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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의 생애와 율사로서의 위상

출처 수집자료

자장의 생애와 율사로서의 위상

  
                                                     김 복 순 *1)
    
• 목 차 •
                     Ⅰ. 머리말                            
                     Ⅱ. 자장의 생애와 두 가지 난제         
                     Ⅲ. 율사로서의 위상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자장의 생애와 율사로서의 위상은 선학들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다.1) 오히려 도출되어 있는 이견들을 종합해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를 구성해 나감에 있어, 이견을 보이는 두 문제 즉, ‘입당연도’의 문제와 ‘몰년’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이 문제를 풀어 나가다 보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자장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율사로서 지니고 있는 신라사상사 내지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장을 역사적 인물로서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기와 관련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한 사료를 어떻게 선택하고 취합하여 재구성할 것인가의 난제가 있다.
  자장에 관한 기록으로는, 「황룡사찰주본기」의 기록과 ꡔ속고승전ꡕ 「자장전」, 그리고 ꡔ삼국유사ꡕ권4의 「자장정률」조와 권3의 「황룡사구층탑」, 「가섭불연좌석」의 내용이 주로 쓰여지고 있다. 「황룡사찰주본기」와 ꡔ속고승전ꡕ은 초기 기록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ꡔ삼국유사ꡕ 「자장전」 등의 내용은 여러 자료를 다 섭렵한 뒤에 씌어진 것이다. 이 「자장전」은 ꡔ삼국유사ꡕ권3 「가섭불연좌석」조와 권4의 「자장정률」조에 나오는 내용이 현전하는 전부이다. 때문에 원효가 저술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누가 언제 저술하였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전기가 만들어진 시기는 그의 입당연대를 기록한 각각의 사료들을 일별해 볼 때, 「황룡사찰주본기」가 기록된 872년 이후부터 ꡔ삼국사기ꡕ가 수찬된 1145년 사이로 생각된다. 그것은 638년의 입당 기록이 636년으로 바뀌는 것이 ꡔ삼국사기ꡕ에서부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룡사찰주본기」와 ꡔ속고승전ꡕ의 기록이 보다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하겠다. 
  본고는 자장의 생애에 보이는 이 두 난제를 중심으로 제기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 특히 문수신앙과 오대산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어 보고 그의 생애를 구성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그의 율사로서의 위상을 그의 사상적 배경과 대국통으로 활약한 내용을 신라 당대의 상황과 연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자장의 생애와 두 가지 난제

