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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조선의 본질과 그 수행의 원리 - 김호귀 [대각사상]

출처 수집자료

묵조선의 본질과 그 수행의 원리 *1)


                                                      김호귀 **2)



                    Ⅰ. 서언
                    Ⅱ. 묵조선의 입장
                    Ⅲ. 묵조선의 본질
                       1. 묵조선의 수행 - 지관타좌
                       2. 묵조선의 심리 - 비사량
                       3. 묵조선의 깨침 - 본증자각
                       4. 묵조선의 모습 - 신심탈락
                    Ⅳ. 결어



  한글요약
  묵조선은 간화선과 더불어 송대에 새롭게 형성된 선수행법이다. 묵조선은 본래성불 사상에 철저한 조사선의 가풍으로서 일체의 진리가 본래부터 어디에나 갖추어져 있다는 본증과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나 언제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는 현성공안의 입장이다. 때문에 그 본래성불의 도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가 중요한 주제이다. 곧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활작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드러내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으로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모습이 곧 지관좌선의 가부좌이다. 이것은 깨침을 얻기 위한 준비나 수단이 아니라 그대로 깨침의 현성에 해당하는 본증이다. 그리고 그 본증을 마음속에서 체득하는 방식이 비사량의 심리체험 곧 자각이다. 이 본증과 그것의 자각에 의하여 비로소 모두에게 진리로서의 공안이 투득되고 현성된다. 따라서 묵조선의 수행구조는 가부좌의 좌선과 본증의 자각과 그것을 내면으로 체험하는 비사량이 근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좌선을 통하지 않은 깨침은 무의미하고, 자각이 결여된 본증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좌선은 이미 깨침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앉아 드러나 있다. 그래서 좌선은 몸의 묵과 마음의 조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그래서 묵조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체의 번뇌와 분별이 없는 비사량의 체험을 중시한다. 이처럼 터득된 비사량의 체험은 신심탈락으로 현성한다. 곧 몸과 마음 나아가서 감각과 언설의 초월상태이다. 공안의 현성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성된 공안이다. 일절중생 실유공안의 입장이다. 이러한 신심탈락의 체험은 행위 자체에마저 집착이 없는 제일심이 필요하다. 제일심은 본격적인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가부좌의 좌선과 호흡을 수반한다.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심을 내는 발심이 필요하다. 발심의 믿음이 곧 현성공안이다. 공안의 현성은 필경에 몸과 마음과 감각의 초월을 지향하는데 이것이 곧 신심탈락이요 좌선탈락이다.

  주제어
  묵조선, 본증자각, 지관타좌, 현성공안, 신심탈락, 굉지정각, 비사량, 가    부좌, 본래성불, 오위, 이미
Ⅰ. 서언

  일찍이 인도에서부터 좌선은 불교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수행의 방식으로 전해져 왔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이후에 수․당 시대에는 많은 불교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선종은 좌선수행을 통하여 깨침에 이르는 것을 중요시하는 종파였다. 이 점에서 선종의 역사는 좌선관의 변천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1) 그 선종의 내부에도 다양한 수행방식이 표출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위빠사나와 간화선과 묵조선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묵조선의 사상적 기반은 우선 달마의 이입사행에서 말하는 심신, 우두종에서의 좌선관 곧 절관에 기초한 본래자연 내지 본래본연, 그리고 무심에 기초한 무물에서 찾을 수 있다.2) 또한 소위 릉가종의 수행에서 수일심 내지는 수본진심도 본심의 구비라는 입장에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신회는 염불기와 견본성을 내세우고 반야바라밀을 강조하여 지를 통한 정의 수가 혜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정으로부터 혜를 얻는 단계적인 수행이 아니라 불지의 작용이 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당말․오대에는 소위 선종오가가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동산과 조산을 중심으로 하는 조동종은 석두희천의 「참동계」에 바탕한 열린 관계[회호]와 동산의 「보경삼매」에 바탕한 열린 관계[회호]와 닫힌 관계[불회호]의 원리, 그리고 오위사상의 원류인 「오위현결」에 바탕하여 조동종지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동선법의 전승은 조동종 제10세에 해당하는 진헐청료에 이르러서 묵조의 선풍으로 등장하였다. 진헐은 현성공안을 현창하고 묵조의 사상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바탕에서 굉지정각은 조동종지를 새로운 묵조선이라는 선법의 주창으로 그 의의를 부각시켰다. 특히 조동종의 경우 동산양개의 법을 이은 운거도응의 아래에서 동안도비․동안관지․양산연관․대양경현․투자의청․부용도해․단하자순․굉지정각 등으로 이어졌다.

