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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아하라(āhāra)를 통한 수행 연구 [대각사상]

출처 수집자료

초기불교의 아하라(āhāra)를 통한 수행 연구


신 병 삼 *1)


• 목 차 •
                     Ⅰ. 서론
                     Ⅱ. 아하라의 특징
                     Ⅲ. 네 가지 아하라 분석
                     Ⅳ.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
                     Ⅴ. 탁발음식과 관련된 두타행
                     Ⅵ. 결론




I. 서 론

 “모든 존재는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이는 붓다의 십대 명호 중 세간해(세간해; 세상을 잘 아시는 분)에 대한 맨 처음 설명으로서, “존재[생명]”와 “음식”을 대등한 위치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그 음식을 경전에서는 “아하라(āhāra)”라고 하는데, 한역으로는 “식(식)”으로 번역되고, 영어로는 “nutriment”(자양분)라고 번역한다. ‘āhāra’의 어원을 분석하면 ‘ā-√hṛ’에서 나온 용어이다. ‘√hṛ(harati)’는 ‘가져가다’라는 동사인데, 앞에 ‘ā’가 붙여서 반대의 의미인 ‘가져오다’(āharati)라는 말이 되었다. 그 ‘가져오다’의 명사형이 “āhāra”(가져온 것)이다.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 임시적으로 결합된 존재[주체, 가아]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상경계[객체, 타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에너지원[식]을 섭취해야만 한다.
 지속적 관계는 주로 “수용”[자극흡수, 가져옴] 속에서 성립가능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 “주는 것”[hāra; give]과 “받는 것”[āhāra; take]이 전무하다면 그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 “가져오는 것”을 경전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먹는 음식[단식], 접촉[촉식], 의도[의사식], 인식[식식]이다. 간략히 물질적인 ‘먹는 음식’과, 대상경계 속에서의 정보섭취인 ‘정신적인 음식’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대상경계 속에 활동하는 주체가 ‘무언가’를 “자신의 내부로 가져옴”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지속적 생명활동이 유지된다.
 본고에서는 주로 한역의 “식(식)”과 영어번역형태의 “자양분”을 사용하여 “아하라”를 설명하고자 한다. 흔히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양식”이라는 것이 곧 “āhāra”의 개념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아하라”와 관련된 국내외 논문은 Nyanaponika Thera의 The Four Nutriments of Life ; An Anthology of Buddhist Texts Translated from the Pali, with an Introductory Essay1)가 유일하다. 그런데 이 논문은 주로 니까야의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인데 반해서, 본고는 논서의 수행론을 위주로 논의를 진행한다. 앞으로도 이 부분에 대한 심층적 연구인 불교와 음식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Ⅱ. 아하라의 특징
 
 존재는 음식․업(업)․마음․온도 네가지를 조건2)으로 한다.
 이 중에서 온도․마음․음식 세가지에서  물질의 가벼움(lahutā), 부드러움(mudutā)과 적합함(kammaññatā)이 발생한다. 음식․업․마음․온도네가지에서 특징적인 물질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3)가 발생한다.
 이처럼 업과 마음과 온도와 음식 네 가지가 물질의 조건인데, 오직 과거의 업만이 물질에게 조건이 된다. 마음은 그것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마음에서 발생한 존재의 조건이 된다. 온도와 음식은 이 온도와 음식이 존재하는 순간에 온도와 음식에서 발생한 물질의 조건4)이 된다. 그래서 음식이 발생하면 물질이 발생하고, 음식이 소멸하면 물질이 소멸한다.5) 따라서 음식은 물질인 발생조건인 동시에, 결핍[부재]의 경우에는 소멸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중생의 목숨은 들숨날숨, 위의(위의), 추위와 더위, 근본물질(사대), 음식과 관련6)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음식은 물질과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작용7)을 한다.
 먹는 음식은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조건이 되고, 정신적인 음식은 관련된 법들로부터 발생한 물질들의 조건8)이 된다. 또한 과보로 나타난 무기인 음식은 재생연결 순간에 관련된 온(온)들과 업에서 발생한 물질들의 조건9)이 된다.
 태아에게는 그의 어머니가 먹거리와 마실거리의 음식을 먹으면, 그것으로 모태에 있는 아기는 생명을 유지한다.10) 먹는 음식[단식]으로 살아가는 태생의 중생들은 어머니가 먹은 음식이 그들의 몸에 공급될 때, 그들의 입에 발생한 침을 처음으로 삼키는 순간에 음식에서 발생한 순수한 ①지 ②수 ③화 ④풍 ⑤형상 ⑥냄새 ⑦맛 ⑧영양소의 팔원소11)가 나타난다.
 음식에서 발생하는 것은 열 네 가지 물질인데, 업에서 발생한 물질을 조건으로 얻은 뒤 그것에 의존하여 머무름에 이른 영양소에서 발생한 ①~⑧여덟 가지 물질들 ⑨허공의 요소 ⑩가벼움 ⑪부드러움 ⑫적합함 ⑬생성 ⑭상속이다. 음식에서 발생한 물질들 중 어느정도 머문 영양소가 다른 여덟 가지 물질을 발생시킨다. 그곳에서도 영양소는 다른 여덟 가지 물질들을 발생시킨다. 이와 같이 열 번이나 열두번 일어나도록 연결한다. 보통 사람이 하루에 먹은 음식물은 7일 동안 유지되고, 데바(deva)들의 음식은 한두 달 동안 유지된다. 어머니가 먹은 음식물은 태아의 몸에 공급되어 물질을 발생시킨다. 몸에 바른 음식도 물질을 발생시킨다. 업에서 발생한 음식은 어느정도 머물다가 물질을 발생시킨다. 그곳에서도 영양소는 다른 여덟 가지 물질을 발생시킨다. 이와 같이 네 번이나 다섯 번 일어나도록 연결한다.
 음식을 조건한 온도에서 발생한 것은 음식에서 발생한 불의 요소가 어느정도 머물다가 온도에서 발생한 여덟 가지 물질들을 발생시킨다. 그곳에서 음식은 음식에서 발생한 물질들에게 업(업)과 조건이 된다. 다른 것들에게는 의지하는 조건, 음식의 조건, 존재하는 조건, 떠나가버리지 않아서 유지하는 조건12)이 된다.
 음식에서 발생한 물질은 굶주림과 포만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굶주릴 때에 발생한 물질은 마르고 생기가 없다. 바싹 마른 그루터기와 같고 숯바구니에 앉아있는 까마귀처럼 윤기가 없고 꼴이 사납다. 포만할 때 발생한 물질은 포동포동하고, 활기차고, 연하고, 윤기가 있고, 촉감이 좋다. 굶주릴 때 발생한 물질은 포만할 시점에 이르지 않고 오직 그곳에서 소멸하고, 포만할 때에 발생한 물질은 굶주릴 시점에 이르지 않고 오직 그곳에서 소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무상)하고, 괴로움[고]이고, 무아(무아)라는 세가지 특징13)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한 물질에 대해 7가지 방법으로 명상수행이 행해진다. ①취하고 버림으로써, ②각 단계에서 늙은 것이 사라지는 물질에 따라, ③음식에서 발생한 물질에 따라, ④온도에서 발생한 물질에 따라, ⑤업에서 발생한 물질에 따라, ⑥마음에서 발생한 물질에 따라, ⑦자연적으로 발생한 물질14) 등의 경우에서이다. 이처럼 배고픔과 배부름, 또는 발생한 물질의 종류에 따라 수행이 이루어진다.
  또한 붓다의 십대 명호 중에서도 ‘세간해(Lokavidū, 세상을 잘 아시는 분)’에 대한 설명으로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라는 것을 잘 아시는 분”15)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붓다는 먹는 음식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서의 정보섭취인 접촉, 의도, 인식 등도 음식의 범주로서 설명한다. 이것은 불세존의 “음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Ⅲ. 네 가지 아하라 분석

