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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선사의 생애와 행적 고찰

출처 수집자료

운문선사의 생애와 행적 고찰


조 원 공1)*

․목 차․
   Ⅰ. 서 언                                        2. 운문의 생애와 행적  
   Ⅱ. 운문의 생애와 행적                       Ⅲ. 결  어
       1. 운문에 관한 자료


Ⅰ. 서 언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가끔은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 그 역사는 단순한 역사이기 보다 그 역사성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또한 인물에 있어서 그의 인물됨과 사상 그리고 생애와 행적에서 커다란 교훈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운문선사는 어지러운 시대였던 당말에서 오대에 살다간 운문종의 종조이다. 한 종의 종조로서 활약하였던 선사의 삶은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가 있으며 그 삶 자체가 후대에선 커다란 가르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사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그 생애와 행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론이 많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 고찰에서는 보다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이에 근거한 운문선사의 모든 것 즉 그의 생을 통틀어 고찰하되 운문에게 영향을 주었던 목주선사와 또 운문선사의 스승인 설봉선사와의 만남까지도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당시 어지러웠던 사회상에 비하여 비교적 풍성한 여건에서 활동하였던 것은 오직 남한조에서의 외호였던 점을 감안하여 그 관계까지를 비교적 자세히 논하고져한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나온 자료에 부족함을 느껴 본 고찰에서는 보다 근본자료에 입각하였으며 광범위한 선사의 주변까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Ⅱ. 운문의 생애와 행적
1. 운문에 관한 자료
운문문언(864~949)은 육조혜능 -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천황도오 - 룡담숭신 - 덕산선감 - 설봉의존을 이은 운문종의 종조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사실로 나타나는 것은 ꡔ전등록ꡕ, ꡔ오등회원ꡕ1), ꡔ석씨계고략ꡕ2) 혹은 ꡔ벽암록ꡕ 제 9칙 등에 나타난 범위에서 얻어진 일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료가 운문의 생애에 대하여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분히 수식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운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사실에 입각하여 그 당시에 곧바로 기록된 비문 등에 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므로 몇 가지 비문 등을 근거로 하여 그의 생애를 고찰하여 보려 한다.
여기에는 ꡔ운문산 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ꡕ과 ꡔ운문산 광태선원 고광진대사실성비병서ꡕ와 그리고 ꡔ대한소주운문산 대각선사 대자운광성홍명대사 비명병서ꡕ가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ꡔ운문산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ꡕ(이하 「행록」)은 가장 오래된 기록자료로서 운문이 몰한 남한 건화7년(949) 4월 25일에 집현전 학사인 뇌악이 찬한 것이다. 그리고 ꡔ행록ꡕ은 현재 대정장 권47에 수록되었으며 명판대장경․속장경 등에 수록된 ꡔ고존숙어록ꡕ에 입록된 ꡔ운문광진선사광록ꡕ에 수록되었다. 당시 남한조의 최고 문사로서의 그리고 열렬한 운문선사의 추종자로서 또 직책상 뇌악의 이 ꡔ행록ꡕ은 상당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음에 상반대정의 저술 ꡔ지나불교사적기념집평해ꡕ에 의하여 널리 소개되어 그 존재가 지적된 ꡔ운문산광태선원 고광진대사실성비병서ꡕ는 그냥 「실성비」로 불리우지만 상반대정은 1928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소주의 운문산에 올라 「실성비」를 확인하고 그의 탁본을 근거로 하였으나 기실 이 「실성비」의 명문은 청대의 오란수에 의하여 편찬된 ꡔ남한금석지ꡕ에도 수록되어 있다. 제1권에는 「실성비」의 정식명칭이 아닌 ꡔ운문산 광진대사탑명ꡕ의 표제를 근거로 하여 「실성비」가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ꡔ행록ꡕ의 선자인 뇌악이 선한 것으로서 남한 대보원년(958) 12월 1일에 건립한 것이다.
또 ꡔ대한소주운문산 대각선사 대자운광성홍명대사비명병서ꡕ(이하 「비명」)가 있는데 이것은 ꡔ전당문ꡕ 권892, ꡔ남한금석지ꡕ 권2와 상반대정의 전게서 등에도 수록된 것으로서 남한대보 7년(964)에 이르러 ‘서어원사 집현전 학사 승지 대중대부 행좌간의대부 지태복사’라는 역직의 진수중에 의하여 선된 남한조의 이탁과 공징추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다.