Ⅱ. 묵조선의 입장

  이러한 시대에 굉지는 천동산을 중심으로 그 자신의 독특한 교화를 펼쳤는데 그것이 묵조의 수행이라는 가풍으로 전개되어 나아갔다. 묵조라는 말을 가지고 자기의 선풍을 고취시킨 것은 바로 굉지정각이었다. 굉지가 묵조라는 말에 의해서 드러내려고 한 것은 묵에 있어서의 무분별과 조에 있어서의 지의 자각이었다.3)
  「묵조명」에 나타나 있는 묵조는 묵과 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묵조가 일여하게 될 때가 바로 묵조선의 현성이다. 이것은 본증의 현성 내지는 자각의 의미이다. 때문에 묵조선의 구조는 본증자각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중점이 바로 깨침의 세계 곧 불의 세계에 맞추어진다. 본증의 자각이기 때문에 그 깨침으로 이끌어 나아가는 방법과 수행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묵묵하게 좌선을 할 때에 그대로 투탈된 깨침의 세계가 현현한다. 그 세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부터 도달해 있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묵조는 묵으로서의 좌선의 수와 조로서 현성된 증을 달리 보지 않고 증이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음 곧 본래성불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묵조라는 용어는 단순히 묵묵히 비추어본다는 수식 내지 한정의 관계가 아니라 묵과 조의 병렬적인 의미이다. 곧 묵조는 다양한 어구로 나타나면서도 본래의 묵조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조는 묵묵한 좌선으로서의 수행을 가리키는 묵과 광겁에 두루 비추지 않음이 없는 증상에서의 공능인 조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묵조가 각각 묵은 조가 상정된 묵으로서의 작위의 현성이라면 조는 묵을 수반하는 조로서의 무작위의 현성이다.
  또한 리와 사, 빈과 주 등 열린 관계[회호]가 어우러진 증상의 양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묵과 조는 다름 아닌 신과 심이다. 묵이 신상에서 올올하게 좌선일여한 상태로 지속되는 동중정이라면 조는 심상에서 무한한 묘용을 뿜어내는 정중동이다. 이것은 신이 묵한 상태로의 좌선과 함께 심이 조한 상태로서의 좌선이다.
  이러한 좌선일여야말로 바로 심의 증은 신의 수를 통해 표현되고, 신의 수는 심의 증을 통해 안팎으로 철저해진다. 따라서 이 묵과 조의 관계는 바로 수와 증의 열린 관계[회호]와 닫힌 관계[불회호]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편정오위의 양태를 실천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부각시킨 것이다.
  한편 묵조선에서는 묵조와 더불어 이미라는 개념이 있다. 곧 이미는 묵조선의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인 오위의 회호와 불회호의 원리를 이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좌선에 있어서의 마음의 자세와 몸의 자세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원래 이미라는 용어의 의미는 「이」는 일체의 계박을 벗어난 것이라는 뜻으로부터 번뇌와 작위적인 행위를 활달하게 떨쳐버린 것이고, 「미」는 만물 속에 감추어져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자타의 구별이 달리 없으면서도 묘용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곧 깨침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서 주와 객인 인과 경이 탈락한 대오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이 동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것이 편정의 열린 관계[회호]라면 정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이미」이다. 이 때문에 바로 묵조선에서는 좌선이 바로 미지와 묘조의 본증자각으로 현성해 있는 요기이고 기요라 한다.
  또한 묵조선에서는 일체가 깨침의 표현이라는 현성공안의 입장을 내세운다. 일체의 작위적인 행위를 벗어나 있는 수행이 묵이고 그 속에서 청정을 구족하는 것이 조이다. 그래서 생과 사가 원래 뿌리가 없으며 출몰의 흔적도 없는 것임을 자증하는 것이 강조된다. 천지가 그대로 하나의 대해탈문임을 묵조한다.
  그런데도 아직 공안  곧 진리가 현성되어 있지 못하는 경우는 자증이 현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본증자각이라는 묵조의 묘용이 요구된다. 진리의 현성 그대로는 무엇하나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본체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몰종적이고 조도이며 무위진인처럼 당당하여 「묵묵하게 노닐고 여여하게 설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현성공안이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공겁이전의 자기가 전체적으로 탈락할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원래부터 공겁이전의 자기는 곧 그 자리에 있는 현재의 자기였을 뿐임을 터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성공안이 묵조선에서는 전시각으로서 등장해 있다. 그리하여 무언적묵의 시각이 곧 위음왕나반의 본각으로서 등장해 있다.
  한편 묵조선의 대표적인 교의인 오위는 주도면밀한 본증의 현성을 강조한다. 본래 묵조선에서 조동오위는 하나의 기관이고 론리였다. 그 논리적인 성격이 강한 오위설은 그 근본사상인 겸대사상이 나타내고 있는 실천성과 열린 관계[회호]의 특징에 있어서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묵조선과 오위는 종래부터 밀접한 관계를 지지고 있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만큼 성격에 큰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드물다. 곧 묵조의 실천과 오위의 논리는 실천과 논리의 관계로서 현상적으로는 합치될 수가 없다. 여기에 바로 실천적인 논리와 논리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이것이 묵조의 실천성에 오위의 논리성을 수용하여 그 당위성을 부여하고, 오위의 논리성에 열린 관계[회호]와 닫힌 관계[불회호]의 겸대를 되살려 묵과 조의 의미를 확대함으로써 오위와 묵조의 한계는 극복되고 승화된다.5)
  묵조선이 지니고 있는 종래의 한계는 그 실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적묵의 수행에 떨어진다든가, 깨침을 무시한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오위사상이 지니고 있는 종래의 한계라는 것은 묵조수행의 도리를 설명하는 방식에 소홀하여 그 실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양측의 상관관계 내지는 대치성을 어떻게 해결하여 그 일치점에 도달하는가 하는 것이 묵조선의 전승에 대한 과제였다. 이와 같은 묵조선이 지니고 있는 한계성은 오위의 논리성으로 극복되고, 오위가 지니고 있는 한계성을 지유선으로 극복된다.6)
  또한 묵조선에서의 마음자세는 비사량에 잘 나타나 있다. 좌선에서 의식의 존재방식으로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비사량은 단순히 사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번뇌와 분별과 집착이 없는 사량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호간의 의식이나 무의식과 같은 상대적인 분별작용이 완전히 없어진[비] 상태의 순수한 의식활동[사량]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사량에 철저한 것이 묵조좌선의 요체이다. 비사량은 좌선을 전제한 비사량이다. 그래서 좌선 속의 비사량이야말로 사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분별이 없는[비] 사량, 탈락의 사량, 불염오의 사량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비사량의 경지는 믿는 주체의 신과 믿어야 할 객체의 심이 원래 불이일체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지식과 작의가 아닌 좌선체험으로서 맛보는 본증의 경지이다. 그것은 곧 무분별의 사량으로서 좌선을 통해 현성한다.
  곧 공안이라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심의식이 무의식을 통해 의식화 되어가는 견성의 과정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공안선의 행태라면, 비사량이라는 무분별한 사량의 전체 속에 그대로 내맡겨 버리는 가운데서 궁극적으로는 다시 사량을 벗어난 탈체현성의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묵조선의 행태이다.
  그러나 비사량의 사상은 좌선에서의 내면적인 마음의 준비로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언설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묵조선의 비사량은 「사량에 대한 비」 뿐만이 아니라 「언설에 대한 비」와 「신체행위에 대한 비」의 소식으로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묵조선에서의 비사량은 절대무심과 순수의식을 근저로 하는 주객원융이 전일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 전일의식은 바로 지유로서의 풍모를 나타내며, 생각을 잊고, 말을 끊으며, 행동이 떠나 생사거래에 그대로 맡겨두는 곳에서 현성한다. 그래서 묵조선의 비사량은 절대무심이라는 순수의식이 좌선을 통하여 현성한 것이다. 이것을 「묵조명」에서는 좌선을 통한 묵조의 현성이 다름아닌 깨침의 현성이고 본증의 자각이라 말한다.