  1. 생애의 개괄
  자장은 신라 진평왕 대(579~631)에 소판 무림공의 아들로 태어났다.2)그에 관한 가장 초기 기록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찰주본기」의 관련 부분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찰주본기
                                시독 우군대감 겸성공신 박거물 봉교찬
상부 황룡사구층탑자 선덕대왕대지소건야 
1)석유선종랑 진골귀인야 소호살생 방응지치 치출루이읍 감차발심 청출가입도 법호자장 
2)대왕 즉위칠년 대당 정관 십이년 아국 인평오년 무술세 수아사신통 입어서국 
3)왕지십이년 계묘세 욕귀본국 정사남산 원향선사 
4)선사위왈 오이관심 관공지국 황룡사건구층솔도파 해동제국 혼강여국
자장지어이환 이문 내명 감군 이간 용수 대장 (백)제아(비)등 솔소장이백인 조사탑언 전자승총혜 기십사년세차을사 시구건 사월 □□ 입찰주 명년내필공 철반이상 고칠보 이하 고삼십보삼척 과합삼한이위□□ 군신안락 지금뢰지3)
  황룡사 9층탑은 당 유학을 끝내고 643년에 귀국한 자장이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한 탑으로, 위의 인용문은 사리내함의 6면에 걸쳐 음각한 쌍구체로 된 내용의 처음 부분이다. 경문왕이 왕12년인 872년에 황룡사탑을 중수하면서 창건 당시의 봉안유물을 확인하고 내함을 만들어 넣으면서 탑과 관련된 기사를 남기려고 조성한 내용이다. 때문에 자장에 관한 여러 기록 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사실과 근접해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에 의하면, 자장은 선종랑으로 불렸던 진골귀족의 자제로서 사냥을 즐겼던 일반적인 지배계층의 일원이었다. 국선 구참공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4) 당시 지배층은 사냥을 즐기던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어린 시절에 매를 놓아 꿩사냥을 하다가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청하여 출가한 것이다.5)
  그의 출가는 처자가 있었다는 기록과 출사령이 내려진 상황으로 추정해 볼 때 25세를 전후한 시기로 생각되는데,6) 당시인들이 12~3세에 출가하였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늦은 나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ꡕ 자장정률 조에는 그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진덕여왕 대(647~653)에 그의 아버지 무림(호림)공의 존재가 뚜렷이 보이고 있다.
5) (진덕)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자장의 아버지),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그들은 남산 오지암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 때 큰 호랑이가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 알천공의 알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에 앉았으나 그래도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7)
  이 사료는 자장의 아버지인 무림공이 진덕여왕 대에 6인의 대신회의의 일원으로 남산 우지암에서 국사를 의논하고 있는 내용으로,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매우 중요시되는 자료이다. 그것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즉위문제가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과 ‘상대등 비담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고, 중고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변화되는 중요한 시기로 인식되어 논고가 양산되어 있기 때문인데, 특히 이 6인의 대신회의는 매우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8) 진덕여왕 대에 그의 아버지가 건재해 있었다는 것은 조실부모했다는 사료가 윤색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신라 왕자로 불릴 정도로9) 진골귀족 집안의 귀한 아들로 성장한 것이다.
  선덕여왕은 그가 조정에 출사하여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으나, 그의 완강한 고집으로 출가를 허락하였다. 일단 발심을 하게 되자 자장은 맹렬히 수도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신이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자질은 결국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까지 하였다.
  2)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 즉위 7년 인평 5년인 638년에 당으로 가는 사신 신통을 따라 당나라의 장안에 도착한 자장은 곧 장안 흥화방의 공관사에서 법상(567~645)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사사하였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종남산 운제사 동벽에 머물면서 수도하였는데, 이 때 도선과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0)
  5~6년 간 중국에 머물고 있던 자장은 국내 정세의 영향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당 황실에서 많은 예우를 해주었다. 이에 자장은 대장경과 부처님 사리 등 신라의 불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귀국하면서 곧 대국통에 임명된 자장은 신라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여러 활동을 펼쳤다. 그의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유입한 선진문물이 국왕과 대신들에 의해 수용이 되면서 그대로 국가정책에 현실적인 면모로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즉 승니들의 지계를 국가차원에서 단속하였을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불사리탑을 세워 신라인들에게 부처님이 진호해 주는 국가라는 개념을 확산시킨 것이다. 이에 더하여 황룡사구층탑의 건립을 추진하면서 주변의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 9개국이 모두 조복해 온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선덕여왕 대에 활동한 그였기에 여왕의 사후 그의 활동은 위축된 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 타격을 주었을 것은 당나라에서 현장의 귀환 이후 새로운 역경사업이 펼쳐지면서 그에 따른 신유식 계통의 교학서들이 쏟아져 신라로 유입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자장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만년의 행보는 이러한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자장과 깊은 관계를 보이고 있는 원효나 명랑이 조정과 지속적으로 연계해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국통으로서의 그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 자장의 당 유학년도
  자장이 당에 유학한 연도에 대해서는 636년과 638년의 두 설이 나와 있다. 신라시대의 기록인 「황룡사찰주본기」에는 그가 선덕여왕 즉위 7년 대당 정관 12년 선덕여왕 인평 5년 무술년인 638년에 사신을 따라 당에 들어갔다가 선덕여왕 12년인 계묘년 643년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ꡔ속고승전ꡕ에도 “정관 12년에 문인인 승실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동쪽나라를 떠나 서울에 이르렀다.”고 하여 638년에 입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ꡔ삼국사기ꡕ에는 그의 입당이 636년으로 되어 있고,11) ꡔ삼국유사ꡕ에는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년인 636년에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오대에서 문수에게 감응하여 법을 받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12) 그리고 이 사실은 본전에 상세하게 보인다고 세주까지 달아 놓고 있다.
  이렇게 자장의 입당연대는 638년과 636년의 차이가 있는데, 일연은 「황룡사찰주본기」의 기록을 보았을 것임도 불구하고,13) 본전이라 쓴 「자장전」의 내용을 채택하여 2년 먼저 중국에 들어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에게 감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자장이 636년에 당에 유학하였다고 보는 입장에 서면, 그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638년에 장안으로 간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자장이 장안에 먼저 갔다가 오대산으로 간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기도 하다.14)
  그렇지만 2)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공식적인 신라의 사신 신통의 행렬과 함께 움직인 자장이 장안에 가기도 전에 오대산으로 향했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일연은 자장이 이 일을 숨겨 놓고 이야기 하지 않아 뒤늦게 알려진 것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지만,15) 「황룡사찰주본기」에도 나오지 않던 내용을 갑자기 고려 후기에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결국 문제는 자장이 중국의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과 만났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건이 있다고 생각된다.
6)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서학하여 이미 오대에서 문수에 감응하여 법을 받았다. 상세한 것은 본전에 보인다. 문수가 또 이르기를 “너의 나라 왕은 천축의 찰리종왕으로 이미 불기를 받았으므로 별도의 인연이 있으니 동이 오랑캐족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16)
7) 뒤에 대덕 자장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였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런 까닭에 인도의 연우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으니, 1천 3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17)