ꡔ남한금석지ꡕ에서 오란수는 권말에 주기를 붙여 석비 재유원현 운문산 현지소재와탈삼십사자령 거탁본저록라 하여 ꡔ남한서 고이ꡕ를 인용하여 연대의 잘못 등을 지적하고 있으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의 자료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밖에 운문선사가 시적한 후 3년이 지나서 찬된 ꡔ조당집ꡕ 권 11, ꡔ전등록ꡕ 권 17, ꡔ석씨계고략ꡕ 권 3, ꡔ불조강목ꡕ3) 권 33, ꡔ전법정종기ꡕ4) 권 8, ꡔ오등회원ꡕ 권 16, 그리고 운문 자신의 ꡔ유계ꡕ, ꡔ유표ꡕ, 또 소주자사 하희범에 의한 ꡔ청소ꡕ 혹은 ꡔ유방유록ꡕ이 있으며, 또 ꡔ송사ꡕ 권 481의 「세가사․남한유씨」 항목 및 ꡔ남한기ꡕ의 기사 등에서도 운문에 대한 여러 가지 행적을 알아볼 수 있다. 더욱이 ꡔ소주부지ꡕ 권 9는 운문산의 모습을 고찰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를 중심으로 고찰하려 하되 「행록」은 대정장 47권 수록의 ꡔ광록ꡕ에 부가된 것이고, 「실성비」․「비명」은 상반대정의 ꡔ지나불교사적기념집평해ꡕ에 게재된 것에 의하여 고찰한다. 그리고 ꡔ조당집ꡕ과 ꡔ대정장ꡕ 권 51의 ꡔ전등록ꡕ 등의 자료를 가지고 고찰하고자 한다.
2. 운문의 생애와 행적
운문문언의 출생연도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자료로는 없다. 다만 그의 시적연대에 관하여는 남한건화 7년(당․건화 2년, 949) 4월 10일이라는 기록에서는 모든 자료에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실성비」에서는 「법령 칠기이․승랍육순지」이라 하고 또 「비명」에서는 「수팔십육, 승랍육십육」이라고 하고 있어 이 점을 고려하여 역으로 계산하면 그의 출생연도는 당함통 5년(864)으로 되고 있다.
또 운문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양자강 하류, 그러니까 상해에서 항주 즉 상해의 서남인 가흥지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속성이 장씨인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려서부터 즉 유년기때부터 출가를 희망하였으며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영민했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출생지인 가흥의 공왕사에 들어가 지징율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실성비」에서는 그간의 일을
내유우 가흥공왕사지징율사하위동 범독제경무번재열 급장락발 구족우상주단 후시징공강수년 파궁사분지귀
라고 하여,
「지징의 휘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어 공부하고 마침내 낙발하였다」라는 것이다. 아울러 「비명」에서는 초세를 넘어서 지징에게로 가서 사미계를 받고 의년에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니 초세라는 연령이 대체적으로 12~15, 6세경이니 이것은 ꡔ조당집ꡕ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
연 십칠의공왕사징율사하수업
이라는 기록과 일치한다고 보아진다. 또 운문에게 사미계를 준 지징율사에 대하여는 그 전기가 등사에는 어디에도 이름이 올라있지 않다. 그다지 저명했던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다만 ꡔ송고승전ꡕ 권23에서는 ‘당오군 가흥법공왕사원혜’의 전기를 싣고 있으며 이는 원혜가 대중7년(853)에 법공왕사를 중건한 뒤 법공왕사를 나와 천태산 등을 유행하고 나서 건덕 3년(896)에 존승원이라는 곳에서 몰했기 때문에5) 지징은 원혜를 이어서 법공왕사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아울러 ꡔ가흥현지ꡕ 권 16의 도석장에서는6)
(오대) 운문선사문언 소의두솔원득도
라고 하여,
운문이 두솔원이라는 절에서 득도했다고 하지만 이 두솔원에 대하여는 권8 사관장에서,
(두솔사)재 성동 우벽의방 구생지야 당건원술무건명 법공사 명법공왕사 오월전씨 개위수왕사 송상부술중사명두솔 덕우을해폐위교장
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당말에는 법공사 혹은 법공왕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으로 보이며 지징이 머물렀다는 공왕사는 원혜가 머물렀던 법공왕사와 일치한다고 보아진다. 또 이곳은 예전에는 두솔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징의 문하에서 운문의 학습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서도 사분율 혹은 소승의 교학을 궁구했다는 지를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운문은 비릉(상주)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점은 여러 자료에서도 일치하고 있다. 그 때의 나이에 대해서는, 구족계를 받은 것은 20세 때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ꡔ조당집ꡕ에서는
등기묘 득구호라
