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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연] 17세기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정

출처 수집자료

http://ehddu.tistory.com/905


17세기 僧侶의 國役體制 편입 과정

 

석사수료

박세연

 

緖論

1. 17세기 국가재정의 변화상과 僧役의 定役化

  1) 17세기 전반 수치제도의 변화와 승역의 확대

  2) 17세기 후반 군비확장정책과 義僧役의 시행

2.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寺刹役으로서의 승역

  1) 부역승 조발 방식의 변화 - 모입에서 분정으로

  2) 의승의 조발과 사찰역으로서의 의승역

3. 승역 확대와 승려의 위상 변화

結論

 

緖論

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경국대전』의 육전 체계가 보여주듯이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유교는 종교이기도 했다. 국가의례와 국가제사에서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민간의 제사, 세시풍속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유교적으로 재편되어갔다. 이런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 신앙은 곧 異端으로 지목되고 교화와 파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불교는 성리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종교이자 사상이었다. 일찍이 『大學章句』에서 朱熹(1130~1200)가 지적했듯이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고원해 보이지만 無實한 虛無寂滅의 異端’으로 보았다.1)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의 유교국가화에 전력한 世宗은 寺社田과 寺社奴婢를 대규모 屬公하여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키고 불교의 확대를 방지하기도 하였다.2)

이단을 신봉하는 승려 역시 국가의 통제 대상이었다. 조선은 양인과 천인을 막론하고 출가하는 것을 철저히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환속 역시 강제하였다. 이미 출가한 승려에게는 丁錢을 받고 度牒을 발급하여 관리하였다. 국가의 승려 수 증가를 막고자한 이유는 이들이 이단을 믿어 王化가 미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승려를 통제한 이유는 이러한 국가정체성과 직결되는 이념과 사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승려가 되면 이들이 國役에서 벗어난다는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經國大典』에서 도첩을 발급할 때 정전을 받거나, 도첩을 3달 이상 받지 못할 경우 환속시켜 當差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3)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승려는 국역을 완전히 면제받는 자들이었다. 더군다나 승려는 緣化 즉 시주에 의하여 생을 영위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겹치면서 국가는 승려를 일종의 비경제활동인구로 인식하였다. 승려가 늘어난다는 것은 이단이 확산되어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국가재정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출가할 때 正布 20필의 정전을 바치도록 되어 있지만 이것이 승려의 脫役으로 인한 장기적인 손해를 보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또한 불법적으로 출가해서 이미 실질적으로 탈역한 승려에게 아무런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은 곧바로 일반민의 부담 증가로 이어져 균역의 이상을 해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안된 것이 바로 승려에게 역을 지우는 僧役이었다.

이렇듯 승역은 조선이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役이었다.4) 조선전기 국가는 단기적으로 큰 토목공사에 승려를 동원하고 도첩을 발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승역은 규모면이나 횟수면에서 훨씬 확대되었고 활용 범위도 다양해졌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일찍이 조선후기 승역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승역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국가의 승려 동원과 그로 인한 사원경제의 피폐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임진왜란에서 승병이 활약한 것을 계기로 국가의 승려에 대한 재인식이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승려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게 되었다.5) 이를 통해 승려의 위상은 다소 높아지고 국가로부터 승려 통제를 위임받은 도총섭과 같은 고위 승려들이 출현하게 되었다.6) 그러나 근본적으로 승역은 승려들을 수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차츰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됨에 따라서 사원경제는 피폐해지고 승려가 역을 피해 유망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7)이 기존의 승역에 대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승역의 부담을 벗어나기 위한 승려들의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僧契와 승려의 상공업활동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8)

한편 승역을 좀 더 세분화한 연구들도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의 승역은 국가 차원에서 부과하는 것과 지방에서 잡역에 동원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큰 국가 차원의 승역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산릉조성이나 궁궐영건 같은 토목사업에 승려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둘째는 남·북한산성의 의승과 같이 승려를 군사로서 동원하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종이나 산나물 같은 공물·진상 마련에 동원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승려의 토목공사 동원은 국역체제의 해체과정에서 요역제가 해체되고 고용노동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9) 윤용출은 요역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승역이 요역을 대체하였으나 승려들의 저항으로 영조대에 종료되었다고 보았다. 남·북한산성을 비롯한 승려의 군사적 역할과 英·正祖代의 義僧防番錢制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으나10) 義僧制度의 연원에 대해서는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11) 승려의 공물·진상 부담은 주로 종이 납부, 즉 紙役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12),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에서 역시 함께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13) 사찰의 지방 各營·各官에 대한 雜役과 사찰과 재지사족간의 관계 역시 조선후기 사원경제의 중요한 연구주제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연구의 손길이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승역의 많은 부분이 밝혀졌지만 아쉬운 점은 주로 국가의 승려 ‘수탈’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역의 종류와 운영방식, 승려가 부담해야 했던 역의 양적 측면에서는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그것이 승역의 수취 주체인 국가의 재정 상황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승려들이 얻을 수 있었던 반대급부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조선후기의 승역이 단순한 일시적 동원에 그쳤던 조선전기의 승역에 비하여 양적·질적 측면에서 더욱 확대되었고 또한 정식화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그런데 그 유교국가였던 조선이 성리학의 조선화가 완성되었던 17세기에 승역을 확대시키고 제도로 정착시킨 이유를 단순한 수탈의 확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승려가 정규적인 役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승려가 조선의 국역체제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가 국역체제의 해체기라고 하더라도 조선전기 국역체제가 가지는 의미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은 승려에게 역을 부담시키면서 이미 붕괴된 국역체제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경향성도 보이고 있다. 승려가 국역체제에 포함된다는 것은 조선의 대불교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고는 17세기 국가의 재정상황과 그에 따른 정책·제도적 변화와 승역과의 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이 처한 어떠한 상황이 국가의 정책 변화를 추동하였고, 그렇게 생겨난 제도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이에 답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그리고 국가 정책의 변화와 제도화에 따라 조선사회에서 승려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역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조선전기 국역체제에서 제외되었던 승려가 17세기 국역체제의 해체시기에 다시 체제 안으로 편입된다는 사실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본문의 첫 번째 장에서는 조선후기 승역이 확대되고 정역화된 계기를 설명하고자 한다. 전쟁과 대내외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 극한 상황에 다다른 17세기와,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군비 증강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17세기 후반의 상황에서 각각 승역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2장에서는 실제로 승역은 어떻게 운영되었으며 그 부과 단위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역의 성격에 따라 분류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역 안에서 승역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해보려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정책과 제도에 따라서 승려가 조선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역 부담을 통해 승려가 얻을 수 있었던 반대급부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의 주요 얼개는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등의 연대기 사료를 통해 완성할 수 있었다. 17세기 국가의 승려 동원은 주로 중앙의 결정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대기 사료를 통해 전체적인 역사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다만 연대기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은 고문서와 지방의 牒報자료를 참고하였다. 그밖에 『續大典』, 『新補受敎輯錄』 같은 법령 자료들도 국가의 승려에 대한 정책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의승역의 운영에 대해서는 연대기사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영조대 반포되어 『비변사등록』에 실려 있는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과 정조대 반포된 『義僧防番錢半減給代事目』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하였다.

승역은 중앙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정부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또한 승역을 통해 국가 및 官이 승려와 사찰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조선전기부터 불교계가 사족 및 왕실과 맺고 있던 관계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미처 본고에서 다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기약하겠다.

     

1. 17세기 국가재정의 변화상과 승역의 정역화

1) 17세기 전반 立國安民 논의와 승역 확대

조선의 개국 이래 국가는 불교와 승려를 공적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세종 6년 불교 관련 사무를 관장하였던 僧錄司가 혁파되면서 국가의 공식 직제에서 불교와 관련된 것은 배제되었다. 그 후로 제 종파가 강제로 통합되어 선교의 양종으로 단순화되고 선교양종도회소가 설치되어 국가의 對佛敎政策을 보조하였다.14)

국가는 승려가 本業인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 시주로 연명하기 때문에 일종의 비경제활동인구라고 생각하여 승려의 출가에는 많은 제한을 가하였다. 『經國大典』 禮典의 度僧條에는 출가하는 자에게는 丁錢으로 정포 20필을 부담하고 도첩을 발급받게 하였던 것이다. 출가하는 이에게 정전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승려는 丁役에서 벗어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전기의 국역은 단순한 민의 부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역을 부담한다는 것은 그 반대급부로 사환권을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였다.15) 승려가 된다는 것은 민이 정전을 내고 국역체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국역체제로 연결된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승려는 온전한 공민이 아니었으며 국왕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존재가 되었고 이는 불교 비판의 한 이유가 되었다.

승려를 역사에 동원하는 일은 고려 공양왕 3년에 시작되었다.16) 성리학이라는 정치이념이 본격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등장하던 시기에 승역이 시작된 것이다. 사찰이 점차 避役地로 변모하면서, 국가는 도첩제를 통하여 이를 통제하려 하였지만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피역을 확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도첩이 없는 승려를 대상으로 力役에 참가하면 도첩을 발급해주는 정책을 통해 승려를 동원하였다.17) 이러한 정책은 승려를 역관계에서 배제시킨다는 원칙이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조선전기의 승역은 승려가 국역체제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자 승려를 국역체제라는 공적 영역에서 분리하기 위해 국가가 징수하는 비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세조대 국왕의 비호 아래 승역은 도첩 없는 승려가 도첩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한 번의 영건사업에 수 만 명의 승려가 몰려들어 영구히 면역받게 되기도 하였다.18) 때문에 성종 23년 도첩제를 폐지하고 승려의 출가를 금지하여 아예 국가와의 역관계에서 벗어나는 승려가 증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였다.19)

조선전기 중단된 역역의 승려 동원은 임진왜란 이후 부활하게 되었다. 이는 전쟁 이후 조선이 직면한 국가재정의 위기상화오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과 중국 정세의 변화 즉 명·청의 교체는 조선의 국가재정에 큰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임진왜란으로 많은 인구가 사망하고 진전이 증가함은 물론 양안과 호적 같은 국가재정의 토대가 되는 기본 자료가 모두 소실되어 부세 수취가 어려워졌다. 세종대 170만결에 달했던 時起結이 임진왜란 직후 실시된 癸卯量田에서는 30만결에 불과하게 되었다.20)

전후복구에 전력해야 할 시기에는 중국 정세의 변화가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 명·청 교체라는 동아시아의 거대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막 일본과의 전쟁을 치룬 조선의 입지는 불안했다. 기존의 사대의리를 맺고 있던 明에서는 칙사가 잇따라 오고 모문룡과 그 군사 및 중국인들이 후금을 피해 조선에 의탁하였다. 두 번의 호란 이후에는 기존의 조-명관계가 조-청관계로 대체되었으며 특히 병자호란 이후 막대한 양의 세폐·방물을 청에 부담해야 했다. 명과 청의 요구에 따른 파병 역시 조선에 큰 인적·물적 부담이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의 회복을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막대한 외교비용을 부담하는 한편 궁궐 영건 등의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켰다. 그 결과 인조반정 직후에는 국가재정이 거의 바닥나 호조의 1년 경상비조차 제대로 걷히고 있지 못했다.21) 또한 인조 재위 초반에는 전쟁과 이괄의 난, 각종 자연재해 때문에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최대 쟁점은 바로 立國安民이었다.22) 立國은 利國, 즉 국가재정을 확보하여 국가운영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격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대비하여 방어력을 증강하는 詰戎 역시 입국의 영역에 속했다. 安民은 便民, 즉 농민의 부세 부담을 줄여주어서 농민의 재생산을 보장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 상반되는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어야 한다는 과제가 왜란과 호란 이후의 조선왕조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기는 어려웠다. 삼도대동법의 시행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尹昉(1563~1640)이 양전의 편리성을 논의하며 利國과 便民을 모두 얻을 수 있다고 하자 인조는 “백성에게 편하면 반드시 나라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나라에 이득이 되면 백성에게 불편하게 되니 어찌 두 이득을 모두 얻을 수 있겠는가?”라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23)

그러나 입국과 안민 모두가 요구되는 시기였기에 국가는 최대한의 방도를 찾아야 했다. 공물 및 양역 변통 논의와 마찬가지로 승역은 이러한 국가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전기 승려는 국역체제에서 완전히 배제된 非公民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시기 승군의 활약을 통해 국가는 역 부담의 대상으로서 승려를 주목하게되었다.24) 임진왜란 당시 유정·휴정·영규 등에 의해서 동원된 승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군량 및 무기의 수송 및 보관 등 보조적 업무에서 여러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가 직접 승군의 활약에 대하여 칭찬하기도 하였다.25) 따라서 국가는 전쟁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민을 직접 요역에 동원하기 보다는 거두어진 결포로 烟軍에게 역가를 지불하여 한편, 그 전까지 逃役之人, 化外頑民 등으로 지목되던 승려들에게 각종 역을 부담시켰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李命雄은 부임한 뒤에 築城하는 일을 몸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십분 신중히 하여 위임해 보낸 뜻에 부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조처를 잘못하고 刑杖을 지나치게 썼습니다. 처음에는 僧軍을 쓰면서 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절에 근거하여 인원 수를 억지로 배정하였습니다. 승군이 다하자 계속해서 烟戶를 썼으며, 연호가 다하자 哨軍을 썼으며, 초군이 부족하자 다시 田結을 썼습니다. 전후로 名目은 다르나 民丁들이 역사에 나아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호령이 전도되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사장에서 죽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 역사를 맡게 한다면 人和가 깨질 것이니 성이 있은들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명웅을 파직하고 각별히 너그러운 사람을 뽑아보내 잘 처리해서 그 역사를 완수하게 하소서.”26)

 

위 사료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李命雄(1590~1642)이 金烏山城을 쌓는 과정에서 민정을 동원한 방식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명웅은 먼저 승군을 동원하고 그 후에 본래 요역을 져야 하는 연호를 동원했다. 그 다음으로는 지방에 잡역을 부담하던 초군을 동원하였으며 그래도 안될 경우에는 結役을 부과하였다. 이렇듯 승역은 요역 및 지방의 과외별역을 대신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 초반 승역 동원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래 <표 1>은 17세기 국가의 승려 力役 동원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표 1】 17~18세기 국가의 승려 工役 동원 (단위: 名)

연도

인원

부역 내용

광해군1

25

선조목릉개수역

광해군13

1500

인경궁영건역

인조2

?

남한산성축성역

인조3

1000

평양성축성역

인조8

1000

선조목릉천릉역

인조8

1000

남한산성(?)축성역

인조10

1000

인목왕후산릉역

인조16

?

남한산성축성역

인조23

1500

소현세자묘소역

인조25

2800

경덕궁수리역

인조27

1000

남한산성수축역

효종 즉위

1000

인조장릉산릉역

효종3

1200

창덕궁·창경궁수리역

효종6

2640

창덕궁만수전수리역

효종7

1000

창덕궁만수적수리역

1000

남한산성수축역

현종 즉위

1500

효종영릉산릉역

현종8

950

영녕전수리역

현종14

2200

효종영릉천릉역

현종15

2400

인선왕후산릉역

300

長山串벌목역

숙종 즉위

2650

현종숭릉산릉역

숙종3

?

왜관신조역

숙종6

3600

인경왕후산릉역

숙종9

2000

명성왕후산릉역

숙종14

3100

장열왕후산릉역

숙종18

?

강화성역

숙종24

1200

사릉봉릉역

숙종24

1500

장릉봉릉역

 

 

 

 

 

 

 

 

 

 

이 표를 통해 우리는 먼저 국가의 대규모 승역 동원이 광해군 재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어 17세기에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원년(1609)의 목릉 개수역에 동원된 승려는 2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해군 13년(1621)부터 수 천 명의 승려가 조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조선은 빈번한 明使 접대와 명으로의 파병, 毛文龍(1578~1629) 및 그 군사에 대한 양식 제공, 궁궐 영건 등으로 재정 지출이 늘어났기 때문에 각 도에 調度使를 파견하는 등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재정을 보충하였다.27)

반정 이후에도 국가 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정 직후 각종 도감을 혁파하고 궁궐 영건을 중단28)하는 등 재정지출을 줄이고, 조도사를 폐지하고29) 공물·진상의 양을 줄여 백성에 대한 수취를 줄였다. 그러나 勅需·毛糧 등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외교비용은 줄어들지 않았고 旱災 같은 자연재해가 이어지면서 전세나 공물이 몇 년간 상납되지 않는 일도 빈번했다. 게다가 두 번의 胡亂과 그에 따른 막대한 세폐·방물의 부담까지 겹쳐지게 되었다.