8)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당나라에 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 가에 돌부처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하였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4구의 게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4구의 글을 기억할 수 있었으나 모두 범어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승 한 사람이 붉은 비단에 금색의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릿대 하나와 부처의 머릿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하여 무료하게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법사는 말하였다. “꿈에 4구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여서 풀지 못하는 때문입니다.”고 하니, 승이 번역하여 말하였다. “ꡔ아라파좌낭(아라파좌낭)ꡕ이라는 것은 일체의 법을 요지하였다는 말이요, ꡔ달예치구야(달예치거야)ꡕ라는 것은 자성이 가진바 없다는 말이요, ꡔ낭가희가낭(낭가사가낭)ꡕ이라 함은 법성을 이렇게 해석한다 하는 말이요, ꡔ달예노사나(달예노사나)ꡕ라 함은 노사나를 곧 본다는 말이다.”라 하고, 이어 그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본시 본사 석가의 도구이니 네가 잘 호지하라.”하였다. 또 가로되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가 항상 그 곳에 거주하니 그대는 가서 보라.”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18)
9) 인평 3년 병신세(즉 정관 10년)에 조칙을 받아 문인 승 실 등 10여 인과 더불어 서쪽 당에 가서 청량산에 갔었다. 산에는 문수대성의 소상이 있어,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석천이 공장을 데리고 와서 조각한 것이라고 하였다. 자장이 불상 앞에 가서 기도 명상하고 있을 때, 꿈에 불상이 머리를 만지며 범게를 주었는데 깨어 보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중이 와서 해석하여 주고(이미 황룡사탑 편에 나왔다), 또 이르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하고 또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공이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에는 실리지 않았다). 자장이 이미 성인의 기별을 받은 것으로 알고, 이어 북대로 내려와 태화지에 다다라 당경에 들어갔다.19)
10) 「산중고전」에 의하면, 이 산을 진성(문수)이 거주한 곳이라고 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20)
  이 사료들은 오대산신앙과 관련한 기록들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자료들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자장의 문수신앙에 관한 여러 견해들이 도출되어 있다.
  먼저 문수신앙의 측면에서 본 견해로, 자장을 우리나라에 문수신앙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보고, 문수의 예지가 가진 함축성을 비극적 최후로써 웅변하는 대변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7세기 초반의 신라적 산악숭배에는 이미 문수주처라는 아이디어가 도입될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 오대산신앙을 통하여 신비화, 구체화되어 갔다는 것이다.21) 또 자장의 문수신앙을 계율과 연계하여 살펴 본 논고도 있다.22) 그리고 이곳에 나오는 화엄게로서 자장을 해동화엄초조로 본 견해까지 나온 바 있다.23)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자장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대성을 만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관련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사건들을 자장이 638년에 입당한 것으로 본다면, 전체 내용이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따라서 638년의 입당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장의 실제 유학기간에 앞서 청량산에 머물렀던 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636년 입당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본 견해24)와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에서 인평 5년을 선덕왕 5년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25)
  필자는 자장의 오대산 관련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견해를 밝힌 바 있듯이26) 이 사료에 나오는 화엄게는 80화엄에 나오는 구절로서 신라 하대에 화엄 승들에 의해서 윤색되어진 내용으로 생각되므로, 자장은 638년에 입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더하여 당시의 정황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 보면, 그 첫 번째는 자장이 중국에서 만난 이는 신인 내지 문수대성이 아니라 종남산의 원향선사였다는 사실이다. 자장이 입당한 638년은 당이 건국한 지 30년 밖에 안 된 시점으로, 당시까지도 수나라 대에 실시하였던 불교정책이 그대로 유효한 시기였다. 그는 수대의 영향력 있는 승려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황룡사찰주본기」 이후의 기록에서는 원향선사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다만 신인이라고만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의 치세 하에서 수의 승려를 내세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장이 만난 신인이 “황룡사 9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열어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말을 자장 스스로가 자신에게 한 말을 신인의 입을 빌려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안함의 ꡔ동도성립기ꡕ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자장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수나라와 관련이 있는 원향선사를 신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고자 했던 것은 이미 안함에 의해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수나라 문제의 불교치국책을 본뜬 것이라는 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27)
  두 번째 이유는 자장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불교경전이 구역경전이었다는 점이다. 자장은 신라에 없던 불전을 채우고자 643년에 귀국하면서 대장경을 가져온 것이었지만,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오기 2년 전이었다. 이는 그가 가져온 불경들이 구역에 의한 경전들로서 수대 불교의 연장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자장 이전 원광법사 시대부터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ꡔ섭대승론ꡕ과 ꡔ인왕경ꡕ, 8권본 ꡔ금광명경ꡕ은 신라에서 강설되거나 법회에서 강경한 불전들인데, 이들은 수나라와 관련이 깊은 경전들이다. 그리고 김부식에 의해서 기록된 자장의 입당연대는, 안함의 예로 볼 때 두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28)
  3. 자장의 몰년 문제
  자장의 만년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기존에 정리된 내용에 의거해 볼 때 80세 장수설과 영휘 연간의 입적설의 두 가지로 좁혀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자장의 나이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ꡔ속고승전ꡕ에 나오는 80세 장수설이 있다. 그리고 그에게 출사령이 떨어진 나이가 25세라고 한 기록을 80세 장수설과 함께 합쳐서 산출해 본다면 608(-614)년부터 688(-694)년까지 생존한 것이 된다.
  이와는 달리 도세의 ꡔ법원주림ꡕ에는 분명하게 영휘 연간(650~655)에 졸했다고 그의 몰년에 대해서 나와 있어, 이를 취할 경우 그의 생애는 매우 짧아서 40여세 정도를 산 것이 된다.
  이 두 견해는 사실상 다 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만년의 행적이 분명하지가 않아 취하기가 어렵고, 후자의 경우 영휘 연간에 졸했다고 하는 것도 그의 아버지 무림공이 영휘 연호를 처음 신라에 사용한 진덕왕 대(647~653)에 활동하고 있어, 그의 졸년을 영휘 연간(650~655)으로 잡는다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장의 몰년에 대해서는 도세의 ꡔ법원주림ꡕ의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654년을 전후하여 입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진덕왕 3년(649)의 중국 복식의 착용과 4년(650)에 중국의 정삭과 연호의 사용을 놓고 이를 주도한 인물을 ꡔ삼국사기ꡕ 등에서는 김춘추가, ꡔ삼국유사ꡕ 등에서는 자장으로 각기 나뉘어 기술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김춘추의 유교치국책이 자장의 불교치국책을 누르고 중대 왕실을 개창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로 인해 자장이 오대산으로 물러났다가 곧 바로 입적한 것으로 본 유력한 견해가 있다.29) 즉 자장이 만년에 왕경에 머무르지 못하고 오대산과 태백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헤매다가 쓸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하고 있는 기사를 김춘추와의 정쟁에서 밀린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행한 불교치국책이 김춘추의 유교정책과 다른 측면임을 들고 있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 대에 불교식 왕명이 유교식 시호로 바뀌었다고 해서 신라에 유교정책이 실시됐다고 보기에는 시기적으로 빠르다고 생각된다. 신문왕도 “오계응세 십선어민 치정공성”하였다 하여 불교를 널리 편 임금으로 나오고 있으며,30) 특히 정책의 경우 왕과 신하가 함께 입안하고 정책을 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유학자인 설총과 녹진,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인재등용의 주장이 고려의 최승로에 이르러 정책으로 채택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갑자기 국가정책으로 유교치국책이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신흥귀족으로서 선덕여왕과 행보를 같이 한 인물이었다. 김춘추가 당에 가서 청병외교를 하려고 하였을 때, 자장이 이를 주선하고 도와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자장이 시행하려고 하였던 당의 공복제나 영휘 연호의 사용의 주장을 김춘추가 그대로 이어받아 신라에서 실시하였던 것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김춘추 위주의 사실로 서술된 것이 아닌가 한다.
 