라고 하여,
기묘세에 등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기묘를 운문의 나이와 비교 고찰하여 보면 그것은 16재 때의 연대가 되는데 대중 12년(859) 혹은 정명 5년(919)이 되므로 여러 가지 사실과 다르게 계산이 나오게 되어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한 운문이 수구한 비릉의 계단이 어떤 절에 설치되었는가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고 있다. 한가지 당시 일체의 경제적 원조를 국가에서 행하는 소위 관사가 네 차례에 걸쳐 중국의 각 주에 설치되었기 때문에7) 이중에 하나가 아닌가 할 뿐이다. 그리고 비릉의 계단에서 수구한 운문은 다시 지징에게로 돌아가 그의 곁에서 모시기를 수년 간 했다고 하니 대략 22, 3재 무렵에는 지징의 문하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
1) 목주 선사와의 만남
운문은 지징의 문하를 떠나 목주 진존숙에게 참했다. 그 때의 처음 모습에 대해서는 ꡔ벽암록ꡕ 등을 통하여 상당한 에피소드가 있다. 목주는 ꡔ선림승보전ꡕ에 의하면 황벽희운의 법사로서 그의 전기로는 ꡔ조당집ꡕ 권19, ꡔ전등록ꡕ 권12, ꡔ오원회등ꡕ 권4 등에 보이고 있다. 고안(지금의 강서성)의 미산사를 떠난 진존숙은 노모를 모시려고 고향인 목주로 돌아가는데 그곳 지명의 이름을 따라 목주선사로 불리었다. 그의 선풍은 모든 자료에서 ‘기병초첩 관유고험’하다 하여 기봉과변설이 날카로워 범인의 지혜로는 미치지 못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목주의 생몰연대가 분명치 않다. 다만 ꡔ석씨계고략ꡕ 권3에서는
지시건부사년소문인왈(중략) 수구십팔랍칠십육8)
이라 하여,
그 시적연대가 건부사년(877)이라 명기되었고 또 진탄씨는 그의 ꡔ석씨의연록ꡕ에서 그 시적연대를
당 건부중졸 연구십팔9)
이라 하고 있지만, 만약 건부사년(877)이라는 기록이 정확하다면 그것은 운문의 나이 14재때요 또한 건부중(847~879)이라 해도 운문의 나이 11~16재이니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ꡔ조당집ꡕ에서는
어중도사입민령 재등상골
이라 하여, 운문이 지징의 문하를 떠나 곧바로 설봉(상골)산에 올랐다 하여 운문과 목주와의 관계를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런데 목주와의 만남에 대하여는 ꡔ선림승보전ꡕ 권2의 운문전이며 ꡔ벽암록ꡕ 육칙의 본칙평창에 의해 유명하다 그리고 운문이 목주를 만나게 되었을 때 목주는 상당히 연로하였다고 한다. 이전에도 여러번 그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번번히 쫓겨났다. 운문은 다시 그의 문 앞에 가서 그를 만나게 된다. 「실성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10)
[목주선사의] 방은 닫혀 있었고 거의 사람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가끔 누군가 들어오도록 허락하더라도 논의 같은 것은 하지 못하게 했다. 운문이 권서가 자재로워지자 목주의 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목주선사가 “누구냐?”하고 묻자 운문이 “접니다. [운문]문언입니다”라고 하였다. 목주가 입구를 막고서는 물었다. “왜 자꾸 오느냐?”
운문이 대답하였다. “제 자신에 대해 아직 미혹한 것이 있습니다”
목주가 “정말 쓸모 없는 녀석이군!”11)하면서 운문을 밖으로 밀쳐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이로써 운문이 깨달았다.
운문에 있어서는 ‘기사불명’이다. 이것은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존립의 근원인 것이다. 의식과 지성의 차원을 넘은 장에서의 자기라는 것은 단적으로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자기라고 한다. 그 경우의 「자기가 있다」는 말하자면 의식되어진 자기이며 지적으로 반성되어진 자기의 밑바닥에 원래 있던 자기이며 대자적인 자기의 이전된 자기자체이다.12) 또다른 자료인 ꡔ전등록ꡕ 권12의 진존숙장13)에서는
어느 승이 문을 두드렸다. 사(목주) 말하되, “누구인가!” 승이 말하되 “모갑이다.” 사가 말하되 “쓸데없는 놈이로군!” 승이 문을 두드리자 사(목주) 말하되 “무엇을 이르는가?” 이르되 “기사가 분명치 못합니다” 하고는 사의 지시를 기다리다. 사가 말하되, ”그곳에는 다만 봉이 있을 뿐이다“ 그때 문이 열려져 승이 무엇을 물으려 했다. 사는 즉시 그 승의 입을 후려쳤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자료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곤 한다.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대 큰 충격을 받아 바로 그 순간에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14)
이후 운문은 목주에게서 얼마를 머물며 사사했는지는 모른다. 「행록」에서 ‘기이자참수재’라 하여 3년은 같이 있었다고 본다.15) 결국 목주의 문하를 떠나서 설봉에 참한 것은 운문의 나이 24, 5재였다고 생각된다.
