떠나 스스로 안에서 증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과 문자를 버리고는 설명하고 선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반야바라밀다가 능히 모든 법의 무자성성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바라밀다(波羅蜜多)와 가까운 바라밀다[近波羅蜜多]와 큰 바라밀다[大波羅蜜多]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바라밀다이며, 무엇이 가까운 바라밀다이며, 무엇이 큰 바라밀다입니까?”

 

“선남자여, 만약 모든 보살이 무량한 시간을 지나면서 보시 따위를 닦으면 선법을 성취하지만 모든 번뇌가 여전히 현행한다. 아직 조복하진 못했지만 그것들을 조복해 나가니, 이른바 수승한 해행지(解行地)에서 연(輭)과 중(中)의 승해가 구르는 시기이다. 이를 바라밀다라 한다. 다시 무량한 시간 동안 보시 따위를 수행하면 더욱 점점 높아져서 선법을 성취하지만 모든 번뇌가 여전히 현행한다. 그러나 조복할 수 있고 그것들에게 조복되지는 않으니, 이른바 초지 이상이다. 이를 가까운 바라밀다라 한다. 다시 무량한 시간 동안 보시 따위를 수행하면 다시 더욱 높아져서 선법을 성취하여 일체 번뇌가 모두 나타나지 않으니, 이른바 8지 이상이다. 이를 큰 바라밀다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지위 가운데 번뇌수면(煩惱隨眠)은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짝을 해치는 수면[害伴隨眠]이니 이른바 앞의 다섯 지위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모든 함께 나지 않은 현행의 번뇌는 함께 난 번뇌의 현행을 돕는 짝이 된다. 그는 이때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으니, 그러므로 짝을 없애는 수면이라 한다. 둘째는 약하고 못난 수면[羸劣隨眠]이니 이른바 제6지와 제7지 가운데 있다. 미세한 현행이 만일 닦음[修]에 항복되면 다시는 현행하지 않는 까닭이다. 셋째는 미세한 수면[微細隨眠]이니, 이른바 제8지 이상에 있다. 이 이상에서는 일체 번뇌가 다시는 현행하지 않고 오직 앎의 장애만이 있어서 의지가 되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수면은 몇 가지 추중(麤重)이 끊어져야 나타납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를 말미암는다. 이른바 피부[皮]에 있는 추중을 끊은 까닭에 앞의 두 가지를 나타내고, 다시 살에 있는 추중을 끊은 까닭에 세 번째를 나타낸다. 만일 뼈에 있는 추중을 끊는다면, 나는 영원히 일체 수면을 여의었다고 말하니 그 지위는 불지에 해당한다.”

 

“세존이시여, 얼마나 많은 셀 수 없는 겁을 지나야 이와 같은 추중을 끊을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삼대불가수겁(三大不可數劫)이나 무량겁(無量劫)을 지나야 하니, 이른바 연․월․보름․낮․밤․한나절․반나절․수유(須臾)․순식간․찰나 등의 분량과 겁의 수효로는 셀 수 없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이 모든 지위에서 일으키는 번뇌에는 어떤 모습과 어떤 허물과 어떤 덕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더러움이 없는 모습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보살은 초지 가운데서 확실히 일체 법의 법계에 대해 이미 잘 통달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은 알면서도 바야흐로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지,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더러움이 없는 모습이라 한다. 자신의 몸 가운데서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허물도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은 번뇌를 일으켜 유정의 세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끊게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무량한 공덕이 있다.”

 

“매우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위없는 보리에는 이와 같이 큰 공덕의 이익이 있어 모든 보살이 일으키는 번뇌로 하여금 오히려 일체 유정이나 성문 그리고 독각의 선근보다 수승하게 하니, 하물며 그 밖의 무량한 공덕이겠습니까?”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성문승이나 대승도 오직 일승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나는 저 성문승 가운데서 갖가지 모든 법의 자성을 널리 말하였으니, 이른바 5온(蘊)과 혹은 안의 6처(處)와 혹은 밖의 6처이다. 대승 가운데서도 바로 그와 같은 법들을 설하였으니, 동일한 법계이며 동일한 이취(理趣)인 까닭에 나는 승(乘)의 차별된 성품을 말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혹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뜻에서 허망하게 분별하고는 한 무리는 더하고, 한 무리는 줄이면서 모든 승의 차별된 도리에 대해 서로 어긋난다고 말하며, 이렇듯 더욱더욱 서로가 논쟁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것을 이 가운데의 비밀한 뜻이라고 한다.”