Ⅲ. 묵조선의 본질

  묵조선에서는 석존의 좌선과 같이 이미 깨침의 분상에서 행불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깨침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7) 다만 깨침이 성취된 불성임을 믿고 그대로 똑같이 닮아가려는 연습을 한다. 따라서 석존의 좌선을 자신이 그대로 흉내내면서 좌선하는 속에서 스스로가 닮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좌선 그대로일 뿐이다. 이것이 곧 깨침에 대한 근본적인 신심이다.
  이 신심은 달마의 심신에 통한다. 달마에게 있어서 이입이란 곧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심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은 단지 객진번뇌에 망상에 뒤덮여 있어 그 진성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만일 객진번뇌의 망념을 제거하여 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심신하는 곳에 돌아가 올곧게 벽관을 통하여 자타의 구별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경지에 굳게 머물러 변함이 없으며, 또한 다시는 조금도 문자개념에 의한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때에 진리와 하나가 되어 분별을 여의고 고요한 무위에 도달한다.8)
  여기에서 이입은 깨침에 들어가는 이론이라든가 수행의 과정이 아니다. 곧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닫는 것」으로서 본증자각이다. 그 방법은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와 같이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 불법의 가르침인 그 근본 취지를 깨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으로서 불법을 깨치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이란 깨침이다. 바꾸어 말하면 깨침으로 깨침을 얻는 것이다. 이미 불법이 깨침으로서 출발하여 깨침을 얻는 것이다. 그 깨침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과 성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중생에게나 성인에게나 모두 불법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법을 심신하는 것이다.
  심신의 벽관은 필연적으로 깨침이 구현되어 있는 모습으로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 분별을 여의고 고요한 무위에 도달하는 모습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따로 자타 내지 범성의 분별이 없고, 고요한 무위의 경지이므로 객진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래서 이 깨침은 심신을 통한 벽관으로서의 구현일 뿐만 아니라 벽관을 통한 심신의 자각이다.
  그래서 묵조에서의 깨침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본증과 그것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현성공안으로 대변된다. 이와 같은 근저에는 본래부터 완성되어 있다는 신심 곧 심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 심신은 달리 본구한 불성으로서 불심의 작용이다. 그 불심의 작용이 깨침이고 그 깨침의 근본이 다름아닌 신심이다.
  묵조선에서는 바로 그 신심이 모든 사람에게 불심으로 본구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수행인이 이 불심의 본구성을 모르고 있다가 자신이 본래부터 그것을 갖추고 있다는 깨침을 원만하게 드러내 가는 과정이 바로 초심으로부터 닦아가는 수행과정이 된다. 그래서 묵조선에서의 수행은 다름아닌 깨침의 분상에서의 수행이다. 따라서 필경에 깨침과 수행이 하나로 통한다. 수행은 깨침을 얻으려는 수행이 아니라 깨침의 작용으로서의 수행이다. 그리고 깨침은 수행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완성되어 있는 행위로서 깨침의 유지가 곧 수행으로 나타난다.
  깨침에서의 몸은 가부좌가 본격을 이루고 있다. 가부좌는 형식적으로는 몸의 자세이면서 내용적으로는 마음의 자세인데 그것은 증상의 자세이기 때문으로서 바로 보리달마의 면벽관심이며 육조혜능의 견불성이다. 곧 직심이 도량이고 심심이 도량이며 보리심이 도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좌선은 모든 좌선의 전체인 이른바 지관타좌이다. 다만 좌선수행의 방식 내지는 깨침의 견해가 다른 것은 깨침에 도달할 때까지의 좌선이 깨침을 목표로 하는 좌선수행이라면 그것은 곧 깨침의 수단[훈수․작수]이지만, 깨침을 얻은 상태에서의 좌선수행이라면 그것은 곧 수단으로서의 좌선수행이 아니다[본수․본수]. 곧 자수법락의 좌선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좌선 그대로일 뿐이다. 여기에서 좌선은 그대로가 깨침으로 나타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 깨침의 형식이라면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그 내용이기도 하다. 직지는 이론적인 모색이나 추론의 결과나 매개체를 의지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직접 부딪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직지인심의 인심은 범부중생의 자심이다. 이러한 자심을 직접 철견하여 그 본성을 현현함으로써 성불에 이른다. 성불은 단혹증리․증득열반․성취정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교리상 치밀하게 짜여진 단계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신에 곧 증오하여 해탈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불은 범부가 환골탈태하여 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로서의 인간 그대로 불타의 각증을 확인한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이다. 즉 범부로서의 인간이 변화하여 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의 인간 그대로 불지를 터득하는 것이다. 이 성불이 바로 견성을 계기로 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라 한다.
  그런데 견성 곧 성불은 인심의 직지이기 때문에 견성과 직지의 관계는 견성직지로서 열린관계[회호]이다. 견성이라는 것은 곧 직지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견성은 실상적인 행위이고 직지는 현상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견성과 직지는 닫힌 관계[불회호]이다.
  여기에서 직지의 인심은 이론적으로는 양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심상을 직지하는 것이다. 심상을 직지하는 것은 곧 무상이면서 무자성이기 때문에 견성 즉 인심과 직지는 앞에서의 열린 관계[회호]와 닫힌 관계[불회호]의 승화로서 겸대가 된다. 이리하여 직지의 당처에서는 견성과 인심과 직지와 성불 등이 순일한 작용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직지인심의 현상 그대로 나타나는 견성이기 때문에 견성의 성은 심성․리심․일심․심의 본질 등과 통한다. 결국 인심이라는 구체적인 사심을 취하여 보편적인 이심으로 철저화하여 일심의 심성을 파악하고, 그에 의해서 사심인 심상의 본래성의 작용을 자유로이 도출해 내는 것이 견성이요 견법이며 견진여이고 견법성이다.
  이리하여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은 직지인심의 현현으로서의 견성을 말하는 형식이라면,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그 작용으로서의 내용이다. 곧 견성은 직지인심의 현현이기 때문에 견성은 현성성불이고 현성공안이다. 그래서 이불성의 입장은 견성성불에, 행불성의 입장은 직지인심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묵조선에서는 바로 행불성에 입각한 좌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좌선은 곧 깨침의 외형이고 깨침은 좌선의 내용이다. 그래서 좌선의 묵은 묘행으로서 곧 깨침의 묵이고, 깨침의 작용인 조는 오히려 부동의 조로서의 설법이다. 이러한 묵조선 수행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묵조선의 수행 - 지관타좌
  묵조선 수행은 본증을 자각하는 방식으로 좌선이 근본이다. 이 본증자각이 터득된 방식이 곧 좌선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번뇌와 분별을 여읜 작용으로 현성하는 것이 비사량의 심리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좌선은 단순히 앉음새만의 형태가 아니라 전시각의 현성으로서의 좌선이다. 당연히 가부좌로서의 몸의 자세[지관타좌]와 함께 자각으로서의 마음의 자세[비사량]이다. 그래서 가부좌라 해도 두 다리를 겹쳐 앉는 몸의 형식으로서의 앉음새만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의 형식에 이르는 가부좌이다.