2) 설봉의존과의 만남과 참학
운문이 설봉에게 참한 직접적인 동기는 분명치 않다. 다만 「행록」에서는 목주 자신이 「오비여사」라고 한 것이 있으며 「금설봉의존선사 가왕참승지」라고 권했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당시 설봉은 왕심지(?~925) 이하 민국조정의 귀숭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16) 크게 교화를 펴고 있었다. 상골산 설봉사에서 대중을 지도하는데 1,000명 이상의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하며 ‘북에는 조주, 남에는 설봉’이라 했으니 얼마나 유명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운문과 설봉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비명」과 초기 선종의 문헌인 ꡔ조당집ꡕ의 기록과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민국에 갔으나 자신의 엄청난 능력을 드러내고 나서야 겨우 상골산에 오를 수 있었다. 설봉의 회중에 도착하여 삼배를 올리자 설봉이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운문)선사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자신의 경지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의심의) 흐름을 이미 끊었지만(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1,000명이 넘는 (설봉)의 문도들도 그가 보통 스님인지 성인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운문은 몇 년 동안을 밤 늦은 때부터 새벽에 걸쳐 (설봉에게) 의심을 물었다.
이와 같은 기술을 본다면 운문이 설봉을 만났을 때 이미 상당한 경지에 있었으나 그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 설봉이 큰 교화를 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ꡔ송고승전ꡕ 권12에서는
존지행개사십여년 사방지승쟁추법도자 불가승산의 동하불감일천오백17)
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운문과 설봉의 서로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에서나 일치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뇌악의 「실성비」의 일단은 ꡔ조당집ꡕ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18)
또 ꡔ유방유록ꡕ이나 혹은 ꡔ오등회원ꡕ 등의 기록19)에서는 운문이 설봉에 이르러 산하의 장에서 머물며 한 스님을 만나 이 스님에게 일칙의 질문을 주고 이를 설봉에게 묻게 하였는데 이 때에 설봉은 이것을 간파하여 ‘대중거 장상영취오백인선지식래’라 서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물론 「행록」․「실성비」․「비명」 등에는 기록이 없어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설봉 문하에서 운문이 수행한 것에 대하여는 몇 년의 수행 끝에 마침내 ‘밀계현기’했다고 한다.
운문은 설봉문하에서 특히 남보다 발군했다는 기록은 없고 ꡔ전등록ꡕ에 있어서도
익자현요 인장기혼중
라 말하고 있으므로, 운문은 도리어 그 기의 뛰어남을 감추고 대중속에 있었는데 설봉만이 그를 알아보고 은밀하게 부촉한 것이다. 또 「실성비」에서는
후설봉천화 학도내문봉 불법부수 봉왈 우송언처주 학도막식기기 언자개사명야
라 하고, 「비명」에서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물론 위의 기록과 같이 설봉이 유계로 부법을 서술한 점은 사실로서는 의심이 가지만 공통된 기록으로는 운문이 그 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이 점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설봉으로부터 부법을 받은 운문은 그 후 설봉의 문하를 떠나 제국의 조사들을 참방하며 편력하였다. 이 점에 대해선 운문 자신도 스스로 ꡔ대사유표ꡕ에서
곤풍상어 십칠년간 섭남북어수천리외20)
라고 하여, 유력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쯤 운문이 설봉의 문하를 떠나 제국을 유력하였는가가 문제이지만 이 17년간의 유방의 결과 911년 운문의 나이 48재 때에는 소주의 영수여민의 회하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역산하여 보면 유력을 시작한 것은 895년 운문의 나이 32재 무렵이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24, 5재때 설봉을 참례하였다고 생각되므로 6~7년간은 설봉의 회하에 있었다고 보인다.21)
설봉의존(822~908)은 육조 혜능에서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천황도오 - 덕산선감으로 이어지며 운문문언의 스승이 되는 선사이다. 운문은 설봉의 사상을 이어서 그 자신 새로운 종풍을 형성하여 학인접화를 꾀하여 운문종의 종조가 되었다.
