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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법당에서 행해지는 의례 의식의 가장 표준화된 내용 [조계종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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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 [부록] 행장 4

출처 수집자료,조계종제공
구분 독송용-한글

행 장 4.

 

 정유년(1357) 2월에 스님은 귀신같이 기미를 알아채고 게송을 지어 왕사의 직을 사퇴하기를 청하셨다. 왕의 마음은 더욱 간절했으나 스승은 몸을 빼서 소설산으로 들어가셨다. 현릉은 스님의 뜻을 알고 법복과 인장을 스님에게 보냈다.

 그때에 고담 적조 현명(古潭寂照玄明)선사라는 훌륭한 분이 있었다. 미원장의 은성사(隱聖寺)에 객승으로 있다가 태고암가를 보고는 공경하고 찬탄한 뒤에 소설산으로 찾아갔다. 그때 마침 스님은 다리에 병을 앓고 계셨다. 고담은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스님, 혹시 과로가 아닐까요?”

 “그렇소.”

 “안심하십시오.”

 스님은 그러겠다 하고 시자에게, 금란가사와 주장자를 가져오라 하여 그에게 주면서, “여우거든 때려 주고 사자거든 길러라” 하셨다. 고담은 꿇어앉아 가사를 받아 입고 주장자를 들고는 힘차게 일어서서 악! 하고 할(喝)을 한 번 하면서 동시에 때릴 형세를 지었다. 스님은 “원래 그런가” 하시니 고담은 절하고 물러갔는데 조금 있다가 스님은 병이 나았다.

 무술년(1358)에 현릉의 명을 받들어 성을 수축하게 되었다. 스님은 글을 올려 비밀히 홍적(紅賊)의 난리가 있을 것을 고하였다.

 기해년(1359) 가을에는 포상(苞桑)*의 형상을 관찰한 뒤에, 미지산(彌智山)에 들어가 미리 초당(草堂)을 지어 두고는 사람들에게 “피란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셨다.

 신축년(1361) 11월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켰으니, 앞에서 말한 예언이 맞았다. 현릉은 안동(安東)으로 피란가고, 스님은 먼저 지어 두었던 초당에 계셨는데, 그 곳 사람들이 피란해 와서 그 덕을 많이 입었다.

 임인년(1362) 봄에 적이 패해 물러갔다. 그 해 가을에 왕은 청주(淸洲)에 있으면서 사신을 보냈으므로 스님은 양산사(陽山寺)에 머무시게 되었다. 스님은 대중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애써 옛것은 다 헐어내고 새로 중수하니, 밭과 농막이 복구되고 목어와 북이 울게 되었다.

 계묘년(1363) 정월에 왕은 서울로 돌아와, 성균관 제주 한천(成均館 祭酒 韓蕆)을

보냈으므로 스님은 가지사(迦智寺)로 옮겨 종풍을 크게 떨쳤다.

 그때 신돈(辛旽)이 승려의 행색을 빌어 왕의 사랑을 받고 아첨하였으므로 어진 이

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스님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개탄하며, 글을 올려

 신돈에 대해 이렇게 논하셨다.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제 뜻을 펴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셔서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신돈은 재상의 이름을 빌어 조정의 신하를 함부로 죽였다. 스님은 일이 다 되었다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시다가, 병오년(1366) 겨울에 신돈의 독한 마음을 아시고 인장을 돌려 왕사의 지위를 하직하고 도솔산에 들어갔다가 구름처럼 노닐면서 전주 보광사(普光寺)로 가서 머무셨다.

 무신년(1368) 여름에 신돈은 말을 퍼뜨려 스님을 매장시키려 하였는데, 그 음모와 간사한 꾀로 못할 짓이 없었다. 너무 절박하게 말했기 때문에 현릉은 할 수 없이 그 말을 쫓았다. 신돈은 제 마음대로 스님을 속리산(俗離山)에 가두었다. 스님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도 그것에 편안해 하여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으셨다. 어느날 저녁에는 선정에서 일어나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신돈이 가련하구나”하셨다.

 기유년(1369) 3월에 현릉이 후회하고 승록사원 혜기(僧錄司員 惠琪)를 보내 스님을 청하여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홍무(洪武) 4년(1371) 신해 7월에 신돈이 분수 밖의 일을 넘겨보므로 현릉은 그를 베어죽이면서 “내 스승이 어찌 거짓말을 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예부상서 홍상재(禮部尙書 洪尙載)와 내시 이부(李榑)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國師)로 높여 봉하고 법호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스승의 모향(母鄕)으로서 본래 익화현(益和縣)이던 양근(楊根)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영원사(瑩原寺)

에 머무시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셨다. 그러나 칙명이 있었으므로 절 일을 7년 동안 멀리서 맡아 보셨다.

