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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국사의 생애와 행적

출처 수집자료

도의국사의 생애와 행적
                                                                  
김 양 정 *1)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도의의 생몰연대 추정
                        Ⅲ. 가계와 출신성분
                        Ⅳ. 입당구법과 남종선의 전래
                        Ⅴ. 귀국후의 활동
                        Ⅵ. 맺는말




Ⅰ. 들어가는 말

  신라에 처음으로 남종선을 전래한 역사적 인물인 도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ꡔ조당집ꡕ권17에 나오는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 기사가 유일하다.1) ꡔ조당집ꡕ권17에는 도의 외에 신라에서 중국으로 유학 온 동리산 혜철, 실상산 홍척, 혜목산 현욱, 굴산사 범일, 성주사 무염, 쌍봉산 도윤 등 7명의 신라출신 선사들이 이름과 행장이 실려 있다. 이중 동문수학한 사람인 혜철과 홍척은 이름과 탑호만 보이고 행장은 없다.2)
  도의의 귀국 후 행적에 관해서는 헌강왕 10년(884) 김영이 지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정강왕 2년(887) 최치원이 지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경명왕 8년(924)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고려 태조2년(939)에 세운 ‘풍기 비로암 진공대사비’ 등에 간단한 언급이 보인다. 그리고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나 고려 충선왕 때의 천㑠이 편찬한 ꡔ선문보장록ꡕ에는 지원승통과의 간단한 법담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본 고찰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자료에 근거하여 도의의 행적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도의연구의 지평을 넓히려고 하거니와 선학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Ⅱ. 도의의 생몰연대 추정

  도의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본 자료인 ꡔ조당집ꡕ에 등재된 ‘도의전’의 기사는 전기자료의 가장 기본인 생몰 연대가 없다. 도의전의 기사는 그때까지 신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을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3) 이 비문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도의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도의전의 기사를 바탕으로 주변자료를 참고해서 활동시기를 추정해야 한다.
  우선 ꡔ조당집ꡕ에 나오는 도의의 출생과 구법에 대한 기록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도의는) 서당의 법을 이엇고 명주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의요 속성은 왕씨며 북한군 사람이다. 임신되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흰 무지개가 뻗어서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어머니는 어떤 중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부모는 깜짝 놀라 이렇게 의논했다.
“이런 상서로움을 보건대 반드시 성스러운 자식을 얻을 것이요.”
그 뒤로 반달이 지나 태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서른 아홉 달 만에야 태에서 나왔다. 탄생하던 날 저녁에 갑자기 이상한 중이 석장을 짚고 와서 말하기를 ‘오눌 낳으신 아기의 태를 강가의 언덕에다 두시오.’ 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마침내 중의 말을 따라 태를 갔다 묻으니 큰 사슴들이 와서 지키기를 해가 바뀌어도 떠나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해치려는 생각을 내지 않았다.
이러한 상서로 인해 출가하였기에 법호를 명적이라 하였다. 건중 5년 갑자에 사신인 한찬 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당으로 들어왔다.4)
  이 기록은 도의의 신분과 출가이전 행적에 대해 속성이 왕씨라는 점, 태어난 곳은 신라의 변방인 북한군 출신이라는 점, 그가 수태될 때 부모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는 점, 태어나자 신승이 와서 어떤 예언을 했다는 점, 이런 인연으로 출가해서 법호를 명적이라 했다는 점, 그리고 건중 5년에 사신 김양공의 배에 동승해 당으로 유학을 갔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도의의 법호에 관한 것이다. ꡔ조당집ꡕ 표제에는 ‘원적선사’라고 되어있으나 본문에서는 ‘법호를 ‘명적이라 했다’고 쓰고 있다. 하나는 ‘원적’이고 하나는 ‘명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편자의 착오나 오기 때문에 생긴 일로 보이는데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또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없어서 도의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는 상당한 난점이 있다. 다행한 것은 이 기사의 다음 문장에 그가 언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지가 기록돼 있다. 그 시점은 ‘건중오년’이다. 당나라 건중 5년은 신라의 왕력으로 치면 선덕왕 5년(784)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때가 도의의 나이가 몇 살인가를 알면 대체로 그가 태어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금석문이 남아있는 당시 승려들의 출가와 입당시기를 살펴보면 참고가 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법랑의 제자 신행(704-779)는 장년의 나이(30세 전후)에 중국으로 갔다. 75세로 입적했다.5)
쌍계사 혜소(774-850)는 애장왕 5년(804)에 30세의 나이로 입당하여 26년간 유학하다가 56세 때인 흥덕왕 5년(830)에 귀국했다. 76세로 입적했다.6)
동리산 혜철(785-861)은 14세 때인 원성왕 5년(799)에 출가하여 29세 때인 헌덕왕 6년(814)에 입당하여 25년 뒤 54세 때인 문성왕 1년(839)에 귀국했다. 76세로 입적했다.7)