시대적으로 운문종은 당말에서 오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기까지 운문의 문하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설봉의 사상은 운문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운문의 사상과 그의 종풍이 송대의 사회상과 부합되는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운문의 스승인 설봉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설봉의존은 장경이년에 천주의 남안현에 회씨로 태어나 후양 개년 2년에 팔십칠세에 입적하였다.22) 태어날 때는 물론 당말의 정치사회가 어지러웠던 시대에 해당하고 출가하여 장성할 때에는 당말무종의 폐불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즉 12재 때에는 천주 포전 왕윤사의 율사인 경현에 출가하여 17재에 득도하였으며 무종 때 회창의 폐불은 그의 나이 24재 때의 일이다. 이 때에 사태를 맞아 유생의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복주의 부용사의 홍조대사를 참배하였으며 그곳에서 홍조대사는 설봉을 법기로 여겨 6년을 머물면서 수행케 하였다. 그 후 북방으로 돌다가 유주의 보리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님으로서의 위의를 갖추었다. 26재에서 51재에 이르는 25년간에 걸쳐 그의 사상적 및 론리에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기에는 랑주의 덕산원 선감의 함화와 업주의 원적대사의 수행에서 큰 영향을 입었다. 결국 덕산선감으로부터 선종의 종지를 얻고 다시 원적대사로부터 도교적 관계를 맺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회창의 폐불이후 불교의 복광시대를 맞아 산악 불교에서 평지불교로, 또 귀족적 불교에서 서민 대중적 불교에로 전환되려니 자연 선종의 사상에다 중국의 토착적 사상이며 실천 철학인 도교적 사상을 응용하여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 그의 회중에는 항상 천오백인의 대중이 운집하여 집단적 수행생활을 하였으며 입실법사만 해도 55인이라고 설봉지 권4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문하에 현사사비․장경혜릉․고산신안․운문문언․보복종전 등 수많은 선승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설봉이 민국에 돌아온 50재 이후 수년간에 걸쳐 지방의 유지와 중앙의 귀족 그리고 황제에 이르는 폭넓은 포교 교화를 지도하여 성공하였다.23)
3) 운문의 행적
이 시대에는 이미 설봉과 동산의 경우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한 사람의 조사의 회하에 정주하지 않고 제방의 존숙을 력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7년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닌 것이다. 왜 운문이 설봉의 회하를 떠났는가의 직접적인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반대정의 저술인 ꡔ지나불교사の연구ꡕ와 유전성산의 지적한 바에 의하면 당시 설봉의 문하 혹은 그 사법 사이 - 특히 현사파와 고산파의 스님들 - 에는 갖가지 암투와 갈등이 있었고 또 여기에서 운문은 그의 선기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았으며 이러한 파와의 갈등이 싫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운문은 895년 즉 32재 무렵인 설봉의 생존시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하를 떠나 제방을 유력한 것으로 보아 ꡔ유방유록ꡕ을 고찰해 보면 그의 유력의 중심은 강남지역으로서 강대한 권력자로부터 절대적 귀의를 받고 있는 강남의 불교계가 운문에게는 커다란 매력을 느꼈을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데 운문은 17연간의 유력을 마치고는 당시 소주에 있었던 영수여민(?~918)에게 참하였다. 영수는 백장 - 장경대안 - 영수여민의 사법관계에 있었던 선사로서 그의 전기는 ꡔ조당집ꡕ 권 19와 ꡔ송고승전ꡕ 권22와 ꡔ전등록ꡕ 권11에 나타나고 있다.
또 「실성비」에서는 「신미(911)년에 운문은 조계를 예하고 돌아다니다가 영수를 참하였는데 영수는 심기로써 접화하였으며 영수와 운문의 교정은 더 한층 깊었다」라 하고 「비명」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운문이 영수의 회하에서 머무르기 8년이 지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운문이 영수 회하에 들어간 것은 「실성비」․「비명」에서는 신미(91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 대하여 ꡔ계고략ꡕ에서는,
후저광중영수민선사(중략) 당차경인장흥원년야24)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백석방류씨의 ꡔ선종편년사ꡕ에서도 이것을 이어받았다고 생각되는데 장흥원년(930) 무렵에는
운문문언 광동성소주부 곡강현영수사에 주하였다.25)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비명」의 기록에는 운문이 영수의 회하에서 8년 후에 영수가 시적하였으므로 「행록」에서는 그 유서를 지닌 운문에게 그 법석을 계승[종]시켰다고 하지만 「실성비」에서는 정축(917)년에 영수는 운문과 문인들을 불러 ‘자신이 멸한 후에는 반드시 무상의 사람이 래산하여 자기의 다비를 행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다음해인 무인(918)년에 고조 천황대제가 소주에 이르렀는데 영수가 천화하자 고조는 그것을 다비하여 사리를 얻고 그 모습을 형상으로 만들어 방장실에 안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명」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 천황대제가 당시 광동성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남한조정의 국왕인 유엄(917~942 치세)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이미 홀골곡쾌천의 저술 ꡔ선학사상사ꡕ 상권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있다.26)
그런데 영수가 몰한 후 운문은 청에 의하여 영수의 법석을 계승하고 개당설법하였지만 그간의 일에 대하여는 소주사자 하희범에 의한 「청소」 등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그 후 운문은 운문산에서 개산하였으며 「실성비」에서는 「영수에 머문 뒤로 운문의 마음은 더욱 묵언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고조의 허락을 얻어 운문은 계미(923)년에 제자들과 함께 운문산에서 절을 개창하고 5년이 지나서 가람이 완성되어 30년간 대중이 오백인(「비명」에는 천인)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으며 칙액과 주기를 받았다」는 니용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비명」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이 가람이 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하므로 그것은 운문의 나이로는 64세, 927년의 일이다.