 무오년(1378) 겨울에 지금 임금(우왕)의 명을 받들어, 비로소 그 절에 가시어 1년 동안 머무시다가 돌아오셨다.

 신유년(1382) 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기셨는데, 부임하시던 날에 우왕은 스님을 다시 국사로 봉하였으니, 그것은 선군(先君)을 생각해서였다.

 임술년(1362) 여름에 스님은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시고, 곧 소설산으로 돌아가시니 대중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해 연못에는 연꽃이 마르고 소나무 여덟 그루 중에서 네 그루가 말랐다. 겨울 12월17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시더니, 23일에는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는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 : 군수)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 하셨다.

 그 때 이양생(李陽生)이 양근 군수로 있었는데, 스님은 그에게 왕께 올리는 유언을 남기고 또 대신들에게 세상을 하직하는 글 여섯통을 써주셨다.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 입고, 때가 되자 단정히 앉아 게송으로 말하셨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죽음에 다달아 이제 가죽푸대 버리노니

수레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帒  一輪紅日下西峰

 

 이 게송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시니, 세수는 82세요, 법랍(法臘)은 69세였다.

 이 소문이 왕에게 들리자 왕은 내시 전농부정 전저(內侍 典農副正 田沮)를 시켜 향을 보내고 부의를 예답게 하였다. 방장실 앞에서 화장하였는데, 그날 밤에는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가 무수히 나왔으며, 정수리에서 나온 사리들은 별처럼 빛났다. 때는 계해년(1383) 1월 12일이었다. 친히 전저가 그 사리 백 알을 나라에 바치니, 왕은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여 원증(圓證)이라 시호를 내렸다. 중홍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이름을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고 영골(靈骨)을 넣어 두었다.

 스님은 문도와 장로들은 모두 “우리 스승은 떠나셨지만 사리가 세상에 있으니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고, 대중과 함께 힘과 마음을 다해 돌을 다듬어 종(鐘)을 만들고 사리를 넣어 네 곳에 간직하니, 그곳은 양산사(陽山寺) · 사나사(舍那寺) · 청송사(靑松寺) · 태고암(太古庵)이었다.

 또 소설산에 탑을 세우고 거기에 이렇게 썼다.

 

 스승은 평소에 암자 짓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을 살게 한 곳이 십여 군데이다. 지리(地理)를 늘리고 줄임은 선천적인 지혜[生知]에서 나왔고, 자비로 대중을 일깨워주심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법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문풍(門風)이 높고 엄하여 학인들이 발붙이기 어려웠고, 이름이 높고 덕이 큰 사람들만이 주로 귀의하였다.

  그 중에서도 상수(上首) 제자로서 첫째 환암(幻菴)화상이 있으니, 지금은 국사 정변지 지웅존자(國師正辯智智雄尊者)가 되었고, 다음에 고저(古樗)화상이 있으니, 지금은 왕사묘변지 원응존자(王師妙辯智圓應尊者)가 되었으며, 가장 오래도록 시봉하고 스님의 후사(後事)를 감독한 이로서는 철봉(哲峯)화상 등이 있으며, 뛰어난 선승들이 많으나 번거로울까 하여 다 쓰지 않는다.

 

 내[維昌]가 가만히 생각하니 스님의 인품은 마치 동쪽에서 뜬 해가 천하를 비추다가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왜 그러냐 하면, 저 하늘의 해가 높기는 높고 밝

기는 밝지마는 태어나실 때에는 꿈에 들어왔고 머무시던 곳은 희양(曦陽)이라 하였으며 마치실 때에는 서산을 넘어간다 하였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 무슨 상서인가. 어둠과 밝음을 지혜의 해에다 물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사리를 보임으로써 신통광명을 나타내었으니, 아마도 ‘보월승공(寶月昇空)’의 징험이라 하겠다. 또한 ‘원증(圓證)’ 이란 시호는 하늘이 준 것인가, 사람이 준 것인가. 아아, 진실로 그러하도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스님은 한 나라의 스승으로서 나 개인의 스승이 아니다. 나는 속에 든 것도 없고 붓을 들매 글재주도 없으니, 변변찮은 글을 빌어 그 높고 큰 덕을 적는다는 것은 실로 황송한 일이다. 그러나 외람되이 높은 문에 올라 병필(秉筆 : 예문관의 관리)이라는 직책에 있으니, 글이 나쁘다고 사양할 수 없겠거늘 하물며 거기에는 의리가 있지 않은가.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겠기에 그 만분의 일이라도 주워모아 행장을 만들어 보시는 이에게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홍무(洪武) 16년(1383) 계해 10월 일에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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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상(포상) : 뽕나무 뿌리. 근본이 확고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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