  묵조선의 수행은 좌선이다. 곧 가부좌의 수행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묵조선 수행의 전부이다. 곧 지관타좌이다. 바로 그 가부좌는 수행의 형식이면서 본증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부좌는 묵조선의 수행의 형식임과 동시에 깨침의 내용이다. 이와 같은 가부좌는 언제나 자각된 가부좌이다. 따라서 묵조선에서의 가부좌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가부좌의 첫째 의의는 앉음새의 형식이다. 형식을 떠나서는 좌선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형식을 떠난 좌선이란 단순한 형이상학의 철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묵조선에서의 좌선은 달리 지관타좌라고도 한다.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가 좌선이고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현성으로 간주된다. 좌선의 형식에 대해서 여러 ꡔ좌선의ꡕ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비단 초심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자의 경우야말로 그 숙련의 경지가 올곧게 좌선이라는 형식으로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이것을 불법즉위의라 하였다. 이 좌선의 가부좌라는 형식은 좌선의 실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실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앉지 않고 깨침을 얻는다든가 좌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삼세제불이 와서 설법한다 해도 혀끝의 희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천을 무시하고는 어떤 선종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묵조에서의 좌선은 묵과 좌․조와 선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라서 좌선이라는 앉음새 자체가 묵조이다.
  다음 가부좌의 둘째 의의는 관조하는 것이다. 단순히 앉아서 묵묵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앉아 있되 이 묵좌는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는 묵좌이다. 곧 조가 수반되는 묵이고 좌가 수반된 묵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묵과 조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하여 「조중실묵 편견침릉」이라 하였다. 곧 묵조의 좌선에서 조가 묵을 상실한 조라면 그 조는 허상으로서 사마와 같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위의 조중실묵은 동산양개의 「보경삼매」에서 말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9)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침능은 사마가 얼굴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묵좌는 묵조의 좌이지 단순한 침묵만의 좌가 아니다. 이것은 몸의 좌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첫째 형식은 여기에서 바로 내용의 관조로 이어진다. 관조가 없는 형식의 좌는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묵중실조 혼성잉법」이라 하였다. 곧 이 묵중실조 혼성잉법은 앞의 조중실묵 편견침릉한다는 것과 같은 구조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곧 묵조 가운데에서 조가 없는 묵이라면 그것은 바로 대혜종고가 비판한 묵조사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묵과 조의 좌선에서 묵과 조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묵조에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중실묵과 묵중실조는 좌선에 있어서 서로 완전한 방제의 관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좌선에 있어서 묵과 조가 일합하게 되면 수와 증의 합일이 나타난다. 이것은 가부좌의 형식이 그 내용으로서의 관조에까지 이르른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정전의 삼매에 안주하여 곧 위없는 깨침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가현각이 말하는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10)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가부좌의 셋째 의의는 묵조가 완전의 작용으로 현성된 모습이다. 완전이란 본래 조동종의 조산본적의 접화방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산은 바로 「팔요현기」라는 것을 통해서 교화를 폈다. 이 팔요현기라는 것은 조산에게 있어서 여덟 가지의 현묘한 기관을 의미한다. 기관은 공안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공안의 체계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여덟 가지의 현묘한 기관에 대하여 조산은 「회호․불회호․완전․방참․추기․밀용․정안․방제」11) 등을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완전은 피와 차가 회호하기도 하고 불회호하기도 하는 자유자재의 경지로서 피는 피이면서 동시에 차이고 차는 차이면서 동시에 피가 되는 도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묵과 조의 완전이란 가부좌의 형식으로서의 의의와 내용으로서의 관조라는 의의가 완전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묵과 조가 상대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상대성을 뛰어넘은 입장으로 바뀌며 분립의 입장에서 전일의 입장으로의 사고전환이다. 전일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아직 보지 못한 대활저의 현성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법의 자기에 투철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본래면목의 자각이며 본지풍광에의 체험으로서 하등의 새로운 곳을 밟아가는 것이 아니다. 본가에로의 귀향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특별한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엄밀하게 존재한다고 규정해 버리면 깨침은 필연성이 아니라 목적성이 되어 버린다. 가부좌는 본래의 자기가 현성하는 것일 뿐이다. 일상의 모든 사사물물이 다 가부좌의 구조 속에서 본래의 자기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주변의 어느 것 하나 가부좌의 현성 아님이 없다. 그래서 가부좌는 부단한 깨침의 체험으로 연속되어 간다. 과거의 깨침의 체험과 미래의 깨침의 체험이 따로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의 깨침이다. 깨침에 전후가 없다. 전일적인 입장이라서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서의 고매한 깨침과 진리를 통한 각자의 입장에서의 일상적인 깨침에 구분이 없다. 여기에서는 벌써 돈오점수가 문제되지 않는다. 일체처 일체시가 깨침의 현현이므로 미오가 없고 범성이 없으므로 깨침의 횟수가 없다. 묵조의 완전이 가부좌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깨침의 다른 이름이다. 깨침은 일회성의 특수경험과 동시에 그 이후의 생활경험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에 더욱더 묘용을 발휘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가부좌의 완전한 작용이고 가부좌의 일상성이다.
  다음 가부좌의 넷째 의의는 수행과 더불어 깨침의 의의를 함께 나타내준다. 굉지는 이에 대하여 「오가저사 중규중구」12)라 하여 가부좌의 의의를 묵조의 속성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곧 묵조의 가풍은 목전의 당사를 중시하는 것이라 하여 묵조의 가풍이 주도면밀함을 중규중구라 말한다. 그래서 묵으로서는 구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조로서는 규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한다. 규와 구는 묵과 조이고, 정과 편이며, 공과 덕이요, 진여와 수연이다. 이것이야말로 가부좌를 통한 묵조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구원의 본증임을 설파한 말이다. 일체의 량단을 떠나 있어서 묵의 근본인 추기에만 떨어지지도 않고, 조의 작용인 방참으로만 현성하지도 않는 종통과 설통의 완전이다. 이것은 가부좌가 지니고 있는 깨침의 속성이 일상성과 함께 지속성임을 말한다.
  가부좌 자체는 곧 깨침의 현성으로서 깨침을 증상의 수행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부좌의 모습은 깨침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행하는 좌선수행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그대로 깨침의 현현으로서 나타난 몸의 구조이고 마음의 구조이다. 이러한 가부좌야말로 묵조가 나타내는 일상성이고 본증성이다. 그래서 굳이 깨침을 얻으려고 목적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의 필연성이 구현되어 온다. 그래서 올바른 수행은 올바른 가부좌이고, 올바른 가부좌는 올바른 수행이며,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깨침이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작용이므로 일시좌선은 일시불이고 일일좌선은 일일불이다. 즉 좌선즉불이요 불즉좌선이다. 이것이 지관타좌로서의 가부좌가 나타내는 본래 의의이다.