또한 그 가람의 건립이 운문을 비롯한 문인들에 대한 명실상부한 최대의 후원자였던 남한조의 기진에 의한 바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ꡔ전법정종기ꡕ에서도
기후 유씨 복치운문대가람27)
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4) 운문과 남한조의 관계
운문과 남한조의 교류에 관해 이를 고찰하여 보면, 「무술(938)년 고조 유엄의 칙에 의하여 운문은 입내하자. 고조는 선을 내려 좌우가승록이란 역직을 주었다고 하지만 운문은 묵연히 그것을 상대하지 않자 좌우의 측근들은 ‘사[운문]는 수행하여 이미 불도에 이르렀다. 세간적인 영록은 즐거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다시 고조는 칙으로 ‘사[운문]를 산으로 돌아가게 하려는데 어떤가’라고 하자 운문은 흔연히 세 번 만세를 부르고 다음날에 내탕향약염화 등을 받았다. 산으로 돌아가자 다시 사호를 광진대사라 하고, 그 후에도 종종 령선을 내려주었다. 또한 중종 유성(943~958 치세)도 사[운문]에 대하여 칙으로 입내시켜 1개월 여 동안 공양하였으며 육수의와 향약 등을 내리고 다시 어제탑액을 내려 보광지탑․서운지원이라 하였다」라는 뜻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운문과 유왕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기록인데 이것은 「비명」에서도 거의 같은 기록을 보이고 있다.
유왕의 불교보호는 상당한 것이었다고 보아진다. 물론 이것이 운문선사에 대한 순수 귀의였는지 아니면 통치를 위한 종교정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교의 부흥을 꾀했고 그때마다 운문은 여법한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하였다.
또 운문은 칙에 의하여 가끔 입내설법을 하게 되지만 ꡔ석씨계고략ꡕ 권 3에 의하면 운문은 무신(948)년에 입내하여 광진대사라는 사호를 받고 다시 7월에 광주의 칙에 의하여 입내하고 9월에 귀산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광진대사라는 호를 받은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938년의 일이므로 ꡔ계고략ꡕ의 기록은 오류로 봐야겠다. 그러나 7월에 입내하고 9월에 귀산했다는 뜻의 기록은 전술한 바와 같이 종종 유성이 칙으로 일 개월 여 동안 공양을 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아울러 948년 7월에 하산하여 9월에 귀산했다는 기록은 ꡔ선림승보전ꡕ 권 328)에서도 기록되고 있지만 한편 ꡔ조정사원ꡕ 권129)에서는 건우 4년 설에만 한정시키면 ꡔ조정사원ꡕ의 사실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때에 「보광지탑․서운지원」의 탑액이 하사되었지만 이미 927년에는 「광태선원」의 칙이, 그리고 다시 963년 10월에는 종래의 ‘증진선사’라는 이름을 ‘대각선사’라고 고쳤으므로 이 점만을 생각한다면 언제 광태선원이 증진선사로 고쳐졌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이 ‘보광지탑․서운지원’이라는 탑액이 운문산의 가람 전체의 명칭인지에 대한 것은 기록이 분명치 않으며 또 증진선사와의 명칭관계도 확실한 자료가 없다.
5) 운문의 시적과 법구
949년 4월 10일 남한 건화7년에 선사는 갑자기 공양을 들지 않으시고 한숨도 잠에 들지 않았다. 「비명」은 선사의 시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제자들이 공양을 올리자 선사께서 그릇을 치우며 말씀하셨다. “우선 나는 괜찮다. 그리고 너희들도 괜찮다. 내가 떠난다고 왕께 글을 올려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유계를 적었다. “내가 죽고 나면 세간에서 하듯이 상복을 입지 말고 상여를 만들어 장례를 치루지도 말아라. 이렇게 하면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니 선종을 문란케 하는 일일 것이다.” 선사께서는 실성 스님에게 법을 전하셨으며 문도들은 이미 그에 따라 회중을 구성하였다. 기유년(949) 음 4월 10일 자시에 천화하셨다.
자비의 배는 부셔져 버리고
윤회하는 중생은 쉴만한 해안을 찾지 못하네
법의 산은 이미 무너져
날짐승과 길짐승은 어디에 의지해 머물 것인가?