 네가지 아하라는 먹는 음식[kabaḷīkāra-āhāra, 단식], 접촉[phassa- āhāra, 촉식], 의도[manosañcetana-āhāra, 의사식], 인식[viññāṇa-āhāra, 식식]이다. 우선 먹는 음식은 물질적인 몸의 양식이고, 나머지는 정신적인 마음의 양식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아하라(āhāra)는 어원상 “가져오다(āharati)”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가져오는 것인가?
 먹는 음식은 ①지(지) ②수(수) ③화(화) ④풍(풍) ⑤형상 ⑥냄새 ⑦맛 ⑧영양소를 가져온다. 이 여덟가지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인데, 이들은 항상 서로 묶여서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인 대상에 나타나 있다. 이 여덟가지는 깔라빠(kalāpa)의 최소의 구성요소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팔원소’라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깔라빠는 이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징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9원소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10원소16)가 된다.
 접촉은 괴로움[고], 즐거움[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불고불락사]인 세가지 느낌을 가져온다. 의도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세가지 존재로부터 재생연결을 가져온다. 인식은 재생연결의 순간에 명색(nāma rūpa)을 가져온다.
 그런데 먹는 음식이 있을 때 집착의 두려움이 있고, 접촉이 있을 때 다가가서 부딪치는 두려움이 있고, 의도가 있을 때 재생의 두려움이 있고, 인식이 있을 때 재생연결의 두려움이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이 음식들 중 먹는 음식은 ‘아들고기’로 비유되고, 접촉은 ‘가죽이 벗겨진 소’의 비유로, 의도는 ‘활활 타는 숯덩이’의 비유로, 인식은 ‘백 개의 창’으로 비유17)된다.
  1. 몸의 양식
 경전에서는 먹는 음식은 “사막에서 굶주림을 이겨내고 벗어나고자 어쩔 수 없이 먹는 아들고기”에 비유된다.
 부부가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사막의 길을 나섰는데, 그들에게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 있었다. 부부가 사막을 지날 때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는데도 그들은 사막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부부는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귀한 아들을 죽여서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사막을 벗어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부부는 사막을 벗어나기 위해 아들을 죽여 아들고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니?”라고 가슴을 후려치게 된다.
 그들은 오락을 위해서 아들고기를 먹을 수도 없고, 흥분상태가 되기 위해서 먹을 수도 없으며, 매력을 위해서 먹을 수도 없고, 장식을 위해서도 먹을 수 없다. 그들은 오로지 사막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만 그 자양분을 먹는다. 물질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면 오욕락(오욕락)을 완전히 알고, 오욕락을 명확히 알면 윤회의 결박이 소멸된다.18)
 몸을 깨끗하지 않다[부정]고 보는 사람은 먹는 음식[단식]을 철저히 안다.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다고 여기는 전도를 버려서 감각적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감각적 욕망의 번뇌를 소멸시킨다. 욕심이라는 몸의 매듭을 끊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는다.19)
 이처럼 먹는 음식은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경우에만 생명유지를 위해서 먹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살”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지혜롭게 숙고하면서 탁발음식을 수용하니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고 흥분상태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매력을 위해서도 아니고 장식을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이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해악을 쉬고 청정범행을 잘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느낌을 물리치고 새로운 느낌을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나는 건강할 것이고 비난받음 없이 안온하게 머물겠다’”20)라고 「제번뇌단속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그들은 오락을 위해서 아들고기를 먹을 수도 없고, 흥분상태가 되기 위해서 먹을 수도 없으며, 매력을 위해서 먹을 수도 없고, 장식을 위해서도 먹을 수 없다.”라는 부분이다.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마을 청년들처럼 오락, 즉 재미삼아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흥분상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격투기 선수 등처럼 긍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성의 자긍심을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매력을 위해서도 아니”라는 “궁녀나 기녀 등처럼 풍채의 매력을 위해서, 사지를 포동포동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장식을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은 “연기자나 무용수처럼 예뻐지기 위해서, 밝은 피부와 안색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락은 어리석음[치], 흥분상태는 성냄[진], 매력과 장식은 탐욕[탐]의 발현으로서, 오락과 흥분상태는 자기자신에 대한 족쇄가 되고, 매력과 장식은 남에 대한 족쇄가 된다.21)
 따라서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음식을 섭취할 때는 재미삼아서 먹거나 긍지를 위해서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이는 자기에 대한 족쇄가 되는 것을 차단한다. 그리고 살찌거나 아름답기 위해서, 곧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먹는 것도 삼가야 한다. 그러면서 음식이 탐․진․치 삼독심과 관련되어 설명되는데, 수행자가 음식을 섭취할 때는 오직 완전한 해탈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위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의 섭취에 있어서 오락이나 흥분상태 또는 매력과 장식 등을 위하는 것은 그러한 해탈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네가지 근본물질[사대]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몸을 계속 존속시키고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만 음식을 수용해야 한다. 마치 집주인이 집이 낡았기 때문에 버팀목을 사용하고, 차주가 차축을 위해 기름칠을 하듯이, 그는 이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수용할 뿐, 오락과 취함과 매력과 장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몸의 생명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음식을 수용할 뿐이다. 그리고 배고픔을 제거하기 위해 탁발음식을 수용한다. 마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것과 같고, 추위와 더위 등을 해소시키는 것과 같다.
 일체교법의 청정범행과 도의 청정범행을 돕기 위해서만 탁발음식을 수용해야 한다. 거기에서 발생한 체력에 의지하여 계정혜 삼학(삼학)에 몰두하고 존재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 마치 사막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고기를 사용하고, 강을 건너고자하는 사람들이 뗏목을 사용하고,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이 배를 이용하듯이. 마치 병든 사람이 약을 사용하듯이 이 탁발음식을 수용하여 오래된 배고픈 느낌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리고 손으로 잡아 일으켜야 할 때까지, 옷이 찢어질 때까지, 그 바닥에서 굴러야 할 때까지, 까마귀가 그의 입속에 든 것을 쪼아 먹을 때까지, 먹은 것을 토해낼 때까지 먹는 음식수용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적당하고 절도있게 먹음으로써 잘못된 조건을 소멸시키고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적절하게 탁발음식을 먹어서 번뇌의 뿌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면서 부적절한 식습관으로 일어나는 느낌을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적절한 식습관으로 자기학대를 버리고 진리에 알맞은 행복을 성취해야 한다.
 절제있게 먹기 때문에 생명기능이 끊어진다거나 또는 위의가 무너질 위험이 없다. 그러므로 필수품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이 몸에 오랫동안 지속되는 건강이 유지된다. 마치 만성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약을 수용하듯이.
 부적당하게 찾고, 받고, 먹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비난받지 않고, 절제가 있게 먹기 때문에 편안하게 머물게 된다. 또는 적당하지 않고 무절제하게 먹음으로 인한 지루함이나 나태, 하품, 그리고 현인들의 비난 등의 잘못이 없기 때문에 비난받지 않고, 적당하고 절제가 있게 먹음으로 인해 체력이 유지되어서 편안하게 머문다. 또는 포만감을 느낄 때까지 먹는 것을 피하여 눕는 즐거움과 축 늘어지는 즐거움과 혼침의 즐거움을 버리기 때문에  비난받지 않고, 포만감을 느끼기 전에 네 번이나 다섯 입의 분량을 덜 먹어서 네 가지 위의를 적절하게 닦아서 편안하게 머문다.22)
  2. 마음의 양식
  1) 접촉의 자양분
 가죽이 찢어진 소가 벽에 기대어 서 있으면 그 벽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고, 나무 곁에 서 있으면 그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며, 물속에 서 있으면 그 물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고, 야외에 서 있으면 그 야외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 가죽이 찢어진 소가 의지해서 서 있는 곳마다 각기 거기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접촉의 자양분은 가죽이 찢어진 소와 같다.
 접촉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면 세가지 느낌을 분명히 알게 되고, 세가지  느낌을 명확히 알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23)
 느낌을 괴로움[고]이라 보는 사람은 접촉[촉식]의 자양분을 철저히 알아서 괴로움에 대해서 즐거움[락; 행복]이라고 하는 전도를 버리고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존재의 번뇌를 소멸시키고, 악의(악의)라는 몸의 매듭을 끊으며, 계율과 인식에 대한 집착[계금취]을 갖지 않는다.24)
  2) 의도의 자양분
 사람의 키보다 큰 숯불화로가 있어 연기가 나지 않으면서 작열하는 숯불로 가득 차 있을 때, 삶을 바라고 불사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두 손이 잡혀 숯불화로 가까이 끌려왔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 희망, 소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은 ‘내가 숯불화로에 떨어지게 되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의도의 자양분은 ‘숯불화로 위에 끌려온 사람’과 같다.
 의도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면, 세가지 갈애를 올바로 알게 되고, 세가지  갈애를 명확히 알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25)
 상(상)과 행(행)들에 대해서 무아(무아)라고 보는 사람은 의도[의사식]의 자양분을 철저히 알아서 무아에 대해서 자아(자아)라고 하는 전도를 버리고, 사견(사견)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사견으로 인한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이것만이 오직 진리”라고 하는 몸의 매듭을 끊으며,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아어취]을 갖지 않는다.26)
  3) 인식의 자양분
 