Ⅲ. 율사로서의 위상

  자장을 역사적 인물로서 신라불교사 속에서 평가하자면, 율사로서의 위상이 가장 크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나, 기존의 평가는 매우 다양한 면을 보이고 있다.
  ① 5교9산 가운데 계율종조의 종조로서 평가되었을 때는 그의 율사로서의 위치가 계율종의 초조로서 크게 부각되었고, 신라에 최초로 계단을 설치한 인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특히 ② 재래 무속 신앙의 신념체계에서 불교적 신념체계로 변화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후 ③ 그는 화엄사상에 기반을 둔 문수신앙을 선양한 인물로, 또는 ④ 화엄가로서 신라 화엄초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까지 나온 바 있다. 그리고 ⑤ ꡔ불설문수사리반열반경ꡕ을 자장의 문수신앙과 연결하여 보고, 그의 활동을 불교치국책이라고 평가한 견해도 있다. 근래 ⑥ 자장은 소승계율과 보살계 등 대승율전을 모두 섭렵하고 이를 홍보하였는데, 그 근본이 되는 이념은 ꡔ섭대승론ꡕ 등 대승경전과 유가보살계사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1)
  이러한 내용들은 그의 자료에 나오는 내용들을 가지고 언급한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자장에게 나타난 일면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역사적 인물로서 신라불교사와 관련지어 평가하자면 율사로서의 위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장의 율사로서의 위상을 사상적 배경과 대국통으로서의 활약상이라는 두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계행의 사상적 배경
  자장은 살생을 좋아하였던 것을 뉘우치고 출가하게 되었다는 출가의 동기에서부터 불살생 계율과 관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죽이려고까지 하면서 그의 출가를 만류하는 선덕여왕에게 계를 지키면서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면서 백 년을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어, 스스로 계를 지키면서 율사로서의 위상을 자신이 만들어 가고 있다.
  자장은 중국에 유학해 있으면서도 계를 받고 계를 준 기록이 있으며, 법상(567~645)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있고, 종남산의 도선과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호의로 광덕방의 승광별원에 머물면서 도둑에게 계를 주어 개과시키기도 하고, 장님을 눈뜨게 하는 등의 이적을 보여 명성을 얻었으므로 그에게 수계를 받는 이가 하루에도 수천인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가 종남산 운제사의 동악에 거주하자 인신이 그로부터 계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귀국 이후 황룡사에서 여러 대중들에게 ꡔ보살계본ꡕ을 7일 밤낮으로 강연하였더니,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껴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그의 ꡔ사분률갈마사기ꡕ와 ꡔ십송률목차기ꡕ 등의 저술과 관련시켜 이해해 본다면, 그는 ꡔ사분율ꡕ 계통의 소승율을 스스로 수행하면서 철저히 체득하였고, 법상을 만나 대승보살계를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라에 돌아와 ꡔ보살계본ꡕ을 강연하였으며, ꡔ사분율ꡕ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또한 ꡔ화엄경ꡕ 만 게송을 강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폈던 자장의 율사로서의 사상적 배경으로 ꡔ사분율ꡕ을 채용해서 썼을 것이라는 점은 연구자들이 대개 합의하고 있는 상황이나, 그가 펼쳤던 대승보살계에 대해서는 범망계 내지 유가계로 보기도 하여 의견이 갈리고 있다. 먼저 범망계로 보는 입장은 그와 함께 율부를 펴는데 도와주었던 원승이 ꡔ범망경ꡕ 관련 저술이 있고, 그 자신이 화엄과 관련한 문수보살 신봉자로서의 사적이 있는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32) 다음으로 유가계였을 것으로 보는 입장은 ꡔ섭대승론ꡕ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보살계를 유가계였을 것으로 보고 이와 관련된 ꡔ섭대승론ꡕ33)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라에서 ꡔ섭대승론ꡕ은 원광에 의해 최초로 강설되었다. 섭론 내지 양론34)으로 불리는 ꡔ섭대승론ꡕ은 원광이 수나라의 장안에서 11년 동안 연구 강설한 주요 교재였다. 원광은 후학을 양성하면서 ꡔ섭대승론ꡕ을 강설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이 섭론이 대승불교사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개론서적인 성격의 논서로, 이 논에 의거해서 후학들이 불교교학의 체계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강론을 들은 많은 신라승들은 다양하고 깊이 있는 불교 교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과 인도로 구법을 위해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우선 천축국 인도로 구법 유학을 한 신라인들은 ꡔ섭대승론ꡕ의 범본 불경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 이는 신라승 혜업이 정관 연간(627~649)에 나란다사에서 ꡔ양론ꡕ 즉, ꡔ섭대승론ꡕ을 필사하여 고국으로 가져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도에서 입적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나라의 의정이 나란다사에 머물면서 불서를 조사하다가 “불치목 아래에서 신라승 혜업이 필사한다.”라고 적혀있는 ꡔ양론(섭대승론)ꡕ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ꡔ대당서역구법고승전ꡕ권상 「신라혜업법사전」에 이 사실을 밝혀 놓음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에 유학한 자장과 원측 등이 당의 법상에게서 ꡔ섭대승론ꡕ을 사사하였다는 점이다. 자장은 원광으로부터의 강설을 접한 후 다시 당의 법상에게 사사한 것이다. 때문에 원광과 자장의 교학체계는 바로 ꡔ섭대승론ꡕ에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자장이 저술한 ꡔ관행법ꡕ은 위파사나로 번역되는 관을 행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되는데, ꡔ섭대승론ꡕ과 관련되는 내용이 아닐까 한다. 유식학파의 수행법으로 지와 관이 보이며, 5도, 6바라밀, 10지 등의 계위에 따라 수행하는 내용이 있다. 이 가운데 관은 제법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것으로, 오상과 오과의 양상을 언급하고 있다.35) ꡔ섭대승론ꡕ의 이러한 수행은 ꡔ유가사지론ꡕ, ꡔ해심밀경ꡕ 등으로 이어져 유가행으로 지관이 계속 추구되고 있다.36)
  그런데 신라에서의 ꡔ섭대승론ꡕ 강경은 분황사승들에 의해 계속되어진 면모가 보이고 있다. 자장과 원효가 분황사승으로 주석하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장은 ꡔ섭대승론ꡕ을 강경한 바 있고, 원효는 섭론을 소, 초, 약기 등37) 3종의 주석서를 내고 있다. 또한 현륭은 분황사승으로 ꡔ섭대승론ꡕ에 관해서 혜휴의 설을 인용하여 연구하였는데, 말년에는 일본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현륭이 6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 보낸 신라 사절의 일원으로 ꡔ섭대승론ꡕ 등 신라 구유식의 내용을 일본에 전해 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에는 자장 - 원효 - 현륭으로 이어지는 분황사승의 ꡔ섭대승론ꡕ 강의가 왕경에서 계속되어졌고, 일본에까지 전해진 것이다.38)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자장의 ꡔ보살계본ꡕ은 범망계의 요소도 있었겠지만, ꡔ섭대승론ꡕ으로 대표되는 구유식의 유가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ꡔ섭대승론ꡕ과 아미타신앙과의 관계에 대해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즉 자장이 ꡔ아미타경소ꡕ와 ꡔ아미타경의기ꡕ를 저술한 것을 정토신앙에 제동을 걸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39) 그러나 의상도 귀국 후 부석사에 좌우보처도 없는 아미타불만을 모셨으므로 지금까지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만이 모셔져 있을 뿐인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40)