승려의 대규묘 역역 동원은 바로 국가재정이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재정 위기가 계속되는 17세기 초반에 승역은 상례적인 역으로 정착되었고, 공역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30)

<표 1>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승려의 역역 동원이 경기지역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경기지역은 서울과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각종 역의 부담이 과중한 곳이었다. 경기지역에는 왕릉을 비롯하여 왕실 인사들의 능·원·묘가 위치해있었으며 새로운 능원의 조성과 개수는 고스란히 경기민의 부담이 되었다. 宮闕 및 각종 廟殿의 營建 역시 각도에 분정되기도 했지만 역시 많은 부분 경기가 책임져야했다. 게다가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중국에서 오는 조사의 통행로였기 때문에 부담해야하는 지공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경기는 매일 일차문선이라는 별진상을 올려야 했다.31) 이러한 과외별역이 많았기 때문에 경기의 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고된 편이라는 지적이 조선전기부터 조정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32)

승려가 담당했던 공역의 대부분은 바로 京畿가 부담해야했던 力役에 집중되었다. 승려 동원이 가장 많았던 경우가 바로 산릉의 조성이나 개수였다. 강화도와 함께 수도 방위를 위한 보장처로 지목되었던 남한산성의 축성 역시 절대적으로 승려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33) 顯宗代까지는 도성 내 궁궐 및 종묘의 수리에도 승려가 동원되었다. 이처럼 17세기 초반 대부분의 승역 동원은 바로 경기의 역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조반정 직후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에 대한 원칙이 재확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34), 도성 안의 공역에 승려를 동원했다는 것은 17세기 국가재정의 위기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다.  

승역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은 바로 紙役으로 대표되는 공납이었다.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농업으로 얻을 수 없는 각종 나물과 버섯 등의 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전기부터 사찰 안에서 종이 등의 물건을 생산해왔다.35) 그 중에서도 특히 종이는 닥나무의 산지와 가깝고 집약적인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찰에서 생산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때문에 전쟁 직후 방물에 필요한 종이를 사찰에 분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36) 또한 造紙署의 工匠이 흩어져 종이 생산이 불가능해지자 僧匠을 조지서에 보내 종이를 만들게 하기도 하였다.37) 요컨대 사찰과 승려에게 紙役이 부과된 것은 재정의 위기 상황에 빠진 국가가 이미 오래전부터 사찰에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던 점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 紙役이 확대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보다도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 부과된 막대한 양의 세폐·방물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병자호란 이후 淸은 조선에 많은 양의 세폐와 방물을 부과하는데 그 중에서도 종이의 양이 많았다. 중국의 상황이 안정되면서 세폐·방물의 양이 줄어들었으나 오히려 청이 요구하는 종이의 양은 더 늘어나기도 하였다.38) 세폐는 대부분 민간에 분정하여 결포를 통해 마련하였지만 방물의 경우 각도에서 본색으로 상납받았다.39) 방물 중에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백면지인데, 정기적으로 가는 동지사·정조사·성절사 마다 각 2500권 씩 한 해 최소 7500卷이 필요했으며, 기타 별사가 갈 경우에도 각기 2500권이 들어 많을 경우 일 년에 6만 권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40)

백면지에 대해서는 紙價가 지급되었으나 실제 보내는 양에 비하여 턱없이 적어 대부분의 별사 백면지는 대가 없이 징수되었다.41) 임진왜란 이후 이미 조지서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백면지는 대부분 道를 거쳐 각읍에 분정되었다.42) 수령들에게 부과되는 백면지의 많은 양은 다시 사찰에 분정되었다.43) 아래 사료를 보면 각읍에서 사찰에 백면지를 할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1 執義 申命圭, 掌令 朴贄, 持平 李宇鼎이 …… 또 아뢰기를, “백성의 요역 가운데 白綿紙 등이 가장 무거운데, 各邑에서는 모두 僧寺에 책임지워 마련케 하고 있습니다. 중들의 능력도 한계가 있으니 편벽되게 침탈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전라 감영이 전례에 따라 바치는 종이도 적지 않은데 근래에 또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일 년에 올리는 것이 큰 절은 80여권, 작은 절은 60여권이 되므로 중들이 도피하여 여러 절이 텅 비었습니다. 이런데도 혁파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장차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各寺에서 이중으로 올리는 폐단을 속히 없애게 하소서.”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44) 

 

여기서 보이듯이 병자호란 이후 증가한 외교비용인 세폐·방물비용의 일부가 사찰에 전가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서천군은 천방사에서 종이를 받고 있었으며,45) 금성현에서는 쌍계사에 한 개 고을의 백면지를 모두 할당시키고 있었다.46) 대동법 시행 후에도 세폐로 쓰이는 종이를 무납하게 할 경우 품질의 차이가 심하여 당분간 계속 본읍에서 본색으로 상납하게 하여47) 사찰의 지역은 계속되었다. 사찰의 종이 부담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고, 일부 과장이 있다는 시각도 있으나,48) 19세기까지 종이 공납의 적지 않은 부분이 사찰에 할당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49)

사찰에대한 종이 분정은 세폐·방물지의 마련이 중요한 목적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관수용 종이와 왕실 진상용 종이 또한 상당부분 사찰에서 생산되었다.50) 대동법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종이는 본색으로 상납되었으며 백면지계·전이 무납하게 된 이후로도 사찰은 원재료가 이외에 종이 생산에 대한 제대로 된 지가를 지급받지 못하고 수령의 통제 하에 전·계에 종이를 공급해야 했다.51) 종이뿐만 아니라 나물이나 버섯 같은 다른 각종 물종들도 내수사와 각종 궁방에 진상하였다.52)

사찰의 지역은 결국 17세기 외교비용의 갑작스러운 확대 속에서 민들이 져야 할 요역 부담 중 일부를 비경제활동인구라고 인식되던 승려들에게 부담시킨 것이었다. 17세기 가장 큰 재정 부담이었던 산릉 및 영건의 역과 외교비용을 필요에 따라 사찰에 부담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승려의 役 동원은 조선후기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과외별역에 승려를 상황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동원하는 것으로 승역이 정역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18세기 중반에 비정기적인 승려의 공역 동원은 종식되었다.53)이러한 상황은 17세기 후반 의승역의 시작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다음 절에서는 의승역의 시행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17세기 후반 군비확장정책과 義僧役의 시행

승려의 역역 동원은 17세기 후반 일대 변화를 맞는다. 바로 남한산성에 위치한 守禦外廳에 승려를 주둔시키는 의승역의 시행이다. 의승역은 이전까지의 승역과는 완전히 형태의 역이다.  지금까지는 의승역과 승군역을 같은 승려의 군역으로 이해해오던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의승과 승군은 국가가 승려를 군사적인 목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역 조발 방식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의승역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후기 국가가 승려를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래 <그림 1>은 의승 혹은 승군의 형태로 승려를 사역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그리고 <그림 2>는 『大東地志』에 나온 조선의 주요 도로들을 「대동여지전도」에 표시한 것이다.54) 이 두 지도를 보면 국가에서 승려를 군사적으로 동원하는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55)

 

 

【그림 1】 조선후기 승군의 배치 상황56) 



 【그림 2】 조선후기의 10大路57)




 

비록 파편적으로 흩어져있는 자료를 종합한 것이라 <그림 1> 및 <부표 2>에 정리한 것보다 더 많은 곳에 승군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래도 대체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다. <그림 1>을 살펴보면 의승 및 승군이 주로 세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 주변과, 양계지방의 북쪽 변방, 그리고 삼남지방 중 동래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경로 및 남해안의 주요 거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그림 2>의 도로와 비교해보면 더욱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난다.

먼저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의주대로에 집중적으로 승군이 배치되어 있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승려들은 남·북한산성으로의 입번을 면제받고 대신 변방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58) 의주의 백마산성과 용천의 용골산성, 영변의 북성, 곽산의 능한산성, 황주의 정방산성 등은 모두 의주에서 서울로 오는 주요 길목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들이다. 자료가 부족해 이 북변 산성들에 승군이 언제부터 주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후금-청의 위협이 고조되던 인조대 초반부터 이미 승군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남한산성 의승제도의 성립보다 일찍 승군이 산성 수직을 시작한 듯하다.59)

함경도의 경우 길주와 단천에 의승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 경흥로의 요지였다. 단천의 승군은 함경도 방어뿐만 아니라 은광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평안도 승군과 마찬가지로 인조대 초반부터 동원되었다.60) 요컨대 양계지방의 승군은 17세기 초반부터 이미 군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어청이 있던 남한산성과 총융청이 있던 북한산성, 개성의 대흥산성, 강화의 진해사와 영종진은 모두 수도 방어를 위한 의승 및 승군들이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과 대흥산성은 원거승과 의승이 함께 편제되었고 북한산성은 의승만으로 편제되었다. 진해사의 경우 의승을 둘 것이 논의되었으나 僧弊가 지나치다 하여 募僧으로 편제되었다.61) 효종대의 남한산성 의승방번제를 시작으로 숙종대 대흥산성·진해사·북한산성 등에 의승·승군이 배치되어 이 시기 의승·승군이 집중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대에는 화성의 용주사 승군이 장용외영에 편제되어 수도의 사방에 의승·승군이 배치되었다.

삼남지방의 경우 <그림 2>에서 보이는 동래로의 주요 거점인 동래 금정산성, 문경의 조령산성, 칠곡의 가산산성 등에 대규모 승군이 배치되었고,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우에도 주요 거점에 승군을 배치하였다. 삼남의 승려들은 의승역을 부담함과 동시에 산성을 지키는 승군역을 져야했는데 경상도의 부담이 특히 컸다.62) 삼남지방의 산성은 주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축성되었는데,63) 승군의 배치도 이 때 이루어진 듯하다. 장성의 입암산성과 같이 임진왜란 도중부터 승군이 배치된 경우도 있었지만64) 대부분의 산성은 숙종대에 축성되었다.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산성을 지으면 의례히 인근 사찰은 산성에 소속되었고, 심지어 산성 운영을 위해 사찰을 새로 창건하는 일도 있었다.65) 산성이 늘고 그에 따라 산성을 수직해야 할 승군의 부담도 늘어나자 지방으로부터 의승역을 줄여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중앙정부는 산성에 승군을 보내는 사찰에도 의승역을 중첩적으로 부과하였다.66)

그 밖에 통제영·전라좌수영·황해수영에도 승군이 있었다.67)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에는 임진왜란 도중 統制使 李舜臣 아래에서 종전했던 부휴계의 승군이 전후에도 그대로 배치되었던 듯하다. 황해수영은 숙종 45년(1719)에 옹진에 설치되었는데 숙종대 승군이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며 수영의 설치 직후에 승군이 배치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밖에 정족산·오대산·적상산의 사고에도 승군이 배치되었다.68)

요컨대 17세기 군비증강과 수도방위체제의 성립으로 양계지방을 제외한 승려에게 의승역이라는 정규적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지방에 산성이 늘어나고 지방에서의 승군 활용의 필요성이 증가하였다. 국가의 방어체계 재편에 따라서 북방 군사 거점의 승군 및 수도 주변의 의승으로 시작된 승려의 군사적 역할은 시대가 흐를수록 강조되었고 전국적으로 국가의 필요에 따라 배치되고 있음을 위 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 1>에서 보이듯 50여 곳에 달하는 곳에 승려가 군사로써 배치되었음에도 오직 수도를 둘러싼 지역에만 의승이 배치되거나 혹은 배치가 논의되었다. 즉 의승은 수도와 국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특별한 승군이다. 즉 수도와 국왕 중심의 방어체제가 확립되면서 기존의 승군과는 다른 의승이라는 특수한 役이 생겨났던 것이다. 대부분 모입의 형태로 조발했던 승군과는 달리 전국의 승려를 대상으로 역을 부과한 것은 수도 방어를 위해 안정적으로 의승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義僧이라는 명칭 또한 수도와 국왕을 지키는 保障의 중요한 임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그 명호를 높여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69)

그렇다면 의승과 승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우선 義僧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료에 나타나는 僧軍·僧徒와 義僧이라는 표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營建·築城·山陵役 등에 동원되는 승려들은 僧軍 혹은 僧徒라고 통칭된다. 지방의 산성에 머물던 승려들도 승군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승도는 말 그대로 승려 무리라는 뜻이고, 승군은 이들이 본래 전쟁 도중에 승장 아래 모여 있었던 무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70)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어진 많은 산성에는 부역승을 조발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모집한 승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기와 병량을 지키는 일부터 직접적인 군사업무까지 다양한 일을 담당했다.71)

義僧은 승군·승도와는 달리 특별히 서울 주변의 산성에 머물며 성을 수호하는 보장의 임무를 맡은 승려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남북한산성에 있는 모든 수호승은 의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의승의 정확한 의미는 숙종 13년 강화도에 義僧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2 이건명이 계하길, “작년 가을에 강화유수 신정이 강화 義僧의 일을 경연 중에 진달하였는데, 그 때 領敦寧府事 김수항이 ‘당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승도로써 부역시켰으므로 일곱 사찰을 세우고 여러 도의 승인들로써 분정하여 입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강화도의 형세는 남한산성과는 다르니 외방의 義僧이 입번하는 사이에 그 폐가 셀 수 없을 것이니, 우선 경기 屬邑과 ... (이하 缺)’ 이 뜻으로써 비변사에 馳報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의논하기를 ‘남한산성의 義僧은 그 폐가 이미 지극한데 지금 또 강도에 설치하면 수호하는데 무익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 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금방 입시하오니 다시 정탈하여 분부하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남구만이 말하길 “소신 또한 公事를 보았는데 남한산성의 義僧은 비록 八路에 분정하지만 폐를 끼침이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연백과 남양, 풍덕 등은 모두 野邑이니 승도가 본래 적어 적은 수의 승인이 輪回入番하는 것은 반드시 힘이 모자를 것이어서 한갓 폐를 끼침이 돌아오는 것이 되니 신의 뜻으로는 결코 불가합니다.” 72)

 

위의 사료에서 설명하고 있는 의승은 해당 사찰에 모집되어 거주하는 승려가 아니라 각 도에 분정하거나 혹은 여러 고을에 輪回分定하여 입번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즉 이들은 마치 군역을 지고 있는 공민과 같이 순서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일정한 기간 동안 의승번역을 부담하고 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거주하던 사찰로 돌아갔다. 이처럼 승군과 의승은 역역을 부담하는 승려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남북한산성의 의승방번제는 숙종 40년(1714)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왔다.73) 즉 승군 자체가 제도화 된 것은 남한산성이 완성된 인조 2(1624)년 이후이며 그 후 元居僧을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육도의 군현과 사찰에 상경 입번할 승려를 분정한 것은 북한산성이 완성된 숙종 40년(1714)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 40년(1714) 이전까지 남한산성의 사찰에서 수호의 역을 담당하던 이들은 국가가 모집하여 산성의 사찰에 영구 거주하는 원거승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의승역의 시작에 관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18~19세기의 여러 사료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사를 토대로 한 것이다.74) 이 사료들에서는 남한산성의 축조 당시 동원된 승군과 남한산성의 의승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현실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의승역은 남한산성 축성역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역으로 시행되었으며, 또한 북한산성 의승역이 성립되는 숙종 40년(1714)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정착하였던 것이다.

먼저 의승역이 남한산성 축성 직후에 성립되었다는 의견을 살펴보자. 이 의견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의승이 소속되어 있는 수어청 자체가 인조 15년(1637) 이후에나 성립된다는 점이다.75) 의승은 수어외청인 광주부에 소속되어 광주부윤이 관할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는데,76) 이러한 체계 자체가 인조 15년(1637) 이전에는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의승역의 시행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아래 사료들을 통해 유추해보도록 하겠다.

 

 1-3 이태연이 말하길 “수원의 일은 소신이 임지에 도착한 후 거의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예전에 수어사 종사관이 되었을 때 보니 앞서 의승을 성내에 모아둔 것은 남한산성의 수호를 위한 것이지만 근래 의승이 고을로부터 모이는 일은 지난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장차 수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걱정할 만 합니다. 외방의 여러 일로 승려가 군사가 되는 것은 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로써 의승에 채워 넣으면 편하고 마땅할 듯합니다. 신이 이 뜻으로 수어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상이 말하길 “의승의 일은 또한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 많다. 경이 수어사에게 가서 보고 서로 의논하여 함이 가하다.”77)

 

 1-4 윤지선이 말하길 “신이 엎드려 듣건데 선산부사 조지항이 영남 의승을 타도에 이정해줄 것을 소청한 것을 묘당이 그 청을 불허하고 단지 선산·칠곡 양읍의 의승만 감해주었다고 합니다. 신이 부득불 그 안 되는 이유를 대략 분별해보았습니다. 남한산성의 의승 분정은 기사년(인조 7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 일찍이 읍에 산성이 있다고 탈감해 주는 바가 있지 않았으며 다만 혹 부득이 수를 가해주는 읍이 있어도 원액은 영구히 감해주지 않았고, 도내의 타관에 이정하였으니 이로부터 유래한 고례를 지금에 이르러 어찌 조지항의 한마디 말로 가벼이 의논함이 가하겠습니까? 경상·전라의 양도는 조잔함과 번성함을 나누어 남한산성 의승의 원액을 정하며, 또한 각 읍의 승도로써 도 내의 산성에 수직시키니 또한 남한산성 의승의 예와 같습니다. 공청·황해·경기 등의 도는 비록 산성이 있어도 수직군으로 정하지 않고 남한산성 의승을 조지서 도침군과 함께 마련하여 분정하니 당초에 역을 고르게 하려는 뜻이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만약 산성이 있다 하여 의승을 감해줄 것을 허락한다면 각도의 산성이 있는 읍이 장차 분분히 다투어 청할 것이니 조가가 어떻게 그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78)

 

위 사료들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의승역은 남한산성에서 먼저 시행되었고 그 시기는 남한산성이 축조된 인조 2년(1624) 이후의 어느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축성이 승군을 통해 이루어졌고, 산성 내에 여러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모집의 형식으로 승군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에 승군이 주둔하는 것 자체는 남한산성 축성 직후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국에 분정된 승려들이 상번하여 입역하는 의승역이 시작된 시기이다.