 

그때 세존께서 다시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지위의 섭수와 생각과 다스려야 할 것

수승함과 생(生)과 원(願)과 모든 배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대승을 의지하여

이것을 잘 닦으면 대각을 이루리라.

 

모든 법의 갖가지 성품을 널리 말하고

그 모두가 한 이취임을 또 말하니

낮은 승(乘)이라 하고 높은 승이라 하기에

그러므로 나는 승에 다른 성품 없다 하노라.

 

말 그대로 뜻에서 허망하게 분별하여

어떤 이는 더하고 어떤 이는 덜어내

이 두 가지는 서로 어긋난다고 하며

어리석은 자들 분별하며 다툼을 일으킨다.

 

그때 관자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해심밀 법문 가운데서 이를 어떤 교법이라 하며, 제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는 ‘제지바라밀요의교(諸地波羅密了義敎)’라 하며, 이 제지바라밀요의교로 그대는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이 제지바라밀요의교를 말씀하셨을 때, 그 큰 모임 가운데 있던 7만 5천 보살이 모두 보살의 대승광명삼마지(大乘光明三摩地)를 얻었다.

 

 

 

8. 여래성소작사품(如來成所作事品) 

 

 

그때 만수실리(曼殊室利)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의 법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부처님께서 만수실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지위의 바라밀다에서 벗어남[出離]을 잘 닦고 전의(轉依)를 원만히 이루면 이를 여래 법신의 모습이라 한다. 마땅히 알라. 이 모습은 두 가지 까닭으로 생기거나 의논할 수 없으니 희론(戲論)이 없는 까닭이며, 무위(無爲)인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희론에 집착하며, 하는 바가 있다고 여긴다.”

 

“세존이시여, 성문이나 독각이 얻는 전의도 법신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법신이라 하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무슨 몸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해탈신(解脫身)이라 한다. 해탈신에 의지하는 까닭에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모든 여래는 평등하고도 평등하다고 말하며, 법신을 말미암는 까닭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며, 여래의 법신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무량한 공덕과 가장 수승한 차별이 산수(算數)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만수실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어떻게 하면 여래의 일어나심[生起]을 알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만수실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일체 여래의 화신으로 짓는 업은 세계가 일어남과 같으며, 일체 종류는 여래의 공덕으로 장엄한 것이어서 머무름으로 모습을 삼는다. 마땅히 알라. 화신의 모습은 일어남이 있고, 법신의 모습은 일어남이 없다.”

 

“세존이시여, 화신을 나타내는 방편선교를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두루 삼천대천 불국토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가장 높은 왕가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큰 복전(福田)의 집안에, 동시에 태에 들어 탄생하고 자라나 장가들고 출가하여 고행함을 나타내고, 고행을 버리고는 등정각을 이룸을 차례로 나타내는 것을 여래가 화신을 나타내는 방편선교라 한다.”

 

“세존이시여, 일체 여래의 몸에 있는 말소리[言音]에는 무릇 몇 가지 차별이 있어서, 이 말소리에 의지해 교화할 유정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이면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자면 이를 반연하고 경계로 삼아 속히 해탈을 얻게 하십니까?”

 

“선남자여, 여래의 말소리에는 간략히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계경(契經)이요, 둘째는 조복(調伏)이요, 셋째는 본모(本母)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계경이며, 무엇이 조복이며, 무엇이 본모입니까?”

 

“만수실리여, 만일 이곳에서 내가 포섭하는 일[攝事]에 의지해 모든 법을 나타내면 이것을 계경이라 한다. 이른바 네 가지 일에 의지하며, 아홉 가지 일에 의지하며, 혹은 스물아홉 가지 일에 의지한다. 무엇이 네 가지 일인가? 첫째는 듣는 일[聞事]이요, 둘째는 귀의하는 일[歸趣事]이요, 셋째는 수행하는 일[修學事]이요, 넷째는 보리의 일[菩提事]이다.

 

무엇이 아홉 가지 일인가? 첫째는 유정을 시설하는 일[施設有情事]이요, 둘째는 그가 수용하는 일[彼受用事]이요, 셋째는 그의 일어나는 일[彼起事]이요, 넷째는 그가 생기고 머무르는 일[彼生住事]이요, 다섯째는 그의 더럽고 깨끗한 일[彼染淨事]이요, 여섯째는 그를 차별하는 일[彼差別事]이요, 일곱째는 능히 설명하는 일[能宣說事]이요, 여덟째는 널리 설명되어진 일[所宣說事]이요, 아홉째는 모든 무리가 모이는 일[衆會聚事]이다.