  2. 묵조선의 심리 - 비사량
  좌선이란 자세를 가다듬고 고요히 앉아서 화두․묵조․관법을 막론하고 무언가 거기에는 마음의 작용이 바탕이 되어 있다. 화두를 들어도 화두에 대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고, 묵조를 해도 묵조에 대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며, 관법을 해도 관법에 대한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서 묵조를 한다는 것은 몸으로 묵하고 마음으로 조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몸과 마음의 행위인 묵조는 좌선경험 가운데서 몸으로는 올곧게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면서 마음으로는 성성적적하게 사량한다. 본래면목의 자성을 사량한다. 본래면목이란 이치적으로 처음부터 성인범부가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전하게 깨쳐 있는 존재[이불성]의 측면에서 말하는 자성을 말한다. 그리고 본래면목의 자성을 사량한다는 것은 본래면목임을 자각하는 것[행불성]이다.
  따라서 이불성은 필연적으로 행불성을 필요로 한다. 행불성이란 이불성에 머물지 않고 본래면목의 자성을 좌선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그것을 형성시키는 자각행위인데 그 자각을 이끌어내는 마음의 구조가 곧 비사량이다. 비사량이란 단순히 사량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량하되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체임을 사량하는 것으로서 분별심이 없는 사량이다. 깨침의 심리도 널리 보면 의식작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의식으로 작용하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나 깨침의 의식활동은 그대로 흐르면서 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것은 번뇌와 깨침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심의 작용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의식이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하는 것처럼 고정적으로 구별하여 보지 않는 순수직관이다. 이리하여 약산은 불사량이라는 것의 사량이 바로 좌선에서의 비사량임을 보여 주고 있다. 부사량이 사량의 부정이라면 무사량은 사량의 부정적 존재방식이다.
  이에 반해 비사량은 사량의 긍정방식이다. 그것은 사량의 비가 아니라 비의 사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는 그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자기가 자각의 주체이고 자각은 좌선의 내용이며 좌선은 자기의 현성이지 그 밖의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이 비사량에 철저한 것이 좌선의 요체이다. 곧 반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오롯하게 단좌하여 부사량의 사량이 비사량으로 철저화된 것이 좌선의 요체이다. 그 까닭은 일체의 분별사식을 버리고 취사선택을 떠나 몸과 마음이 모두 자기의 본래심성으로 돌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좌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사량은 무위이다. 무위이므로 일찍이 변설한 바가 없다. 변설한 바가 없이 일체의 언론을 떠나 있으므로 부사의한 경계라 한다. 이 부사의한 경계가 약산에게서는 사량하지 않는 것[부사량]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 승이 약산에게 “사량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사량한다는 겁니까.”13)라고 물은 것은 약산에게 긍정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한 승의 물음이 아직 사량의 범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으로 인한 사량의 부자유를 떠난 바로 그 당체적인 사량[비사량]에는 생각이 있고 없음에 관계가 없다. 그러기에 무위의 진체이다. 무위의 진제이므로 사량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사량의 진실한 의미는 사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의 사량, 탈락의 사량, 부염오의 사량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비는 서술격이 아니라 주격의 의미인 비의 사량, 비가 사량한다, 비에 있어서의 사량 등의 뜻으로서 비가 바로 사량 그 자체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비사량은 아집을 탈락한 집착 없는 사량으로서 유일무이한 절대사량 내지는 정사량으로 규정할 수가 있다. 이리하여 비사량은 단순한 무의식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사량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량하는 그 념도 결국 의식의 굴레가 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체를 생멸거래에 맡겨 두고 그대로를 자각하는 의식에는 집착이 생기지 않고 관찰되거나 개념화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좌선하는 도중에 만일 분별의식에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분별의식을 흘려보내면서도 그 분별의식 자체에 끄달리지 않게 되어 분별의식이 일용사위의의 좌선에 조금도 지장이 없다. 그리하여 그것이 몸에 익혀지는 그것이야말로 비사량을 체험한 좌선의 요술이다. 따라서 잊는다는 상태가 되어도 의식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비의 사량이다.
  3. 묵조선의 깨침 - 본증자각
  묵조선의 깨침은 본증을 자각하는 것이다. 곧 애초부터 구비하고 있는 본래불이 현성하는 것이다. 증의 문제에 대하여 일찍이 대혜는 「그러나 이러한 깨침의 도리는 사람들마다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다.」14) 라는 것으로 보자면 그 근본은 본각문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혜의 입장은 수행인이 본각의 도리를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굉지는 증에 대하여 「모든 것이 각」으로서 시각[무언묵연]이 곧 본각[위음왕나반]이라 말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상은 곧 무상의 상이고 진심은 곧 무심의 심이며 진득은 곧 무득의 득이고 진용은 곧 무용의 용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그것은 곧 탁 트인 행위이고 진실한 행위로서 일체의 법이 이르는 바 그 성품이 허공과 같다. 바로 이러한 때는 공마저도 얻을 수 없어서 비록 공하지만 묘하고 비록 허하지만 신령스러우며 비록 고요하나 밝고 비록 묵하나 조한다.15)
  여기에는 묵조 뿐만 아니라 허이영․확곡․공이묘․지유이묵 등의 말을 통해서 증이 본래부터 누구에게나 구비되어 있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1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불심이 본구되어 있음을 전제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범부가 바로 이 불심의 본구성을 모르고 밖의 경계에 대한 취사분별에 끄달리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깨침의 본원을 원만하게 드러내 가는 과정이 바로 초심으로부터 자각에 이르는 수행과정이 된다. 각자 그 본증임을 자각하는 수행을 통해서 「깨친 존재로서의 불을 닮아가는 행위」가 곧 참구행위이다. 따라서 묵조에서의 무분별의 참구는 외부로 치달리는 마음을 멈추고 본구한 자기의 본래성을 되돌이켜 자각하는 것이다.
  그 본구성의 자각을 아는 것으로부터 깨침으로서의 본증이 가능하다. 따라서 묵조라는 무분별지의 참구는 제불과 동체라는 지견을 터득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자기에게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무분별지를 자기 자신에게 현성시키는 것이다. 그 현성이란 일체의 번뇌와 분별을 방하하여 본구한 불심의 허명불매케 하는 참구의 행위이다. 그래서 묵조의 본증을 자각하는데 있어서는 깨침의 당체, 곧 본구한 무분별지를 그 본래의 무분별에 따르게 하고 가부좌를 통한 참구 그대로 존재케 하는 행위 곧 본증을 현성시키는 자각의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묵조선은 본증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활작용은 가부좌라는 좌선과 자각이라는 본증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그 어우러짐에 떨어지지 않는 자태이다. 일체의 환화를 여읜 「무상의 상」과 「무심의 심」과 「무득의 득」과 「무용의 용」이기 때문에 가부좌를 통한 좌선은 동시에 늘상 자각된 본증과 다르지 않다. 바로 침묵이 곧 설법이고 설법이 곧 침묵이다. 그래서 자각이 가부좌의 현성이라면 본증은 자각의 본구성이다. 이러한 내면 속의 심리는 고요하여 신령스럽고 묵묵하여 참되어 있는 묵묵의 공부로써 마음을 일구는 본증 그대로이다. 그 까닭은 곧 묵 가운데에 미가 있고 조 가운데에 묘용이 있다.
  이와 같이 본증의 자각은 그 근저에 불심의 본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심의 본구성과 무분별지에 있어서 묵조의 참구 그 자체가 무매개적․비간격적․비시간적인 것으로서 자기에 대한 즉금의 당처라는 사실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불심의 본구성에로의 회귀와 그 현현을 통한 자각적인 수용은 단순한 적정퇴영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 나아가서 이것은 일상의 모든 행위를 본증의 현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달리 일절중생실유공안이라 할 수 있다.17)
  곧 외부로부터의 빌림이 없이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철저하게 터득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는 달리 본래부터 뿌리가 없는 생사와 흔적이 없는 출몰에 철저하게 탈락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탈락의 상태가 바로 일체처 일체물이 다 깨침의 빛으로 다가와 법을 설하고 광명을 내며 불사를 짓고 법을 전한다. 이것은 저 공안이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는 까닭에 철저한 탈락을 통한 내면의 긍정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외부로부터의 유위적인 작위가 소용이 없다.
  이처럼 묵조에서는 조동의 면밀한 종풍을 잇고 성불․작조의 본래속에서 일체의 위의가 광명 속에서 노니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 수행의 근간이 본증에 대한 자각을 내세우는 입장이므로 본증묘수라는 의미에서 혜와 정의 성격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가부좌라는 좌선의 형식에 국한시켜 잘못 정에만 머물러 고목선에 빠져 있는 무리를 보고 일찍이 대혜는 묵조사사배라 하여 비판하였던 것이다.18)
  여기에서 바로 묵조의 자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곧 묵조가 단순한 묵과 조가 아니라 묵묵히 앉아 마음은 텅 비고, 묘하게 전하여 도가 존귀하게 되고, 깊이 침묵하여 밝게 드러나고, 고요히 있어 묘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묵과 조이다. 그래서 묵은 본증의 체로서의 묵이어야 하고 조는 본증의 용으로서의 조여야 한다. 이러한 묵조가 전제된 좌선은 바로 시비를 떠나고 이미를 체득한다. 그 묵조는 곧 묘용으로 나타나지만 유가 아니고 공으로 숨어 있지만 무가 아닌 원리이다. 이것이 현성공안이다. 현성공안은 혹 견성공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공안의 현현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묵조선에서는 마음의 수행 못지않게 몸의 수행이 강조된다. 때문에 정혜관에 대해서도 정과 혜가 동시로 나타나고 있다. 곧 앉아 있는 그 자체를 깨침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정이 혜의 형식이 아니라 혜의 내용이고 혜는 정의 내용이 아니라 정의 묘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유하자면 간화선에서의 정과 혜의 관계가 각각 등잔[체]과 등불[용]의 관계라면, 묵조선에서의 정과 혜의 관계는 정이 곧 혜이고 혜가 곧 정으로서 정과 혜가 서로 즉입되어 있는 관계이다. 그리하여 간화선에서의 공안의 투과는 묵조선에서는 본증의 자각으로 비교된다.
  4. 묵조선의 모습 - 신심탈락