 <사료 1-4>에서 보이듯 숙종대에는 남한산성 의승을 인조 7년(己巳年, 1629)에 두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의승역의 시작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오래된 기록이다. 그러나 인조대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병자호란 직후까지도 의승이라는 용어는 분정하여 입번시키는 승군을 가리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조 17년(1639) 인조는 반란이 일어났다고 스스로 승병을 모았던 승려를 義僧이라며 두둔하는 신하들에게 전쟁에 나왔던 승려에게 의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일의 폐단이 될 것이라고 하며 일이 없을 때는 의승이라는 명호를 없애라고 하고 있다.79) 여기서 의승은 말 그대로 의로운 승려를 가리킨다. 게다가 동년에는 淸의 명으로 개축한 남한산성을 헐어버리는 일이 있었다.80) 적어도 인조 17년(1639)까지는 의승이 남한산성으로 상번하여 입역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의승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크게 변하는 사실은 효종대의 연대기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료 1-3>에서 알 수 있듯이 늦어도 효종 8년(1657) 이전에는 의승이 상번하여 남한산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조 18년(1640)에서 효종 8년(1657)에 이르는 어느 시기에 의승역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효종대 초반에 의승역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인다. 이괄의 난과 두 번의 胡亂을 겪으면서 조선은 수도 중심의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호위청·수어청·총융청·어영청 등 여러 군영을 설립한다. 군영의 주요 목적은 경기를 비롯한 수도를 방위하고 비상시 국왕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비상시 국가의 保障處로 주목받았고, 남한산성에는 守禦廳이 자리 잡게 되었다.

守禦使가 성립된 것은 인조 10년(1632) 이전이지만 수어청이 군영으로서 자리잡은 것은 인조 12년(1634) 이후로 보인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화포·조총·궁시 등 많은 군기가 남한산성에 비치되었다.81) 이렇게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인조대부터 강조되었지만 특히 남한산성의 군비가 급증한 것은 효종대였다.

효종대는 두 번에 걸친 호란의 충격이 조금 수습되고 세폐·방물이 감면되는 등 淸의 압박이 조금 완화되던 시기이다. 효종은 복수설치를 위한 북벌을 추진하고 그에 따라 강력한 군비확장책을 시행하였다. 북벌을 위한 군비증강책은 국왕 및 수도 방어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군비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효종 재위 초반에는 남한산성의, 후반에는 강화도의 군비가 급증하게 되었다.82)

 효종은 李時昉(1594~1660)을 수어사로 임명해 수어청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總戎使 소속의 竹山營을 남한산성에 소속시키고 守禦牙兵을 편성해 사수와 포수를 증강시켰다. 뿐만 아니라 청천강 이북 各邑의 稅米와 忠州官穀을 산성에 유입시켜 비상시를 대비케 하였다.83) 또한 수어청은 둔전을 경영하여 비용 마련을 스스로 담당하였는데, 수어청의 군액이 늘어남에 따라 屯田도 늘어나 조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식량뿐만 아니라 각종 무기의 제작도 남한산성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효종 4년부터 수어청에서는 조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84) 이렇게 되면서 남한산성에는 군량고·화약고·무기고 각종 창고가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특히 산성을 수직하고 창고를 지킬 승려들의 필요성이 증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의승의 주요업무는 성의 수리와 수직뿐만 아니라 각 사찰에 설치된 승창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85)

승창은 군량미·환적미 등을 저장하는 군량고의 역할86)과 군기·화약을 저장하는 군기고의 역할87)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남한산성의 중심 사찰로 총섭청의 역할을 하던 중경사는 광주유수부 바로 인근에 위치하면서 책고·화약고·무기고·군량고 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88) 이러한 승창은 남·북한산성뿐 아니라 緇營寺刹이 건립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89) 이처럼 안정적으로 수직해야할 창고가 늘어났기 때문에 모집한 원거승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90)

효종은 북벌정책의 추진을 위해 各司直貢奴婢와 內需司奴婢 등 隱漏奴婢 12만 명을 쇄환하여 그 신공을 받아 군비로 삼는 등 강력한 군비증강책을 실시하였다.91) 그런 만큼 새로운 군액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표적인 피역 집단이면서 전쟁 이후 활용되던 승려에 대하여 정규적인 역을 지우고 상번시키려 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숙종 원년 기록에 보이는 당시 전라도의 의승의 수92)가 영조대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磨鍊別單」에서 보이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현종대를 거치면서 남한산성의 치영사찰이 추가되면서 팔도 분정이 완성되고 의승의 원액이 대략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수는 대략 40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3)

승려에게 의승역의 부담이 새롭게 주어졌지만 이 시기 다른 종류의 승역이 감면된 것은 아니었다. 승려는 각종 공역에 동원되고 왕실 및 관청에 필요한 각종 물종을 공납하는 역을 부담함과 동시에 의승역이라는 새로운 역을 중복해서 부담해야 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국역체제의 해체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승려에 대해서는 役을 더욱 강하게 부담시켜야했던 것이다. 기존의 승역이 비정규적이었고, 역을 부담하는 승려의 범위 역시 한정적이었던데 비하여 의승역은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즉 국가의 군액 확보를 위한 의승역의 시행으로 승역의 定役化가 이루어진 것이다.

17세기 중반 성립된 의승역은 숙종대에 크게 확대되었다. 새로운 수도 보장처로 북한산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숙종 40년(1714)에 북한산성 의승방번제가 시행되었다. 이 때 의승의 수는 400여 명에서 700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94) 그 밖에 숙종 재위 초에는 역시 중요한 보장처인 강화도에 의승을 입번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95) 결국 의승이 배치되는 대신 甲串에 鎭海寺라는 사찰96)을 창건하고 원거승을 募集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97) 국방정책의 변화에 따라 의승의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요컨대 승려의 군사적 활용은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 의승은 효종대 북벌의 추진과 조응하여 수도와 국왕을 방어하기 위해 승려를 대상으로 새로 부과된 역이었다. 의승은 모입을 위주로 하는 승군과는 달리 전국의 승려들에게 동일하게 부과되었으며 승려들은 산성에 윤회입번하여야 했다. 의승역은 승역이 정역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7세기 국가가 승역을 강화하는 한편 승역을 정규적인 역으로 편제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시기 사찰의 數的 推移를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후기 승려의 구체적인 수를 알려줄만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98) 그러나 사찰 수의 증감과 승려 수의 多少는 대체적으로 비례관계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사찰 수의 증감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99)

 


【표 2】 17세기의 주요 사찰 중창·중건 회수 (단위: 件)

왕대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미상

합계

횟수(件)

7

15

34

8

14

19

3

100

 

 *위 표의 대상 시기는 임진왜란이 종결된 선조33년(1599)에서 숙종 25년(1699)까지의 100년이다.

 **전거는 『朝鮮寺刹史料』 및 각종 寺誌 자료.

 ***상세한 내용은 <부표 1>을 참조.

임진왜란의 과정에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거의 소실되었다. 때문에 임진왜란 직후부터 여러 사찰의 중창·중건 공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불교 지정문화재의 80% 이상이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100)임을 생각해보면 조선후기 각종 불사가 대단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 2>와 <부표 1>은는 17세기 주요 사찰의 중창 및 중건 회수를 정리한 것이다. 위 표에 정리한 내용은 대부분 현존하는 사찰의 자료만을 전거로 하였고, 또한 각 공역이 적게는 3~4년에는 길게는 35년에 이르는 장기적인 공역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계량적 수치로 상정하기에는 한계가 많고 또한 수치상으로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17세기 佛事에 대한 대략적인 추이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사찰들은 17세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복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조에 실린 사찰이 1658개소인데, 『여지도서』 불우조에는 1537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사찰의 창건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101), 17세기를 거치며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져 불교계가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 2>와 <부표 1>에서 주목되는 점은 특히 인조대까지 17세기 전반에 매우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17세기 전반 전쟁으로 황폐화된 사찰들이 어느 정도 복구되면서 승려들이 安集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인조대 승려 碧巖 覺性(1575~1660)의 활동은 17세기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각성은 남한산성 축성시 승군을 모으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102), 병자호란의 와중에는 항마군을 일으켜 북상하기도 하였다.103) 인조 역시 각성을 신뢰하여 승직 중 최고직인 국일도대선사와 팔도도총섭에 제수하고 무주 적상산성의 史閣을 수호하도록 하였다.104)

이처럼 국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각성은 각종 대형 불사의 최고 화주로써 자주 등장한다. 각성이 관여한 대표적인 불사는 완주 송광사의 重創, 해인사 법보전의 重修, 구례 화엄사 중창, 하동 쌍계사 중창 등이다. 이러한 불사들은 대부분 왕실 혹은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105) 이처럼 불교계가 국가의 일에 협조하는 경우 국가는 왕실 혹은 지방을 통해 불교계를 후원함으로써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 결과 17세기 불교계는 물적 기반을 전쟁 이전의 수준에 비견할만한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경기지역에 과중하게 부과된 요역의 부담을 덜고, 갑작스럽게 증가한 외교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승려를 역역에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승려는 산릉과 영건의 역, 그리고 증가하는 세폐·방물용 백면지 생산의 역에 투입되었고, 더 나아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종까지 공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은 아직 과외별역에 대한 보충으로 단기적·비정기적·비정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북벌론 등 강력한 군비증가책이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국의 승려를 대상으로 남한산성에 입번하게 하는 의승역이 성립되었다. 의승역은 전국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정규적 역을 부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승역의 정역화 현상은 승려들이 안집할 수 있는 사찰 수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전반부터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들이 중건되었고 여기에는 국가 및 왕실과 연결되어 있는 고위 승려들이 참여하였다. 사찰 수의 증가를 통해 승려가 안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안정적으로 승역을 수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승역의 조발과 운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다음 장에서는 국가가 승역을 운영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시대별로 조선이 처했던 상황과 승역 운영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고찰해볼 것이다.

 

2. 승려 조발의 변화와 寺刹役으로서의 승역

1) 부역승 조발 방식의 변화 - 募集에서 分定으로

조선의 중앙정부가 비어있는 국역 부과의 대상으로서 승려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쟁 기간 동안 활동했던 義僧軍이라고 할 수 있다.106) 임진왜란 당시 유정·휴정·영규 등에 의해서 동원된 승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군량·무기의 수송 및 보관 등 보조적 업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역시 의승군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107) 때문에 전쟁 이후 적극적으로 승려를 역역에 동원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시작된 승군의 공역 조발은 기본적으로 전쟁 중 명망있는 승려들이 일으킨 승병 집단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전쟁 당시 고위 승려들이 승병을 일으키면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도총섭·총섭·부총섭 등의 승직을 내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었다.108) 본래 도총섭과 총섭은 고려시대부터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고승들에게 부여하던 일종의 명예직함이며,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109)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는 승려를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어 그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110)

승군 자체가 자체적인 승려의 師弟 법통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국가는 고위 승려에게 도총섭 등의 승직을 주어 고위 승려의 권한을 사실상 인정해주었다. 때문에 국가는 승병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승병 내부에서도 통일된 지휘체계가 성립되기 어려웠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서로 다른 법통을 지닌 서산계와 부휴계 승병은 각기 전혀 상이한 지휘체계를 가지고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111)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승려의 역역 동원은 두 번의 전쟁 이후 각 지역에 분산되어있던 승군의 동원으로 시작되었다. 전후 승군은 해산되었지만 승군을 지휘했던 승장들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일본에 사신으로까지 다녀온 선조대의 사명 유정과 앞서 살펴본 인조대의 벽암 각성이 17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승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는 壬辰倭亂을 거치면서 승군으로 체계화된 승려들의 명령계통을 활용하여 각종 토목공사의 책임자로 승군의 지도자를 임명하고 僧軍에게 공사를 일임하였다.112)

 

 2-1 상이 晝講에 자정전에서 孟子를 강하였다. ... 金瑬가 아뢰기를 “... 그리고 남한산성을 쌓는 것이야말로 현재 나라의 대역사인데, 승려를 官軍과 함께 立役케 하는 것은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요즈음 듣건대 승려에게 摠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 마치 국가가 각도에 분부하듯 독자적으로 각처에 호령을 행하게 하고 있다 하는데, 어찌 국가가 직접 외방에 호령하지 못하고 일개 총섭의 손을 빌린단 말입니까. 道臣으로 하여금 사찰의 대소와 승려의 다과에 따라 인원수를 정하게 한 뒤 差員에게 領送하게 하도록 한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소견이 없지 않은 말이나 다만 각 고을에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된다. 묘당과 관장하는 사람이 다시 자세히 살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113)

 

위 사료에서 보이듯이 임진왜란이 끝난 지 삼십년에 가까운 인조 2년(1624)까지도 국가에서는 승려를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없었다. 金瑬(1571~1648)는 지방에서 승려의 인원을 파악해 중앙에서 내려 보낸 경차원이 승군을 영송하도록 하여 승군을 완전히 국가에서 통제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으나 인조는 각 고을에 폐단이 될 것 같다며 이를 거부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각성에게 도총섭의 직첩을 주고 승군을 모아 적상산성을 지키게 하는 모습을 보면114) 인조 후반에도 완전히 국가에서 승군을 직접 동원하는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고위 승려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려의 지휘 역시 도총섭 등 승직을 맡은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15) 임진왜란 기간에는 잠시 폐지된 양종의 관직인 선교양종판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종의 부활을 염려하여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도총섭·총섭·승통의 승직이 주어지면서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116) 본래 군사적 의미가 없었고 태종 이후 사라진 도총섭 및 총섭 등의 승직이 왜 다시 성격이 변하여 등장했을까?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승군을 통솔할 승직이 필요하지만 僧科와 禪敎兩宗의 부활을 통한 공식적 승직을 부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經國大典』에 실리지 않은 비정규적이고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도총섭·총섭 등의 승직을 부여한 것이다. 본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던 도총섭 등의 승직이 승역의 책임자로 변모하면서 점차 실질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117)

국가 즉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직접적인 승려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승려의 역역 동원 역시 일괄적인 분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승군 혹은 승도를 동원하는 방식은 주로 조선전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17세기 全般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승려 동원 방식은 주로 募集·募入·勸募였다. 궁궐이나 산릉의 대규모 토목공사나 산성 수축과 승군 조발에 모두 이 방식이 사용되었다. 승려를 모집한다는 것은 즉 국가에 일정한 역을 부담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여 승려가 더 이상의 역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증명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전기 승려 동원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방식이었다.118)

그러나 도첩제 자체가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즉 도첩제의 본래 취지인 국가에서 승려에게 정전을 받고 이들을 완전히 국역체계에서 배제시키는 방식은 채택되지 않았다.119) 이는 국가적으로 양정의 손실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도첩제의 부활이 피역을 확산시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도첩은 상황에 따라 국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하여 지급되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도첩을 돈을 받고 발급하여 공명첩처럼 국가재정의 보용책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120)

도첩제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여 전국 승려의 도첩 소지 여부를 조사하여 도첩이 없는 승려에게 木 1~2匹씩을 거두어 軍需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루러지지 않았다.121) 따라서 조선후기의 도첩은 승려의 신분증이라는 사실 외에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며 도첩을 통해 피역을 합법화하지 못했다. 결국 승역의 반대급부로서 도첩발급의 효과는 점차 줄어들게 되어 효종대가 되면 사실상 도첩제가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효종 5년(1654)에는 도첩법이 戶牌五家統의 일, 束伍軍 給保의 일, 用錢의 일과 함께 이미 설치되었으나 행해지지 않는 법으로 지적되고 있으며122) 인조대 이후로는 전혀 지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123)

도첩의 유명무실화는 두 가지 현상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의 승려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승려를 모집하기 위해 피역을 보장해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동시에 국가로서는 승역을 지속시키기 위해 도첩제를 대신하여 승려를 동원하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여야했다.

의승역이 시행되는 전후 시기인 효종대에는 승려 통제와 동원의 방식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발굴된 효종 3년(1652)에 순영에서 발급된 『海南大興寺節目』124)에서는 승려를 高僧類·善僧類·凡僧作罪類·不從衣冠戒類·橫行作弊僧俗類·居士社堂頑悖類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문제가 되는 凡僧作罪類 이하의 승려에 대해서 보고하고 치죄하는 경로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로를 간단하게 도식화하면 아래 <그림 2>와 같다.