이와 같이 운문산에서 30년간 항상 오백인 내지 천인의 수행자를 접화하며 남한조의 큰 보호를 받으며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큰 교화를 떨치던 운문선사는 시적하였으며 모든 자료에서 똑같이 남한 건화 7년(949) 4월 10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명」과 「실성비」에서 그 시각을 자시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운문에게는 남한 중종 유성에 대한 「유표」와 문인 제자들에게 대한 「유계」가 남아 있다는 것도 공통하고 있다.  그러한 것은 모두 ꡔ광록ꡕ에서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후술하겠다. 또한 법사에 관해서도 모든 자료에서 백운 지상(ꡔ전등록ꡕ에서는 자상)의 이름을 들고 기타 문인으로서는 「행록」에서만 운문의 시적후 그 후사를 부탁함에 있어 백운 지상은 이미 운문산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참여한 문인이었던 운문산 법주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건화 7년 4월 10일에 시적한 운문의 장송이 보름후인 4월 25일에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실성비」와 「비명」에 명기되어 있으며 「행록」에서도 그 선술이 「시기유세 맹하월이십유오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ꡔ운문록ꡕ에는 선사의 시적과 장례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더해준다.
스님은 건화 7년 기유 4월 10일에 시적하였다. 미리 글을 올려 임금과 하직하였으며 아울러 「유계」를 쓰신 뒤에 가부좌를 틀고 시적하셨다. 그리고는 곧 임금께서 내린 탑액을 받았으나 “내 몸을 방장실에 두고 혹 임금이 탑액을 내리시거든 방장실에 걸어둘 뿐 따로 탑을 세우지는 말라”하신 유언을 받들어 문도들은 그 말씀대로 스님을 방장실에 모시고 이를 탑으로 삼았다.
장례식의 슬픔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비명」의 시적 문구로 묘사되고 있다.
이 날은 흐르던 구름도 한군데에 머물고 무덤 근처 나무들도 시들었다. 외로운 산 원숭이의 울음소리는 잃어버린 아픔 더하고 숲속에서 보이지 않는 새소리는 이별의 슬픔 더하였다. 조문객들은 옷깃에 얼굴을 묻고 울며 서 있었다.
「실성비」와 「탑명」에서도 역시 여러 존숙과 도속천수가 그 유체를 탑으로 옮겼다는 뜻을 기록하고 있다.
운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은 법구가 살아있는 것 같아서 모두들 놀랐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두 번째 「비명」에서는 운문이 시적하고 17년 후에 웅무군 절도추관 원소장의 꿈에 나타나 무덤을 열어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무덤을 열어 보니 법구는 그대로 였으며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자라 있었다. 눈은 반쯤 뜬 채로 진주처럼 광채를 뿜고 이빨은 눈처럼 빛났으며 신비한 기운이 온 방안을 감쌌으며 수천 명의 제자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다시 왕명에 따라 운문의 법구는 수도로 옮겨져 한 달 동안 공양하였다. 남한의 왕은 선사에게 시호 ‘대자운광성홍명대사’를 내리고 운문산에 있는 사원을 ‘대각선사’라고 내리고 이 이름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법구는 원래의 자리로 옮겨져 1,000년 이상을 머물렀다. 문화혁명기였던 1970년대 중반에 사찰이 사라지면서 법구도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Ⅲ. 결 어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운문선사의 생애와 행적에 비하여 비교적 근본적인 자료를 널리 연구․고찰하여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 자료에 나타났던 그에 대한 사실은 선사의 몰후 직후에 이루어진 ꡔ운문산 광태선원광진대사행록ꡕ과 ꡔ운문산 광태선원 고광진대사실성비병서ꡕ와 그리고 ꡔ대한소주운문산 대각선사대자운성홍명대사비명병서ꡕ가 가장 유력한 자료로 인정할 수가 있으며 현재 대정신수대장경권47에 수록된 내용이 가장 보편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위대했던 역사적 인물일수록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수식되고 첨삭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래도 운문선사의 경우는 송대에서 그의 문하인들이 잘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아울러 운문선사의 주변 인물중 직접 운문선사를 처음 이끌어준 목주선사와 그리고 운문선사의 스승인 설봉선사에 대하여도 비교적 자세히 고찰하였으며 특히 지역과 사회적 여건이었던 남한조와의 관계를 고찰한 것은 보다 광범위한 자료와 시각으로서 고찰한 내용이었다.
이로서 운문선사의 한 생을 조명하였으며 역시 그의 생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소중한 역사적 가르침으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아직도 미처 발굴되지 않고 있는 자료가 있을 것임에 보다 심도있는 자료의 연구․고찰로써 오늘과 후대에 남을 교훈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지나간 과거의 선사의 삶과 가르침을 도출할 뿐 아니라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살고 수행해 나가야함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연구고찰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각주)-----------------
* 동국대학교 강사
1) 전20권. 영은보제(1179~1253) 지음. 순우 12년(1252) 간행 경덕전등록․천성광등록․건중정국속등록․연등회요․가태보등록으로 이루어진 오등록을 개편하여 편찬해 낸 가장 종합적인 선종 통사[속장138].