 흉학한 도둑을 사로잡아 왕 앞에 데려왔다. “왕이여, 흉악한 도둑을 잡아왔습니다. 그에게 형벌을 가하십시오.” 그러자 왕은 백 개의 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고, 아침에 그 사람을 백 개의 창으로 찔렀다. 점심 때 죽지 않고 살아있자, 다시 백 개의 창으로 찔렀다. 저녁 때도 죽지 않고 살아있자, 다시 백 개의 창으로 찔렀다. 삼백 개의 창에 찔린 그 사람은 그 때문에 큰 괴로움과 고통을 느낀다. 인식의 자양분은 ‘백개의 창에 찔린 사람’과 같다.
 인식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면 명색을 분명히 알게 되고, 명색을 명확히 알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27)
 인식을 무상(무상)하다고 보는 사람은 인식[식식]의 자양분을 철저히 알아서 무상한 것에 대해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상]는 전도를 버린다. 그래서 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무명번뇌를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계율과 인식에 대한 집착[계금취]이라는 몸의 결박을 끊고, 사견에 대한 집착[견취]을 갖지 않는다.28)

Ⅳ.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에서의 “음식”은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으로 분류되는 먹는 음식에 대해서만 설명되지만, 먹는 음식의 설명을 통해 다른 정신적인 음식은 유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음식은 이미 태어난 중생이 현생의 생명유지를 위하고,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중생의 영양보충을 위해서 섭취하는 것29)이다. 그런 음식에 대해서 혐오하는 모습을 취함으로써 일어난 상(상)이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수행30)이다. 또한 이러한 음식을 혐오하는 상(상)에 대한 수행은 본삼매에 들어가기 이전의 근접삼매를 가져온다.31)
  이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상(상)을 닦고자하는 사람은 명상주제를 배워 그 배운 것의 한 구절에 대해서도 의심이 없도록 하여 한적하게 혼자 머물면서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으로 분류되는 먹는 음식에 대해 열 가지 형태로 혐오스러움을 반조해야 한다. ①탁발가는 것으로써 ②구하는 것으로써 ③먹는 것으로써 ④분비물로써 ⑤저장하는 곳으로써 ⑥소화되지 않은 것으로써 ⑦소화된 것으로써 ⑧결과로써 ⑨배출하는 것으로써 ⑩묻은 것으로써 반조해야 한다.
  1. 탁발 가는 경우
 세력이 큰 교단(sāsana)에 출가한 사람은 밤새 붓다의 설법을 음미하는 수행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탑전의 뜰이나 보리수의 뜰을 쓰는 소임을 보고는 마실 물과 씻을 물을 마련한다. 그 다음 절 주위를 비질한 뒤 목욕을 하고 자리에 앉아 명상주제를 스무 번, 서른 번 작의하고는 일어나서 발우와 가사를 걸치고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한적함의 행복을 주고, 그늘과 물이 있고, 깨끗하고, 시원하고, 쾌적한 곳인 고행의 숲을 떠나 성스러운 한적함의 기쁨을 뒤로한 채 공동묘지를 향해 가는 재칼처럼 음식을 얻기 위해 마을을 향해가야 한다.
 이와 같이 갈 때 침상이나 의자로부터 내려오는 순간부터 발의 먼지와 도마뱀의 똥 등으로 뒤덮여있는 깔개를 밟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때때로 쥐 똥․박쥐 똥 등으로 불결해져 실내보다 더 혐오스러운 현관의 계단을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올빼미 똥․비둘기 똥 등이 묻어있는 누각의 위층보다 더 혐오스러운 아래층을 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때는 바람에 날려 온 낙엽과 마른 풀 등에 의해, 병든 수행자의 대소변과 침과 콧물 등에 의해, 우기에는 비와 진흙에 의해 더러워진 더욱 혐오스러운 사원의 뜰을 보아야 하고, 사원의 뜰보다 더 혐오스러운 사원 밖의 길을 보아야 한다.
 서서히 보리수나 탑전에 예배드리고 ‘오늘은 어디로 탁발을 가야 할까’라고 강당에서 생각을 한 뒤 진주다발과 같은 탑과, 한 아름되는 공작꼬리의 깃털과 같이 아름다운 보리수와, 천상의 궁전과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을 뒤로한 채 음식을 위해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떠난다. 마을의 길을 걸어갈 때 그루터기나 가시가 있는 길을 만날 수도 있고, 폭우에 패인 울퉁불퉁한 길을 만날 수도 있다.
 그 다음에는 종기를 숨기는 사람처럼 하의를 단단히 입고 상처를 붕대로 감듯이 그의 허리를 묶는다. 뼈 무더기를 덮듯이 윗옷을 입고 약이 담긴 주발을 가져가듯이 발우를 가지고 마을 집 대문 가까이 가면 코끼리 사체, 말, 소, 코뿔소, 인간, 뱀, 개의 사체 등을 보기도 한다. 단지 볼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취로 고통을 겪으면서 그 냄새도 참아야한다. 그 다음엔 마을의 대문에 서서 사나운 코끼리, 말 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마을 골목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이처럼 깔개를 밟는 것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시체에 이르기까지 그 혐오스러운 것을 음식을 위해서 밟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냄새 맡아야 한다.32)
  2. 음식을 구하는 경우