 

【그림 3】 『海南大興寺節目』에 나타난 僧侶 犯罪의 보고 경로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海南大興寺節目』에는 명시된 범승작죄류, 부종의관계류, 횡행작폐승속류, 거사완패류의 4종 승려를 치죄하기 위한 승려들은 各寺 首僧과 三寶 등이 일일이 적간하여 본관에 고하여 치죄하고, 또 都摠攝에게 보고하면 즉 上司에 보고하여 경중에 따라 형을 가하도록 하였다.125) 그런데 여기서의 上司는 승군 총섭을 차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비변사로 보인다.126) 이처럼 승려의 관리 및 통제는 지방 관아와 도총섭의 이중 구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승려에 대한 통제가 도총섭 같은 불교계 내부 인물뿐 아니라 지방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던 것처럼 역승의 조발에도 모집과 分定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분정이란 중앙에서 필요한 승군의 수를 각도에 차정하면 각도에서는 이를 다시 군현에 차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모집한 승려를 모아 부역소로 데려가기 위하여 중앙에서 차사원이 파견되기도 하였다.127) 예컨대 인조 23년(1645) 昭顯世子의 園所役에 동원할 승려의 숫자는 도별로 분정되었다.128)

여러 도 중에서도 평안·함경의 두 도는 역승 조발에서 제외되었고,129) 황해도의 경우 양서지방으로 역시 관방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경기의 경우 사대부의 재사와 분암이 많았기 때문에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130) 따라서 주로 삼남지방과 강원도에 많은 역승이 할당되었다.

지역별 분정이 되더라도 국가가 승려의 인신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별·읍별로 승군의 액수를 채우는 방식은 모집이 주를 이루었다.131) 모집의 방식은 일정한 기준 없이 도와 군현이 자체적으로 결정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실제의 조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찰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사찰 수에 의거하여 임의로 각 군현에 분정하였다.132) 모집을 한다 해도 그것이 관의 강제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명망있는 승려들의 도움이 필요했다.133) 이는 아직 각도와 군현이 사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모집되어 역소에 도착한 승려는 정해진 부역일수만큼 부역을 하였다.134) 산성의 수호를 맡은 승려들은 산성 안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평상시에는 각 사찰의 치영을 지키며 훈련을 하고 군량이나 무기, 화약을 관리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승려들이 담당하는 역에는 별도의 役價가 지급되지 않았다. 광해군대에는 일시적으로 부역승들에게 식량과 포를 지급하기도 했지만135) 인조반정 이후에는 승려들이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오는 것(自備糧)이 원칙이 되었다.136)137) 이는 광해군대 풍수가이자 궁궐 영건의 감독 역할을 했던 승려 性智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지만,138) 여민휴식을 위해 피역지배인 승려를 동원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조발한 승려 속에 속인이 섞여 있을 경우 큰 문제가 되어 차사원과 해당 군현의 수령 및 관찰사가 추고되기도 했다.139)

17세기 중반 도총섭 같은 고위 승려가 아니라 중앙-도-군현의 수직적 계통을 통해 승려를 분정하여 동원하는 체제는 17세기 후반에 더욱 강화되었다. 도총섭·총섭 등의 승직이 남발되면서 총섭의 권한은 약화되었다.140) 반면 각 군현의 승려 및 사찰 장악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승역이 강화되면서 사찰의 궁방·아문 투속이 심해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원당사찰을 혁파했던 현종 원년(1660)의 조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종 원년(1660) 영의정 鄭太和(1602~1673), 좌참찬 宋浚吉(1606~1672) 등의 청에 의하여 각 궁방 및 아문에 절수되어 있는 원당사찰을 혁파하게 된다.141) 원당의 혁파 이유는 “본읍에 도로 소속시킴으로써 紙地 등의 役에 이바지 받게”142) 하기 위해서였다. 즉 사찰은 원칙적으로 해당 군현에 소속되어 각종 역을 부담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피하여 다른 곳에 투속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이후에도 계속하여 궁방 및 아문의 원당 절수는 이어졌지만, 현종대의 원당 혁파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사찰이 군현으로 소속되는 원칙이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직접적으로 승역과의 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143) 숙종 원년(1675) 尹鑴(1617~1680)에 의해 제기되어 시행된 승려의 호적 등재 역시 군현의 사찰·승려 통제를 강화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적의 승려 등재율은 일반적인 호적 등재율인 50% 내외 일 것으로 추정된다.144) 그러나 실제 호적 작성 과정에서 군현은 자체적인 가좌책 등을 만들어 실제 호구수를 파악했기 때문에 승려의 호적 등재와 군현의 장악력과는 일정한 길항관계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경상도대구부호적대장』에는 大刹의 分所로 보이는 거주승이 1~2인에 불과한 매우 작은 佛堂까지 파악되어 있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군현이 승려 개개인의 인신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남원과 구례 사이에 있었던 승려 쇄환문제이다. 영조 12년(1736) 남원에서는 구례 화엄사로 도망간 승려 3명의 쇄환을 구례에 요구했는데 오히려 구례에서는 천은사 소속 승려 8명을 쇄환해달라고 남원에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구례에서는 쇄환을 요구한 승려 8명의 친족을 구금하여서 구례와 남원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145) 여기서 군현은 각 사찰의 거주승과 그들의 친족관계까지 파악하고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승려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는 군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승역의 조발 역시 중앙정부-도-군현의 분정을 통해 시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군현의 사찰·승려 장악력이 극대화된 18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중앙정부의 역승 동원은 종식되었고146) 승역의 중심은 공납 및 지방 잡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임진왜란 직후에는 국가의 직접적인 승역 조발보다는 도총섭 등 고위승려를 통한 간접적 조발과 지휘가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의 직접적 조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첩발급을 반대급부로 하는 모집·권모가 주된 승려 조발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도첩제가 유명무실화되고 지방의 승려 장악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정부-도-군현으로 이어지는 분정을 통해 역승을 조발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총섭의 권한이 약해지는 반면 군현의 사찰·승려 장악력은 극대화되어 18세기에는 군현이 승려 개개인의 인신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다음절에서는 역승 조발 방식과 전체적인 궤를 같이하는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의승역의 의승 조발과 그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의승의 조발과 寺刹役으로서의 의승역

임진왜란 기간 동안 休靜(1520~1604), 惟政(1540~1610), 靈圭(?~1592), 處英(?~?) 등 여러 승려는 각 지방에서 의승군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 병자호란 때 역시 각성이 3천명의 항마군을 조직하여 북상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경험에 바탕하여 승려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승군들이 산발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군사력 즉 사병의 존재를 극도로 금지하였던 조선의 특성 상 승군이 정규적인 군사로서 남아있다기보다는 평소에는 일반적인 승려로서 종교적 활동을 하다가 국가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때면 도총섭을 통해 조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승군은 군사적 목적 으로 활용되기 보다는 대부분 요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승군이 비록 비정규적인 군사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으로 활용 가능한 군사력으로 인식되었던 듯, 많은 반역 사건에서 승군의 동원이 논의되기도 하였다.147)

승려가 국가에 의해 정규적인 군사력으로 활용된 것은 앞서 논의했던 인조대 후반에서 효종대 초반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남한산성 의승역의 시행이 시작이다. 의승역의 시행은 앞선 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국가의 승려와 사찰에 대한 장악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남한산성의 의승역이 처음 성립할 당시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초기 의승역의 조발 및 운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 연대기 사료에 보이는 의승 관련 기사들과 영조 26년 반포된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이하 「義僧變通節目」) 및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이하 「義僧番錢摩鍊別單」)을 보면 그 대체적인 내용을 밝혀 낼 수 있다.148)

의승의 지휘 및 관리는 남한산성 내에 있는 팔도도총섭이 담당하고 있었지만 의승의 조발 자체는 중앙정부에서 各道에 정액을 分定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의승은 보장을 담당하는 중요한 군사였기 때문에 매삭마다 정해진 수의 군사력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정액제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료를 보면 17세기 중반 의승역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2-2 김수흥이 말하길 “(남한)산성에 募入하거나 定配한 사람은 모두 불량한 무리이어서 엄하게 하면 원망하여 배반하고 부드럽게 하면 해이해져 방종해지니 다스리기가 최고로 어렵습니다.” 홍명하가 말하길 “보통 사람은 즉 처자가 다 入居하여 생활의 방도가 극히 어려운데, 僧人은 즉 이런 근심이 없으니 금후로 승인과 죄로 정배한 부류를 모두 산성에 보내면 좋을 듯합니다.” 김수흥이 말하길 “승군의 힘은 큽니다. 일곱 사찰은 모두 信地로 성첩이 퇴락하면 즉 信地의 寺僧에게 수축하게 하고, 전쟁에 임하면 즉 모두 信地를 지키므로 승군의 힘이 큽니다. 단지 승군으로 元居者 외에 七道 승군을 輪回入番시키는 것은 모두 고통이 된다고 합니다.” 홍명하가 말하길 “지금 한 논의가 있어 외방의 신역이 있는 승려로 혹 軍保나 혹 寺奴로 승려가 된 자는 모두 산성에 들여보내고 의승은 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상이 말하길 “성내 원거승은 몇이며 일곱 사찰은 모두 대찰인가?” 김수흥이 말하길 “개원사·천주사·장흥사는 대찰이 되고, 국청사·망월사·옥정사·한흥사는 소찰이 되며, 거승은 정해진 수가 없습니다.”149)

 

<사료 2-2>는 남한산성의 의승역이 시작된지 10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 남한산성의 승군 조발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다. 위에서 남한산성의 의승 및 원거승은 7개 사찰에 각각 소속되어 信地를 지키면서 성의 수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윤회입번하는 의승은 각도에 분정이 되고 있었다. 위 사료에서 金壽興(1626~1690)과 洪命夏(1607~1667)는 의승이 폐단이 되고 있음을 들어 의승 전체를 募入하여 원거승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의승의 수는  시대가 갈수록 계속 확대된다.

그렇다면 실제 의승은 어떻게 조발되어 應役하였을까? 아래 사료를 살펴보자.

 

 2-3 김석주가 말하길 ㉠“남한산성의 일곱 사찰은 각기 팔도에 분속되어 있습니다. 선신(김좌명)이 수어사가 되었을 때 한 사찰을 더하여 여덟 사찰이 되었는데 ㉡각도의 의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산성의 절에 입번하게 하였으니 그 역이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호남의 의승은 육번으로 나누어 아무 달에 아무 사찰을 세우며, 1년에 한 사찰에서 입번하는 승려가 항상 백여 명을 내려가지 않았으니, ㉣한결같이 군사가 상번하는 예와 같이 상번하는 의승이 왔습니다. 그 도의 各寺의 재물을 받아 의승의 역에 보냈으니 그 실제는 한 도의 승려가 모두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150)

 

<사료 2-3>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에서 보이듯 각 사찰이 각도에 분속되어있었고, ㉢에서 보이듯 의승의 조발은 일정한 방식이 없이 道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호남의 경우 1년을 6번으로 나누어 2달마다 한 사찰에서 의승을 모두 상번시키고 다른 사찰에서는 재물을 보내 의승을 올려 보내는 밑천으로 쓰게 했는데, 한 사찰에서 백여 명을 올려보냈다고 한다. 영조대 「義僧番錢摩鍊別單」에 나타난 전라도가 남·북한산성에 들여보내는 의승의 원액이 198명이고 그 중 남한산성의 원액이 136명이다. 북한산성의 의승역이 시작되면서 의승의 액수가 조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사료 2-3>의 백여 명은 호남에서 1년에 올려보내는 의승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전라도는 순서대로 한 사찰에 이를 모두 부담시키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의 경우에는 다른 식으로 의승을 조발하고 있었다. 경상도는 각 읍별로 의승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고, 산성의 여부에 따라서 그 액수를 조절하는 식으로 의승을 조발하였다. 중앙정부는 도별 액수만 정한 채 각 읍별 액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151) 일종의 정액제로 의승역을 운영했던 것이다. 18세기에 반포된 「義僧變通節目」과  「義僧番錢摩鍊別單」의 내용을 보면 숙종 13년의 경상도 상황과 마찬가지로 각읍의 액수가 정해져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각읍의 액수까지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숙종 13년의 상황보다 한층 의승 조발에 관한 규정력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과 ㉣에서 알 수 있듯이 의승의 입번은 일반 군사의 상번하는 예와 같았다는 점이다. 부역 승군과 마찬가지로 의승은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여(自備糧) 입번해야 했다. 그리고 ㉣에서 보이듯 일반적인 군사가 입역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입역하고 있었다.

의승은 일년에 2朔의 기간동안 상번하여 산성을 수직해야 했다. 입번하는 비용은 일체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한 사찰에서 부담하여야 했으며, 정해진 입역 기간이 끝나면 다시 소속된 사찰로 돌아갔다. 그리고 군영에서는 가끔씩 의승을 대상으로 시취하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승려는 총섭 등의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152) 이러한 모습은 법전에 규정된 일반적인 군역 부담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었다. 가끔씩 요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점과 승려 간에 代立이 성행하였다는 점까지 양민의 입번 모습과 유사하다. 국역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다른 한편의 役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그동안 국역체제 바깥에 존재하였던 승려를 수도와 국왕 방어를 위한 의승역에 동원하면서 입역의 원칙을 국초에 규정된 군역의 그것과 비슷하게 세웠던 것이다. 실제로 승군을 조발하는 책임을 맡았던 군현에서도 승군의 입역 모습을 正軍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153) 본래 공민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던 승려들을 국역체제 안으로 편입하면서 16세기 이후 이미 해체되고 있었던 국역체제의 모습을 승역에서 재현하려고 한 것이었다. 중앙정부에서 승역을 승도의 身役이라고 불렀던 것 또한 의승역이 국역체제의 재현임을 보여주고 있다.154)

17세기 승려의 호적등재와 승역의 안정적인 정역화가 양역의 변통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승역이 일반적인 국가의 양역 정책과는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양역변통의 핵심은 바로 역총의 감수정액화이다.155) 그런데 의승방번역만은 이러한 흐름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역이정청이 설치되고 각종 양역변통론이 제출되었던 숙종 재위 후반에 오히려 의승방번역의 총액은 400여 명에서 700명으로 확대되었다.156) 숙종 40년 북한산성에 추가로 의승을 입번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의승역의 변화 양상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16세기에 이미 군역의 방군수포가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승역은 반드시 승려가 직접 입역해야 했으며 대립은 금지되었다.157) 의승역의 전납을 허용한 의승방번전제는 良役을 釐正한 均役法이 시행된 이후인 영조 32년(1756)에야 비로소 군포의 예와 같이 전납이 허용되었다.158) 均役法과 같이 역가가 반감되고 그 급대사목이 마련된 것은 의승방번제가 시행되고도 26년이 더 지난 정조 6년(1782)이었다.159) 이렇듯 다른 양역 이정과는 달리 의승역의 변통 작업이 더디게 진행된 것 또한 의승역을 과거 국역체제의 질서대로 운영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조선왕조가 국역체제 하에서의 군역과 동일한 모습으로 승려들을 입번시켰음에도 그 조발 단위는 군역과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의승역은 산릉·영건 등 과외별역에 일시적으로 동원되는 승역이 아니라 전국의 승려에게 일괄적으로 부과되는 정규적·정기적인 역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승려를 조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결국 사찰을 부과 단위로 한다는 점에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승 조발의 최종 단위는 사찰이었다. 아래 사료 <2-4>를 보면 의승의 최종 조발 단위가 사찰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4 호남 이정사 李成中이 복명하고 書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 ... 異端은 우리 儒家에서 매우 배척하는 것입니다마는, 우리나라의 僧徒는 그렇지 않아서 身役에 응하는 평민이나 編伍의 군졸에 지나지 않으니, 그 愛護하는 것도 평민이나 군졸과 같아야 할 것인데, 南漢의 義僧이 上番하는 것은 승도의 괴로운 폐단입니다. 본도는 큰 절이면 너댓 명이고 작은 절도 한두 명인데, 한 명을 資裝하여 보내는 데에 거의 1백 金이 들므로 한 절에서 해마다 4, 5백 金의 비용을 책임지니, 저 草衣木食하는 무리가 어찌 바랑을 메고 떠나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한의 守臣은 팔도의 의승이 상번하는 것은 保障하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마는, 兩廳의 軍官, 卒隷도 다 각 고을의 시골에서 사는 자에게는 쌀·베를 거두고 성안에 사는 자를 대신 세우니, 어찌 의승에게만 이 예를 쓸 수 없겠습니까? 이제부터 定式하여 의승은 상번하지 말고 매명마다 돈 16냥을 代送되 義僧防番錢이라 이름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軍布의 규례와 마찬가지로 거두어 모으게 하면, 승도의 큰 폐해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160)

 

군현에서 각 사찰에 상번시킬 의승의 수를 정해주면 사찰에서는 의승의 상번 비용을 마련하여 승려를 입번시켜야 했다. 사찰의 사세에 따라서 책정되는 의승의 수는 달랐다. 왕실과 아문의 원당, 능원 수호사찰의 승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승려들은 일부는 해당 朔의 의승이 되어 상번하고, 같은 사찰의 다른 일부는 일종의 軍保처럼 의승의 상번비용을 보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 사료에서 보이듯이 의승 상번을 위해 사찰과 승려가 부담해야 할 경제적 부담은 대단히 컸다.