2) 전4권. 대혜문하 5세인 남악각안(1286~1355)이 1354년에 엮음. 인도 및 중국의 편년체 불교통사. 특히 선종의 본의와 도맥을 잘 밝혔음. 줄여서 계고략이라고도 함.
3) 전42권. 명의 심공사 주시은이 지음(1633) 석존에서 명의 만봉시울에 이르기까지의 불조의 행업을 기록한 편년체의 불교통사[속장 146].
4) 전9권. 송의 운문종 문하 불일계숭(1007~1072)가 지음. 중국 선종의 사자상승에 따라 인도이래 여러 조사의 전기를 기술한 것으로서 경덕전등록의 설을 따르고 있음.
5) 대정장 50. 845a.
6) 궁내청서릉부장.
7) 도단량수, ꡔ당대불교사の연구ꡕ p.16.
8) 대정장 49. 843a.
9) 진탄 ꡔ석씨의년록ꡕ p.155.
10) “사권서득지 경왕구문 선사문 수 사왈 문언 선사관문운, 빈빈래작십마 학인기사불명 선사운, 진시차도력찬 이수추출폐문 사인시발명.
11) 글자 그대로는 ‘진나라 때 쓰던 돌 천공기[차도력찬]라는 뜻이다. 이 거대한 천공기는 진나라때 아방궁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역사가 실행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도구는 전혀 쓸모없는 것에 대한 격언으로 쓰이게 되었다.
12) 서곡계치, ꡔ강좌선 제일권 선の립장ꡕ 축마서방, 소화 42년.
13) 유승구문 사운, 아수 승운 모갑 사운 진시차도력찬 유승구문 사운 우십마 운 기사미명걸사지시 사운, 저리지유봉 방개문 기승의문 사 변괵기승구.
14) 일부 다른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운문이 목주의 방에 어렵게 들어가니 목주가 곧 그를 가로 막아서서는 “일러라, 일러라”하며 다그쳤다. 운문이 머뭇거리자 목주가 바로 그를 쫓아내며 “정말 쓸모없는 녀석이로다!”하며 운문의 다리가 끼어 있는 상태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이 때에 운문은 깨달았다고 한다[벽암록].
15) 이 문제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ꡔ설봉록ꡕ에 따르면 운문은 목주와 3년을 보냈는데 이때 목주의 재가제자인 상서진조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속장경 119. p.482c18].
16) 왕씨 일족에 의한 민의 불교정책에 대해서는 아부조일의 ꡔ중국선종사の연구ꡕ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17) 대정장 50.782c.
18) 「실성비」에서도 사축입민 재등상골 직분붕정 인조설봉회 삼례욕시 설봉내운 하득도제마 사불이연발 중인금기 수등절류 환동대각 운운하고 있는데 그것은 ꡔ조당집ꡕ의 기재와 일치하고 있다.
19) 속장경 2을-11-3, 276c.
20) 대정장 47, 575a.
21) 17년간 운문이 누구에게 참했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ꡔ유방유록ꡕ 등에서는 많은 선사와의 문답상량하고 있으며 그들을 알아보면 상주 정근원온, 월주동암가휴, 무주광인, 무주 조산본적, 신주 아조호 지부, 강주 진조상서, 여산귀종담권, 월주건봉 화상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설봉 회하에 있을 대 와룡화상, 서원, 장경, 노장노와의 문답을 한 기록이 있으며 다시 ꡔ조당집ꡕ 권 6에 동산 항목에는 「운문도서봉」이라고 하고 있다.
22) 설봉의존의 태생에 대하여는 조당집 권7과 송고승전 권12에 참조.
23) 송고승전 권12에 “건부중관 편경조위공 중화중사공영용진공 매갈서시서호이불극취음 교사치간”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24) 대정장 49.851c.
25) 백석방류 ꡔ선종편년사ꡕ p.68.
26) 홀골곡쾌천 ꡔ선학사상사ꡕ 상권, p.727.
    영수와 남한조와의 관계는 이미 ꡔ송고승전ꡕ 권 22(대정장 50.849c
    )에서는 석여민 민인야 수성화영외 성다이적(중략) 유씨편패번우매영 소민입청문다역지기래(중략) 유의불결직왕순방 민역혐기계발구점연개준적시위지위걸원운운…… 라고 하며 그 교섭에 상당히 점술적 요소의 가미가 있어 보이며 영수의 멸 후에 유엄이 래산하므로 ꡔ전등록ꡕ 권 11에서는 거병의 시부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27) 대정장 51.752b.
28) 속장경 2을-10-3, 225c.
29) 속장경 2-18-1, 8a.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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