 

무엇이 스물아홉 가지 일인가? 잡염품(雜染品)에 의지해 모든 행을 포섭하는 일이요, 그가 차례차례 따라서 움직이는 일이요, 이에 대하여 보특가라(補特迦羅)라는 생각을 짓고는 미래 세상에 윤전할 원인이 되는 일이요, 이러한 생각을 짓고는 미래 세상에 윤전할 원인이 되는 일이요, 청정한 품류에 의지해 생각[念]을 소연에 매어 두는 일이요, 이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요, 마음이 편안히 머무는 일이요, 현전의 법에 즐겁게 머무는 일이요, 일체 괴로운 반연을 초월하는 방편의 일이요, 그가 두루 아는 일이다. 이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전도(顚倒)를 두루 아는 것의 의지할 처소가 되는 까닭이며, 유정의 망상에 의지하되 밖으로 유정들의 삿된 행을 두루 아는 것의 의지할 처소가 되는 까닭이며, 안으로 증상만(增上慢)을 여의는 것을 두루 아는 것의 의지할 처소가 되는 까닭이다. 또한 수행이 의지하는 곳의 일이요, 증득함을 짓는 일이요, 닦고 익히는 일이요, 그를 견고히 하는 일이요, 그의 행상이 되는 일이요, 그의 반연이 되는 일이요, 이미 끊은 것과 아직 끊지 못한 것을 관찰하되 공교로운 일이요, 그가 산란하는 일이요, 그가 산란치 않은 일이요, 고생스럽게 가행을 닦고 익히는 일이요, 수승한 이익을 닦고 익히는 일이요, 그가 견고한 일이요, 성스러운 행을 포섭하는 일이요, 성스러운 권속을 포섭하는 일이요, 진실을 통달하는 일이요,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요, 좋은 설법인 비나야(毘奈耶) 가운데서 세간의 바른 소견뿐 아니라 일체 외도가 얻는 바른 소견의 정수리까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이것들에서 닦지 않고 물러나는 일이 있는데, 잘 설해진 비나야 가운데서 닦고 익히지 않기 때문에 물러난다고 말한 것이지, 소견에 허물이 있어서 물러난다고 한 것은 아니다.

 

만수실리여, 만일 이곳에서 내가 성문이나 모든 보살들을 의지해 별해탈(別解脫)과 별해탈에 상응하는 법을 나타내면 이를 조복(調伏)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보살의 별해탈은 몇 가지 모습에 포섭되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일곱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받는 궤칙(軌則)을 말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바라이[他勝]에 수순함을 설명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헐고 범함에 수순함을 설명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범함이 있는 자성을 말하는 까닭이요, 다섯째는 범함이 없는 자성을 말하는 까닭이요, 여섯째는 범한 것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까닭이요, 일곱째는 계율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까닭이다.

 

만수실리여, 만일 이곳에서 내가 열한 가지 모습으로써 결단하고 분별하여 모든 법을 나타내면 이를 본모(本母)라 한다. 무엇이 열한 가지 모습인가? 첫째는 세속의 모습이요, 둘째는 승의(勝義)의 모습이요, 셋째는 보리분법의 소연의 모습이요, 넷째는 그 행의 모습이요, 다섯째는 자성의 모습이요, 여섯째는 그 결과의 모습이요, 일곱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어 보이는 모습이요, 여덟째는 그것을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요, 아홉째는 그것에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요, 열째는 그것의 허물되는 모습이요, 열한째는 그것의 수승하고 이로운 모습이다.

 

세속의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특가라를 말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변계소집의 자성을 말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모든 법의 작용과 사업을 말하는 까닭이다.

 

승의의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일곱 가지의 진여를 말하는 까닭이다.

 

보리분법의 소연의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두루 일체 종류의 아는 바 일을 말하는 까닭이다.