  수행을 하는 데 그 기본은 무엇보다도 우선 반드시 근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위가 요구된다.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 언설이든 몸과 마음과 언설의 상호간의 행위든 간에 반드시 어떤 유형 내지 무형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바탕에는 언제나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 수행의 주체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고 자기의 몸이며 자기의 마음이고 자기의 언설이다.
  그런데 자신의 신․심․언의 궁극에는 그 행위마저도 다시 닦아야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수행에 들어가는 제일심이다. 이 제일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필요로 한다. 그 몸의 자세와 작용이 다름 아닌 좌선이라는 행위이다. 좌선의 행위는 우선 몸의 자세를 중시한다. 앉는 것이다. 제대로 똑바로 여법하게 앉는다. 그것이 가부좌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수행의 제일심을 수지 내지 유지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이 가부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기를 조절할 줄 아는 호흡이 수반된다. 건강한 몸과 목표의식을 구비한 마음과 일정한 호흡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는 근본방식이다. 호흡이 바탕이 된 가부좌야말로 여법한 몸의 자세이다. 수식관 내지 지식관의 호흡에서 수식 내지 지식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방식은 호흡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이 지금 호흡하고 있음을 알고 언제나 호흡하는 자신을 알며 호흡하는 주체를 알고 호흡하는 이유를 알며 호흡하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호흡에 대한 인식은 몸과 마음에 습관이 베어들 때까지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끝내 호흡하는 자세와 호흡하는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 초월이란 더 이상 호흡에 신경 쓰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호흡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호흡과 올바른 호흡은 자연스러운 가부좌와 올바른 가부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흡은 가늘게 고르게 길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호흡의 자각이고 호흡삼매이다.
  호흡이 갖추어졌거든 보제심을 내야 한다. 보리심이란 다름 아닌 발심이고 발심은 자각의 행위로서 믿음의 당체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당체를 어떻게 자각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이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발심은 그만큼 본래적이다. 발심이 본래적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개인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고, 개인의 인연을 따라 나타나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소용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발심의 믿음은 직관적이고 자발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발심의 믿음은 애초부터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행위이다.
  발심은 최초 수행의 단계에서부터 우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실증하고 그 연후에 모든 것은 단순한 공이 아님을 자각하는 공삼매로서 지고지순한 경험이다.19) 그래서 발심은 수행하는 것이고, 수행한다는 것은 발심이라는 분별마저도 초월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이야말로 그대로 수행상에 있는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에게는 수행을 시작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할 만한 능력이 구비되어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 중생으로서는 열반에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중생이 멸하여 중생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수행인데 그 수행의 첫걸음은 중생을 비우는 행위이다. 중생을 비우는 행위를 공이라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공이란 중생이 공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공이다. 곧 중생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깨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생을 깨치는 것은 보리심의 획득 곧 발심의 완성이 된다. 이리하여 발심이 이루어지고 나면 좌선이 순일해지는데, 바로 그 순일해진 좌선은 그대로가 깨침의 행위의 연속이다. 이것이 본증의 행태이다. 그런데 본증의 행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그 자각의 행위가 묵조의 마음이고 좌선의 몸이다. 따라서 본증에 대한 자각은 이미 발심되어 있는 분상에서 이루어지는 수행 곧 묘수이고 본수이다. 그 자각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자각에 대한 준비란 다름 아닌 믿음이다. 발심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모습으로서의 믿음, 곧 순전히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의 믿음이다. 이것을 좌선이라는 행위로 다듬어 가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을 좌선삼매를 통하여 부단히 검증하고 마침내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이다.20) 그 경험은 절대고요를 통해 검증된다. 절대고요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서 좌선의 상태를 통한 몸의 고요가 바탕이 된다.21) 그 속에서 일체의 소리를 배제하고 정념에 드는 것이다. 그 정념은 무아의 체험으로 나타난다. 곧 공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안을 자각하는 것이다. 분별이 없는 전일한 사량으로서 비사량의 체험이기도 하다.22)
  이와 같은 묵조의 수행은 항상 믿음의 대상을 근본으로 하여 일행삼매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심의 일거수일투족이 항상 믿음을 떠나지 않고 성성적적하다. 이것은 자기의 평소생활을 되돌아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곧 단좌하여 믿음의 실상을 염하고 자기를 염하며 심심이 상속되어 마음을 고요하고 청정하게 하면 믿음의 대상이라는 의식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곧 망념이 사라진 본래믿음의 현성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대상을 염하는 마음 그 자체를 염하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을 염하는 것은 곧 마음을 염하는 것이며, 믿음의 대상을 궁구하는 것은 곧 깨침을 궁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적정하게 되어 궁구하는 자신과 하나가 되면 믿음도 더 이상 형상이 없는 도리인 줄을 알아 안심입명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리하여 지속적으로 믿음의 대상을 궁구하여 대상적인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평등하여 대립이 없게 된다. 이처럼 마음을 믿음에 모아 평등하고 청정하게 하여 항상 그것을 자각하면 달리 망상이 없다. 애초부터 없는 줄을 자각한다. 모두가 믿음의 대상과 똑같은 법신이 된다. 항상 이러한 마음 상태로 있으면 모든 분별과 번뇌가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23)
  믿음의 대상이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며 말하고 경험하며 실존하는 모두가 이에 해당한다. 본래면목과 더불어 경전의 문구라든가 연기법이라든가 생명의 모습이라든가 인간과 우주활동의 일체가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떻게 언제 궁구하느냐 하는 것을 염려할 뿐이다. 왜냐 하면 발심의 믿음에서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진 믿음이 자신의 눈을 통하여 색깔을 달리하여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하여 언제부터인지 무슨 모습으로든지 어떤 작용으로든지 이미 자신이 믿어버린 그대로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체험은 자신의 본증에 대한 본래인의 자각행위이다. 그 자각은 필연적으로 공안이 현성된 상황이며, 공안의 현성은 좌선하는 가부좌에 늘 그렇게 올곧게 드러나 있다.
  묵조선의 수행에서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은 믿음이다. 그것도 제일심으로서의 믿음과 아울러 본증을 위한 전제로서의 발심의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 진리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을 현성공안이라 한다. 말 그대로 공안의 현성이다. 따라서 현성공안은 믿음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믿음의 작용방식은 곧 좌선이다. 다시 말해 좌선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공안이 현성되고 현성된 공안이 다시 좌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안의 현성과 좌선은 믿음의 다른 방식일 뿐 별개사가 아니다.
  여기에서 공안은 탈락된 공안이다. 곧 일체의 의문과 형식과 공능을 벗어난 진리 그대로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공안은 진리이면서 진리의 현성이고 믿음의 탈락방식이다. 믿음이 무엇을 상대로 하여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무엇으로든지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좌선이다. 그래서 좌선은 좌선 그대로 현성된 진리이다. 이 좌선이 묵조의 좌선이다. 묵조의 좌선은 묵과 조의 좌선이다. 묵의 좌선은 이 몸뚱이로 단좌하는 것이라면 조의 좌선은 깨어 있는 마음의 작용이다. 몸과 마음이 좌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묵과 조는 몸과 마음의 조화이고 몸과 마음의 일체작용이다. 몸과 마음이 조화 내지 작용의 일체를 보이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탈락이라는 수행이 필요하다. 탈락은 벗어나고 초월하며 집착이 없으면서 본래작용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작용이다. 그래서 신심탈락이란 신과 심이 자기로부터 탈락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24)
  몸과 마음이 일치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탈락의 양상은 필연적으로 감각의 탈락을 수반한다. 안․이․비․설․신․의의 탈락은 몸으로부터의 탈락이고 마음으로부터의 탈락이기 때문이다. 좌선의 형식을 통하여 몸과 마음의 탈락을 경험한 이후에는 다음으로 반드시 감각의 탈락으로 이행된다. 색과 형체를 보고 소리와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촉감을 느끼고 여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인식하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초연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좌선을 통해 경험된 감각의 탈락은 달리 좌선의 탈락형태이기도 하다. 좌선이 탈락된 형식으로 보고 들으며 맡고 맛보며 느끼고 체험한다. 그래서 좌선은 곧 신심의 탈락이고 감각의 탈락이기도 하다. 탈락된 신심과 탈락된 감각과 탈락된 언설은 좌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이처럼 드러나 있는 모습이 공안의 현성이다. 따라서 공안의 현성 곧 현성공안은 좌선탈락의 모습이면서 좌선탈락의 내용이다.25)