혜목산 현욱(787-868)은 21세 때인 애장왕 9년(808)에 출가하여 37세 때인 헌덕왕 16년(824)에 입당하여 13간 유학하다가 50세 때인 희강왕 2년(837)에 귀국했다. 81세로 입적했다.8)
사자산 도윤(798-868)은 17세 때인 헌덕왕 7년(815)에 출가했다. 28세 때인 헌덕왕 17년(825)에 입당하여 22년간 유학한 뒤 49세 때인 문성왕 9년(847)에 귀국했다. 70세로 입적했다.9)
성주사 무염(801-888)은 12세 때인 애장왕2년(813)에 출가하여 20세 때인 헌덕왕13년(821) 입당하여 24년간 유학한 뒤 44세 때인 문성왕5년(845)에 귀국했다. 81세로 입적했다.10)
가지산 체징(804-880)은 23세 때인 헌덕왕 2년(827) 출가하여 33세 때인 희강왕 2년(837)에 입당한 뒤 3년간 공부하고 36세 때인 문성왕 2년(840)에 귀국했다. 76세로 입적했다.11)
사굴산 범일(810-889)은 14세 때인 헌덕왕16년(824)에 출가하여 21세 때인 흥덕왕 6년(8310에 입당하여 16년간 유학하고 37세 때인 문성왕 8년(847)에 귀국했다. 79세로 입적했다.12)
  이를 분석해보면, 당시 입당구법한 승려들은 30세가 넘어 출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15~20세를 전후해서 출가하고, 30세를 전후한 나이에 입당한 뒤, 평균 18년 정도 유학하고 돌아와, 76세를 전후해 입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의가 입당하던 때의 나이를 동시대의 다른 선사들의 입당 때의 나이와 맞춘다면 대략 30세 안팎이 될 것으로 본다. 30세 안팎을 입당유학의 나이로 보는 것은 단순히 평균통계치로 환산한 것만은 아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혼자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려면 20세 전후의 어린 나이나 40세 전후의 늦은 나이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도 어느 정도 알고, 또 가장 왕성한 의욕으로 구도하고자 하는 때는 역시 30세 전후가 된다.
  이런 가정 아래 도의의 유학시기를 30세(선덕왕 4년, 784) 전후로 본다면 그의 출생시기는 대체로 경덕왕대(742~762)인 750년 무렵이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그리고 출가시기는 도의의 나이 20세 전후인 혜공왕대(756~780)인 770년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도의가 입적한 때는 언제쯤일까. 이 문제도 알아볼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다만 도의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시점은 헌덕왕13년(821)이었다고 한 다. 이를 알려주는 자료는 ‘봉암사 지증대사비’다.
장경초(헌덕왕 13년, 821)에 도의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지장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지장선사에게서 배워서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선종을 전한 사람이다.13)
  도의가 선법을 배운 뒤 귀국한 사실은 보조체징의 비문에도 보이지만 체징의 비문에는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다. 어쨌든 '지증비'의 기록대로라면 도의는 무려 3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셈이다. 그러나 도의는 당시의 신라불교계가 선법을 수용할 분위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염거에게 법을 전한 것으로 돼 있다. 도의의 설악산 은거사실에 대해서는 별도로 검토할 것이지만 과연 도의가 설악산에서 몇 년이나 교화를 하다가 언제 입적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14)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참고가 되는 자료는 쌍계사 진감혜소의 비문에 나오는 혜소와 도의와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이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인 도의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니 서와 남에서 친구를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을 증득하였다. 의공(도의)이 먼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선사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선정과 지혜를 닦기를 3년 동안 하였다. 그후 자각으로 나와 길에서 짚신을 삼아 보시하며 왔다 갔다 하기를 또 3년 동안 하였다. … 태화4년 귀국하여 불교의 최상승도리를 우리나라에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날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이 흑의이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라를 기쁘게 하는구나’ 하였다.15)
  이 기록은 혜소가 중국에서 도의와 만나 여러 곳을 순방하며 공부했다는 사실, 그리고 도의가 먼저 귀국하자 6년간 더 수행을 하다가 흥덕왕 4년(830)에 귀국했다는 사실, 왕은 혜소를 먼저 돌아온 도의와 함께 ‘두 보살(위이보살)’이라고 지칭한 사실 등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혜소는 장경초(헌덕왕13년, 821)에 돌아온 도의보다 9년 뒤에 귀국한다. 비문에는 도의와 헤어진 뒤 혜소가 종남산에서 3년, 자각에서 3년을 더 수행한다. 나머지 3년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빠져있지만 귀국연대는 9년 뒤인 태화4년(830)으로 명기돼 있다.
혜소의 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흥덕대왕의 도의에 대한 언급이다.     왕은 도의를 혜소와 함께 ‘두 보살’ 또는 ‘흑의지걸’이라며 존경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도의는 혜소가 귀국할 무렵까지는 최소한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도의의 입적 시기는 최소한 흥덕왕 4년 이후가 될 것이고, 입적할 때의 나이는 대략 80세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도의의 년보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즉 도의는 대략 경덕왕대인 750년경에 태어나 혜공왕대인 770년경 출가를 한다. 그리고  30세 전후인 선덕왕 4년(784)에 입당 유학하여 37년 간 당에 머물다가 71세 전후인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한다. 그 뒤 설악산 진전사에서 약 10여 년간 교화활동을 벌이다가 80세 전후인 흥덕왕 4년(830) 이후에 입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Ⅲ. 가계와 출신성분