 

행의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여덟 가지 관행을 말하는 까닭이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자세하고 진실한 까닭이요, 둘째는 편안히 머무는 까닭이요, 셋째는 허물이 되는 까닭이요, 넷째는 공덕이 되는 까닭이요, 다섯째는 이취(理趣)인 까닭이요, 여섯째는 윤전하는 까닭이요, 일곱째는 도리(道理)인 까닭이요, 여덟째는 총(總)과 별(別)인 까닭이다. 자세하고 진실함이란, 이른바 모든 법의 진여이다. 편안히 머무른다는 것은 보특가라를 세우거나 혹은 모든 법의 변계소집의 자성을 세우거나 혹은 한결같이 분별하고 반문(反問)하고 기억하여 둠을 세우거나 혹은 숨었거나 드러난 기별(記別)의 차별을 세우는 것이다. 과실(過失)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잡염법(雜染法)에는 무량한 부분으로 차별된 허물이 있다는 것이다. 공덕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청정한 법에는 무량한 부문으로 차별된 승리(勝利)가 있다는 것이다. 이취란 마땅히 알라.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참뜻[眞義]의 이취요, 둘째는 증득(證得)의 이취요, 셋째는 가르치고 인도[敎導]하는 이취요, 넷째는 양극단을 떠나는 이취요, 다섯째는 불가사의한 이취)의 이취다. 윤전(流轉)이란, 3세(世)와 3유위(有爲)의 모습과 4연(緣)이다. 도리란 마땅히 알라.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관하여 상대하는 도리[觀對道理]요, 둘째는 작용하는 도리[作用道理]요, 셋째는 깨침을 이루는 도리[證成道理]요, 넷째는 법이 그러한 도리[法爾道理]이다. 관하여 상대하는 도리란, 이른바 인(因)이나 혹은 연(緣)이 능히 모든 행을 내며 또 따르는 말[隨說]을 일으키니, 이것이 관하여 상대하는 도리이다. 작용의 도리란 이른바 인이나 혹은 연이 능히 모든 법을 얻거나 혹은 능히 이루거나 혹은 다시 내고, 모든 업의 작용을 지으니 이것이 작용의 도리이다. 깨달음을 이루는 도리란 이른바 인이나 혹은 연이 능히 세우고 말하고 표시한 뜻을 성립시키며 바르게 깨닫게 하니, 이것이 깨침을 이루는 도리이다. 또 이 도리에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청정함이요, 둘째는 청정치 못함이다. 다섯 가지 모양을 말미암아 청정이라 부르고, 일곱 가지 모양을 말미암아 청정치 못함을 말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모습에 의지해 청정이라 하는 것인가? 첫째는 현전에 보고 얻는 모습이요, 둘째는 현전에 보고 얻는 것이 의지하는 모습이요, 셋째는 같은 부류로 비유해 끌어들인 모습이요, 넷째는 원성실의 모습이요, 다섯째는 청정한 가르침의 모습이다. 현전에 보고 얻는 모습이란, 일체 행은 모두 무상(無常)의 성품이며, 일체 행은 모두 괴로운 성품이며, 일체 법은 모두 무아(無我)의 성품이니, 이는 세간에서 현량으로 얻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현전에 보고 얻는 모습이라 한다. 현전에 보고 얻는 것이 의지하는 모습이란, 일체 행은 모두 찰나의 성품이며, 다른 세상의 유(有)의 성품이며, 맑거나 맑지 못한 업이 없어지거나 망가지지 않는 성품이다. 그 의지하는 거칠고 무거운 성품은 현전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의 갖가지 차별은 갖가지 업에 의지해 현전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이 맑거나 맑지 못한 업으로써 의지를 삼는 것을 현전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현전에 보이지 않는 것도 헤아릴 수 있으니, 이런 것을 현전에 보고 얻는 것이 의지하는 모습이라 한다. 같은 부류로 비유해 끌어들인 모습이란, 이른바 안팎의 모든 행의 모임 가운데서 모든 세간이 함께 아는 것을 끌어들여 파악해야 할 나고 죽음을 비유하며, 모든 세간이 함께 아는 것을 끌어들여 파악해야 할 생(生) 따위의 갖가지 괴로운 모습을 비유하며, 모든 세간이 함께 아는 것을 끌어들여 파악해야 할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비유하며, 또 밖에서 모든 세간이 함께 아는 것을 끌어들여 파악해야 할 성하고 쇠퇴함을 비유한다. 이러한 것들을 같은 부류로 비유해 끌어들인 모습이라 한다. 원성실의 모습이란, 이른바 이와 같이 현전에 보고 얻는 모습과 현전에 보고 얻는 것이 의지한 모습과 혹은 같은 부류로 비유해 끌어들인 모습이 이루어 놓은 것에서 단정코 잘 이루니, 마땅히 알라. 이를 원성실의 모습이라 한다. 청정한 가르침의 모습이란, 일체지(一切智)를 가진 자가 말한 열반(涅槃)ㆍ구경(究竟)ㆍ적정(寂靜)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마땅히 알라. 청정한 가르침의 모습이라 한다. 선남자여, 이 다섯 가지 모습을 말미암는 까닭에 청정의 도리를 잘 관찰한다고 하니, 청정을 말미암아 닦고 익혀야 한다.”