 탁발가는 것의 혐오스러움을 인내하고 마을에 들어서서 가사를 바르게 걸치고 거지처럼 발우를 손에 들고 마을골목에서 집집마다 다녀야 한다. 우기에는 걸음을 딛는 곳마다 종아리까지 진흙탕에 빠져 발이 물에 잠긴다. 한 손으로는 발우를 잡아야 하고 다른 손으로는 옷을 치켜 올려야 한다. 여름철에는 바람에 휩쓸려 온 쓰레기와 건초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다녀야 한다. 집집마다 그 대문에 서면 생선 씻은 물․고기 씻은 물․발 씻은 물․침․코․개똥․돼지 똥 등에 뒤섞인 갖가지 벌레들과 파리들이 들끓는 도랑과 수채통을 보기도 하고 밟기도 한다. 그곳으로부터 파리들이 올라와 가사와 발우와 머리에 앉는다.
 집에 들어섰을 때에도 어떤 사람은 주고 어떤 사람은 주지 않는다. 줄 때도 어떤 사람은 어제 지었던 밥이나 오래된 빵과 맛이 간 피죽을 준다. 어떤 사람은 주지도 않고 “다른 집으로 가”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못 본 척하면서 말이 없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돌린다.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없는 놈아, 저리 가라’는 거친 말로 대한다. 이와 같이 거지처럼 마을에 탁발을 하고 나와야한다. 이처럼 마을을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하여 나오기까지 물과 진흙 등 혐오스러운 것을 음식을 위해 밟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참아야 한다.33) 
  3. 먹는 경우
 음식을 얻어서는 마을 밖의 안전한 곳에 편안히 앉아 그가 아직 손을 대지 않았을 때에는 그 음식에 걸맞은 존경할만한 수행자나 선량한 사람을 보면 초대할 수 있다. 먹고 싶은 욕구에 일단 손을 대면 드시라고 권할 수가 없다. 손을 넣어 비비면 다섯 손가락으로 땀이 흘러내려 파삭파삭한 음식을 젖게 하고 물렁하게 만든다.
  그것을 찌그러뜨려 아름다운 모양이 일그러질 때 덩어리를 만들어 입에 넣으면 아랫니는 절구의 역할을 하고, 윗니는 절구공이의 역할을 하고, 혀는 손의 역할을 한다. 마치 개밥그릇 속의 개밥처럼 이빨의 절구공이로 그것을 부수어서 혀로 이리저리 돌릴 때 혀 끝에 있는 맑고 묽은 침이 그것을 적시고, 혀 중간으로부터 뒤에 있는 찌꺼기가 그것을 적신다.
 그가 이와 같이 이기고 침이 적시는 그 순간에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 특별한 모양과 냄새의 혼합물은 개밥그릇에 개가 토해 내놓은 것처럼 극도로 혐오스러운 상태에 이른다. 이와 같지만 눈의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삼킨다.34)
  4. 분비물과 저장된 음식물의 경우
 붓다나 벽지불, 전륜성왕은 담즙․가래․고름․피라는 네가지 분비물 중 오직 하나만 가진다. 공덕이 적은 일반인들은 네가지 분비물 모두를 가진다. 이와 같이 음식을 삼켜 안으로 들어갈 때 담즙의 분비가 많은 사람의 경우 그 음식은 마치 진한 기름이 묻은 것처럼 극도로 혐오스럽다. 가래의 분비가 많은 사람의 경우 그것은 마치 나가발라 잎의 액이 묻은 것과 같다. 고름의 분비가 많은 사람의 경우 그것은 상한 버터가 묻은 것과 같다. 피의 분비가 많은 사람의 경우 그것은 물감이 묻은 것과 같이 극도로 혐오스럽다.
 이 네가지 분비물 가운데 어느 하나의 분비물이 묻은 채 음식이 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금으로 된 그릇이나 수정으로 된 그릇이나 은으로 된 그릇 등에 담기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열 살 먹은 아이가 삼켰다면 십 년 동안 씻지 않은 오물통과 같은 장소에 저장되고, 만약  백 살 먹은 사람이 삼켰다면 백 년 동안 씻지 않은 오물통과 같은 장소에 저장된다.35)
  5. 소화되지 않은 경우와 소화된 경우
 이 음식이 내장에 저장되어 소화가 되기 전까지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있고, 갖가지 썩은 냄새에 오염된 바람이 순환하고, 악취가 나고 혐오스러운 장소에 있다.
 마치 가뭄에 때 아닌 구름이 비를 내려 천민촌 입구의 구덩이에 모여 있는 풀과 낙엽과 낡은 돗자리 조각과 뱀이나 개, 사람들의 사체가 태양의 열기로 데워져서 포말과 거품 등을 내뿜듯이 그 날 삼켰던 것, 어제와 그제 삼켰던 것이 모두 모이고 섞여서 가래의 막으로 인해 숨이 막히고, 몸에 불의 열기로 발효되어 소화될 때 발생한 포말과 거품으로 쌓여, 극도로 혐오스러운 상태로 남아있다.
 이것이 몸의 불로 소화될 때 마치 금․은 등의 광석처럼 금․은 등의 상태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포말과 거품을 뿜으면서 흙손으로 이겨서 관에 채워 넣은 누런 흙처럼 대변이 되어 배설물이 모이는 곳을 채우고, 소변이 되어 방광을 채운다.36)
  6. 결과로서와 배출된 음식의 경우
 음식이 적당하게 소화될 때는 머리털․몸의 털․손톱․이빨 등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을 만들어내지만, 잘 소화되지 못하면 피부병․가려움․두드러기․문둥병․전염병․폐병․기침․하혈 등 여러 병을 발생시키는 것이 음식의 결과이다.
 삼킬 때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지만 배출할 때는 “눈으로부터 눈곱이, 귀로부터 귓밥이”37) 등의 방법으로 여러 가지 문으로 배출한다. 삼킨 때에는 여러 친지들과 함께 삼키지만 내보낼 때는 대소변의 상태로 된 것을 혼자서 배출한다. 첫날 그것을 먹을 때에는 즐겁고 만족스럽고 최상의 희열과 기쁨을 가진다. 다음날 배출할 때는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리며, 혐오스럽고, 민망스럽다. 첫날에는 그것을 갈망하고, 탐하고, 게걸스럽고, 얼빠지게 삼켰지만 다음날에는 탐함도 없고 괴로우며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하면서 배출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음료이거나 맛있거나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음식은 입이라는 하나의 구멍으로 들어가서 아홉 개의 구멍으로 배출된다. 맛있는 음식을 여러 친지들과 함께 먹지만 배출할 때는 숨어서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즐기지만, 배출할 때에는 혐오스러워한다. 맛있는 음식도 하룻밤이 지나면 모두 썩어버린다.”38)
  7. 몸에 묻은 음식의 경우
  