  라말여초 선사들의 출신성분 문제는 신라사회에서 선종이 흥기하는 배경을 추적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어왔다. 알려진 대로 신라불교는 중대까지만 해도 중앙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교종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신라하대에 이르면 도당유학승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선종이 흥기한다.16) 물론 이 때도 교종 특히 화엄종은 완전히 쇠퇴한 것이 아니고 선종과 병립하면서 발전하고 있기는 하다.17) 하지만 대세로 본다면 교종에 대체하는 세력으로 선종이 등장하여 이후 라말여초의 불교계를 지배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18)
  그렇다면 선종이 라말여초의 불교계를 지배하게 되는 배경이 무엇인지에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최병헌과 김두진은 당시 선사들이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19)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선사들의 출신성분이 진골족의 몰락자나 육두품 이하의 출신자들이 대부분이다. 하대신라에 이르면 신라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골품제가 붕괴되면서 호족들이 지방에 할거하며 세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 은 이미 학계의 일반적 정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본 연구주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의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출신성분을 검토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차원에서 여기서는 도의의 출신성분과 출생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도의의 출신성분에 관한 자료는 앞에서 인용한 ꡔ조당집ꡕ의 기사가 전부다. 즉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고 ‘북한군 사람’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비문이 남아있는 동시대 다른 선사들의 경우에는 출가 이전의 가계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 소략한 편이다.
  김두진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 하대에 활동한 선종승려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행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30여명 정도에 이른다.20) 이들 중 성씨가 알려진 사람은 20여명 정도다. 진골출신으로 추정되는 김씨로는 가지산문의 체징(웅진호족 출신) 실상산문의 도선(영암출신 무열왕의 방계) 동리산문의 심희(임나왕족) 사굴산문의 범일(경주김씨, 왕족 김주원계) 개청(경주김씨, 왕족 김주원계) 성주산문의 무염(경주김씨)희양산문의 도헌(경주출신) 등 7명이다. 이에 비해 김씨가 아닌 사람은 13명 정도다. 이들은 김씨가 아니므로 일단 육두품 이하로 파악된다. 이중 가장 많은 성씨는 혜철․윤다․도윤․대통․순지 등 5명이 포함된 박씨다. 다음은 최씨로 혜조․형미․행적 등 3명이고 왕씨는 도의, 긍양 2명이다 그리고 각 1명인 성씨는 이씨인 현휘, 장씨인 경유, 신씨인 승형이다. 성씨로 보면 조상이 진골출신인 경우도 있지만 당대에 와서는 이미 가계가 족강된 상태이고 나머지는 모두 육두품 이하로 분석됐다. 즉 선문구산에 관계된 선승들은 대체로 육두품 이하라는 것이다.
  도의도 물론 육두품 이하의 신분이었다. 또 출신지역도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북한군(지금의 한강유역 경기도 일대)이다. 따라서 출신성분이 귀족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신분이 아주 낮은 계층의 신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라하대 사회에서 칭성을 하는 계층은 사회적으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지만 모든 사람이 성씨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성씨사용은 처음에는 왕실에서부터 시작해서 귀족,관료, 량민, 천민으로 확대되어갔다.21) 성씨가 보다 일반화된 것은 고려가 개국한 이후 왕건이 개국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을 통합관장하기 위해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성씨를 하사하면서부터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22) 따라서 라말여초에 성씨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 신분이 하층계급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의는 비록 신라의 변경이기는 하지만 북한군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지방세력가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도의의 출신성분과 관련해 한 가지 더 검토할 사항은 ‘왕자출신’이라는 언급이다. 이 표현은 고려의 문신 이규보(1168~1241)가 쓴 ‘용담사총림회방’이라는 짧은 글에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사가 서천에서 오매 심법이 중국에 행해진지 오래나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미치지 못했다. 신라에 이르러 ‘왕자 도의국사’가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가서 지장화상에게 법을 배워 돌아와 드디어 진전사에 입정하여 심인을 몰래 전한 뒤에야 선법이 우리나라에 퍼지게 되었다.23) 
  이 글에서 이규보가 도의를 ‘신라왕자’라고 한 것은 무슨 근거에 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도의가 신라의 왕자로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도 신라에는 왕씨가 왕이 된 적이 없다. 굳이 왕족출신 승려를 꼽는다면 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활약한 정중무상(648~762)이 왕자출신이라는 설이 있고24) 고려시대에는 문종의 넷째 아들로 출가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을 비롯해 왕자들이 출가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의가 왕자로서 입당구법했다는 자료는 이규보의 글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렇다면 이규보의 이 언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규보가 무엇인가 착각했을 가능성, 또 하나는 도의의 가계가 고려의 왕족인 왕씨 혈통일 가능성이다. 비록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이규보의 이 언급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본다. 왕건이 개경 일대의 토호세력이고 도의의 출생지인 북한군이 왕씨일족의 영향권에 속했던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가정은 설득력이 있다. 즉 도의는 고려를 건국한 왕씨가문의 사람이므로 ‘왕자출신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따른다. 그렇더라도 도의가 고려를 개국한 왕씨의 가까운 조상에 해당하는 가계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당시에 성씨를 사용한 계층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도의의 출신성분 문제 외에 또 한 가지 살펴볼 점은, ꡔ조당집ꡕ에 보이는 출생을 전후한 신비한 태몽과 이적에 관한 언급이다. 즉 도의는 임신되기 전에 부모가 이상한 꿈을 꾸었고, 태어나서는 신승의 예언으로 태를 강가에 묻었더니 사슴이 와서 지켜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언급은 도의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남아있는 선승들의 전기에는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일종의 ‘몽참’이다. 이것은 라말여초에 입비한 고승비문의 일정한 양식일 뿐이다.25) 따라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도의의 몽참에는 이미 불교와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도의의 어머니가 고승과 관계하는 꿈을 꾸었다든가, 태어난 후 신승이 찾아와 예언을 한 것은 그의 가계가 독실한 불교신도의 집안이었음을 말해준다. 라말여초의 한국사회는 불교가 사회의 상층부나 하층민 사이에 널리 믿어졌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해서 전혀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그래서 ꡔ조당집ꡕ은 출가 이전의 도의가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이러한 상서로움으로 인해 출가하여 법호를 명적이라 하였다(인서출가 법호명적).”라고 쓰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도의의 출신성분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도의는 진골과 같은 귀족출신은 아니지만 칭성을 하는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특히 이규보가 ‘용담사총림회방’에서 언급한 ‘왕자’라는 표현을 약간 확대 해석하면 고려를 개국한 왕건의 윗대조상일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하는 가계였을 것이란 점이다.