  2. 대국통으로서 활약
  자장이 율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첫 번째로 대국통으로서 신라 승니들의 지계를 엄격히 체계화하였다는 점이다.
12) 그가 돌아오자 온 나라가 환영하였다. 왕이 명하여 분황사에 살게 하고 급여와 호위를 극진히 하였다. …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승니의 모든 규범을 승통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였다.41)
13) 왕은 자장이 대국에서 경앙받고 정교를 널리 유지하였으므로, 그와 같은 강리가 아니고서는 숙청할 수 없다고 하여 자장을 대국통으로 명하고 왕분사에 거주하도록 하였다.42)
14)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불교가 동쪽으로 퍼져서 들어온 지 백 천 년이 되었지만, 주지에 관한 제도와 질서가 없으니 법규로서 다스리지 않으면 규율을 확립할 수 없다”고 하여 자장을 대국통으로 명하고 무릇 승려들의 일체 규정을 승통에게 맡겨 이것을 주관하게 할 것을 아뢰었다. 자장이 이런 좋은 기회를 만나 용기를 내어 불법을 널리 전하였다. 영을 내려 승니 5부에 각각의 구학을 더하게 하고 보름마다 계를 설하고 겨울, 봄에 시험하여 지계와 범계를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 관리하고 유지하게 하였다. 또 순행하는 사자를 보내어 지방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점검하여 승려의 과오를 경계하고 독려하며, 불경과 불상을 엄숙히 장식할 것을 떳떳한 규례로 삼으니 한 시대의 불법수호가 이때에 와서 융성하였다. 공자가 위에서 노에 돌아와 악에 아송을 바르게 하여 그 마땅함을 얻게 한 것과 같았다. 이때를 당하여 국내 사람으로 계를 받고 불법을 믿는 이가 열 집 가운데 여덟 내지 아홉 집이 되었다. 머리 깎고 승이 되기를 원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늘어났다. 이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자를 받았다.43)
  자장이 귀국 이후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대국통으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숙정과 계율의 확립을 위해 힘쓴 상황이 잘 그려져 있는 사료들이다.
  그런데 그는 삼국의 항쟁 속에 있으면서 왜 신라 승니들의 계율을 확고히 하려 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를 통한 국가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황룡사가 그 중심이었다고 보기도 하고,44) 승려의 역할과 영향력이 중시되는 분위기에 비례하여 지배층이 이들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승정기능을 강화하려는 분위기와도 상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45) 신라 불교교단의 이상적인 존재모습을 석가모니 당시의 청정한 교단에서 찾고자 한 것으로 본 견해46)가 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그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자장이 행한 여러 활동이 당시 신라의 정황과 관련하여 볼 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율은 도덕적인 측면을 가진 것이므로, 자장은 지율을 통해 당시 신라 승려들의 도덕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교단통제를 위해서 구체적인 규제가 필요했으므로, 출가자 위주의 계율이라 할 수 있는 ꡔ사분률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출가자 개개인의 죄악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금제적 측면과 교단을 규율한다는 타율적 측면이 두드러진 면이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승니들이 세작으로 많이 활동하였다.47) 특히 장수왕이 보낸 승 도림에 의해 백제는 수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이 고갈됨으로써48) 고구려의 공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웅진으로 천도까지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의 불교공인이 늦은 이유도 이러한 승려들의 세작으로서의 활동이 부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전도승인 정방, 멸구비 등이 신라에서 죽임을 당한 것도49) 이들이 세작인 것으로 오해받은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게 계속 몰리고 있던 위기의 상황에서,50) 자장은 승니들,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을 순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단속하여 국가의 기밀 유지와 보안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또한 승니들은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불교적 윤리를 확립시킴으로써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 내어 신라불교가 호국불교로 가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자장이 율사로서의 진면목을 보인 두 번째 점은 통도사에 계단을 쌓음으로써 신라승들이 여법하게 수계를 받을 수 있는 관단을 설치한 것이다. 신라 중고기 불교교단의 체제를 정비하고 확립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며, 이는 곧 형식을 중시하고 출가자 위주의 입장에 서있었던 관계로, ꡔ사분률ꡕ과 같은 소승계가 유용하였다고 보고 있다.51)
  또한 자장은 이를 위해 강관을 갱치하였는데,52) 이는 대국통․대도유나․대서성 등의 증치기사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당의 10대덕제와 일본의 10사제와는 다른, 신라 계단을 유지하는 형태의 10인의 강관이 두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3) 그런데 신라 하대의 기사이기는 하지만, 신라에서도 구족계를 받을 때 10사의 존재가 보인다는 점이다.54) 10사란 구족계를 줄 때 계단에 오르는 승려들로, 전계화상․갈마아사리․교수아사리의 3사와 그 좌우에 앉아 수계를 증명하는 7증사를 말한다. 혹 자장에 의해 증치되었다는 대국통․대도유나․대서성 등이 3사로서 7증사와 함께 10사를 이루어 관단에서 구족계를 준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승려가 되려는 이가 날로 늘어나서 통도사계단을 쌓아 계를 받으러 오는 이들에게 수계하기 위해서는 매우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장의 통도사 계단 축조에 대해서 여러 의문들이 도출되어 있으나, 자장이 당에 있으면서 도선을 비롯한 서역승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계단 축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55) 따라서 그는 신라에 최초로 관단을 설치하여, 사미, 사미니 등 출가승에게 구족계를 주어 여법한 승니를 배출시킬 수 있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그의 율사로서의 위상은 신라사회를 불교사회로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승가의 역할을 확고히 한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즉, 원광이 신라를 지키는 최전선에 있던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면, 자장은 그 범위를 넓혀 주변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승려들의 계율생활을 확립시킴으로써 주로 지배층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불교를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원효의 포교에 이어 진표에 의한 일반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계를 받아 지닐 수 있는 바탕을 확실하게 정립해 놓은 것이다.