Ⅳ. 결어

  선종 가운데서도 오늘날 묵조선의 수행방법은 간화선만큼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행의 목적성과 필연성으로 볼 경우 묵조선은 당연히 필연성으로 제기된다. 묵조선은 곧 일체의 진리가 본래부터 어디에나 갖추어져 있다는 본증과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나 언제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는 현성공안의 입장이다. 때문에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자각하느냐가 묵조선에서 수행의 문제로 부각된다. 혹자는 깨침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고 드러나 있다면 수행의 무용론을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자각할 필요가 대두된다. 곧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활작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드러내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으로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는 모습이 곧 지관좌선의 가부좌이다. 이것은 깨침을 얻기 위한 준비나 수단이 아니라 그대로 깨침의 현성에 해당하는 본증이다. 그리고 그 본증을 마음속에서 체득하는 방식이 비사량의 심리체험 곧 자각이다. 이 본증과 그것의 자각에 의하여 비로소 모두에게 진리로서의 공안이 투득되고 현성된다. 따라서 묵조선의 수행구조는 가부좌의 좌선과 본증의 자각과 그것을 내면으로 체험하는 비사량이 근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좌선을 통하지 않은 깨침은 무의미하고, 자각이 결여된 본증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비사량을 통한 내면의 체득이 아니라면 그 좌선과 그 자각은 제각각 단순한 형식으로서의 좌선이고 드러나지 않은 깨침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가부좌의 좌선은 더 이상 수행형태만의 좌선이 아니다. 이미 깨침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앉아 드러나 있다. 그래서 좌선은 몸의 묵과 마음의 조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따라서 좌선이 깨침의 체성이라면 그 깨침이 본래부터 완성되어 있다는 본증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깨침의 내용이다. 이러한 경우에 비로소 묵조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체의 번뇌와 분별이 없는 비사량의 체험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처럼 터득된 비사량의 체험은 신심탈락으로 현성한다. 곧 몸과 마음 나아가서 감각과 언설의 초월상태이다. 공안의 현성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성된 공안이다. 일절중생 실유공안의 입장이다. 이러한 신심탈락의 체험은 행위 자체에마저 집착이 없는 제일심이 필요하다. 제일심은 본격적인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가부좌의 좌선과 호흡을 수반한다.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심을 내는 발심이 필요하다. 발심의 믿음이 곧 현성공안이다. 공안의 현성은 필경에 몸과 마음과 감각의 초월을 지향하는데 이것이 곧 신심탈락이요 좌선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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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essence of Silent-Penetration Seon & principles
of the practice

Kim, Ho-gui
(Lecturer, Dongguk Univ. in Seoul)

  A standpoint of the Silent-Penetration Seon is BonjeungJagak, which means the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Enlightenment. Enlightenment of the Silent - Penetrative Seon comes when each principles faces the same  position. In that manner, the The training structure of the Silent-Penetration Seon tells us the Self-consciousness of From realization and, the priority is directly focused on the world of being spiritually awakened, namely, the world of Buddha. Because it is the Self - consciousness of From realization, there are no distinction between the ways to lead for realization and self-discipline.
  The Free itself of Body & Mind give a concrete form to the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Un-Thought. To put it another way, the Free itself of Body & Mind is embodiment of inward training our body and our mind in daily life, through the Sitting-Samadhi. Generally, because of Daily life is consider for training and act of enlightenment in Silent-Penetration Seon. It may be given as a conclusion that the training system of Silent-Penetration Seon are the Self Awakening of Original Enlightenment, the Un-Thought and the Solely for Sitting-poster.
  And the thought of All beings posses Buddha-nature are consist of three elements. First, the Essential Body are all-pervasive with All beings. Second, the Truth principles are equality with All beings. Third, the Posses of Buddha-genus with All beings.
  Here we can looked around relation the view practice-enlightenment about Silent Penetration-Seon & All beings posses Buddha-nature.
  First, the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Enlightenment applies to the Essential Body are all-pervasive with All beings. Second, the Solely for Sitting-poster applies to the Truth principles are equality with All beings. Third, the Free itself of Body & Mind applies to the Posses of Buddha-genus with All beings.
  Eventually, the essence of Silent-Penetration Seon are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Enlightenment, Essential Body are all-pervasive, Solely for Sitting-poster, Truth principle are equality, Free itself of Body & Mind, and Posses of Buddha-genus. And the principles of practice about Silent-Penetration Seon are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Enlightenment, Solely for Sitting-poster, Experience of Un-Thought, and Free itself of Body & Mind.
  Key Words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Enlightenment,
  Essential Body are all-pervasive,
  Solely for Sitting-poster,
  Truth principle are equality,
  Free itself of Body & Mind,
  Posses of Buddha-genus
   