Ⅳ. 입당구법과 남종선의 전래

  도의가 출가한 뒤 어디서 무슨 공부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당시 승려들의 일반적 경향이 화엄학을 배우는 것이었으므로 도의도 어느 절에서 화엄학을 배웠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구체적 자료는 없다. 이 문제는 조금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입당구법 과정의 문제부터 검토해보고자 한다.
  도의의 행적은 입당 이전의 사실이 불분명한데 비해 입당과정이나 중국에서의 구법과정은 간략하지만 자료가 있다. 우선 ꡔ조당집ꡕ에 있는 기록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도의는) 건중5년(784) 갑자세에 사신으로 가는 한찬 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 그는 바로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의 감응을 받았는데 공중에서 성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산 속에서 신조가 비상하는 모습을 보았다.
드디어 광부의 보단사에 머물면서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후에 그는 조계에 이르러 조사당을 참례했는데 문빗장이 스스로 열렸다. 세 번 예배하고 밖으로 나오고려고 하니 문빗장이 전과 같이 닫혔다.
다음으로 강서의 홍주 개원사에 이르러 서당지장의 처소로 나아가 대사를 알현하니 의문점이 해결되고 막혔던 부분이 해석되었다. 대사는 마치 돌 사이에 옥을 캐는 것과 같고 조개에서 진주를 모으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가히 법을 전할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하면서 도의로 이름을 고치게 했다.
이어 두타의 길을 떠나 백장산 회해화상에게로 가서 마치 서당화상에게 하듯이 하니 백장은 ‘강서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했다.26)
  이 기록에 의하면 도의는 선덕왕 5년(784)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던 한찬 김양공의 도움을 받아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ꡔ삼국사기ꡕ에는 선덕왕 5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선덕왕대의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보면 즉위 3년(782)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27)과 즉위 6년(785) 당나라 덕종이 사신을 보내 선덕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책봉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28) 이를 보면 당나라에 사신이 왕복한 것은 책봉문제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 5년에 사신을 보냈다면 이 역시 책봉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도의는 이때 책봉사의 배를 타고 입당했던 것이다.
  도의의 입당을 도와준 사람은 한찬 김양공이다. 이 사람은 왕비 구족부인의 부친으로 선덕왕대 초기의 신라조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양품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ꡔ삼국사기ꡕ는 ‘구족부인이 양품 또는 아찬 의공의 딸’이라고 쓰고 있다.29) 이로 미루어보면 의공은 일명 양품이라고도 불렸으며 두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양공’이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30) 그렇다면 도의는 신라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입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도의와 김양공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정부의 고위관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도라면 도의의 신분도 사회적으로 그렇게 한천한 위치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만은 추정이 가능하다.
  입당을 한 도의는 바로 오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문수의 감응을 받았는데 그때 공중에서 성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산 속에서 신조가 비상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신비한 이적에 속하는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신비체험이 의미하는 상징성이다. 그것은 도의가 오대산에서 닦은 수행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의 불교설화에는 수행자들이 어떤 수행을 하면 그 정점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는 장면을 자주 등장시킨다. 이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수행의 완성이나 성취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다. 도의가 중국 오대산에서 체험한 신비한 현상을 이런 차원에서 해석하면 그는 이곳에서 각고의 수행 끝에 상당한 성취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한 가지 더 검토할 것은 도의가 왜 오대산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선 먼저 생각할 일은 중국불교에서 오대산이 차지하는 신앙적 성격이다. 중국의 오대산은 산서성 태원부 오대현에 동북으로 140여리에 걸쳐 있는 거악이다. 청량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문수신앙의 도장으로 보현보살의 아미산, 관음보살의 보타락산과 더불어 중국의 삼대화엄령산 중의 하나다. 이 산은 동진시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ꡔ육십화엄경ꡕ 「보살주처품」에 의거해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1만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라고 믿어져 왔다.31) 때문에 많은 화엄불교의 수행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컨대 신라하대 사굴산문의 행적(832~916)은 해인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입당하여 오대산을 찾아간다.32) 그런가 하면 당나라 때 무착(820~899)은 선승이면서도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으로 간다.33)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많은 수행자들이 오대산을 참배하기 위해 일보일배의 고행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모두 ꡔ화엄경ꡕ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역참하는 과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도의가 중국유학 초기에 오대산을 찾았다는 것도 이런 화엄불교를 성숙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아직 선법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으며 화엄학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화엄학은 의상(625-702)에 의해 대성되어 중대 이후 신라불교계를 지배하고 있었다.34) 이른바 화엄십찰이 세워지고35) 수많은 화엄학자가 배출되어 화엄학의 황금시대가 구가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도의도 본국에 있을 때는 화엄학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화엄신앙의 본산이라 할 중국 오대산을 찾았던 것이다. 오대산을 찾은 도의는 이내 화엄학과 관련된 고도의 이해와 지적 기반을 쌓았다. 이런 사실을 반영한 것이 바로 오대산에서 문수의 감응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도의는 이후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에 심취하게 된다. 즉 도의는 조계산으로 들어가 육조혜능의 조사당을 참배하는 것으로 남종선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도의가 그 동안 배운 교종불교를 포기하고 선종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의가 이렇게 교종에서 선종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시 승려들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것 같다. 이는 당시 중국의 불교계가 이미 교종중심에서 선종중심으로 전환되는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도의와 비슷한 시기에 유학한 입당승들은 모두 본국에 있을 때 화엄학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도의보다 약간 후배인 무염은 일찍이 신라화엄의 중심지였던 부석사에서 석징대덕으로부터 화엄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화엄을 공부하다가 그 한계성을 느껴 마조도일의 제자인 불광사 여만을 찾아갔다.36) 무염의 제자인 여엄도 화엄을 배우다가 선종으로 전환했으며37) 도헌도 부석사에서 범체대덕에게 화엄을 배우다가 선종으로 전환한다.38) 동리산의 혜철도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중국에서 선을 배우며39) 그의 제자 도선도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우다가 혜철을 찾아가 선을 배운다.40) 사굴산의 개청도 한때 화엄사에서 화엄을 공부했으며41) 위앙종을 홍통한 순지도 화엄을 배웠다.42) 이들은 모두 초기에는 화엄을 배우다가 나중에 선종으로 전환을 하고 있다. 이는 당시로서는 선진이라 할 수 있는 중국불교계의 영향과 신라불교계 내부의 사정이 맞물려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에 유학한 도의가 선불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소주에 있는 육조대사 영당이었다. ꡔ조당집ꡕ은 도의가 육조대사의 영당을 참배할 때 문이 스스로 열리고 닫혔다고 쓰고 있다. 이런 상서로운 이적은 도의뿐만 아니라 그의 후배에 해당하는 범일이 찾아갔을 때도 있었다. ꡔ조당집ꡕ ‘범일전’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중에 맹세하기를 ‘소주에 가서 조사의 탑에 참배하리라’하고 천리도 마다 않고 조계의 조사탑에 도착했다. 그러자 향기 어린 구름이 탑묘 앞에 서리고 신령한 학이 훌쩍 날아서 누대 위에서 지저귀니 사중의 대중이 모두 이렇게 수근거렸다. ‘이러한 상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필시 선사(혜능)께서 오신 징조일 것이다.’43)
 