 먹을 때에 음식은 그의 손과 입술과 혀와 입천장에 묻는다. 손은 그것이 묻음으로써 혐오스러워진다. 씻은 뒤에도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계속해서 씻어야 한다. 마치 밥을 지을 때 껍질이나 싸라기 등이 끓어올라 솥의 입구와 가장자리와 뚜껑에 묻는 것처럼 음식을 먹으면 온 몸에 퍼져있는 몸의 불로 부글부글 끓어올라 소화가 되면서 위로 올라붙어 치석으로 이빨에 묻는다. 침과 가래 등의 상태로 혀와 입천장 등에 묻고, 눈곱, 귓밥, 코딱지, 대소변 등으로 눈과 귀와 코와 대소변도 등에 묻는다. 그것들이 이 문들에 묻으면 날마다 씻어도 불결하고 불쾌하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닦으면 손도 다시 물로 씻어야 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닦으면 두 번 세 번 소똥과 진흙과 향기로운 가루로 닦아도 혐오스러움이 가시지 않는다.39)
 수행자가 이와 같이 열 가지 형태로 혐오스러움을 반조하고 추론하고, 생각을 일으킬 때 수행자에게 먹는 음식은 분명히 혐오스럽게 된다. 그리고 수행자가 그 표상을 거듭거듭 반복해서 닦고 많이 공부할 때 장애들이 억압된다.
 음식을 통해서는 본삼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근접삼매에 든다. 그러나 혐오스러운 상태를 취하는 것으로써 인식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이 명상주제는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수행’이라는 명칭을 가진다.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상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맛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그의 마음이 물러나고, 움츠려들고, 되돌아온다. 마치 사막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 아들의 살을 먹듯이 그는 괴로움을 건너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되면 그는 음식에 대해 철저하게 알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이 오욕락에 대한 탐욕을 철저하게 알게 된다. 그는 오욕락을 철저히 알기 때문에 색온을 통찰할 수 있다. 그리고 소화되지 않은 것 등의 혐오스러움을 통해 몸에 대한 사띠(sati)의 수행을 성취하고 부정의 인식에 수순하는 수행을 갖추게 된다.40) 그래서 수행을 통해 현생에 해탈열반을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선처(선처)에 태어난다.
Ⅴ. 탁발음식과 관련된 두타행