  논문투고일 : ’11. 4. 30    심사완료일 : ’11. 6. 20    게재확정일 : ’11. 6. 20

각주)-----------------
*  본 논문은 영산선학대학교 소태산사상연구소에서 2006년에 발표한 「묵조선의 본질」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 동국대 외래강사.
1) 여기에서 좌선관은 좌선을 수행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좌선에 관련된 선관경전에 대한 탐구와 아울러 좌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선종의 교의 및 각종 어록에서 언급하는 좌선일반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2) 불교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과 여래장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상은 인도에서 형성되고 전개된 사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선을 위주로 한 선종으로서 형성된 것을 보리달마 이후로 시대로 보아 달마 이후의 선종사로 그 사상적 기반을 한정하기로 한다.
3) 송대에는 당대에 전개된 활발발지한 선기가 점차 누그러지고 결국 선리의 도그마 내지 교조주의적인 법맥의 묵수 및 공안의 정착과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이전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경향으로서 새로운 선사상의 창출보다는 이미 등장한 선리와 수행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 내지 새로운 수행방식의 요구 등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곧 간화선 및 묵조선과 같은 수행방식의 표출로 드러났다. 이와 같은 새로운 수행방식의 등장 배경에는 당대에 형성된 조사선이 송대에 시들해지면서 활달했던 당대의 조사선의 가풍을 되살리려는 선풍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현실의 미혹한 입장으로부터 화두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는 방식의 간화선과, 아예 본래부터 그 본래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묵조자각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는 방식의 묵조선으로 나타났다. 졸고, 「묵조선의 성립배경」, (ꡔ한국불교학ꡕ 제34집, 2003)
4) 오위는 그와 같은 입장을 실천하고 작용시키는 도리로서 정과 편의 상관관계에 따라서 열린 관계 내지 닫힌 관계로 설정된 개념이다. 그리고 묵조선의 수행은 지관타좌를 통한 본증자각으로서 현성된 공안이 자기의 신심탈락으로 체험되는 입장이다. 그것을 오위의 각 계위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중편은 본증자각된 지관타좌이고, 편중정은 지관타좌를 통한 본증자각이며, 정중래는 본증자각이고, 편중지는 지관타좌이며, 겸중도는 신심탈락이다. 졸고, 「묵조선의 수행체계」, (ꡔ불교학연구ꡕ 제6호, 2003)
5) 졸저, ꡔ묵조선 연구ꡕ pp.260-261.
6) 지유선은 본래 지유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지유는 굉지정각이 그 어록에서 늘상 사용하던 용어로서 묵조에서 묵에 대한 적극적이고 달관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곧 유가 승화[지]된 입장으로서 묵하면서 지유하고 지유하면서 묵하는 지유이묵이기도 하다. 그 본격적인 의미는 「지유암명」, (대정장48, p.98하)에서 드러나 있는 것처럼 간화선측에서 비판하는 퇴영적이고 묵수적인 묵조선의 의미를 한층 묘용과 완전의 의미로 부각시킨 것이 지유선의 개념이다.
7) 일반적으로 선종은 깨침을 목표로 삼아 수행하는 종파이기도 하다. 특히 간화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점에서 대혜는 당시에 깨침을 추구하지 않고 화두를 참구하지 않으며 좌의 형태에 집착하는 묵조선의 부류를 비판하였다. 졸고, 「간화선의 성립배경」, (ꡔ보조사상ꡕ 제19집)
8) 「이종입」, (대정장48, p.369하) “리입자 위자교오종 심신함생동일진성 구위객진망상소복 부능현료 야야사망귀진 응주벽관 무자무타 범성등일 견주부이 갱부수어문교 차즉여리명부 무유분별 적연무위”
9) 「보경삼매가」, (대정장47, p.515중), “여호지결 여마지주”
10) 「영가증도가」, (대정장48, p.396상) “일초직입여래지”
11) ꡔ조산록ꡕ 권하, (대정장47, p.544중) 조동종의 조산본적이 제시한 접화방법에 팔요현기라는 것이 있다. 곧 팔요현기란 여덟 가지 현묘한 기관을 의미한다. 기관은 공안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공안의 체계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여덟 가지의 현묘한 기관에 대하여 조산은 회호․불회호․완전․방참․추기․밀용․정안․방제] 등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기관은 곧 조산이 학인을 접득하고 지도하는 기관 곧 작략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곧 스승이 학인의 근기에 응하여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대하는 기관문을 말한다.
12) 「묵조명」, (대정장48, p.100중)
13) ꡔ경덕전등록ꡕ 권14, (대정장51, p.311하)
14) ꡔ대혜선사어록ꡕ 권18, (대정장47, p.888상) “연차사 인인분상 무불구족”
15) ꡔ굉지선사광록ꡕ 권5, (대정장48, p.64중), “실상시무상지상 진심시무심지심 진득시무득지득 진용시무용지용 약여시야 각시개활락주처 각시개진실주처 일절법도저 기성여허공 정임마시 각공타불득 수공이묘 수허이령 수정이신 수묵이조”
16) 굉지의 다음 말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ꡔ굉지선사광록ꡕ 권1, (대정장48, p.1하) “우리 출가수행자의 본분사에는 원래 실 한 오라기의 부족함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 그래서 근본으로부터 텅 비고 확철하다. 아납승가본분사 원무일사두결소 무일사두분외 종본이래 령명곽철”
17) 조사선의 도리는 흔히 언어도단 심행처멸 교외별전 불립문자 등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묵조선의 도리는 가령 현성공안 불법즉위의 신심탈락처럼 모든 도리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한 특징이다.
18) ꡔ대혜선사어록ꡕ 권28, (대정장47, p.933하), “오늘날 묵조사사배는 무언무설로 극칙을 삼아, 그것을 위음나반의 사로 삼고, 공겁이전의 사로 삼는다. 그리하여 깨침의 문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깨침을 미친 것 쯤으로 간주하고, 깨침을 제이의로 삼으며, 깨침을 방편으로 간주하고, 깨침을 접인의 수단쯤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남과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남과 자신을 그릇되게 망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다. 금묵조사사배 지이무언무설위극칙 환작위음나반사 역환작공겁이전사 불신유오문 이오위광 이오위제이두 이오위방편어 이오위접인지사 여차지도 만인자만 오인자오 역불가부지”
19) 이와 같이 묵조의 공안과 좌선은 현성과 탈락이라는 공능으로 나타나 있다. 바로 현성과 탈락의 근원에는 반야공관이 뒷받침되어 있다. 곧 묵과 조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연기상의는 현성과 탈락이라는 중중무진의 상즉으로 통하며, 그 현성과 탈락의 전개양상은 제법무아의 도리에 통한다.
20) 자신이 만들어낸 믿음이란 주체적인 믿음이다. 곧 좌선삼매 속에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들어 궁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궁구하는 데에는 온통 자신을 송두리째 그 대상에 들이밀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경험이 자각이다. 그러나 끝내 자신과 하나가 되지 않는 경우는 자신이 만들어 낸 믿음에 대하여 다시 숙고해 보아야 한다. 믿음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각도를 달리하여 용의주도하고 주도면밀하며 세밀하고 깊게 다시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본래면목이라는 주제에 대한 믿음을 달리하여 다시 궁구하는 것이다.
21) 절대고요의 체험은 심신의 동요가 사라진 상태이다. 이 경험은 자신의 탈락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무아의 터득이다.
22) 비사량은 무분별의 사량에서 궁극적으로 다시 그 사량을 벗어나 탈체현성 곧 본래 그대로 진리로 현성되는 묵조의 심의식이다. 그러나 비사량의 사상은 좌선에서의 내면적인 마음의 준비로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언설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굉지는 사량에 대한 비 뿐만이 아니라 언설에 대한 비와 신체행동에 대한 비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굉지가 말하는 비사량은 약산유엄의 올올지에서의 비사량의 의식상태가 절대무심의 차원에서 인법불이와 주객원융의 전일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그 전일의식은 바로 지유로서의 풍모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을 잊고 말을 끊으며 행동을 초월하여 생사․거래에 그대로 맡겨두는 곳에서 비로소 비사량의 몰종적한 자취가 현성한다. 곧 비사량은 절대무심이라는 순수의식의 발로로서 좌선을 통하여 현성된 심의식이다. 졸고, 「묵조선의 수행구조」, (ꡔ불교학보ꡕ 제37집, 2000)
23) 궁구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처음으로 돌아가 믿음의 대상을 앞에 두고서 절대고요를 체험해 본다. 절대고요의 체험은 조금도 자신을 남겨두어서는 안되는 경험이다. 좌선 그대로 고요하다는 것을 느껴보는 것이다. 깊고 깊은 고요 속에 파묻혀 마침내 고요라는 생각마저 사라져 버린 때에 고요에 대한 본래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 절대고요에서 무아의 체험이 가능하다. 무아의 체험은 자기 전체의 대긍정이다. 이와 같은 절대고요와 무아를 체험하고 난 후에 긴 호흡과 더불어 다시 앞에 두었던 자신의 믿음을 가져다가 궁구해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믿음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자각의 체험이 필요하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하나됨의 체험을 마치고나면 또 다른 대상을 가져다 다시 계속한다.
24) 신의 탈락이란 자신이 이 몸 그대로를 지니고 유지하면서 몸의 당체와 작용과 유혹과 번뇌에 끄달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몸의 유지와 작용에 대하여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심의 탈락이란 신과 함께 상호 작용 속에서 유지되는 심이면서도 동시에 신의 구속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을 말한다. 심이 신의 구속을 벗어나 있는 것은 몸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면서도 몸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몸이 따르고 몸을 부리며 몸을 지탱된다.
25) 발심에서 믿음에 대한 주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어느 것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발심의 믿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12연기를 발심의 믿음으로 정했다면 우선 붓다의 깨침에 대하여 좌선삼매를 행한다. 왜냐 하면 붓다의 깨침은 12연기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붓다가 연기를 깨쳤다는 말인지, 아니면 붓다가 연기를 통해서 무엇을 깨쳤다는 것인지, 아니면 붇다는 무엇 무엇이 연기의 도리라는 것을 깨쳤다는 것인지 등등을 몸소 좌선삼매를 통하여 심신하는 것이다. 또한 붇다가 말한 연기의 맨 바닥에 놓여 있는 무명에 대하여 무명의 실상이 무엇인지, 무명은 무엇을 인연하여 발생하는 것인지, 무명 자체가 근본적인 제일원인이 되는 것인지, 무명의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지 등등을 몸소 좌선삼매를 통하여 확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필연적으로 반야에 의하여 탐욕과 번뇌를 여의는 혜해탈뿐만 아니라 선정을 통해서 근본적인 무명을 여의는 심해탈의 어느 것에도 두루 통하는 직접경험이고 또한 지혜와 심신의 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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