  도의와 범일이 육조영당에 참배하려 하자 이렇게 상서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수행정도와 함께 조계혜능의 선불교를 계승한 뛰어난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도의는 이후 마조도일의 수제자인 서당지장의 문하로 찾아가서 모든 의심과 체증을 푼다. 그러자 서당은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하랴(성가이전법 비사인이수).”라고 하면서 조계혜능→ 남악회양 → 마조도일 → 서당지장으로 이어져온 남종선의 법맥을 전해주었다. 이어 도의는 마조의 또 한사람의 제자인 백장회해에게도 가서 공부를 하니 백장은 “강서의 선맥이 모두 동국의 이 사람에게로 돌아가는구나(강서선맥 총속동국지승).”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도의가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의 법맥을 이었다는 것은 한국선종사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도의가 마조의 홍주종의 정통법맥을 이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ꡔ전등록ꡕ권6 ‘마조도일장’에 따르면 마조에게 입실한 제자는 무려 139인에 이른다. 이중 수제자는 서당지장이다. 지장의 법호 가운데 ‘서당’은 그가 거주하던 당호에서 따온 것인데 서당이란 총림에서 주지 다음 가는 상석의 선승이 머무는 곳이다. 이는 지장이 마조의 후계자임을 말한다. 실제로 지장은 다른 제자들이 각지에서 법당을 내걸고 행화를 펼칠 때도 마조의 옛 도량인 습공산을 지키면서 스승의 선법을 선양했다. 뒷날 백장회해나 남천보원을 마조의 적사로 내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백장이나 남천의 문파가 번성한 데서 만들어진 조작이다. 적자는 어디까지나 지장이었다.44) 도의는 바로 이 서당지장을 찾아가 선법을 닦은 끝에 인가를 받은 것이다.
  신라의 입당승 가운데는 도의 외에도 3인이 서당을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당시 지장문하에서 수학한 신라의 유학승은 도의 외에 실상산문의 개창조 홍척, 동리산문의 개창조 혜철, 그리고 쌍계사 혜소 등이었다. 이중에서 최초로 법맥을 전해 받은 사람은 도의였다. 도의는 이들 가운데 나이도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인가도 먼저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유학승들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조사선의 선구자인 혜능의 정통법맥은 마조와 지장을 거쳐 도의에 의해 신라로 전해질 수 있었다. 도의가 백장을 참문했을 때 “강서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는 감탄을 했다는 사실은 이를 립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류의할 점은 서당이나 백장이 도의를 인가하고 선맥이 동국으로 돌아갔다는 언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서당이나 백장의 언급을 너무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마조의 강서선맥이 도의에 의해 동국에만 전해지고 중국에는 방계만 남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좀더 객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고려해야 할 것은 ‘강서선맥 총속동국지승’과 비슷한 표현은 다른 신라승들의 자료에도 보인다는 점이다. 즉 사굴산문의 범일은 염관제안(?~842)으로부터 ‘동방이 보살’이라는 칭찬을 받으며45) 성주산문의 무염은 불광여만으로부터 “중국에 선법이 없어지면 동이에서 물어보아야 하리라.”는 말을 듣는다.46) 또 사자사문의 도윤은 남천보원(748-834)으로부터 “우리 종의 법인이 몽땅 동국으로 들어가는구나.”라는 말을 듣는다.47) 이는 분명 그들이 뛰어난 선승이 되었으며 선맥을 이었다는 증거로 손색이 없다. 그렇지만 이는 신라선종이 정통선맥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 이상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ꡔ조당집ꡕ권17에 입전된 신라승들의 기록에 왜 한결같이 ‘정법동래’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과 검토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가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신라에 정통선맥이 계승되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한 구참설과 관련이 있다는 정성본의 시각이다.48) 구참이란 현기나 참기처럼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불을 미리 예언하는 수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전통에 따라 선종에서는 제자에게 전법을 하거나 조사의 출현을 참기하는 일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ꡔ보림전ꡕ에 나오는 반약다라와 보지선사의 참게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도의를 비롯한 신라선승에 대한 중국선사들의 예언이나 전법사실의 강조는 신라선종의 정법상승설의 의도 아래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49) 또 하나는 신라선사들의 전기를 비교적 자세히 싣고 있는 ꡔ조당집ꡕ을 한국에서 편찬했기 때문이라는 김두진의 추측이다. 김두진은 그 근거로 이 책이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고 해인사 고려대장경 보판에만 있다는 점,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의 도헌과 수미산문의 이엄을 빼고 나머지 일곱 산문의 조사를 모두 입전시키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전법한 사람만을 실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순지에 대해서는 중국 어떤 선사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점을 들어서 이 책을 순지 계통의 사람이 편찬했을 가능성을 추측하기도 한다.50)
  이상의 논의를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신라하대의 선종은 개산조들의 인격과 행화, 활약에 대한 기대로 구참이 만들어져 비문에 기재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 편집되었거나 개편된 ꡔ조당집ꡕ에서는 이를 근거로 신라선사들이 중국선종, 그 중에서도 마조계통 홍주종의 남종선맥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의 행적에 이 사실을 등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고려할 것은 이상과 같은 정법상승설은 당시 교종불교에 대한 선종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교종중심의 신라불교계가 선종을 비판하자 이에 대한 반격과 재비판이 적지 않았던 사실과 연관시켜볼 때 매우 설득력이 높은 추정이라 할 것이다.