 

만수실리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지(一切智)의 모습은 몇 가지라고 알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만일 세간에 출현하게 되면 일체지를 가졌다는 소문이 두루 들리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둘째 서른두 가지 대장부의 모습을 성취한다. 셋째 10력(力)을 구족하여 일체 의혹을 끊는다. 넷째 네 가지 두려움 없음[無畏]을 구족해 바른 법을 설하고, 일체 다른 말에 굴복되지 않으며, 능히 일체 삿된 희론을 항복받는다. 다섯째 좋은 설법인 비나야에서 8지성도(支聖道)와 네 가지 사문의 과[沙門果] 따위를 모두 현전에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아서 생(生)인 까닭이며, 모습인 까닭이며, 의혹을 끊는 까닭이며, 남에게 꺾이지 않고 능히 남을 항복시키는 까닭이니, 이러한 다섯 가지를, 마땅히 알라. 일체 지혜의 모습이라 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아서 깨침을 이루는 도리는 현량(現量)에 말미암는 까닭에, 비량(比量)에 말미암는 까닭에, 성교량(聖敎量)에 말미암는 까닭에 다섯 가지 모습을 말미암아 청정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일곱 가지 모습에 의지해 청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이 밖의 같은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此餘同類可得相]이요, 둘째는 이 밖의 다른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此餘異類可得相]이요, 셋째는 일체 같은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一切異類可得相]이요, 다섯째는 다른 무리의 비유로 얻는 모습[異類譬喩所得相]이요, 여섯째는 원성실의 모습[圓成實相]이요, 일곱째는 착하거나 청정치 못한 가르침의 모습[非善淸淨言敎相]이다. 만일 일체 법이 의식(意識)으로써 알 수 있는 성품이라면 이를 일체 같은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이라 한다. 만일 일체 법이 모습과 성품, 업과 법, 원인과 결과가 다른 모습이라면 이런 하나하나의 다른 모습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결정되어지고 점점 전개될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일체 다른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이라 한다. 선남자여, 만일 이 밖의 같은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이나 또는 비유 가운데 일체 다른 무리가 있다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결정되지 못한 까닭에 이를 원성실이 아닌 모습이라 한다. 또 이 밖의 같은 무리로 가히 얻는 모습이나 비유 가운데 일체 같은 무리의 모습이 있다면 이 인연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결정되지 못한 까닭에 또한 원성실이 아닌 모습이라 한다. 원성실이 아닌 까닭에 청정한 도리를 잘 관찰하지 못하며,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닦고 익히지 못한다. 만일 다른 무리의 비유로 이끌어진 모습이나 혹은 착하고 청정하지 않은 가르침의 모습이라면, 마땅히 알라. 체성이 모두 청정하지 않다. 법이 그러한 도리[法爾道理]란,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건 세상에 출현하지 않건 법의 성품은 편안히 머물고 법은 법계에 머문다. 이를 법이 그러한 도리라 한다. 총(總)과 별(別)이란, 이른바 먼저 총합하여 한 구절로 법을 말하고, 다음다음 이어가며 모든 구절을 차별하고 분별하고 규명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자성의 모습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유의 행[有行]과 유의 반연[有緣]에 있는 능취(能取)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이른바 염주(念住) 따위이니, 이를 자성의 모습이라 한다.

 

그 결과의 모습이란, 이른바 세간 밖의 모든 번뇌가 끊어짐과 그리고 이끌어낸 바 세간과 세간 밖의 모든 과보의 공덕이니, 이를 그 결과의 모습이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어 보이는 모습이란, 이른바 그것에 대하여 해탈지(解脫智)로써 받아들이고 널리 남에게 말하여 열어 보이는 것이니, 이를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어 보이는 모습이라 한다.

 

그것을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란, 이른바 보리분법 닦는 것을 장애하는 모든 더럽고 오염된 법이니, 이를 그것을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라 한다.