  1.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41)은 ‘여분의 음식은 거절하겠다’거나 ‘항상 걸식만 것만 수용하겠다’는 이 둘 중 하나를 받아지닌다.
 항상 걸식한 것만을 수용하는 수행자는 열네가지 음식을 수용해서는 안된다. 열네가지 음식은 ①대중들에게 올리는 음식 ②지정한 수행자들에게 올리는 음식 ③초대하여 올리는 음식 ④제비뽑기42)하여 올리는 음식 ⑤반달마다 올리는 음식 ⑥포살일마다 올리는 음식 ⑦각 반달의 첫날에 올리는 음식 ⑧손님들을 위한 음식 ⑨길 떠나는 자들을 위한 음식 ⑩병자를 위한 음식 ⑪간병자를 위한 음식 ⑫특정한 절에 올리는 음식 ⑬주요한 집에서 올리는 음식 ⑭차례대로 올리는 음식이다.
 만약 “대중 스님들에게 올리는 음식을 드십시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저희 집에서 대중 스님들이 공양을 드십니다. 스님께서도 공양을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주는 것은 받아도 된다. 대중스님들로부터 제비뽑기한 것이 음식이 아니고 약 등이거나 절에서 요리한 음식이면 그것도 받아도 된다는 것이 그 규정이다.
 원칙대로 하는 사람은 앞뒤에서 가져온 음식을 받고, 문 밖에 서서 보시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주기위해 발우를 요구할 때는 발우를 주며, 식당에서 준 음식도 받는다. 그러나 그날 약속한 음식을 기다렸는데 늦게 가져오면 받지 않는다. 중간 정도로 하는 사람은 그날 늦게 가져온 음식도 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날의 음식은 동의하지 않는다. 가볍게 하는 사람은 다음날의 음식과 이틀 뒤의 음식도 동의한다. 뒤의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행복을 얻지 못하지만 엄격하게 하는 사람은 얻는다.
 어떤 마을에 성자의 계보에 관한 설법이 있었다고 한다. 엄격하게 하는 사람이 다른 자들에게 말했다. “도반이여, 가서 법을 들읍시다.”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은 “존자시여, 어떤 사람의 음식을 받기로 약속이 되어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다른 사람은 “존자시여, 저는 내일 음식을 받는 것에 동의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와 같은 그 두 사람은 결핍한 자들이었다. 엄격하게 하는 사람은 다음 날 아침 걸식을 행한 뒤 가서 법의 맛을 맛보았다. 이 셋 모두가 대중스님들께 올리는 음식 등 여분의 음식을 수용하는 순간에 두타행은 무너진다.
 첫째, “탁발음식을 먹는 것에 의지한 출가”43)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의지한 것에 어울리는 수행을 하고, 둘째, 일래과(일래과)에 머물고, 셋째,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유스런 생활을 하고, 넷째,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잘못이 없다.”44)라고 세존께서 찬탄하신 필수품이고, 다섯째, 게으름을 물리치고, 여섯째, 생계가 청정하고, 일곱째, 중학(중학; 사소한 학습계율)45) 수행을 원만히 하고, 여덟째 남에 의해 양육되지 않고, 아홉째, 남을 돕고, 열 번째, 자만을 버리고, 열한 번째, 맛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고, 열두 번째, 대중을 위한 음식(gaṇabhojana)과 다른 사람을 위한 공양 초청에 대신 응하는 것(paramparabhojana)과 바른 행동거지(cāritta)에 관한 학습계율을 위반하지 않게 되고, 열세 번째, 소욕 등에 적합하게 생활하고, 열네 번째, 바른 수행을 증장시키고, 열다섯 번째, 후대사람들에게 연민심을 가진다는 것이 이익이다.
 탁발음식에 만족하고 남에 의존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음식에 탐욕을 버린 수행자는 사방에 자유롭다. 게으름을 떨치고, 생계가 청정하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탁발하는 것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탁발음식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남에 의해 부양되지 않는 수행자가 만약 이득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으면 데바(deva)들도 그를 부러워한다.”46)
  2.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47)도 ‘탐욕스럽게 탁발하는 것을 거절하겠다’거나 ‘차례대로 탁발하겠다’는 것 가운데 하나를 받아지닌다.
 차례대로 탁발하는 사람은 마을 입구에 서서 위험이 없는지 주시해야 한다. 거리나 마을에 어떤 위험이 있으면 그곳에서 나와 다른 곳에 탁발가도 된다. 집의 대문이나 골목이나 마을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면 마을이라고 인식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얻는다면 그곳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된다. 이 수행자는 불안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탁발할 수 있도록 마을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 만약 시주자가 절에 와서 음식을 올리거나 도로에 나와 발우를 받아서 음식을 올리면 그것은 허락된다. 이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탁발하는 시간이 되면 그가 도착한 마을을 지나치지 말고 그곳에 탁발해야 한다. 그곳에서 얻지 못했거나 또는 조금밖에 얻지 못하면 마을의 차례대로 탁발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규정이다.
 엄격하게 하는 사람은 공양하는 곳으로 가져와서 준 음식은 받지 않지만, 문 앞에서 발우는 건네준다. 중간정도로 하는 사람은  공양하는 곳으로 가져와서 준 음식도 받고, 문 앞에서 발우도 건네준다. 그러나 약속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앉아있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엄격하게 탁발음식을 수용하는 자의 규칙에 따른다. 가볍게 하는 사람은 그날 올 음식을 기다리면서 앉아있다. 이 세 사람이 탐욕스럽게 탁발하는 순간 그들의 두타행은 무너진다.
 재가자들에게 항상 낯설어서 한 달에 한 번 뜨는 보름달과 같고, 재가자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널리 연민을 느끼고, 친한 재가자의 부양을 받아서 위험이 없고, 초대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에게 공양 베풀기를 바라지 않고, 소욕 등에 어울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익이다.
 집의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자는 재가자들에게 보름달과 같고, 항상 낯설고, 인색하지 않고 모두에게 고루 연민을 느끼고 친한 재가자의 부양을 받는 위험이 없다. 그러므로 탐욕스럽게 탁발하기를 버리고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내다보며 대지에서 자유로움을 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차례대로 탁발함을 행한다.
  3.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48)은 ‘여러 자리에서 먹는 것을 거절하겠다’거나 ‘한자리에서만 먹겠다’는 이 둘 중 하나를 받아지닌다.
 한자리에서만 먹는 사람은 식당에 앉을 때에 장로의 자리에 앉지 않고 ‘이 자리가 나에게 배정되겠다’라고 적당한 자리를 주시한 뒤 앉아야 한다. 만일 공양이 끝나기 전에 스승이 오면 일어나서 의무를 행할 수 있다. “자리를 보존하거나 또는 음식을 보존해야 한다. 이 사람은 음식을 끝내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무를 다할 수는 있지만 다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49)는 것이 그 규정이다.
 엄격하게 하는 사람은 적거나 많거나 간에 그가 손을 댄 음식 이외에 다른 것을 받지 않는다. 만약에 ‘장로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버터기름 등을 가져오면 약으로는 받을 수 있지만 음식으로 받아서는 안된다. 중간 정도로 하는 사람은 발우 속의 음식이 끝나기 전에는 더 받을 수 있다. 그는 음식이 다 했을 때 공양을 끝내는 자라 불린다. 가볍게 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먹을 수 있다. 그는 물과 함께 공양을 끝내는 자다. 왜냐하면 발우를 씻을 물을 받기 전까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리와 함께 끝내는 자다. 왜냐하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이 여러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순간 그들의 두타행은 무너진다.
 병이 없고, 몸의 고통이 없고, 몸이 가볍고, 몸에 힘이 있고, 행복하게 머물고, 여분의 음식을 거절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고, 맛에 대한 갈애를 없애고, 소욕 등에 적합하게 생활한다는 것이 이익이다.
 한자리에서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수행자는 음식 때문에 병들지 않는다. 맛에 대한 탐욕을 버린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하는 일을 잃지 않는다. 한자리에서만 먹는 것은 편안한 삶의 원인이고 깨끗함과 번뇌가 소멸한 기쁨이 함께하니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는 그것을 기뻐한다.
  4. 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50)은 ‘두 번째 그릇은 거절하겠다’거나, ‘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겠다’라는 두 가지 중 하나를 받아지닌다.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사람은 죽을 먹을 때에, 그릇에 담긴 반찬을 얻으면 반찬을 먼저 먹거나 죽을 먼저 먹어도 된다. 만약 죽에다 반찬을 넣을 때에, 냄새나는 생선 등으로 만든 반찬을 넣으면 죽이 혐오스러워진다. 혐오스럽지 않게 해서 먹어야 한다.51) 그러므로 이것은 그와 같은 반찬에 관해서 설한 것이다. 그러나 꿀, 설탕 등 혐오스럽지 않은 것은 그 속에 넣어야 한다. 받을 때에도 적당량을 받아야 한다. 생야채는 손으로 받아서 먹어도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발우 속에 넣어도 된다. 두 번째 그릇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뭇잎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규정이다.
 엄격하게 하는 사람은 사탕수수 대를 씹을 때를 제외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 찌꺼기를 버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밥과 생선과 고기와 빵을 분리하여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중간의 사람은 한손으로 분리하여 먹을 수 있다. 그는 ‘손수행자’라고 불린다. 가볍게 하는 사람은 ‘발우수행자’라 불린다. 발우 안에 담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손이나 이빨로 분리하여 먹을 수 있다. 그들이 두 번째 그릇을 수용하는 순간 그들의 두타행은 무너진다.
 다양한 맛에 대한 갈애를 없애고, 한 개의 발우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소원을 버리고,52) 음식의 목적과 적당한 양을 보고, 쟁반 등을 소지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산란함이 없이 먹고,53) 소욕 등에 적합하게 생활한다는 것이 이익이다.
 눈을 아래로 내린 진실한 수행자는 여러 그릇에서 발생하는 산란함에 집착이 없으니 참다운 서원을 가진 수행자는 맛에 대한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5.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54)은 ‘추가로 받은 음식을 거절하겠다’거나,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겠다’라는 둘 중 하나를 받아지닌다.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음식에 만족하고 나서 다시 음식을 올리도록 하여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규정이다.
 엄격한 사람은 첫 번째 음식에 대해서 충분하다고 여기고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삼킬 때에 다른 것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이 충분하다고 거절했을 때 첫 번째 음식은 삼키고 두 번째 음식은 먹지 않는다. 중간의 사람은 충분하다고 거절한 음식도 먹는다. 가볍게 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먹는다. 세 사람이 충분하다고 거절한 다음 음식을 올리도록 하여 먹는 순간 두타행은 무너진다.
 추가의 음식으로 인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에서 멀어지고, 과식이 없고, 음식을 보관하지 않고, 다시 찾는 것이 없고, 소욕 등에 적합하게 생활한다는 것이 이익이다.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지혜로운 수행자는 다시 음식을 찾아야하는 귀찮음이 없고 저장하거나 과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자를 선서(선서)는 찬탄한다. 또한 지족(지족) 등의 덕을 증장시키는 데에 이 두타행을 의지한다.