                            Ⅳ. 맺음말

  자장의 생애를 그의 입당의 문제와 몰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제까지의 논의들을 정리해 보고자 하였다.
  그를 신라 중고기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에 활약하였던 역사적 인물로 규명하고자 하여 그의 당나라에서의 오대산행은 후대에 윤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의 문수신앙에 대한 연구는 ꡔ화엄경ꡕ에 기반을 둔 것이든 ꡔ문수사리반열반경ꡕ에 기반을 둔 것이든 새롭게 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몰년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신역불교의 유입에 따른 사상기반의 혼란 문제로 인해, 만년에 태백산과 오대산 등지를 유오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보았고, 정확한 몰년에 대한 의견은 유보하였다.
  그의 율사로서의 위상은 신라 승니교단의 정비와 확립에 있었다고 보고, 특히 통도사 계단의 창설은 최초의 관단을 설치하여 여법하게 수계를 받을 수 있게 한데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에 따른 신라의 위기 상황을 신라의 승니를 단속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인들을 정신적으로 안정시키고, 불교적 신념으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 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국하면서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모셔왔는데, 군사전략적으로 요충지에 사찰과 함께 불사리탑을 세워 호국 불교의 원형을 만들어 내었고, 재래 안함 등에 의해 주창된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통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예언을 실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식 연호의 사용과 공복의 착용을 주장하여 김춘추에 의해 실행이 되지만, 그는 신라사회가 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것을 염원한 국제통의 실천적 승려였다고 하겠다.



【 국문초록 】
신라의 고승 자장의 생애를 입당 연대와 입적한 해에 관한 두 가지 난제에 초점을 맞추어 기존의 논의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장을 신라 중고기 선덕, 진덕여왕 대에 활약한 역사적 인물로 규명하여, 그가 당나라에 가서 오대산에 갔던 행적은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문수신앙에 대한 연구는 ꡔ화엄경ꡕ에 기반을 둔 것이든, 또는 ꡔ문수사리반열반경ꡕ에 기반을 둔 것이든,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입적 년도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신역 불교의 유입에 따른 사상기반의 혼란 문제로 인해, 그의 만년에 왕경에 머무르지 못하고 태백산과 오대산 등지를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정확한 입적 년도에 대한 의견은 유보하였다.
그의 율사로서의 위상은 신라 승니 교단의 정비와 확립에 있었으며, 특히 통도사 계단의 창설은 신라 최초의 관단을 설치하여 여법하게 수계를 받을 수 있게 한데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침입에 따른 위기 상황을 신라의 승니를 단속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인들을 정신적으로 안정시키고, 불교적 신념으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 내려고 한 까닭이었다.
한편 그는 귀국하면서 중국에서 진신 사리를 모셔왔는데, 군사전략적으로 요충지에 사찰과 함께 불사리 탑을 세워 호국 불교의 원형을 만들어 내었고, 재래 안함 등에 의해 주창된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통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예언을 실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식 연호의 사용과 공복의 착용을 주장하여 김춘추에 의해 실행이 되지만, 그는 신라사회가 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것을 염원한 국제통의 실천적 승려였다고 하겠다.