의승역에 드는 비용을 구체적으로 산출해내기는 어렵지만 18세기의 의승방번전을 참고하면 대략적인 부담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영조 32년(1756) 남북한산성의 의승방번제를 폐지하고 입번을 대전으로 대납케하는 의승방번전제가 시행되었을 때, 정해진 代錢은 의승 1명에 錢 10~22냥이었다.161) 그러나 10냥을 부담하는 경기지방의 의승은 20명에 불과했고 호서·해서·강원의 의승은 18냥을, 전체 의승의 약 63%를 차지하는 양남의 의승은 22냥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전세가 결 당 4두, 대동미가 12~16두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큰 부담이었다고 생각된다. 의승방번전제가 성립 할 때 영조가 승려들의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실제 부담의 정도는 「義僧番錢摩鍊別單」의 규정 이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嶺南 의승이 한 차례 상번하는데 드는 비용이 30냥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162)

의승 개인이 이를 부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7세기 이후 승려 개인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기도 했지만,163) 그 규모는 대체적으로 영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찰 소유의 토지가 승려 개인의 이름으로 양안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실제 경자양전을 기준으로 작성된 사양안인 『佛甲寺位施畓等數長廣卜數犯標量時各區別秩』을 살펴보면 영광 불갑사의 垈地 조차도 起主가 승려 개인으로 된 경우를 볼 수 있다.164) 양안상의 기주가 그대로 토지의 소유주가 아님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며 승려 개인 소유의 토지로 등록된 토지라도 실제로는 사찰 소유의 토지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승을 상경 입번시키는 것은 단순히 의승 개인의 역이 아니라 해당 사찰이 온 힘을 기울여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는 큰 역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군현도 결국 의승의 분정을 사찰별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찰의 기본적 경제기반인 사위전이 사찰 자체의 소유로 등록되어 공동 노동형태인 울력을 통해 경영되었다.165) 이 공동노동을 통해 승려의 국역부담을 보조했기 때문에 의승역은 자연히 사찰 공동부담의 역이 되었다.166)

사찰은 승려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戶이다. 의승역은 군역이지만 개개인의 인신에 군역 부담자인 호수와 호수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보인의 역을 지우는 군역·양역과는 역 부과단위를 다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승역은 무상으로 상번하여 군사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군역과 유사하지만 실제 역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숙종 원년(1675) 윤휴가 승려를 호적에 등재시키고자 한 것도, 이들을 작대하여 군역을 부과하기 위한 것이었다.167) 의승역이 시행되고 있었음에도 다시 승려를 작대하고자 한 것은 의승역의 조발 원칙이 군역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는 의승역은 戶役일까? 사찰이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自然戶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의승역을 비롯하여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는 승역을 호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戶役은 八結을 기준으로 作夫하여 공동으로 役을 부담하도록 하는데 승역에는 이러한 팔결작부의 원칙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국가에서 사찰을 하나의 戶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호적자료를 보면 한 사찰에는 사승관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호가 기재되어 있다. 『慶尙道大邱府戶籍臺帳』의 1681년 호적에는 많게는 62개(桐華寺)에서 적게는 2개(見佛庵)의 戶가 확인되며, 『慶尙道丹城縣戶籍臺帳』에도 율곡사와 용흥사에 각각 37개, 26개호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사찰과 국가에서 파악하는 戶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승역은 호역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의승역은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되 군역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특수한 형태의 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특수한 형태를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여 공동부담한다는 의미에서 사찰역이라고 칭하여도 좋다고 생각한다.168)

의승역이 사찰을 부과 단위로 하는 사찰역이라 한다면 지방 산성의 승군역이나 기타 공납의 역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아래의 사료에서 한 사찰이 부담하고 있는 여러 역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2-6 상고하실 일입니다. 本城을 重修하는 초에 義僧 40명을 定額으로 各邑에 분배하였는데 中年에 10명을 감하여 남아 있는 30명은 매 삭에 3명씩 輪回入番 하는데, 연전에 僧統이169)  

 

남원현에서 전라감영으로 보낸 이 첩보는 주로 남원의 사찰들이 부담해야 하는 산성의 승군역을 감면해 줄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비록 18세기 초의 자료이지만 의승방번전제가 시행되기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지방 사찰의 승역 부담을 살펴보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사료 안에서 ‘의승’이라고 나오는 역이다. 여기서의 의승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남·북한산성의 의승이 아니고 지방의 산성에 입번하는 승려들이다. 다른 기록에는 전라도에 의승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 ‘의승’은 ‘모입’한 승려와는 구분되는 ‘윤회입번’하는 승려임을 보아 ‘윤회입번’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전라도에서 자체적으로 의승이라고 명호를 부여한 듯하다.

이 사료에서 주목되는 점은 여러 가지 역이 모두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 사찰은 남·북한산성의 의승역을 지는 것과 동시에, 지방 산성의 승군(의승)의 역도 부담하여야 했고 또한 염장, 채소, 버섯, 미역 같은 각종 물종들을 관아에 공급해야 했다. 이러한 중첩되는 역이 모두 사찰을 단위로 하여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승역은 기본적으로 사찰을 부과단위로 하는 사찰역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요컨대 승려에게 군사적 역할을 본격적으로 부과한 의승역은 중앙정부-도-군현-사찰로 이어지는 분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체계를 통해서 국가는 정기적이고 정규적으로 승려를 의승으로 조발하였다. 그런데 의승역은 승려에게 일반 양인의 군역과 똑같은 형태의 입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승려를 국역체제로 편입시키면서 이미 16세기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국역과 같은 형태의 上番立役을 승려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의승역이 곧 군역은 아니었다. 의승역은 丁役도 戶役도 아니라 사찰을 부과 단위로 하는 사찰역이었다. 사찰의 승려들은 의승역뿐만 아니라 산성의 승군역, 그리고 각종 공납의 역을 공동으로 부담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승려에 대한 통제력이 확대되어 승려들에게 도첩제와 같이 避役을 담보로 하지 않는 정규적인 역을 부과할 수 있게 된 의승역은 승려들을 사찰역의 형태로 국역체계 안에 흡수함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전통적 의미에서 국역체계는 국가가 공민에게 국역 부담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들에게 사환권과 같은 반대급부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이후 국역체계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기는 했지만, 역에 따른 반대급부가 주어진다는 의미한다는 사실이 완전히 망각된 것은 아니었다. 다음 3장에서는 승역의 확대에 따른 반대급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3. 승역 확대와 승려의 위상 변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승려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변화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었다.170) 17세기 중반 이후 국가의 승려 인식은 여전히 이단을 신봉하는 자, 피역의 무리라는 인식을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점차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승려 역시 백성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승려의 재생산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을 보장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 변화의 기저에는 역시 국역의 일부로 편입된 승역이 있었다.

승역의 확대에 따라 승려의 역 부담이 늘어나자 승려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변화하였다. 이전까지 避役民, 非農之民으로만 지목되던 승려에 대하여 단순히 우호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백성이라는 언급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171) 특히 유교정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연 자리에서 경연관들의 승려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3-1 (시독관) 이희무가 아뢰기를 “사원가 僧尼는 폐가 되기 때문에 폐하고 금한 것입니다.” 이희무가 아뢰길 “장미는 굽히는 것으로 供副를 삼았지만 (周)세종은 공과 충으로써 그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된 자는 마땅히 뜻을 굽혀 承順해서는 않됩니다.” ... 이희무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승려는 役이 있고 중원의 승려는 役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중원의 승려 많은 것과 같지 않습니다.” 상이 말하길 “승도는 모두 군역을 피하는 자이다.”172)

 

 3-2 참찬관 권지가 아뢰기를 “외방 각 營門에 소속된 폐단은 다만 둔전의 설치, 염분, 어전뿐만 아닙니다. 호남·영남 같은 데는 종이가 사찰에서 생산되는데 이 사찰 중들을 各營에 分屬시킨 자도 있습니다. 분속시킨 사유를 물어 보니 이들은 진상할 箋文을 油芚으로 싸는데 소중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실제 타도에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營門에서 대략 그 값을 주지만 징수하는 바는 倍蓰뿐 아니며 營屬 무리들이 문서를 빙자하여 억지로 빼앗아 감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관에서는 누구인지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僧徒들이 지탱하지 못합니다. 옛 巨刹이 오늘날 무성한 풀로 변하였고 승도가 부역을 도피하는 것은 나쁜 짓인 듯합니만 義僧의 番上, 僧軍의 調發, 紙地의 添納에 이르러서는 또한 비로소 국가를 위한 부역이 아님이 없습니다. 요즘 사찰을 혁파하고 승도를 조발하는 것은 다 이러한 데 있으니 조정에서도 마땅히 긍념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만약 각 영에 분속하는 규정을 혁파하여 본관에 전속시켜 국가의 부역에 제공하게 되면 이것도 또한 혁파하는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를 감히 아룁니다.”173)

 

<사료 3-1>과 <사료 3-2>는 모두 경연의 자리에서 나온 경연관의 발언이다. 공통되는 점은 승려가 모두 역을 지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료 3-1>에서 시독관 이희무는 『資治通鑑綱目』을 강하는 과정 중에 불교로 인한 중국의 폐정을 논하고 있지만 조선의 경우는 중국과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조선의 승려들은 모두 국가의 역을 지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중국의 승려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불교의 폐해를 논할 때 梁武帝의 崇佛 같은 중국의 고사를 논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인식이다.

<사료 3-2>에서 참찬관 권지 역시 義僧·僧軍·紙納이 모두 국가의 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원당의 혁파를 주장하고 있다. 승려가 부담하고 있는 역이 모두 국가를 위한 부역이기 때문에 궁방이나 아문이 私的으로 점유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승역의 확대와 정역화 이후 승려는 경연을 준비하는 유신들로부터도 역을 담당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국왕의 의례적 恩典의 대상에 승려가 포함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174) 이러한 인식에서 승려의 재생산을 일정 부분 보장해주는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17세기 승려 및 사찰의 경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토지였다. 본래 불교는 緣化 즉 시주를 통해서 경제적 수입을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며, 실제로 시주가 사찰 운영의 중요한 경제적 바탕이 되었지만, 토지를 통한 수입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안정적인 사찰 운영을 위해서는 사위전의 확보가 중요한 문제였다. 15세기 주요 사찰의 일부 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토지가 몰수되어 속공되었지만, 이후로도 사찰로의 토지 시납은 계속되어 사찰의 토지 소유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17세기부터는 승려와 속인이 참여하는 각종 契가 활발해지면서 契를 통해 비용을 조성해 토지를 시납하는 일이 잦아졌다.175)

사찰 토지소유의 증가와 함께 승려 개인의 토지 소유 역시 증가하였다. 16세기까지 승려의 토지는 寺田으로 취급되어 사찰의 공동소유물이 되었지만 적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사전과  별개인 승려 소유 토지가 등장하였다.176) 숙종 원년(1675) 승려의 호적등재가 이루어졌을 때 등재 대상이 된 승려들은 바로 토지를 소유한 승려들이었다.177) 승려의 토지 소유가 이루어지며 문제가 된 것은 바로 토지의 상속 문제였다. 승려가 避役民이며 非農之民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던 상황에서 승려의 토지 상속이 일반적인 상속과 같이 처리될 수는 없었다. 아래 사료는 『新補受敎輯錄』에 실려 있는 효종 8년(1657)의 승려의 토지 상속 규정이다.  

 

3-3 전답을 소유한 승려가 사망한 후에 전토는 諸族屬에게 귀속시키고 雜物은 諸弟子에게 전승된다.178)

 

<사료 3-3>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승려가 死後에 자신과 師承關係에 있는 上佐에게 토지를 상속하거나 사찰로 토지가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즉 혈연적인 계통만을 인정하여 가장 중요한 재산인 토지가 승려에게 상속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여기서의 잡물은 衣鉢과 같은 승려의 가장 기본적인 소지품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데, 의발을 전수하는 불교계의 전통은 인정하되 이를 넘어서는 영역에서는 불교계 내부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지가 승려에게 상속되는 것을 막은 것은 기본적으로 승려가 증가하는 것을 막는 한편 승려는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非農之民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승려는 아직 『경국대전』에서 허락된 토지의 상속을 인정받지 못한 非公民이었다.

그렇데 같은 책의 현종 15년(1674)에는 승려의 토지 상속과 관련되어 수정된 令이 실려 있다.

 

3-4 僧人田畓은 사촌 이상의 친족이 있으면 上佐와 더불어 절반을 분급하고 상좌도 없고, 사촌인 자도 없으면 屬公하되 그 전답을 本寺에 仍給하여 승역을 돕는다.179)

 

<사료 3-4>의 내용을 보면 비로소 승려가 자신의 상좌에서 토지를 상속할 수 있도록 법령이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다. 국가는 속가의 혈족들과 佛家의 제자들의 권리를 똑같이 인정함으로서 불교 내부의 질서를 인정해주었다. 국가에서 인정한 혈연관계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의 사승관계도 제도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승려는 토지를 상속하거나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승려의 토지 상속 규정이 바뀐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역시 승역의 확대가 그 원인일 것이다. <사료 3-4>의 친척과 제자가 모두 없을 경우 토지를 속공하여 사찰에 분급해 승역을 돕기 위한 자금으로 삼도록 한다는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승려의 토지 상속은 승역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승려가 부담해야 하는 각종 역이 늘어나면서 승려의 경제적 재생산을 보장해주어야 했고,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토지를 불교계 내부에 계속 두어서 승역을 감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결국 승역의 확대는 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추동해 내어 승려를 이전의 非公民의 영역에서 조금 이동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승려가 역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급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僧帖·空名僧帖이다. 승첩은 기재된 직위에 따라서 嘉善帖이나 通政帖으로도 불리고 있었다.180) 임진왜란 도중이나 직후에도 승려에게 공명첩을 수여하는 경우가 있었다.181) 그러나 이는 대부분 공을 세운 고위 승려 개인에게 발급된 것이었으며, 도총섭 등의 승직을 제수할 때 그에 걸맞는 당상관의 품계를 제수하는 성격이 강했다.182) 그리고 일반 승려들에게는 과거 승과 급제의 증명서로 발급되었던 登戒帖이나 선과의 승직첩이 주어졌다.183)  

17세기 승려를 모집하여 부역을 시키거나 산성의 승군으로 수직시키는 일이 늘어나면서 모집의 대가로 도첩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모집의 대가로 승려에게 주어지던 도첩은 현종 연간까지 지속적으로 발급되었지만 사실상 일시적 부역을 대가로 면역을 보장하는 도첩의 본래 효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당대에 이미 폐지된 법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184) 도첩이 효력을 잃게 되면서 승려를 모집할 때 그 반대급부로 지급할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는데 그것이 바로 승첩이었다. 승첩은 효종대에 등장하여 17세기 후반 특히 숙종대에 집중적으로 발급되었다.

 

3-5 (병조판서) 김석주가 아뢰기를 “남한산성의 남단사는 다 기울어지고 무너졌는데, 지금 장차 개수하려 하지만 이미 오로지 승려 무리에게만 맡길 수 없게 되었으며 본청의 物役으로는 또한 도울 수 없습니다. 또한 각처의 건물을 수선하는 일은 계속되어 그만둘 수 없는데 지난 해 조정에서 성급한 승·속의 통정첩은 지금 또한 이미 다했습니다. 이 첩문 수 백장을 다시 해조로 하여금 성급하게 하여 재료와 힘을 수합하게 하는 방법이 어떻습니까?” (영의정) 허적이 말하길 “賣爵은 비록 폐가 있지만 일이 부득이 하므로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속 통정첩 각 200장을 특별히 성급하도록 하심이 마땅합니다.”185)

 

승첩은 일반 공명첩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발급되었다. <사료 3-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승첩의 발급은 주로 국가의 재정을 보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명첩과는 달리 각종 공사에 부역하거나 산성에 거처할 승려를 모집하는 데에 활용되기도 하였다.186) 더 이상 승과의 승직에 해당하는 직첩은 발급되지 않았다. 대신 일반적인 공명첩과 마찬가지로 당상관인 通政大夫와 嘉善大夫의 직첩이 가장 많이 발급되었고 折衛將軍의 직첩도 있었다.  