Ⅵ. 결 론

 모든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음식은 먹는 음식뿐만 아니라 접촉, 의도, 인식을 포함한다. 먹는 음식은 “아들고기”로, 접촉은 “가죽이 벗겨진 소”로, 의도는 “활활 타는 숯덩이”로, 인식은 “백 개의 창”으로 비유된다. 불교에서의 음식은 이처럼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음식은 오직 생명을 유지하면서 수행을 지속시키는 데만 필요한 것이고, 결국 ‘계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열반이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과 관련된 수행”이 언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은 근접삼매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수행을 닦고자하는 사람은 명상주제를 배워 그 배운 것의 한 구절에 대해서도 의심이 없도록 하여 한적하게 혼자 머물면서 먹는 음식에 대해 열 가지 형태로 혐오스러움을 반조해야 한다. “①탁발 가는 것으로써 ②구하는 것으로써 ③먹는 것으로써 ④분비물로써 ⑤저장하는 곳으로써 ⑥소화되지 않은 것으로써 ⑦소화된 것으로써 ⑧결과로써 ⑨배출하는 것으로써 ⑩묻은 것으로써”이다.
 그리고 탁발함에 있어서도 항상 생명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걸식하는 수행이 전제된다. 그것은 ①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②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③한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④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⑤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이다. 이러한 청정수행을 통해 조금씩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음식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인간들은 음식을 탐닉[탐]의 대상으로만 여기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맛있다”, “맛없다” 등의 감정적 측면에서 분노[진]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들은 음식과 관련해서 탐, 진, 치를 발생시키는데, 이 음식(āhāra)과 관련된 수행을 실천하면서 만족[불탐]과 희열[부진]과 지혜[무치]를 획득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십대 명호 중에서 ‘세간해’에 대한 설명으로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라는 내용이 맨 앞에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붓다는 물질적인 먹는 음식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서의 정보섭취인 접촉, 의도, 인식 등의 정신적 영역도 음식의 범주로서 설명하는데, 이것은 붓다의 “음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역사 이래로 음식과 관련해서 이렇게 포괄적이고 전체적으로 서술하면서 수행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사람은 모든 사상가와 철학자들 중에서도 붓다가 유일할 것이다. 















【 국문초록 】
 “모든 존재는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 “음식”을 불교용어로는 ‘아하라(āhāra)’라고 하는데, “아하라”는 “식(식)”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아하라의 본래 의미는 “가져오는 것”의 의미이다. 따라서 주객의 관계는 대상경계인 객체 속에 활동하는 주체가 그 속에서 무언가를 가져옴에 의해서 지속적 생명활동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라는 먹는 음식뿐만 아니라 접촉, 의도, 인식을 포함한다. 먹는 음식은 “아들고기”로, 접촉은 “가죽이 벗겨진 소”로, 의도는 “활활 타는 숯덩이”로, 인식은 “백개의 창”으로 비유된다. 불교에서의 음식은 이처럼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입장에서 음식은 수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섭취를 통한 생명유지에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계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과 관련해서 수행이 언급된다.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이 있는데, 이 수행은 근접삼매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그 경우는 “(1)탁발 가는 것으로써 (2)구하는 것으로써 (3)먹는 것으로써 (4)분비물로써 (5)저장하는 곳으로써 (6)소화되지 않은 것으로써 (7)소화된 것으로써 (8)결과로써 (9)배출하는 것으로써 (10)묻은 것으로써”의 열 가지이다.
 그리고 탁발함에 있어서도 항상 생명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는 수행이 전제된다. 그것은 (1)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2)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3)한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4)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5)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이다.
 이러한 청정수행을 통해 조금씩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음식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인간들은 음식을 탐닉(탐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맛있다”, “맛없다” 등의 감정적 측면에서 분노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들은 음식과 관련해서 탐, 진, 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러한 음식과 관련된 수행을 통해서 만족[불탐], 희열[부진]과 지혜[무치]를 획득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주제어 】
음식(아하라) / 생명유지 / 사식(사식) / 접촉 / 의도 / 인식 / 수행 / 근접삼매 / 탁발 / 탐진치 / 세간해















【 Abstract 】

The study on practice of āhāra(food, nutriment)
in the Early Buddhism

Shin, Byoung-Sam
(Researcher, 
in Institute of Electronic Buddhist Texts & Culture Contents)

  All of beings maintain their life with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The buddhist terms for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is āhāra. The buddhist term āhāra is translated into chinese character '식'. The original meaning of āhāra is to bring something.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subject and object should be maintained by something which subject brings from object, and life force should be continuous.
  So the meaning of āhāra contains not only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but also sense-impression, volitional thought, consciousness. At this point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sense-impression, volitional thought, consciousness are assimilated to son's flesh, skinned cow, a lump of charcoal in a blaze, a hundred lance one by one. The buddhist view of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is negative rather than positive. Because ascetics need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for maintaining their life, and their ultimate purpose is to accomplish emancipation from the sufferings of the transmigration of souls which make every endeavor to maintain life. On that account ascetic exercises are mentioned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with relevance.
  There is the perception of loathsomeness in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which helps access concentration(upacāra) by ten methods: 1) as to going, 2) seeking, 3) using,  4) secretion, 5) receptacle, 6) what is uncooked(undigested), 7) what is cooked(digested), 8) fruit, 9) outflow, and 10) smearing.
  And in mendicancy ascetic exercises which always ingest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to the extent of the minimum quantity for maintaining life is assumed: 1) alms-food-eater's practice, 2) house-to-house seeker's practice, 3) one-sessioner's practice, 4) bowl-food-eater's practice, and 5) later-food-refuser's practice. With these ascetic exercises, ascetic exercises attain Buddhahood little by little.
  Human beings whom are inseparably related to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have a tendency to regard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as an object of indulgence which is originated in delusion.
By above-mentioned ascetic exercises human beings whom cause greed(lobha), hate(dosa), and delusion(moha) in connection with something to eat(food, nutriment) should be lead an  satisfactory, joyful, boundless style of living.