【 주제어 】
당나라의 오대산 / 문수신앙 / 신라의 오대산과 태백산 / 신라의 통도사 / 사리탑 / 호국불교 / 황룡사9층탑 / 중국 연호 / 중국 공복 / 국제사회의 일원





















【 Abstract 】
              The life of Jajang and His Position
        as a Master of the Buddhist Commandments

                                             Kim, Bok-Soon
                    (Prof.,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Dongguk University in Gyungju)

  This study examines the existing studies on the life of Jajang, a famous Buddhist priest in Shilla, by focusing on two difficult problems; when he went to Tang dynasty and when he died.  I illustrated that Jajang was a historical person in the period of the queens, Sunduck and Jinduck, of Shilla dynasty. I also indicated that his activities in the Odae Mountain in Tang were fabricated after his death.  In this sense, I think that his study on religion of Munsu has to be re-illustrated whether it is based on ꡔFo-sue Wunsushilybanniepanjingꡕ(ꡔ불설문수사리반열반경ꡕ) or ꡔWhaenjingꡕ(ꡔ화엄경ꡕ).  Regarding the year of his death, I only estimated that he wandered over the Odae Mountain and the Taeback Mountain in Shilla without staying in the capital city just before he died because of his philosophical confusion derived from the newly translated Sutra rather than the political reasons.  Thus, I withhold the ascertainment on the exact year of his death.
  His position as a teacher of the Buddhist commandments is based on his efforts to regulate and settle the Sangha (religious fraternity) for male and female Buddhist priests. Especially, he organized the systematic form for the Buddhist ordination at Tongdo temple of Shilla.  This provided the Shilla government with the opportunity to establish the first governmental organization to ordain the novice the Buddhist priest according to the Buddhist laws.  He tried to stabilize the mind of Shilla people and strengthen the unity of Shilla people through Buddhism, as well as to supervise the Buddhist priests of Shilla, in order to overcome the invasion from Koguryo and Backje dynasty.
  He brought relics of Buddha when he returned from Tang dynasty and built the Sarira Stupas and Buddhist temples in the strategic areas.  He actually developed a Buddhist model to protect the country.  For instance, he was a person who realized the prediction on unification of the three dynasties (Shilla, Koguryo, and Backje), through the construction of the nine-story tower in Whangyong temple which had been asserted by the previous Buddhist priests including Anham.  In addition, he argued to use the Chinese name of an era and Chinese official costume, and the King, Kim Chun-Chu, accepted his argument later.  In sum, he was a practical Buddhist priest, as an expert in the field of international relations, who wanted Shilla dynasty to be a member of international community through the open-door policy.
               