국역체제에서 벗어나 사환권이 박탈된 승려가 명목상으로나마 당상의 품계를 지니게 되는 일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승려가 국역체제 안으로 편입되고 나서 <사료 3-5>에서 보이듯 승·속의 공명첩이 함께 발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역체제가 붕괴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사환권이 주어지던 것 역시 의미를 잃게 되었지만 17세기까지 아직 관념적으로나마 사환권이 국역의 반대급부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승첩의 발급은 이러한 의식 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승첩은 국역체제 붕괴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 국역체제의 유제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숙종대 이후 가선 혹은 통정의 품계를 지닌 승려들이 늘어나는 것이 여러 사료에서 발견된다.187)  

모집을 통한 승려의 역역 동원이 점차 줄어들면서 숙종대 후반으로 갈수록 주로 진휼이나 환자의 마련 같은 목적의 승첩 발급이 승려 모집을 위한 경우를 능가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공명첩이 그러했듯이 승첩 역시 자발적인 구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를 분정받은 아문이나 지방 각관의 강제적인 매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첩의 경우는 일반적인 공명첩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향촌사회에서 공명첩으로 얻은 품계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면, 승첩으로 품계를 얻은 승려는 불교계 내부에서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17세기 중반 이후 국가는 승역의 대가로 승려가 품계를 지닐 수 있도록 인정하였고 승려들은 품계라는 국가의 인정을 불교계 내부의 질서에 투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호적의 승려 직역조를 보면 당시 국가의 승려 파악 현황을 보다 정치하게 알 수 있다.188) 숙종 원년(1675) 승려의 호적 등재가 결정된 직후부터 실제 호적에 승려가 등장한다. 호적에 실린 승려의 이름 앞에는 일반적인 호적 기재 방식과 마찬가지로 良人僧, 寺奴僧, 驛吏僧 등 다양한 직역이 기재되었다. 이러한 직역 구분의 기준은 출가 이전의 신분이라고 생각된다. 함께 기재되어있는 2조 내지 4조의 직역과 승려의 직역이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승려는 그 자체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국가에서 양천을 파악하여 역을 부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려의 직역을 파악했던 것이다. 즉 승려는 그 자체로는 독립된 직역이나 신분이 아니었으며 출가 전의 신분이 출가 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정한 직역으로 호적에 등재되던 무당과는 다른 모습으로189) 승려가 일반적으로 말해지듯이 八班賤役으로 신분이 고정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190)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승첩 발급이 활발해진 18세기부터 승려 職役條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191) 현재 남아있는 호적 자료 중에 17세기의 승적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678년의 『慶尙道丹城縣戶籍臺帳』(이하  『丹城戶籍』)과 1681년의  『慶尙道大邱府戶籍臺帳』(이하 『大邱戶籍』)이다. 이 두 호적의 17세기 승려 직역조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良人僧이며 그 밖에 寺奴僧·驛(吏)僧·私奴僧·宮奴僧·木手僧·無職僧 등 대부분 출가 전의 직역으로 짐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18세기 초의 호적에는 이렇게 출가 전의 직역이 대폭 줄어든다. 전반적으로 良人僧 혹은 僧으로 표기되는 승려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직역들이 대거 등장한다. 즉 嘉善大夫·通政大夫·納嘉善大夫·納通政大夫·折衛 등이 그것이다. 반면 寺奴僧·驛(吏)僧·私奴僧·宮奴僧 등의 직역은 18세기 초반부터 매우 줄어들어 18세기 중반으로 가면 아예 사라지게 된다.

이렇듯 승려가 품계를 지니고 그것이 국가의 공식 문서에 기재되면서 일정한 효력을 지니는 경향은 17세기 중반 이후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면 출가 전의 신분·직역보다는 출가 이후 국가와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모습이 호적자료를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17세기 이후 확대된 승역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승려의 품계 수여에는 승역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2)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승려가 완벽하게 일반적인 공민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료 3-3>에 나오는 숙종의 발언에서 보이듯 승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했다. 비록 국역을 지게 되었지만 이단을 신봉하는 무리라는 점에서 유교국가인 조선의 완벽한 공민이 되기엔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사료 3-2>에 보이듯 토지 상속에 있어서도 그 상좌의 권리가 절반만 인정되었던 것은 공민과 비공민의 가운데 있었던 승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승려가 완전히 국가의 공민으로 인정되고 그에 합당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갑오개혁과 광무호적의 작성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즉 17세기에 이르러 승려는 국역체제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公民의 영역에 완벽히 들어오지는 못했던 것이다. 조선후기 국가가 파악하는 승려의 위치는 굳이 표현하자면 半公民의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승려의 위상은 전반적으로 상승되었다. 유신들은 승려를 국가를 위해 부역하는 이들로 인식하고 이들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 및 제도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용된 가운데 국가에서는 불교계 내부의 질서를 일부 인정하여 상좌에게 토지의 절반을 상속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승려가 국역체제로 편입되면서 그들 역시 품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승역의 반대급부 중 하나로 승려에게 품계를 수여하는 승첩이 지급되었다. 승첩을 통해 받은 품계는 호적에서 보이듯이 국가에서 공인된 것이고, 국가의 공인은 불교계 내부 질서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17세기 이래로 확대된 승역이 있었다. 승역을 통해 승려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公民의 위상을 일부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結論

이상에서의 논의를 정리하여 결론을 갈음하고자 한다. 승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급증한 재정부담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부과되던 산릉역이나 영건역 같은 대규모 과외별역은 승려 동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호란 이후 급중한 세폐·방물지의 부담도 승역으로 부과되었다. 때문에 조선전기의 승역과는 달리 조선후기의 승역은 대대적이고 본격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승려의 군사적 활용은 임진왜란의 의승병을 계기로 시작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 의승역은 효종대 북벌의 추진과 조응하여 수도와 국왕을 방어하는 保障을 목적으로 새롭게 부과된 역이었다. 의승은 募入을 위주로 하는 지방 산성의 승군과는 달리 양계지방을 제외한 六道의 승려들에게 동일하게 부과되었고 윤회입번하도록 규정되었다. 의승역은 승역이 과외별역을 부담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정역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 승역의 조발과 운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7세기 초반에는 국가의 직접적인 승역 조발보다는 도총섭 등 고위승려를 통한 간접적 조발과 지휘가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의 직접적 조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첩발급을 반대급부로 하는 모집·권모가 승려 조발의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도첩제가 유명무실화되고 지방의 승려 장악력이 강화되면서 중앙정부-도-군현으로 이어지는 분정을 통해 역승을 조발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총섭의 권한이 약해지는 반면 군현의 사찰·승려 장악력은 극대화되어 18세기에는 군현이 승려 개개인의 인신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승려에게 군사적 역할을 본격적으로 부과한 의승역은 중앙정부-도-군현-사찰로 이어지는 분정체계가 대체적으로 완성된 시기에 성립되었다. 이 체계를 통해서 국가는 정기적이고 정규적으로 승려를 의승으로 조발하였다. 그런데 의승역은 승려에게 일반 양인의 군역과 똑같은 형태의 입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승려를 국역체제로 편입시키면서 이미 16세기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국역의 부담을 승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승역이 곧 군역은 아니었다. 의승역은 丁役도 戶役도 아니라 사찰을 부과 단위로 하는 사찰역이었다. 사찰의 승려들은 의승역뿐만 아니라 산성의 승군역, 그리고 각종 공납의 역을 공동으로 부담하였던 것이다.

승역의 확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승려의 위상은 전반적으로 상승되었다. 유신들은 승려를 국가를 위해 부역하는 이들로 인식하고 이들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 및 제도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용된 가운데 국가에서는 불교계 내부의 질서를 일부 인정하여 상좌에게 토지의 절반을 상속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승려가 국역체제로 편입되면서 그들 역시 품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승역의 반대급부 중 하나로 승려에게 품계를 수여하는 승첩이 지급되었다. 승첩을 통해 받은 품계는 호적에서 보이듯이 국가에서 공인된 것이고, 국가의 공인은 불교계 내부 질서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승역을 통해 승려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公民의 위상을 일부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역역과 함께 승역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공납의 역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거의 다루지 못하였다. 승려가 담당하는 공납의 역은 시대가 내려갈수록 강화되었다. 중앙정부 및 각 궁방에 바쳐야 하는 진상·공물뿐 아니라 지방각관에서 소요되는 관수 역시 승려가 담당해야 할 역 중 일부였다. 役의 성격으로 보면 공납의 역은 승군 및 의승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찰 내부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역을 종합적으로 부담해야했기 때문에 실상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추후에는 사찰 내부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역을 부담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 연구의 목표 중 하나이다.

중앙정부의 승역 동원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영조 18년(1742)의 역 동원을 마지막으로 승려를 산릉·영건의 역사에 부역케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의승방번전제가 시행되면서 지방의 승려가 상번하는 일은 종식되었다. 대신 여러 지방사자료에서 확인되듯이 지방의 군현과 향촌사회, 그리고 사찰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사찰은 지방의 각종 雜役을 담당하기도 하고 아예 전체가 계방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영조대의 『伽藍考』와 정조대의 『梵宇考』 같은 사찰의 현황을 전국적으로 파악한 자료의 편찬은 의승방번전제의 실시 및 의승방번전 반감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고 또한 18세기 국가 주도로 편찬된 수많은 통계자료의 연관성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동시에 승역의 중심이 주로 지방 잡역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의승역의 전납화가 이루어지고 이어 의승방번전의 반감과 그 급대사목이 마련되는 것 또한 그 연관성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과제는 추후의 연구를 기약하겠다.

1) 朱熹, 「大學章句序」, 『大學章句』
   異端虛無寂滅之敎 其高過於大學而無實

2) 세종대의 사사전, 사사노비 속공에 대해서는 김갑주, 2007, 「조선전기 사원경제의 동향」,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 경인문화사 참조.

3) 『經國大典』 卷3, 禮典 度僧
   爲僧者三朔內告禪宗或敎宗試誦經(心經金剛經薩怛陀)報本曺(私賤則從本主情願)啓聞受丁錢(正布二十匹)給度牒(過三朔者族親隣近告官還俗當差知而不告者幷罪)

4) 불교가 동북아시아에 전래된 이래로 불교와 국가 간의 투쟁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승려의 지나친 증가로 인한 국가의 일시적인 제어 역시 존재했다. (二葉憲香 編, 『國家と佛敎』, 永田文昌堂, 1979; 二葉憲香 編, 『續 國家と佛敎: 近世·近代編』, 永田文昌堂, 1981;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대한불교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編, 『불교와 국가권력, 갈등과 상생』, 조계종, 2010) 그러나 조선과 같이 장기적으로 정규적인 승려의 역 동원이 이루어진 예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다.

5) 차상찬, 1947, 「조선승병제도」, 『朝鮮史外史』, 명성사; 우정상, 1959, 「이조불교의 호국사상에 관하여 - 특히 의승군을 중심으로」, 『백성수박사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조명기, 1981, 「조선후기 불교」, 『한국사론』4, 국사편찬위원회 ; 박용숙, 1981, 「조선조 후기의 승역에 관한 고찰」, 『부산대학교 논문집』31; 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 : 고중세편』, 2004, 조계종출판사,

6) 여은경, 1987a, 「조선후기의 대사찰의 총섭」, 『교남사학』3; 여은경, 1987b, 「조선후기 산성의 의군총섭」, 『대구사학』32; 손성필, 2013, 『16·17세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동향』,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7) 정광호, 1974, 「조선후기 사원 잡역고」; 박용숙, 1981, 앞의 논문; 여은경, 1983, 「조선후기 사원침탈과 승계」,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조계종 교육원, 2004, 앞의 책.

8) 김갑주 1978, 「임란이후 승려의 산업활동에 대한 일고」, 『동국대대학원연구논총』8; 한상길, 2006,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경인문화사

9) 윤용출, 1984, 「조선후기의 부역승군」, 『부산대학교 인문논총』26; 윤용출, 1989, 「18세기 초 동래부의 축성역과 부역노동」, 『한국문화연구』2; 윤용출, 2007,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지역과 역사』21; 윤용출, 2009,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73; 윤용출, 2011,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부역노동」, 『지역과 역사』28

10) 우정상, 1959, 「이조불교의 호국사상에 관하여 - 특히 의승군을 중심으로」, 『백성수박사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 우정상, 1963,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에 대하여」, 『불교학보』1 ; 김갑주, 1984, 「정조대 남북한산성 의성방번전의 반감」, 『素軒南都永博士華甲記念 史學論叢』, 태학사; 김갑주, 1989, 「조선후기의 승군연구」 『龍巖車文燮華甲記念 조선시대사연구』, 신서원; 정찬훈, 「南韓山城 義僧軍制의 成立과 運營」,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1) 김갑주는 남한산성이 축성되는 인조 2년을 의승제도 성립의 시점으로 보고 있으나 정찬훈은 수어청이 성립되는 인조 17년을 그 시점으로 보고 있다.

12) 이광린, 1962, 「이조후반기의 사찰제지업」, 『역사학보』17; 박용숙, 1981, 앞의 논문 ; 하종목, 1984, 「조선후기의 사찰제지업과 그 생산품의 유통과정」,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3) 송찬식, 1974, 「三南方物紙契貢考(상)·(하)」, 『진단학보』37·38; 김삼기, 2003,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4) 사문경, 2001, 「세종대 선교양종도회소의 설치와 운영의 성격」, 『조선시대사학보』17; 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 : 고중세편』, 2004, 조계종출판사

15) 김성우, 2001, 앞의 책.

16) 『高麗史』

17) 국역이 고역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승려는 국역체제에서 배제시킨다는 국가의 원칙이 역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세조와 같은 호불지주는 역역을 통해 수 만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했으며, 명종대 문정왕후 역시 이와 비슷한 방법을 통해 승려의 출가를 사실상 도와주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도첩을 발급 혹은 매매하면서 승려의 출가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받아내려 한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당말기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도 널리 목격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승려 중국의 도첩 제도에 대해서는 道端良秀, 1983, 「宋代度帖考」, 『中國佛敎社會經濟史の硏究』, 平樂寺書店 참조.

18) 한우근, 1991, 「문종-세조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한국사학』12.

19) 한우근, 1993, 「예·성종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20) 『선조실록』 권128, 33년 8월 26일 병신

21) 『인조실록』 권1, 원년 4월 24일 갑신

22) 이정철, ; 배우성

23) 『仁祖實錄』 권2, 원년 7월 12일 경자
    便於民 則必不利於國 利於國 則必不便於民 何得兩利乎

24) 『仁祖實錄』 권22, 8년 4월 11일 경신

25) 『宣祖實錄』 권42, 26년 9월 11일 기미  

26) 『仁祖實錄』 권22, 18년 4월 4일 을묘 
    憲府啓曰 慶尙監司李命雄莅任之後 身當築城之役 所當十分謹愼 以副委寄之意 而措置失宜 刑杖太濫 初用僧軍 而就輿地勝覽所載之寺 勒定名數 僧軍旣盡 繼用烟戶 烟戶旣盡 又用哨軍 哨軍不足 再用田結 前後之色目雖異 民丁之應役 則一號令顚倒 民不堪命 木石之下 殞命甚多 若使此人 久當此役 則人和旣失 有城焉用 請李命雄罷職 另擇愷悌之人 善爲料理 以完其役

27) 한명기, 1992, 「17세기 초 銀의 유통과 그 영향」, 『규장각』15; 오항녕, 2012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8) 『仁祖實錄』 권1, 원년 3월 13일 계묘

29) 『仁祖實錄』 권1, 원년 3월 14일 갑진

30) 윤용출, 1998, 「17세기 이후 僧役의 강화와 그 변동」,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31) 『성종실록』 권3, 원년 2월 22일 신미

32) 『태종실록』 권1, 원년 1월 14일 갑술; 『세종실록』 권28, 7년 6월 17일 을묘; 『성종실록』 권3, 원년 2월 14일 계해; 『성종실록』 권3, 원년 2월 22일 신미; 『성종실록』 권13, 2년 11월 11일 기유; 『성종실록』 권57, 6년 7월 4일 신해
    조선전기 경기지역의 요역제에 대해서는 강제훈, 1989, 「15세기 京畿地域의 요역제」,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조.

33) 『重訂南漢誌』 권9, 城史

34) 『仁祖實錄』 권2, 원년 5월 7일 병신

35) 김인규, 2003, 「조선 명종대 성주지역 사찰의 제지활동」, 『전통문화논총』1. 이 밖에 조선전기 사찰에서의 종이 생산에 대해서는 전영준, 2011, 「조선전기 官撰地理志로 본 楮 · 紙産地의 변화와 사찰 製紙」, 『지방사와 지방문화』 참조.

36) 『선조실록』 권113, 32년 5월 26일 계유

37) 『선조실록』 권78, 29년 8월 13일 무신

38) 『통문관지』 권3, 방물수목 세폐 항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물종이 견감되고 있는데 비하여, 대·소호지는 효종 5년(1654) 오히려 각기 원액이 1000권과 1500권에서 2000권과 3000권으로 두 배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9) 홍선이, 2012, 『17~18세기 초 조선의 對淸 歲幣·方物 규모와 조달 방식』,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40) 홍선이, 2012, 앞의 논문, 30쪽.

41) 홍선이, 2012, 앞의 논문, 31쪽.

42) 한정수, 1999, 「조선전기 제지수공업의 생산체제」, 『역사와 현실』33.