Ⅴ. 귀국후의 활동

  도의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 활동한 사실을 전해주는 기록은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와 김영이 쓴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다. 우선 <지증대사탑비>(893년작)에 나오는 도의관련 기록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장경 초(821)에 도의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지장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지장선사에게서 배워서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선종을 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으로 분주한 망상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북쪽으로 달리는 얕은 길을 옹호하고 뱁새가 날개를 자랑해서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뜻을 비웃었다. 또 이미 송언에만 심취하여 선법을 비웃으며 마어라고 비방하였다. 이를 본 스님은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빛을 행랑채 지붕 아래 숨기고 자취를 깊은 곳에 감추었다. 신라의 왕성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다. 주역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에 숨어살아도 민망함이 없다’는 것과 중용에서 말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아도 뉘우침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났으며 선정의 숲에서 향기가 풍기매 개미가 고기 있는 곳에 모여들 듯 도를 사모하여 산에 가득 메웠다. 교화를 받고 마침내 산을 떠나가니 도는 인력으로 폐할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마땅히 행해지는 것이다.51)
  최치원이 이 비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먼저 도의가 지장으로부터 선법을 전래해온 사실, 송언(교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선법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비웃으며 마어라고 비난하고 있는 사실, 그러자 도의가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북산(설악산)에 은거한 사실, 그러나 선법을 숭상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교화를 받은 사실 등이다.
  도의가 귀국한 이후 신라불교계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는 도의의 손제자인 보조체징의 비문(884년작)에서도 확인된다.
처음 도의대사가 서당의 심인을 얻고 신라에 귀국하여 그 선리를 설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은 아직 경교와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 숭상하였으며 무위임운의 종지에 이르지 못하고 이를 허탄하다 하여 숭상하고 중히 여기지 않았다. 이는 마지 옛날 달마가 양무제를 만나 뜻이 계합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부터 도의선사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였으며 법을 염거에게 부촉하였다. 염거선사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조사의 심인을 전하고 도의의 가르침을 펴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 그리하여 달마가 중국선종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대사를 제1조로 삼고 제2조는 염거선사, 제3조는 우리선사(체징)가 되었다.52)
  이 비문 역시 도의가 불우하여 환영받지 못한 사실을 달마가 양무제를 만나 선법을 가르치려다가 시절인연이 아님을 알고 소림사로 들어간 것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달마가 혜가를 만났듯이 도의는 염거를 만나 법을 전하고, 염거는 다시 체징에게 법을 전하니 도의는 달마가 중국의 제1조이듯 우리나라에서 제1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의가 귀국한 직후의 사정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들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도의가 귀국한 직후 불우한 말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선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즉 도의가 설악산에 ‘은거’한 것이 반드시 당시 사람들의 선법을 이해하는 수준이 부족한 탓인가 하는 것이고, 또 도의가 과연 설악산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도의가 귀국했을 때 신라불교계가 선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살펴볼 일은 도의보다 5년 뒤 귀국한 홍척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흥덕대왕이 즉위(826)함에 선강태자 충공이 감무가 되어 사를 제거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으며 선을 좋아하여 나라가 살쪘다. 이 즈음에 홍척대사가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으로부터 수법하고 신라에 돌아와서는 남악(지리산)에 머물렀다. 임금이 국태민안을 위해 법문을 청하였고 대궐에서는 그가 온 것을 경하하였다. 대사는 선법을 보여서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게 함이니 변함에 차제가 있지 않으며 흥함이 갑작스러웠다. … 이후에 중생을 구제함이 쉬워지고 도에 계합하여 무념의 경지에 드니 이에 조사를 따르는 문도들이 번창하였다.53)
  이것은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에 나오는 홍척에 관한 언급이다. 이에 의하면 홍척은 귀국한 후 배척을 받은 흔적이 없다. 도리어 왕실의 적극적인 호의와 환대를 받는다. 아무리 임금이 헌덕왕에서 흥덕왕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도의와는 상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비슷한 예는 도의보다 9년 뒤인 흥덕왕 4년(830)에 귀국한 혜소(774-850)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혜소의 비문에 의하면 흥덕왕은 쌍계사에 머물고 있는 혜소에게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초청을 한다.54) 도의가 귀국한 뒤 5-10년 사이에 상황은 놀랄 정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상황을 변하게 만든 것인지 궁금해진다. 또 어째서 도의는 설악산에서 산문을 열지 못했는데 홍척은 지리산에서 산문을 열 수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기두의 의견이 귀중한 시사점을 준다. 한기두는 ‘지증대사비문’에 나오는 ‘북산의 남악척’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면서 도의의 북산선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릇된 습관에 말려들지 아니하는 순선’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홍척의 남악선은 ‘현실을 떠나지 않고 교학계와도 융통하는 융선‘의 성격을 지녔다’고 분석하고 있다.55) 이러한 분석은 서윤길도 같은 입장이다. 서윤길은 실상산문의 홍척 뿐만 아니라 동리산 혜철도 교학을 인정하고 융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56) 한 걸음 나아가 서윤길은 도의의 손제자인 체징이 가지산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보림사에 밀교의 주존인 비로차나불을 모신 예에서 보듯이 ’사상적 통합‘을 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57)
  이런 분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도의가 설악산에 은거만 하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증비문’에 나오는 것처럼 ‘북산의’라고 할 정도의 활동이나 문파형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치원이 도의의 활동을 언급한 지증비문 뒷부분에도 나타난다. 도의의 선풍이 “겨울산봉우리처럼 빼어났으며 선정의 숲에서 향기가 풍기매 개미가 고기 있는 곳에 모여들 듯 도를 사모하는 사람이 산을 가득 메웠다. 교화를 받고 마침내 산을 떠나가니 도는 인력으로 폐할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마땅히 행해지는 것”이라는 표현58)이 그것이다. 다만 후대에 그의 손제자인 체징이 왜 설악산 진전사에서 산문을 이어가지 않고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개창했는지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Ⅵ. 맺는말

  본 고찰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의의 귀국 후의 교화활동을 ‘은거’로만 생각해온 종래의 견해는 일정부분 수정돼야 한다.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만 한 것이 아니라 ‘설악산 선풍’이라 불릴만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도의의 설악산 선풍은 한기두의 지적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릇된 습관에 말려들지 아니하는 순선’이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불교계와는 쉽게 융화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의의 이런 노력은 뒷날 신라사회에 선법을 뿌리내리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도의가 신라사회에 선을 보급하는 ‘개척’의 길을 걸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체징비문에 나오는 표현처럼 도의는 ‘중국의 달마’에 비견되는 ‘해동의 달마’라 해도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지금껏 도의생애에서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몇가지 행적을 조명하여 보았다. 필자의 이런 주장은 당시 시대상황, 불교계 변동을 고려하면서 더욱 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 국문초록 】
  본 고찰은 한국선종사에서 뚜렷한 위상을 갖고 있는 도의국사 연구에 있어서 그간 연구의 공백지대였던 생애사의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한 글이다. 도의국사는 그의 위상으로 인하여 조계종단의 종조로 추앙을 받고 있는 고승이다. 해서 그의 생애사에 대한 정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본 고찰에서는 도의의 생몰년대, 가계와 출신성분, 입당구법과 남종선의 전래, 귀국 후의 활동 등의 문제를 관련 문헌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추후에는 본 고찰에서 살핀 내용을 당시 시대 상황, 불교계 동향, 개별 산문의 동향 등과 연결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되리라 본다.