【 Key Word 】
the Odae Mountain in Tang / religion of Munsu / the Odae Mountain and the Taeback Mountain in Shilla / Tongdo temple of Shilla / the Sarira Stupas / a Buddhist model to protect the country / the nine-story tower in Whangyong temple / the Chinese name of an era / Chinese official costume / a member of international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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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동국대 인문과학대학 국사학과 교수.
1)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야」 ꡔ진단학보ꡕ8, 진단학회, 1931 ; 안계현, 「자장-호국이념의 율사」 ꡔ한국의 인간상ꡕ3 ; 채인환, ꡔ신라불교계율사상연구ꡕ 국서간행회, 1977 ; 신종원, 「자장의 불교사상에 대한 재검토 -신라불교 초기계율의 의의」 ꡔ한국사연구ꡕ39, 한국사연구회, 1982 ; 남동신, 「자장의 불교사상과 불교치국책」 ꡔ한국사연구ꡕ76, 한국사연구회, 1992 ; 「자장과 사분율」 ꡔ불교문화연구ꡕ4, 영축불교문화연구원, 1995 ; 「신라 중고기 불교치국책과 황룡사」 ꡔ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황룡사의 재조명ꡕ22, 경주시 신라문화선양회, 2001 ; 정병조, 「자장과 문수신행」 ꡔ신라문화ꡕ3.4합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7 ; 김두진, 「자장의 문수신앙과 계율」 ꡔ한국학논총ꡕ12, 국민대 국사학과, 1989 ; 이기백, 「황룡사와 그 창건」 ꡔ신라의 국가불교와 유교ꡕ, 1978 (ꡔ신라사상사연구ꡕ, 1986) ; 신선혜, 「신라 중고기 불교계의 동향과 승정(승정)」 ꡔ한국사학보ꡕ25, 고려사학회, 2006.
2) 자장이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진평왕 30년(608)에서 36년(614) 사이로 보고 있다. 남동신, 위의 논문, 1992, p.8 참조.
3) 황수영, ꡔ한국금석유문ꡕ, 일지사, 1981; 허흥식, ꡔ한국금석전문ꡕ1, 아세아문화사, 1983 ; 국립중앙박물관, ꡔ불사리장엄ꡕ, 199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ꡔ역주 한국고대금석문ꡕ3, 1992 ; 국립경주박물관, ꡔ문자로 본 신라ꡕ, 2002 등에 원문과 해석, 주석 등이 실려 있다.
4) ꡔ삼국유사ꡕ권4, 이혜동진.
5) 이에 대해 신라승들의 출가동기가 비슷한 것이 여럿임을 들어 그저 가져다 붙인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6) 민지가 1307년에 찬술한 「봉안사리개건사암제1조사전기」 ꡔ오대산월정사사적ꡕ에 나오는 내용에 의거하여 추정한 나이이다. 신종원, 위의 책, p.255와 남동신, 위의 논문, 1992, p.8을 참조.
7) ꡔ삼국유사ꡕ권1, 진덕왕 조.
8) 주보돈,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 ꡔ(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ꡕ상, 1994, pp.206-234 ; 정용숙, 「신라 선덕왕 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 ꡔ(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ꡕ상, 1994, pp.235-266 ; 박용국, 「선덕왕대 초의 정치적 실상」 ꡔ경북사학ꡕ23, 2000, pp245-273.
9) 중국 서안(장안)의 종남산에는 자장이 머물던 곳에 신라 왕자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0) 이에 대해 초기의 연구자들은 자장의 나이가 도선보다 연장일 것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근래에는 거의 전 연구자들이 교류사실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종남산에 3년씩이나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도선이 운제사에 있었던 기록에 의거한 때문이다.
11) ꡔ삼국사기ꡕ권4, 선덕여왕5년 조.
12) ꡔ삼국유사ꡕ권3, 황룡사9층탑 조.
13) ꡔ삼국유사ꡕ권3, 황룡사9층탑 조에서 “사중기운 어종남산원향선사처 수건탑인유”라고 주기하고 있는데, 이 사중기의 기록은 「황룡사찰주본기」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14) 김두진, 위의 논문, p.9
15) ꡔ삼국유사ꡕ권4, 자장정률 조에는 “장공초익지 고당승전불재”로 주기하고 있다.
16) ꡔ삼국유사ꡕ권3, 황룡사구층탑 조.
17) ꡔ삼국유사ꡕ권3, 황룡사구층탑 조.
18) ꡔ삼국유사ꡕ권3, 대산오만진신 조.
19) ꡔ삼국유사ꡕ권4, 자장정률 조.
20) ꡔ삼국유사ꡕ권3, 대산오만진신 조.
21) 정병조, 위의 논문, p.149.
22) 김두진, 위의 논문, pp.18-22.
23) 이행구, 「한국 화엄의 초조고」 ꡔ불교문화연구ꡕ4, 영축불교문화연구원,     1995, p.27.
24) 신종원, 위의 책, p.258.
25) 남동신, 위의 논문, p.10.
26) 김복순, 「신라 하대 화엄의 일예 -오대산사적을 중심으로」 ꡔ사총ꡕ33, 1988 ; 「신라 오대산사적의 형성」 ꡔ강원불교사연구ꡕ, 한림대 과학원, 1996,  pp.194-199.
27) 신종원, 「안홍과 신라불국토설」 ꡔ신라초기불교사연구ꡕ, 1992, pp.244-245 ; 남동신, 「신라 중고기 불교치국책과 황룡사」 ꡔ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ꡕ22, 2001, p.26.
28) 김복순, 「수당의 교체정국과 신라 불교계의 추이」 ꡔ한국고대사연구ꡕ43, 2006, p.190.
29) 남동신, 위의 논문, 1992, p.42
30) 황수영 편, 「신라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명」 ꡔ한국금석유문ꡕ, 1985, p.140.
31) ①은 김영수, 채인환, ②는 신종원, ③은 김두진, ④는 이행구, ⑤는 남동신, ⑥은 이만에 의해 각기 견해가 도출되었다. 주1)의 논문 참조.
32) 채인환, 「신라불교계율사상연구」3 ꡔ불교학보ꡕ31, 1994, p.51
33) ꡔ섭대승론ꡕ은 진제에 의해 번역되면서 축자적인 해석이 아닌 대승의 10가지 수승한 의미를 논증하여 대승이 부처님의 진의를 드러낸 것으로, 1. 아뢰야식, 2. 삼종자성 3. 유식교, 4. 육파라밀, 5. 보살십지, 6. 계, 7. 정, 8. 무분별지, 9. 무주처열반, 10. 삼종불신의 내용이다.
34) 중국 양 무제의 초청에 의해 546년 남경에 온 진제가 번역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
35) 이지수, 「유식학파의 수행법 -무착의 ꡔ섭대승론ꡕ을 중심으로」 ꡔ가산학보ꡕ9, 2001, p.71
36) 김치온, 「유가행파의 지관과 관련심소법에 대하여」 ꡔ불교학보ꡕ40, 2003, pp.233-241
37) ꡔ섭대승론소ꡕ4권, ꡔ양섭론소초ꡕ4권, ꡔ섭대승론세친석론약기ꡕ4권
38) 이만, 「신라불교에 있어서 ꡔ섭대승론ꡕ의 영향」 ꡔ한국불교학ꡕ30집, 2001,   pp.298-315.
39) 이기백, 1986, 「신라 정토신앙의 기원」 ꡔ신라사상사연구ꡕ, p.127.
40) ꡔ섭대승론ꡕ은 신라의 화엄종과 밀교에도 그 영향을 끼친 것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화엄종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의상이 처음 중국에 유학하고자 하였던 의도가 신유식을 배우고자 한 것이었으므로, 신라에 있으면서 구유식인 ꡔ섭대승론ꡕ을 익혔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 유학한 이후에도 의상은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스승인 중국 화엄종의 2조 지엄이 섭론종사인 보광사의 법상에게 ꡔ섭대승론ꡕ을 배웠을 뿐 아니라, 무성무성의 석론도 주석하여 ꡔ무성석론소ꡕ4권을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화엄종은 일정부분 구유식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만, 위의 논문, 2001, pp.305-306.
41) ꡔ삼국유사ꡕ권4, 자장정률 조.
42) ꡔ속고승전ꡕ 「자장전」.
43) ꡔ삼국유사ꡕ권4, 자장정률 조.
44) 이기백, 「황룡사와 그 창건」 ꡔ신라의 국가불교와 유교ꡕ, 1978 (ꡔ신라사상사연구ꡕ, 1986, p.62)
45) 채상식, 「자장의 교단정비와 승관제」 ꡔ불교문화연구ꡕ4, 영축불교문화연구원, 1995, p.78.
46) 남동신, 위의 논문, 1995, p.100.
47) 김복순, 「삼국의 첩보전과 승려」 ꡔ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ꡕ, 1992, pp.144-163.
48) ꡔ삼국사기ꡕ권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 조.
49) ꡔ해동고승전ꡕ권1, 석아도전.
50) ꡔ삼국사기ꡕ권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11년 조에 의하면, 자장이 귀국하기 전 해인 642년에 신라는 당항성의 위기와 대야성의 함락으로 전선이 경산으로까지 후퇴해 있던 상황이었다.
51) 최원식, ꡔ신라보살계사상사연구ꡕ, 민족사, 1999, p.54.
52) ꡔ삼국사기ꡕ권40, 잡지9 직관 하.
53) 신선혜, 위의 논문, pp.108-112.
54)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 ꡔ역대고승비문 -신라편ꡕ(이지관편), 1994, p.75, “계이십이 수대계야 … 십사위왈 차사미감응 기지우기야”
55) 채인환, 위의 논문, p.59.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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