【 Key Word 】
āhāra(food, nutriment) / sense-impression / volitional thought / consciousness / the perception of loathsomeness in food / access concentration(upacāra) / alms / delusion(moha)․greed(lobha)․hate(dosa) / Lokavidū(Knower of Worlds)




















【 참고문헌 】
A. Aṅguttar Nikāya
M. Majjhima Nikāya
Pm. Paramatthamañjūsā(Visuddhimagga Mahāṭīkā)
Ps. Paṭisambhidāmagga
Pṭn. Paṭṭhāna
S. Saṁyutta Nikāya
Sn. Suttanipāta
Th. Theragāthā
Ud. Udāna
Vin. Vinaya Piṭaka
Visuddhimagga
Bhikkhu Bodhi,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Kandy:     BPS, 1993. (Pāli in Roman script with English translation)
Bhikkhu Ñyāṇamoli, The path of Purification, Shambhala, Berkeley &  London, 1976.
Nyanaponika Thera, The Four Nutriments of Life ; An Anthology of   Buddhist Texts Translated from the Pali, with an                Introductory Essay, The Wheel Publication No. 105(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1)
권오민 역, ꡔ아비달마구사론ꡕ, 동국역경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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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스님 역, ꡔ앙굿따라 니까야ꡕ, 초기불전연구원, 2007.
대림스님 역, ꡔ청정도론ꡕ1, 2, 3, 초기불전연구원, 2004.
전재성 역, ꡔ맛지마니까야ꡕ,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3.
전재성 역, ꡔ쌍윳따니까야ꡕ,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7.

각주)-----------------
*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1) The Wheel Publication No. 105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1)
2) Visuddhimagga XI.111참조.
3) 한가지에서만 발생하는 경우는 “업”에서의 경우와 “마음”에서의 경우이다. 심장토대와 기능의 물질은 “업”에서만 발생하고, 한 쌍의 암시는 “마음”에서만 발생한다. “마음”과 “온도” 두 가지에서 발생하는 것은 성처(소리의 감각장소) 뿐이다. Visuddhimagga XIV.79참조.
4) Visuddhimagga XIX.9참조.
5) 여기에서는 “음식”과 동일한 맥락 속에서 “무명”․“갈애”․“업”․“발생하는 특징”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다섯 가지가 물질발생의 조건임을 설명한다. 그래서 조건이 부재할 때는 발생이 불가능하므로, “소멸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Visuddhimagga XX.97.
6) Visuddhimagga VIII.27참조.
7) Visuddhimagga XVII.90참조.
8) Pṭn.5참조.
9) Pṭn.174참조.
10) S.i.206참조.
11) Visuddhimagga XVII.194~195참조.
12) Visuddhimagga XX.35~38참조.
13) Visuddhimagga XX.68참조.
14) Visuddhimagga XX.46참조.
15) Ps.i.122, Visuddhimagga VII.36~45참조, 세간해와 관련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은 “세간법에 대한 내용을 잘 아신다.”고 설명하고 있다. “(1)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 (2)명색 (3)세 가지 느낌 (4)사식 (5)오온 (6)육처 (7)칠식주 (8)팔세간법: 획득 손실 명성 오명 비난 칭찬 행복 고통, (9)아홉가지 중생의 거처 (10)십처(십이처 중 열 가지 물질의 감각장소) (12)십이처 (18)십팔계”
16) ꡔ아비담마길라잡이ꡕ 6장 7의 10번 해설 참조.
17) S. 12-63, Visuddhimagga XI.1~26참조
18) S, 12-63.참조.
19) Visuddhimagga XIV.226참조.
20) M, I.10참조.
21) Visuddhimagga I.89~94참조.
22) Th1.983, Visuddhimagga I.89~94참조.
23) S, 12-63.참조.
24) Visuddhimagga XIV.227참조.
25) S, 12-63.참조.
26) Visuddhimagga XIV.228참조.
27) S, 12-63.참조.
28) Visuddhimagga XIV.229참조.
29) S. 12-11.참조.
30) āhārepaṭikkūlabhāvanā
31)  Visuddhimagga III.6, 105~106참조.
32) Visuddhimagga XI.6~10참조.
33) Visuddhimagga XI.11~13참조.
34) Visuddhimagga XI.14~16참조.
35) Visuddhimagga XI.17~18참조.
36) Visuddhimagga XI.19~20참조.
37) Sn. 197
38) Visuddhimagga XI.21~23참조.
39) Visuddhimagga XI.24참조
40) Visuddhimagga XI.25~26참조
41) piṇḍapātikaṅgakathā, Visuddhimagga II.27~30참조.
42) 현재 미얀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공양법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보시물이 들어왔거나 공양에 초청된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을 경우에 제비뽑기를 해서 해당되는 보시물을 나눠 가지기도 한다.
43) Vin.i.58;96
44) A.ii.26
45) 중학(sekhiya)은 바라이죄 등의 일곱 항목으로 분류된 수행자계목 가운데 마지막 항목에 속하는 계목들이다. 이것은 어겨도 범계가 되지 않는 수행자의 행동거지와 인식주에 대한 생활규범을 모아놓은 것이다.
46) Ud.31
47) sapadānacārikaṅgakathā, Visuddhimagga II.31~34참조.
48) ekāsanikaṅgakathā, Visuddhimagga II.35~38참조.
49) 삼장법사 쭐라이바야 장로의 말이다. ‘자리를 보존해야 한다’란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어른스님들이 오셨더라도 일어나지 않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또는 ‘음식을 보존해야 한다’란 아직 음식 먹는 것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른스님들께 예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Pm.28
50) pattapiṇḍikaṅgakathā, Visuddhimagga II.39~42참조
51)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자는 혐오스러운 음식은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Pm.29
52) “갖가지 그릇에 담긴 다양한 맛에 대한 소원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Pm.29
53) “각각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때 그 각각에 대한 음식으로 인해 먹는 것이 산란해진다. 그러나 한 개의 발우에 담긴 음식을 먹을 때에는 그와 같지 않기 때문에 산란함이 없는 먹게 된다.” Pm.29
54) khalupacchābhattikaṅgakathā, Visuddhimagga II.43~46참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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