 

그것에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란, 이른바 그것을 많이 짓는 법이니, 이를 그것에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라 한다.

 

그것의 허물되는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곧 저 모든 장애하는 법에 있는 허물이니, 이를 그것의 허물되는 모습이라 한다.

 

그것의 수승하고 이로운 모습이란, 마땅히 알라. 모든 수순하는 법에 있는 공덕이니, 이를 그것의 수승하고 이로운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모든 보살을 위해 계경과 조복과 본모와 외도와는 다른 다라니의 뜻을 설해 주십시오. 외도와는 다른 이 다라니의 뜻에 의지해 모든 보살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의 매우 깊고 비밀한 뜻에 들어가게 하소서.”

 

“선남자여,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외도와는 같지 않은 다라니의 뜻을 말해, 모든 보살들이 내가 말한 비밀한 뜻과 말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리라. 선남자여, 잡염법이건 청정한 법이건 나는 일체가 모두 작용이 없고, 또한 모두 보특가라가 없다고 말한다. 일체 종류는 모두 행위를 떠난 까닭에 더러운 법이 먼저는 물들었다가 뒤에 맑아지는 것이 아니며, 청정한 법이 뒤에는 청정하고 먼저는 물든 것이 아니다. 범부와 중생은 추중신(麤重身)에서 모든 법과 보특가라의 자성과 차별을 집착하고, 수면(隨眠)과 망견(望見)으로 반연을 삼는 까닭에 나[我]와 내 것[我所]을 계교한다. 이 망견에 의지해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냄새 맡고, 내가 먹고, 내가 물들고, 내가 맑아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부류는 삿된 가행을 굴리는 것이다. 만일 여실히 아는 자라면 곧 추중신을 영원히 끊고, 일체 번뇌가 머물지 않는 최고의 청정함을 얻어 모든 희론을 벗어나 의지함이 없고 가행(加行)이 없으리라.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것이 외도와 같지 않은 다라니의 뜻을 대략 말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더럽고 청정한 일체의 법은

모두 작용도 삭취취(數取趣:보특가라)도 없나니

그 까닭에 말하노라, 해야 할 바 떠나라고.

더러움과 청정함은 앞뒤가 없다.

 

추중신에서 수면과 망견으로

반연해 나와 내 것 계교하고는

그 까닭에 함부로 말하네, 내가 본다고.

내가 먹고 내가 하고 내가 더럽고 깨끗하다고.

 

이와 같음을 여실히 깨닫는 자는

이에 추중신을 영원히 끊을 수 있으리니

더러움도 깨끗함도 희론도 없어

의지하지 않고 가행(加行)도 없으리라.

 

그때 만수실리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여래의 마음이 일어나는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여래는 심ㆍ의ㆍ식을 일으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여래는 가행(加行)이 없는 마음의 법은 일으킴이 있으니, 마땅히 알라. 이 일은 변화(變化)와 같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여래의 법신이 일체 가행을 멀리 벗어났다면, 이미 가행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과 법을 일으킵니까?”

 

“선남자여, 이전에 닦은 방편(方便)ㆍ반야(般若)의 가행의 힘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바야흐로 무심히 잠든 이가 깨어날 때 가행을 짓지 않아도 이전에 지은 가행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깨어나는 것과 같으며, 또 바야흐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었다가 선정에서 깨어날 때 가행을 짓지 않아도 이전에 지은 가행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선정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수면과 멸진정에서 마음이 다시 일어남과 같이 여래는 이전에 닦은 방편과 반야의 가행의 힘을 말미암는 까닭에 다시 심법(心法)을 일으킴이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화신은 마음이 있습니까, 마음이 없습니까?”

 

“선남자여,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의지하는 마음[自依心]이 없는 까닭이며, 남을 의지하는 마음[依他心]이 있는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소행(所行)과 여래의 경계(境界), 이 두 가지는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여래의 소행은 일체 종류의 여래가 함께 가지는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한 청정불토이다. 여래의 경계란 일체 종류에 다섯 가지 세계의 차별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유정세계(有情世界)요, 둘째는 세계(世界)요, 셋째는 법계(法界)요, 넷째는 조복계(調伏界)요, 다섯째는 조복하는 방편의 세계[調伏方便界]이다. 이것을 두 가지 차별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심,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심, 큰 열반에 드심, 이 세 가지를 어떤 모습으로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 세 가지는 모두 다른 모습이 없다. 이른바 등정각을 이룬 것이 아니며, 등정각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며, 바른 법륜을 굴린 것이 아니며, 바른 법륜을 굴리지 않은 것도 아니며, 큰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며, 큰 열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끝끝내 청정한 까닭이며, 여래의 화신은 항상 나타나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유정은 화신만 보고 듣고 받들어 섬겨 모든 공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인연이 됩니까?”