43) 송찬식, 1974, 「삼남방물지공고」上·下, 『진단학보』37·38.

44) 『顯宗實錄』 권18, 11년 10월 7일 신묘
執義申命圭 掌令朴贄 持平李宇鼎 …… 又曰 民徭莫重於白綿等紙 而各邑皆責辦於僧寺 僧力有限 不宜偏侵 全羅監營例納之紙 不爲不多 而近來又創新規 一年每捧 大刹八十餘卷 小刹六十餘卷 僧徒逃避 諸刹蕭然 此而不革 害將及民 請令本道監司 亟罷各寺疊捧之弊 上皆從之

45) 『효종실록』 권9, 3년 12월 7일 을사

46) 『顯宗實錄』 권2, 원년 3월 5일 경신

47) 『備邊司謄錄』 21책, 현종 2년 10월 2일 
   戶曹判書鄭致和所啓 前者全南大同磨鍊時 歲幣所用大好紙·小好紙·白綿紙 竝入於大同作米之中 不以本色上納 而貿用於京中矣 京中紙品 不如各官所納 前頭將未免生事之患 極爲可慮矣 右議政元斗杓曰 當初臣等之意 預慮此弊 紙地則欲以本色上納 而大同主管之臣 試貿於京中 到今其弊如此 戶判之言誠然矣 上曰 自明年爲始 紙地則竝以本色上納事 分付可也

48) 김덕진, 1996, 앞의 논문, 123쪽.

49) 물론 상인과 민영수공업자를 통한 貿紙가 계속 확대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승려들도 종이를 파는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김갑주, 2007, 「승려의 산업활동」,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 경인문화사 참조)

50) 내수사 및 궁방에 전문적으로 종이를 진상하는 사찰이 존재했는데 이에 대한 본격적 연구 성과는 아직 없다. 다만 경상남도 고성군 옥천사에는 오랜 기간 동안 내수사에 어람용 색지를 진상했던 것에 대한 각종 고문서가 다수 남아있어 주목할만하다. 이형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석사학위논문 참조.

51) 송찬식

52) 조영준, 2010, 「조선후기 왕실재정의 구조와 규모: 1860년대 1司4宮의 재정수입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 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53) 윤용출, 1998, 앞의 책, 쪽.

54) 김종혁, 2004, 「조선후기의 대로」, 『역사비평』69에서 인용.

55) 의승 및 승군이 배치된 구체적인 양상은 <부표 2>를 참조.

56)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승군의 주둔지를 『동여도』에 표시한 것. 자세한 전거는 <부표 2>를 참조.

57) 김종혁, 2004, 「조선후기의 대로」, 『역사비평』69에서 재인용.

58) 「남북한산성의승방번전마련별단」에는 양계지방의 의승 정액이 제외되어 있다.

59) 『承政院日記』 21책, 인조 6년 5월 18일
    上曰 僧人入城云 果皆死於賊乎 忠信曰 其半出去 其在者 則僧軍皆先死云矣

60) 『인조실록』 권8, 3년 2월 18일 정유; 『承政院日記』 4책, 인조 3년 2월 13일

61) 『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62) 경상도의 경우 각지 산성의 승군이 他道 보다 많았으며, 그 부담이 컸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의승을 줄여달라는 요청도 수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남대동법이 시행될 때 특별히 산성 승군의 급료를 지급하는 방식이 『嶺南大同事目』에 규정되었다. 『嶺南大同事目』에는 경대동이 시행되어 산성 승장에 대한 급료를 會付된 耗穀으로 上下하고 있는데, 가산산성만은 여전히 사대동으로 하고 있으니 다른 산성의 예대로 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보아 대동법 시행 이전까지 경상도 산성 승군의 급료는 사대동으로 지급되었으며, 영남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회부된 모곡으로 지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회부된 모곡이 산성곡의 모곡인지, 다른 곡식인지는 알 수 없다.

63) 예컨대 전주의 위봉산선은 숙종 원년(1675), 동래의 금정산성은 숙종 28년(1702), 문경의 조령산성은 숙종 37년(1711), 남원의 교룡산성은 숙종 38년(1712), 청주의 상당산성은 숙종 39년(1713)에 축성되거나 중축되었다.

64) 『선조실록』 권46, 26년 12월 3일 임자

65) 『인조실록』 권36, 16년 3월 5일 무진; 『비변사등록』 9책, 인조 23년 5월 4일;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2일 계축;  『효종실록』 권14, 6년 1월 3일 무자; 『비변사등록』 21책, 현종 2년 윤7월 3일; 『숙종실록』 권3, 원년 5월 25일 계미; 『숙종실록』 권11, 7년 5월 21일 계유;

66) 『승정원일기』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비변사등록』 41책, 숙종 12년 5월 17일

67) 『증보문헌비고』 권120, 병고 12 주사; 『흥국사공북루중건상량문』

68) 『조선불교통사』, 「사고절목」

69) 의승역이 성립한 후 윤회입번하는 남·북한산성의 의승 외에 의승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경우는 단 한가지로 사고를 지키는 승군의 사무처를 義僧廳이라는 부르는 것이다. 사고의 승군들은 『實錄』과 『璿源錄』 등의 중요한 서책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성격상 남·북한산성의 의승과 마찬가지로 국가 및 국왕과 관련된 것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義僧廳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70) 다만 軍이라는 글자가 烟軍의 軍과 마찬가지로 일꾼의 뜻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71)  우정상, 1959, 앞의 논문; 김갑주, 1989, 앞의 논문.

72) 『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정유. 
 李師命啓曰, 上年秋, 江華留守申晸, 以江華義僧事, 陳達於筵中, 其時領敦寧金壽恒, 以爲當初南漢築城時, 以僧徒赴役, 故仍爲設置七寺, 以諸道僧人, 分定入番, 而今此江都形勢, 與南漢有異, 外方義僧入番之際, 其弊不貲, 姑以京畿屬邑及一行缺 以此意馳報備局, 而群議皆以爲, 南漢義僧, 爲弊已極, 今又設置於江都, 無益守護, 而反有其害云。大臣今方入侍, 更爲定奪分付, 何如? 上曰, 此事, 如何? 南九萬曰, 小臣, 亦見其公事, 而南漢義僧, 雖分定八路, 貽弊猶多, 今此延白及南陽·豐德等, 皆是野邑, 僧徒本小, 以數小僧人, 輪回入番, 必不得力, 而徒爲貽弊之歸, 臣意則決不可爲矣。

73) 김갑주, 1989, 앞의 논문.

74) 『정조실록』 권8, 3년 8월 3일 갑인
  上將展拜寧陵 ... 上曰 仁廟甲子築城時以僧覺性爲名者 爲八道都摠攝 召募八道僧軍赴役 仍命居此城蓋僧軍之制 始於此時大備云 卿等亦聞之乎 命膺曰 果於此時 創設云矣
  『증보문헌비고』 권114, 병고 6에도 비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75) 차문섭, 1976·1979, 「수어청연구」상·하, 『동양학』6·9; 육군군사연구소

76) 『重訂南漢誌』 권4, 營制

77) 『승정원일기』 144책, 효종 8년 1월 9일 임자
 泰淵曰 水原事 小臣到任之後 庶可周旋爲之 而臣曾爲守禦使從事官時見之 則前者義僧之聚集於城內者 爲其南漢之守護 而近來義僧之自鄕聚會之事 不如往日 故將無以守護云 是可慮也外方諸事 以僧爲軍者 其數甚多云 以此充定於義僧 則似爲便當矣 臣欲言此意于守禦使處矣 上曰 義僧事 亦有貽弊者 甚多 卿其往見守禦使 相議爲之 可也

78) 『승정원일기』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계사 
 趾善曰 臣伏聞善山府使趙持恒 疏請以嶺南義僧 移定他道 而廟堂 不許其請 只減善山柒谷兩邑義僧云 臣不得不略辨其不然也南漢義僧分定 在於己巳年 至于今六十年之間 曾無以邑有山城 而有所頉減 雖或有不得已減數之邑 元額則不爲永減 移定於道內他官 自是流來古例 到今豈可以持恒之一言 而有所輕議哉 慶尙全羅兩道 分殘盛元定南漢義僧 而且以各邑僧徒 守直於道內山城 亦如南漢義僧之例 公洪黃海京畿等道 則雖有山城 勿定守直之軍 而南漢義僧 與造紙署擣砧軍 磨鍊分定 當初均役之意 實非偶然 若以有山城而許減義僧 則各道有山城之邑 擧將紛紜爭請 朝家 將何以防塞其路耶

79) 『인조실록』 권28, 17년 1월 10일 무진
    備局啓曰 全羅道僧人照亨之事 論其跡 則漸不可長 罪在必誅 原其情 則感恩慕義 志在赴難 參酌二者而兩存情法 無沮義僧之心 而痛懲後日之弊者 乃臣等區區之見 故不得不有所申稟 而至於用法輕重 惟在睿裁 答曰 減死論罪 且所謂義僧之號 必有後弊 無事時則革其名可也

80) 『인조실록』 권39, 17년 12월 10일 임진

81) 육군군사연구소,

82) 송양섭, 2007, 「효종의 북벌구상과 군비증강책」, 『한국인물사연구』7.

83) 차문섭, 1973, 「효종대의 군비확충」, 『조선시대군제연구』, 단대출판부, 263쪽; 송양섭, 2007 앞의 논문.

84) 차문섭, 1973, 앞의 논문, 291~296쪽

85) 『중정남한지』 권5, 倉庫; 『북한지』 ; 『만기요람』

86) 『중정남한지』 권5, 倉庫

87) 『북한지』 ; 『만기요람』

88)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의 사찰들이 창고, 그 중에서도 무기고와 화약고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각 군영이 철폐되면서 산성 사찰들이 훼철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제는 군영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산성 사찰에 화약을 지나치게 많이 보관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찰들을 그대로 폭파시켜 버렸다. 그 결과 모든 남·북한산성 성내의 사찰은 현재 모두 훼철되어 본 모습을 볼 수 없다.

89) 『여지도서』에서 산성에 사찰이 있으면 승창이 함께 존재하는 경우는 목격할 수 있다.  

90) 『중정남한지』에 나타난 남한산성의 원거승은 138명에 불과하다.

91)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7, 육군본부, 388쪽.

92)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93) 『비변사등록』 67책, 숙종 40년 9월 27일. 이 기사에서 남한산성의 의승 수는 400여 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수는 북한산성에도 의승이 입번하게 됨에 따라 약간 조정되었다. 『중정남한지』와 『북한지』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 40년 이후 남한산성의 의승은 356명, 북한산성의 의승은 350명으로 남한산성의 의승은 40~50 명 정도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경우 원거승 138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감액은 감당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94) 『비변사등록』 67책, 숙종 40년 9월 27일

95) 『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정유.

96) 20세기 초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해운사 자리가 본래 진해사의 터이다.

97) 『승정원일기』 347책, 숙종 18년 1월 28일  

98) 『與地圖書』에는 함경도 각읍의 승려 수가 기록되어 있고, 각 호적자료에서도 승려의 수가 나타나 있지만 이것만으로 승려의 구체적인 수를 추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따른다. 새로운 방법론이 마련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대략적인 추정만 계속될 뿐이다.

99) 조선후기 사찰은 대략 1500여 개소 내외의 개수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與地圖書』에 나타나는 사찰은 폐사된 곳을 제외하고는 총  1537개소이다. (이병희, 1997, 「조선시대 사찰의 수적 추이」,『역사교육』61.) 현전하는 『與地圖書』는 부분적 결책이 있기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에 補遺된 읍지까지 합쳐 계산했을때의 숫자이다. 영조대 편찬된 『伽藍攷』에는 1450여 개의 사찰이 수록되어 있고 정조대에 편찬된 『梵宇攷』 1400여 개의 사찰이 수록되었다. 이능화의 『朝鮮佛敎通史』에는 1478개소의 사찰이 수록되어 있다. 몇 곳의 산내암자가 수록되거나 그렇지 못한 곳이 있어 정확한 개수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략 1500여 개소 내외일 것으로 생각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고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재된 사찰은 총 1658개소인데, 壬辰倭亂 때 삼남지방의 사찰이 거의 전소된 사실을 고려해볼 때 조선 전후기의 사찰 개수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후기 승려의 구체적인 수는 정확히 추산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다. 현종대에는 전국의 승려가 십만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었으며(『숙종실록』 권59, 39년 8월 11일) 영조대의 부호군 李穆은 영남지방 사찰의 수를 고려하여 영남지방에만 십만 명이 넘는 승려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권45, 13년 9월 11일) 그러나 한 사찰에도 많게는 수 백 명에서 적게는 한두명에 이르기까지 머무는 승려의 수가 다르고, 또한 일정한 거처가 없는 승려도 많기 때문에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다만 1500여 개가 넘는 전국 사찰의 수를 고려했을 때 적게는 수 만 명에서 많게는 십만 명 인근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인데, 결코 국가에서 무시할 정도로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100) 김상현, 2002, 「조선불교사 연구의 과제와 전망」, 『불교학보』39.

101) 『경국대전』 권3, 禮典 寺社

102) 『중정남한지』 권9, 城史

103) 『인조실록』, 권34, 15년 1월 7일 정미; 『승정원일기』 55책, 인조 1년 1월 7일

104) 『인조실록』, 권39, 17년 10월 8일 신묘

105) 예컨대 완주 송광사의 불사는 소현세자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해 왕실에서 발원한 것이며, 화엄사의 경우에는 전라도관찰사와 지방관들의 적극적 시주와 지원에 의해 불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06)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107) 『顯宗實錄』 권17, 10년 6월 11일 신사  

108) 『선조실록』 권41, 26년 8월 7일 무자

109) 『조선불교통사』에 나오는 조선초기의 고승 비문을 살펴보면 이미 총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총섭은 군사적 기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여러 승려집단을 신앙적으로 이끌어 가는 명예직으로서의 총섭이다.

110) 여은경, 1987, 앞의 논문.

111) 양은용, 2003, 「임진왜란 이후 불교의승군의 동향: 전주 송광사의 개창비 및 신출 복장기를 중심으로」, 『열린정신 인문학연구』4; 김용태, 2009, 「조선후기 화엄사의 역사와 부휴계 전통」, 『지방사와 지방문화』12-1

112) 현재 확인되는 17세기 도첩 발급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인조 3년 평양성 축성,

113) 『인조실록』 권7, 2년 10월 16일 정유
    上晝講孟子于資政殿 ... 瑬曰 ... 且南漢築城 方爲國中之大役 而僧徒若與官軍 一體立役 則似有其弊 近聞以僧人名爲摠攝 自行號令於諸處 如國家之分付於各道云 豈有國家不能號令於外方 而假手於一摠攝乎 若令道臣 隨其寺刹之大小 僧人之衆寡 定其名數 使差員領送爲便 上曰 此言不無所見 但慮各官之有弊耳 令廟堂及句管之人 更爲商確處之

114) 『인조실록』, 권39, 17년 10월 8일 신묘

115) 『仁祖實錄』 권7, 2년 10월 16일 정유 ; 『仁祖實錄』 권39, 17년 10월 8일 신묘

116) 『선조실록』 권41, 26년 8월 7일 무자

117) 총섭의 권한에 대해서는 여은경 참조. 비록 18세기의 자료기는 하지만 필자가 확인한 『완문』(규장각 청구번호)에는 북한산성의 도총섭이 사찰의 승역을 면하도록 해주는 완문을 발급해주었다는 내용이 있어 도총섭이 불교계 내부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통사』 권하, 에서의 이능화의 지적처럼 지나치게 도총섭 등의 승직이 남발되어 후대에는 그 권한이 약해진 바 있다.

118) 조선전기의 승역에 대해서는 배명애, 2006, 「조선전기의 승려통제책과 승역」, 『역사와 세계』30 참조.

119) 『承政院日記』 217책, 현종 10년 12월 23일 임오

120) 『宣祖實錄』 권83, 29년 12월 8일 경오

121) 『승정원일기』 14책, 인조 4년 7월 20일; 『승정원일기』 14책, 인조 4년 7월 22일

122) 『승정원일기』 131책, 효종 5년 6월 18일

123) 현종 2년에도 역시 도첩제가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등장한다 (현종실록; 승정원일기)

124) 최근 발견된 『海南大興寺節目』(담양 용흥사 소장.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유산아카이브사업단 제공)은 2012년 담양 용흥사의 불서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필사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다량 판출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는 것은 용흥사 소장본 한 건이다. 절첩본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문서의 첫 면이 훼손되어 정확한 문서명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서 안에 이를 절목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으며 말미에 발급자가 巡察使로 되어 있고, 巡察使의 署押이 있다. 순찰사가 관찰사의 例兼職이라는 것을 볼 때 이는 전라감영 절목이 관문 혹은 전령의 형태로 사찰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장 경위를 살펴보면 해당 문서가 본래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 확실시 된다. 조사처에서는 『順治 9年 官府文書』로 가제를 붙였으나 내용으로 보아 감영에서 발급한 절목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海南大興寺節目』으로 명칭하였다. 
    해석은 이종수, 2012, 「용흥사의 역사와 소장 불교전적의 학술적 가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구축(ABC) 사업 학술대회 자료집: 불교기록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33~35쪽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海南大興寺節目』의 원문 전문은 <부록 1>을 참조.