【 주제어 】
 도의국사, 남종선, 진전사, 신라하대 선불교, 산문











【 Abstract 】
Life and Achievements of Dowui National Teacher of Buddhism

Kim, Yang-Jung
(PhD. Wonguang University)
        This dissertation organizes several topics that have been omitted in the studies of the life history of Dowui national teacher of Buddhism. Dowui Guksa is a highly respected monk in Korean Buddhism as the founder of the Jogye Order. Therefore, precise and clear knowledge of his life history has a significant meaning in Korean Buddhism.
        Knowing this significance of the study, this article examined the exact years of his birth and death, the origin and status of his family, his going to Dang dynasty for search for the Dharma(입당구법), the introduction of zen of southern order(남종선) by him, and activities after coming back from abroad by analysing related literature and documentary records. For concrete understanding of this topic, the study done in this dissertation should be further investigated in connection with circumstances of the time, the stream of the Buddhist society, and the tendency of individual prose writings.


【 Key words 】
Dowui national teacher of Buddhism, zen of southern order, Gingeonsa, Zen Buddhism after Shin-la, prose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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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투고일: 2008. 8. 5        심사완료일: 2008. 9. 17     

각주)-----------------
* 원광대 대학원․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1) 중국선사들의 행장과 선문답을 모아놓은 ꡔ전등록ꡕ 권9에는 서당지장의   사법제자로 ‘계림도의선사’라는 이름만 보이고 행장은 없다.
2) ꡔ조당집ꡕ은 중국이나 일본의 대장경에는 없으며 ꡔ고려대장경ꡕ(45-233)에만 입장되어 있다. 이 책은 ꡔ경덕전등록ꡕ보다 50년 정도 앞서 성립된 고전이다. ꡔ한글대장경ꡕ 184, 185권에 번역본이 있으며, 권17은 185권 231-2
   65쪽 사이에 있다. 정승석편, ꡔ불전해제사전ꡕ 민족사, 1991, 300쪽 참조.
3) ꡔ조당집ꡕ 권17 도의전에는 말미에 ‘나머지는 비문과 같다(여여비문)’는 말이 보인다.
4) <설악진전사 원적선사>, “사서당 재명주 사휘도의 속성왕씨 북한군인 미임지전 기부모백홍입실 급모몽중견승 동상이침 각문향기분복 부모악연 공상위왈 거사희서 필득성자 경어반월지유신 인재태삼십구월 방시산생 분면지단 홀유이승 석장도문왈 금일소산아 태가치임하지 언필홀연불견 수종승언 장태매지 대록래수 종년불거 경력인견 부족해심 인서출가 법호명적 이건중오년세차갑자 수사한찬김양공 과해입당…“ (ꡔ조당집ꡕ 권17).
5) <해동고신행선사지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114-117쪽.
6)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66-72쪽.
7)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116-120쪽.
8) <동국 혜목산화상> ꡔ조당집ꡕ 권17.
9) <쌍봉화상> ꡔ조당집ꡕ 권17.
10) <감포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72-83쪽.
11)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60-64쪽.
12) <명주굴산 고통효대사> ꡔ조당집ꡕ 권17.
13) <봉암사 지증대사비>, “장경초 유승도의OOOO 서범도서당지오 지광모지장이환 지시어현계자…”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14) 역사학자 이이화는 ꡔ역사 속의 한국불교ꡕ (역사비평사, 1988) 96쪽에서 “그는 설악산에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면서 제자를 길렀다.”고 쓰고 있으나 필자는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15)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월유향승도의 선방도어화하 해후적원 서남득붕 사원참심 증불지견 의공전귀고국 선사즉입종남 등만인지봉 이송실이지관 적적자삼년 …내어대화사년내귀 대각상승 조아인역 흥덕대왕 비봉필영노왈 도의선사 향이귀지 상인계지 위이보살 석문흑의지걸 금견루갈지영 미천자위 거국흔뢰…”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16) 신라하대에 이르러 유학승들이 갑자기 대거 귀국한 것은 당나라 무종의 회창년간(841~846)에 일어난 폐불사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무렵 강제 환속을 당한 승니수는 무려 26만여 명이었고 수많은 사찰과 불상이 파괴되었다. 또 외국의 승려는 강제로 추방되었다. 중국에 유학하던 승려들이 이 무렵 대거 귀국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의 사정을 짐작케 하는 자료로는 일본승려 원인이 쓴 ꡔ입당구법순례기ꡕ가 있다. 이 문제를 다룬 논문으로는 권덕영의 <당무종의 폐불과 신라구법승의 동향> (정신문화연구 17권 1호, 1994)이 있다.
17) 김상현, 김복순 등 신라화엄종을 연구한 학자들을 선과 화엄이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융섭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 김상현, <신라하대 화엄종의 이해>, ꡔ신라화엄사상사 연구ꡕ 민족사, 1991. 219-262쪽. 김복순, <신라하대 선종과 화엄종과의 관계 고찰> ꡔ국사관논총ꡕ 48집, 1996 참조.