 

“선남자여, 여래는 그들에게 가장 높은 소연(所緣)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며, 그 화신에 여래의 힘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평등하여 가행이 없다면 왜 여래의 법신은 모든 유정을 위해 큰 지혜의 광명을 놓으며 무량한 화신의 그림자를 나타내는 것입니까? 성문과 독각의 해탈신(解脫身)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평등하여 가행이 없지만 해와 달의 수파지가(水頗胝迦)보배와 화파지가(火頗胝迦)보배 이 두 가지는 큰 광명을 낼 수 있지만 다른 수파지가보배와 화파지가보배는 그렇지 못한 것과 같다. 이른바 큰 위덕을 가진 유정이 머무는 곳인 까닭이며, 모든 유정의 업이 너무도 센 까닭이다. 또 솜씨가 좋은 장인이 조각한 말니(末尼:摩尼)보배에서는 문양이 나타나지만 다른 사람이 조각한 것에서는 그렇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아서 무량한 법계를 반연하여 방편과 반야를 잘 닦고 갈고 빛내 이루어진 여래의 법신은 그로부터 큰 광명을 내고 갖가지 화신의 그림자를 나타낼 수 있지만 저들의 해탈신에서는 이런 일이 없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와 보살의 위덕(威德)과 주지(住持)는 모든 중생을 욕계에서 찰제리나 바라문 등 크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 몸과 재물에 원만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며, 혹은 욕계의 하늘과 색계․무색계에서 일체의 몸과 재물을 원만히 얻게 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여래와 보살의 위덕과 주지는 도(道)에서건 행(行)에서건 일체 처소에서 중생들이 몸과 재물을 모두 원만히 얻게 한다. 그러므로 곧 그들이 응하는 것에 따라 그들에게 이 도와 이 행을 널리 설하는 것이니, 만일 이 도와 이 행을 바르게 수행하는 이가 있다면 일체 처소에서 그가 얻는 몸과 재물이 모두 원만치 못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중생이 이 도와 이 행을 등지고 가벼이 여기거나 또는 나에게 해치려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일체 처소에서 얻는 몸과 재물이 하열하지 않을 때가 없으리라.

 

만수실리여, 이러한 인연으로 마땅히 알라. 여래와 모든 보살의 위덕과 주지는 몸과 재물을 원만케 할 뿐만 아니라, 여래와 보살의 위덕과 주지는 또한 중생들의 몸과 재물을 하열하게도 한다.”

 

“세존이시여, 모든 예토(穢土)에서는 어떤 일을 얻기 쉬우며, 어떤 일을 얻기 어렵습니까? 또 정토(淨土)에서는 어떤 일이 얻기 쉬우며 어떤 일이 얻기 어렵습니까?”

 

“선남자여, 모든 예토에서는 여덟 가지 일이 얻기 쉬우며, 두 가지 일이 얻기 어렵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외도요, 둘째는 괴로운 중생이요, 셋째는 종족과 가세가 흥하고 쇠퇴하는 차별이요, 넷째는 모든 악행이요, 다섯째는 시라(尸羅)를 범함이요, 여섯째는 나쁜 세계요, 일곱째는 낮은 승(乘)이요, 여덟째는 하열한 의락(意樂)으로 가행하는 보살이다. 무엇이 두 가지 얻기 어려운 일인가? 첫째는 가장 높은 의락으로 가행하는 보살이요, 둘째는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일이다. 선남자여, 모든 정토에서는 위와 반대이니, 여덟 가지 일은 매우 얻기 어렵고 두 가지 일은 얻기 쉽다.”

 

그때 만수실리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해심밀 법문에서 이를 무슨 가르침이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를 ‘여래성소작사요의교(如來成所作事了義敎)’라 하니, 이 여래성소작사요의교를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이 여래성소작사요의교를 말씀하셨을 때, 큰 모임 가운데 있던 7만 5천 보살마하살이 모두 원만법신(圓滿法身)의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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