125) 

126) 승군 총섭의 차정 과정에 대해서는 여은경, 1987, 「朝鮮後期 山城의 僧軍總攝」, 『대구사학』28 참조.

127)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 3월 6일  

128) 『仁祖實錄』 권46, 23년 5월 15일 병신

129) 윤용출, 1998, 앞의 책, 쪽.

130) 『承政院日記』 269책, 숙종 5년 3월 28일  
      當初調發僧軍時 黃海道則以兩西之故 不爲徵發 京畿則士夫家墳庵頻多 故亦不調發矣

131) 예컨대 숙종 연간에 이루어졌던 동래부의 금정산성 축성도 동래부사에 의하여 읍별 승군 모집을 통해 역승을 모집해 이루어졌다. (윤용출, 1989, 「18세기 초 東萊府의 築城役과 賦役勞動 」, 『한국문화연구』2.)

132) 『仁祖實錄』 권40, 18년 4월 4일 을묘

133) 『승정원일기』 178책, 현종 4년 4월 16일 
    備邊司啓曰, 仁川紫燕島設鎭處, 往來船隻 例泊於太平岩 自此下船 由一條細路 入往本島 而其路一日之內 僅得兩度相通 人馬不得竝行 蓋潮滿則不通而然也 此路石築而稍使高廣 然後可免緩急軍馬阻絶之患 招問本島萬戶南得華 則若得役丁二百餘名 赴役四五日 可以完了云 此時民丁 決不可調用 畿甸僧軍  准此數 趁五月初旬前 調發赴役 似爲便順 以此意分付道臣 使之及期分定以送 且僧人文哲 鳩集財力 官廨五十餘間 一時丹靑 其勞不可不償 故曾於己丑年 啓稟此意 已給通政空名帖 使之仍令守護其寺 而若不重其事 則僧徒必不肯募入於絶島生利艱窘之處文哲 稱以僧將 仍給僧將輩所用長印 以爲終始守寺之募僧之地 何如 答曰 允

134) 승려들의 부역일은 기본적으로 1개월로 규정되었고 이에 못미치는 10일에서 1개월을 초과하는 40일 등 다양한데 각 경우에 따라 달랐다. 윤용출, 2011,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부역노동」, 『지역과 역사』28 참조.

135) 『光海君日記』中草本 권130, 10년 7월 4일 경인

136)윤용출, 1998, 앞의 책, 쪽.

137) 물론 상황과 사정에 따라 승려나 역군들에게 약간의 식량을 지급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휼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으며 정규적으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었다.

138) 『仁祖實錄』 권1, 원년 3월 17일 정미;  『仁祖實錄』 권45, 22년 2월 24일 계미

139)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 3월 6일  
    趙翼 以禮葬都監言啓曰 卽見山所下去郞廳金時讓 初六日成貼牒呈 全羅道僧軍 則未到十八名 忠淸道則未到七十二名 慶尙道則未到八十名 且全羅忠淸兩道僧軍中 各三名 以俗人代占 國家徵發僧軍 其意有在 而僧俗相雜 極爲不當 忠淸道差使員 不爲別定雜物領納 故僧軍交付時 只令迷劣色吏代送 俱屬未便 請忠淸監司鄭廣敬 全羅監司閔聖徵 慶尙監司元●●●●道 差使員竝推考 何如 傳曰 依啓 差使員 拿推

140) 여은경, 1987, 앞의 논문.

141)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3월 28일 계미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2일 병술;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142)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吏曺啓曰 上年備局 以慶尙監司洪處厚 査啓道內列邑寺刹 屬於諸宮家各衙門者 竝令停罷 還屬本邑 俾供紙地等役事 已覆啓蒙允 行會丁寧

143) 승려의 호적 등재에 대해서는 장성규 참조. 장성규는 승려의 호적 등재 목적을 국가의 승역 강화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144) 이영숙, 2008, 「17세기 후반 호적대장의 승려등재비율에 대한 고찰 -丹城縣 戊午式年(1678) 호적대장의 栗谷寺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집』40. 
    이 연구는 栗谷寺에 전래되는 畵記 자료를 토대로 숙종 4년 율곡사의 실제 승려 숫자와 『단성호적』에 등재된 율곡사 거주 승려의 수를 비교하였다. (참고로 율곡사는 당시 원당이 아니었다.) 그 결과 당시 율곡사의 실제 승려 수는 109명인데 비하여 호적에 등재된 승려는 54명에 불과하여 등재율에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18세기의 『대구호적』에서도 목격된다. 호적에 등재되는 전체의 숫자가 줄어듦과 동시에 승려가 거주하여 廢寺되지 않았던 사찰의 승려 수가 없는 것으로 기재되는 것이다. (장경준, 2005,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승려 등재와 그 양상」, 부산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참조.)

145) 『남원현공사』 4책, 정사년 4월 6일
     전문은 <부록 2>를 참조.

146) 윤용출, 1998, 앞의 책, 쪽.

147)17세기 미륵신앙과 민중저항에 대해서는 정석종, 1981, 「조선후기 숙종연간의 미륵신앙과 사회운동」, 『한우근박사정년기념 사학논총』, 지식산업사; 정석종, 1984, 「숙종연간 승려세력의 거사계획과 장길산」,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일조각 참조. 이 밖에 반역사건에 승군이 연루된 사례는 아래와 같다.
    『宣祖實錄』 권77, 29년 7월 9일 갑술; 『宣祖實錄』권77, 29년 7월 16일 신사; 『宣祖實錄』 권78, 29년 8월 25일 경신; 『宣祖實錄』 권139, 34년 7월 18일 계축; 『光海君日記』 中草本 권50, 4년 2월 21일 병술; 『光海君日記』 中草本 권52, 4년 4월 16일 경진; 『光海君日記』 中草本 권52, 4년 4월 16일 경진; 『光海君日記』 中草本 권131, 10년 8월 24일 경진; 『仁祖實錄』 권18, 6년 1월 3일 을축; 『仁祖實錄』 권19, 6년 12월 8일 갑진; 『仁祖實錄』 권24, 9년 2월 3일 정미;  『仁祖實錄』 권47, 24년 4월 3일 기묘; 『효종실록』 권7, 2년 11월 23일 정유; 『肅宗實錄』 권23, 17년 6월 23일 정축    

148) 「義僧番錢摩鍊別單」과 「義僧番錢摩鍊別單」의 내용을 각각 <부표 3>과 <부표 4>를 참조.

149) 『승정원일기』 168책, 현종 2년 6월 17일  
壽興曰, 山城募入定配之人, 皆是不良之徒, 急之則怨叛, 緩之則解弛, 治之最難矣。命夏曰, 平人則妻子盡爲入居, 生理極艱, 僧人則無此患, 今後僧人, 以罪定配之類, 皆送於山城, 則似好矣。壽興曰, 僧軍之力, 大矣。七寺皆受信地, 城堞頹圮, 則信地寺僧, 告知修築, 臨亂則皆守信地, 僧軍之力, 大矣。但僧軍元居者外, 七道僧軍, 回輪入番, 皆以爲苦云矣。命夏曰, 今有一議, 以爲外方有身役僧, 或軍保或寺奴爲僧者, 皆入送于山城, 而義僧則除之宜當云, 而此則未易變通矣。上曰, 城內元居僧, 幾何而七寺皆大刹乎? 壽興曰, 開元·天柱·長慶寺爲大刹, 而國淸·望月·玉井·漢興爲小刹, 居僧則無定數

150)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錫胄曰 南漢城七寺 各分屬八道 先臣 爲守禦使時 加一寺爲八寺 使各道義僧 自備糧立番于山城之寺 其役甚苦 而湖南義僧 分爲六番 某月立某寺 一年一寺所立之僧 常不下百餘名 一如軍士上番之例 而上番義僧之來也 受其道各寺之資 送義僧之役 其實 一道之僧 皆當之也

151) 『승정원일기』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152) 여은경, 1987, 앞의 논문, 쪽.

153) 『남원현첩보이문성책』 병진년 9월 초3일, 報巡營 (『한국지방사자료총서』1, 여강출판사,  471~475쪽)

154) 『비변사등록』 22책, 현종 3년 1월 10일;  『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10월 10일

155)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8, 육군본부, 212~238쪽.

156) 『비변사등록』 67책, 숙종 40년 9월 27일

157) 『비변사등록』 74책, 경종 3년 8월 4일

158) 『비변사등록』 130책, 영조 32년 1월 12일

159) 『홍재전서』 권164, 「일득록」 34

160) 『영조실록』 권81, 30년 4월 29일 무신
    湖南釐正使李成中復命 書啓 略曰 ... 異端吾儒之所深斥 而我國僧徒不然 不過如應役之平民 編伍之軍卒耳 其所愛護亦宜如平民軍卒 而南漢義僧上番 爲僧徒苦弊 本道則大寺四五名 小寺亦一二名 而一名資送幾至百金 以一寺而每年責四五百金之費 彼草衣木食之類 安得不擔鉢離散乎 南漢守臣 必以八道義僧之上番保障 意有所在云 而兩廳軍官卒隷 皆以各邑鄕居者收米布 以居在城內者代立 則何獨於義僧而不可用此例耶 自今定式 義僧勿爲上番 每名代送錢十六兩 名以義僧防番錢 令各邑收合一如軍布之規 則可除僧徒之大弊

161)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

162) 『비변사등록』 122책, 영조 27년 2월 26일

163) 『신보수교집록』 호전 잡령

164) 김갑주,1982, 「영광 불갑사의 양안 연구」, 『숙대사론』11·12 참조.

165) 김갑주, 1982, 앞의 논문. 17세기 이후 승려의 개인 토지 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역시 사찰 및 승려 소유 토지의 운영은 사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찰 소유의 토지가 승려의 이름으로 등록된 경우도 있었으며, (김갑주, 앞의 논문) 무엇보다도 승려 개인 소유 토지가 사찰로 시주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에 승려의 토지 시답 사실을 밝힌 자료가 상당히 남아 있으며 (김상현, ) 이중 숙종 10년 세워진 『충주청룡사위전비』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 조선후기 사찰의 토지 소유 현황과 승려 소유의 토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적다. 이는 필자의 추후 연구 과제로 삼고 싶다.

166) 의승방번역이 사찰역으로 부과되었다는 사실은 18세기 중반 시행되는 의승방번전의 부담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순천향교 소장의 『順天府紙所矯弊節目』에 따르면 순천부의 지고에서 얻는 수익의 일부는 중앙에 의승방번전을 납부하는 데에 쓰였다. 그런데 이 의승방번전은 순천의 대찰인 송광사와 선암사가 각각 육상궁의 원당으로 절수되면서 혁파된 것이었다. 즉 의승방번전의 최종 부과 단위는 사찰이었고, 이 것이 면제되었을 때는 군현에서 책임지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67) 『숙종실록』 권3, 1년 5월 13일 신미

168) 실제로 연대기 자료에는 승역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역, 사찰역이라는 단어가 검출되고 있다.

169) 『남원현첩보이문성책』 병진년 9월 초3일, 報巡營 (『한국지방사자료총서』1, 여강출판사,  471~475쪽)

170) 조계종 교육원, 2004, 앞의 책; 김용태; 오경후; 손성필

171) 『숙종실록』 권3, 1년 5월 13일 신미

172) 『승정원일기』 377책, 숙종 24년 3월 14일  
    喜茂曰 寺院僧尼有弊 故廢之禁之矣 喜茂曰 張美 曲爲供副 而世宗 不以公忠待之 爲人臣者 不當曲意承順矣 ... 喜茂曰 我國僧則有役 中原僧則無役 故我國 不若中原之多僧 而中原有度牒 我國則無之矣 上曰 僧徒 皆避軍役者也

173) 『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2월 30일
    參贊官權持曰 外方各營門所屬之弊 不但設屯鹽盆漁箭而已 如湖嶺紙産寺剝 亦有各營之分屬者 問其分屬之由 則以進上箋文 封裹油芚 爲所重之地 此實他道之所未有之也 營門略給價本所徵 不啻倍蓰 以至營屬輩 憑藉橫侵 罔有紀極 而本官則莫敢誰何 以此僧徒 不得支保 昔之巨刹 今爲茂草 僧徒之逃避賦役 雖似可惡 而至於義僧之番上 僧軍之調發 紙地之添納 亦未始不爲國役設也 卽今寺罷僧發 在在皆然 亦朝家之所宜矜念 今若革罷各營分屬之規 而專屬本官 以供國役 則亦革罷中一事 故敢達

174) 『정조실록』 권53, 24년 2월 2일 을유; 『순조실록』 권16, 12년 7월 7일 정축; 『순조실록』 권31, 30년 9월 17일 임신

175) 사찰계에 대해서는 김갑주, 1976, 「해남 대흥사의 보사청 연구」, 『호남문화연구』8; 한상길, 2006,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경인문화사 참조.

176) 김갑주, 1981, 「조선후기 승려의 사유전답」, 『동국사학』15·16. 해남의 해남 윤씨 문중에서 전래되는 소지와 토지매매문기는 인조 25년(1647)에서 현종 12년(1661) 사이에 작성되었는데 승려 응상과 해남 윤씨 문중이 토지 소유권을 놓고 벌인 쟁송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적어도 인조 25년에는 승려 개인의 토지 소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7) 『숙종실록』 권3, 1년 5월 13일 신미

178) 『新補受敎輯錄』, 호전 잡령

179) 『新補受敎輯錄』, 호전 잡령

180) 『승정원일기』 291책, 숙종 8년 6월 23일

181) 『선조실록』 권85, 30년 2월 11일 임신
    禪科僧職帖 則多數成給可矣 空名告身事 諫院所啓固當 但初不給之則已 旣爲給之而還收 則是以僧人而外之 置之勿問 使之募取軍糧 斯爲得矣 更量回啓事 傳敎矣 惟政處 已給空名告身 還爲收納 頗似未穩 而臺諫旣已論之 故如是回啓矣 今承上敎 至爲允當 仍給無妨 敢啓 答曰 依啓

182) 『승정원일기』 122책, 효종 2년 10월 30일

183) 전영근, 2007, 「조선시대 승관제와 승인 인사 관련 문서」, 『고문서연구』30 참조.

184)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 11월 1월 6일 갑오  

185) 『승정원일기』 268책, 숙종 4년 1월 18 
    錫胄曰, 南漢山城南壇寺, 盡爲傾頹, 今將修改, 而旣不可專委於僧輩, 本廳物役, 又無以相助。且各處廨宇修繕之事, 隨續不絶, 頃年朝家成給僧俗通政帖, 今亦已盡矣。此帖文數百丈, 更令該曹成給, 以爲收合材力之地, 何如? 積曰, 賣爵雖有弊, 而事在不得已, 則亦不可不爲也。僧俗通政帖各二百丈, 特令成給, 宜當矣。

186) 『승정원일기』 170책, 현종 2년 10월 3일;  『승정원일기』 258책, 숙종 3년 1월 23일; 『승정원일기』 286책, 숙종 7년 12월 26일;  『승정원일기』 291책, 숙종 8년 6월 23일;  『승정원일기』 303책, 숙종 10년 3월 14일;  『승정원일기』 316책, 숙종 12년 6월 29일;  『승정원일기』 341책, 숙종 16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 348책, 숙종 18년 6월 23일;  『승정원일기』 421책, 숙종 30년 10월 20일;  『승정원일기』 456책, 숙종 36년 10월 10일;  『승정원일기』 460책, 숙종 37년 5월 10일

187) 승려들의 직책에 총섭·승통·승장·주지 등이 기록되는 것과 함께 승려들의 품계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각종 호적자료이며, 불교계 내부에서 작성된 불상의 복장기, 불화의 화기, 그리고 상량기, 계안, 시답기에서도 승려의 직책에 품계를 적어 넣은 경우가 많다.

188) 물론 호적으로 다시의 직역을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적의 직역조는 군현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조정되어 반드시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호적의 재정자료적 성격에 대해서는 송양섭; 권내현; 손병규 참조.

189) 「단성호적」의 무당 등재 형태에 대해서는 참조.

190) 승려가 신붕이 신량역천이라는 것은 다카하시 도오루에 의하여 제기되었으나 최근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손성필, 2013, 『16·17세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동향』,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조.

191) 『단성호적』 및 『대구호적』의 승려 직역에 대해서는 <부표 5>, <부표 6>을 참조.

192) 아직 시론에 지나지 않는 의견이지만, 18세기 이후 승려 직역의 상향평균화 경향과 승역의 변화 양상이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산성의 증가 및 사찰의 지방 계방화가 진행되면서 지방 군현에게 사찰의 중요도가 커지는 측면과 호적에서 승려의 직역이 조정되는 현상이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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