18)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ꡔ한국사연구ꡕ 7집, 1972.
    고익진, 「신라하대의 선전래」, ꡔ한국선사상사 연구ꡕ 1984.
19) 최병헌의 상게 론문과 김두진의 「신라하대 선사들의 중앙왕실 및 지방호족과의 관계」, ꡔ한국학논총ꡕ 21집,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98 참조.
20) 주19, 김두진의 논문 참조.
21) 이순근,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ꡔ한국사론ꡕ 6집, 1980.
22) 이수건, ꡔ한국 중세사회사 연구ꡕ (일조각, 1984) 참조.
23) “부조가서래 심법지행호 중국상의 연유미급어삼한 기신라왕자 도의국사 항해입당 구법어지장화상 득이동국 수입정진전사 밀전심인 연후 선철시전우동국의…” ꡔ동국이상국집ꡕ 권25, ꡔ국역 동국이상국집ꡕ 3, 민족문화추진회, 1985. 311쪽.
24) ꡔ력대법보기ꡕ의 ‘무상전’에는 무상이 ‘신라왕족’ 출신이라고 되어있으며 ꡔ송고승전ꡕ에는 무상이 ‘신라국왕의 세 번째 왕자’라는 기록이 보인다.
25) 몽참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지만 나말여초에 도참이 성행하면서 이것이 비명찬술의 일정한 양식이었다. 양은용, 「도선국사 비보사탑설 연구」 ꡔ도선연구ꡕ 민족사, 1999, 118쪽 참조.
26) <설악진전사 원적선사>, “이건중오년세차갑자 수사한찬김양공 과해입당 직왕대산이감문수 공문성종지성 산견신조지상 수거광부단사 시수구계 후도조계욕례조사지당 문선홀연자개 첨례삼편이출 문개여고 차예강서홍주개원사 취어서당지장대사처 정알위사 결의석체 대사유약 석간지미옥 습합중지진주 위왈성가이전법 비사인이수 개명도의 어시두타이예 백장산회해화상처 일사서당 화상왈 강서선맥 총속동국지승…”(ꡔ조당집ꡕ권17)
27) ꡔ삼국사기ꡕ권9. 선덕왕 3년.
28) ꡔ삼국사기ꡕ권9. 선덕왕 6년
29) ꡔ삼국사기ꡕ권9. 선덕왕 원년.
30) ‘양’은 ‘양’과 발음이 같으며, 발음이 같은 경우는 같은 자를 쓰기도 했다. 예컨대 금석문에도 ‘도의’를 ‘도의’로도 표기하고 ‘의상’을 의상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31) 정병조, 「강원지역의 불교 -오대산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ꡔ월정사성보박물관 학술총서ꡕ 제2집 (월정사, 2001), 18쪽.
32)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ꡔ한국금석전문ꡕ 중세편 상, 358쪽.
33) 무착은 문수동자를 만나 “면상무진공양구 구리무진토묘향 심리무진시진보 무염무구시진상”이라는 게송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ꡔ송고승전ꡕ 권20, <당오대산화엄사무착전>
34) 신라 화엄교학의 영향과 활동에 대한 전반적 이해로는 김상현의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활동> (ꡔ신라문화ꡕ 1집, 1984)이 많은 참고가 된다.
35) 화엄십찰에 관한 언급한 자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이고 또 하나는 ꡔ삼국유사ꡕ 권4, <의상전교조>이다.
36)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37) <저평보제사 대경대사현기탑비> (ꡔ조선금석총람 ꡕ 상) 참조.
38)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39) <태안사 적인선사조륜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40) <광양옥룡사 선각국사증성혜등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41) <강릉지장선원 낭원대사오진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42) <오관산 서운사화상> (ꡔ조당집ꡕ 권20) 참조.
43) <계림명주굴산고통효대사>, “후이서향소주 예조사탑 불원천리 득예조계 향운홀기 반선어탑묘지전 영학후래 료루어누대지상 사중악연 공상위왈 여차서상 실미증유 응시선사내의지지야…” (ꡔ조당집ꡕ권17) 이밖에도 행적과 형미도 육조의 영탑을 참배한 기록이 있다.
44) 마조의 정통법사 문제는 정성본이 ꡔ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ꡕ(민족사, 1991) <마조문하의 선승들> 항(738-755쪽)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45) ꡔ조당집ꡕ 권17, <명주굴산고통효대사조>.
46) ꡔ조당집ꡕ 권17, <숭엄산성주사 고양조국사조>.
47) ꡔ조당집ꡕ 권17, <쌍봉화상조>
48) 정성본, 「신라선종의 구참설」, ꡔ한종만박사 화갑기념 불교사상논총ꡕ, 원광대출판국, 1991.
49) 정성본의 전게 론문 참조.
50) 김두진, 「요오선사 순지의 선사상」, ꡔ역사학보ꡕ 56집(1975), 3-4쪽.
51)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장경초 유승도의OOOO 서범도서당지오 지광모지장이환 지시어현 박원심 호분북지단 긍안익초도남지고 기취어송언 긍치위마어 시용도광무하 감적호중 파사동해동종둔북산 기태이지무민 중용지불회자사 화수동령 방정림OOOO 의모자미산 안화자출곡 도불가폐…”(ꡔ조선금석총람ꡕ 상).
52)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초도의대사자 수심인어지장 후귀아국 설기비리 시인아상경교 여습관존신지법 미진기위임운지종 이위허탄 부지숭중 유약달마불우양무야 유시지시미집 은어산림 부법어염거선사 거설산억성사 전조심벽사교...달마위당제일조 아국칙이의대사 위제일조 거선사위제이조 아사제삼조의…”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53)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흥덕대왕찬융 선강태자 감무거사의국 낙선비가 유홍척대사 역서당증심 래남악휴족 별면진순풍지청 용덕경개무지기 현시밀전 조범모성 변비울야 흥차OOOOOO발언…이후촉건하전 융도무념 이조식번유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54)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ꡔ조선금석총람ꡕ 상) 참조.
55) 한기두, 「신라시대의 선사상 -신라선의 북산과 남악-」, ꡔ한국불교학ꡕ 1집, 1975. 참조
56) 서윤길, 「도선국사의 생애와 사상」, ꡔ도선연구ꡕ (민족사, 1999) 29쪽.
57) 서윤길 전게 론문 참조. 그러나 신라시대에 조성된 비로차나불을 밀교의 주존으로 보는 것은 억측이다. 신라시대에 봉안된 비로차나불은 화엄의 주존이지 밀교의 주존은 아니다.
58) 주53 참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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