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22.유보학 언수에게 답하다
-
아라마
- 89
- 0
출처 | 아라마제작 |
---|
答 劉 寶 學 彦修
9-01
卽日烝溽호니 不審커라. 燕處悠然하야 放曠自如하고 無諸魔撓否아. 日用 四威儀內에 與狗子無佛性話로 一如否아. 於動靜二邊에 能不分別否아. 夢與覺교가 合否아. 理與事가 會否아. 心與境가 皆如否아.
9-02
老龐이 云호대 “心如하면 境亦如하야 無實亦無虛라 有亦不管하며 無亦不拘하니 不是聖賢이라 了事凡夫라”하니라. 若眞箇作得箇了事凡夫인댄 釋迦達磨는 是甚麽오. 泥團土塊니라. 三乘十二分敎는 是甚麽오. 熱盌鳴聲이니라.
9-03
公이 旣於此箇門中에 自信不疑하니 不是少事라, 要須生處란 放敎熟하고 熟處란 放敎生하야사 始與此事로 少分相應耳이니라. 往往에 士大夫- 多於不如意中에 得箇瞥地處라가 却於如意中에 打失了하나니, 不可不使公知라. 在如意中하야 須時時以不如意中時節로 在念하야 切不可暫忘也어다.
9-04
但得本이언정 莫愁末하며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 這一着子는 得易守難하니 切不可忽이어다. 須敎頭正尾正하야 擴而充之然後에 推己之餘하야 以及物이니, 左右所得이 旣不滯在一隅하야 想於日用中이 不着 起心管帶하며 枯心忘懷也리라.
9-05
近年已來에 禪道佛法이 衰弊之甚일새, 有般杜撰長老는 根本이 自無所悟하고 業識이 茫茫이라. 無本可據하며 無實頭伎倆으로 收攝學者하니 敎一切人으로 如渠相似하야 黑漆漆地로 緊閉却眼하야 喚作“黙而常照라”하니라. 彦沖이 被此輩에 敎壞了라 苦哉苦哉로다. 遮箇話를 若不是左右- 悟得狗子無佛性이런들 徑山도 亦無說處니라. 千萬捺下面皮하고 痛與手段하야 救取遮箇人하라. 至禱至禱하노라.
9-06
然이나 有一事하니 亦不可不知니라. 此公이 淸淨自居하야 世味澹薄이 積有年矣라. 定執此爲奇特이리니, 若欲救之인댄 當與之同事하야 令其歡喜하야, 心不生疑하야사 庶幾信得及하야 肯轉頭來하리니, 淨名의 所謂 “先以欲으로 鉤牽하고 後令入으로 佛智라”함이 是也니라. 黃面老子- 云호대 “觀法先後하되 以智分別하며 是非審定하되 不違法印하고, 次第建立 無邊行門하야 令諸衆生으로 斷一切疑라”하시니, 此乃爲物作則칙이며 萬世楷模也온
9-07
況此公의 根性이 與左右로 逈不同하니, 生天은 定在靈運前이요 成佛은 定在靈運後者也라. 此公은 決定不可以智慧攝이요 當隨所好攝하야 以日月磨之하니, 恐自知非하야 忽然肯捨를 亦不可定이니, 若肯轉頭來하면 却是箇有力量底漢이라 左右도 亦須退步하야 讓渠出一頭라사 始得다.
9-08
比에 暐禪이 歸에 錄得渠答 紫巖老子一書어늘 山僧이 隨喜讀一徧하고 讚歎歡喜累日호니, 直是好一段文章이러라 又似一篇大義하니, 末後에 與之下箇謹對호리니 不識커라 左右는 以謂如何오.
9-09
昔에 達磨- 謂二祖曰 “汝但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이라사 可以入道라”하야늘, 二祖- 種種說心說性호대 俱不契러라. 一日에 忽然省得 達磨所示要門하고 遽白達磨曰 “弟子此回에사 始息諸緣也니다.” 達磨 知其已悟하시고 更不窮詰하시며 只曰 “莫成斷滅去否아?” 曰 “無니다.” 達磨 曰 “子- 作麽生고?” 曰 “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니다.” 達磨 曰 “此乃 從上諸佛諸祖의 所傳心體니, 汝今旣得이라 更勿疑也하라”하시니라.
9-10
彦冲이 云호대 “夜夢晝思十年之間에 未能全克이라. 或端坐靜黙하야 一空其心하야 使慮無所緣하며 事無所託하야사 頗覺輕安이라”하니, 讀至此에 不覺失笑호라. 何故오 旣慮無所緣이라하니, 豈非 達磨의 所謂內心無喘乎며, 事無所託이라하니 豈非達磨의 所謂外息諸緣乎아.
9-11
二祖도 初不識達磨의 所示方便하고 將謂外息諸緣하며 內心無喘을 可以說心說性하며 說道說理라하야, 引文字證據하야 欲求印可할새 所以로 達磨- 一一列下하사 無處用心코사 方始退步하며, 思量 心如墻壁之語는 非達磨實法이라하고 忽然於墻壁上에 頓息諸緣이라. 卽時에 見月亡指하고 便道了了常知故로 言之不可及이라하니, 此語도 亦是臨時하야 被達磨拶出底消息이라, 亦非二祖實法也어늘
9-12
杜撰長老輩- 旣自無所證하고 便遂旋捏合하니, 雖敎他人歇이나 渠自心火熠熠하야 晝夜不停호미 如欠二稅百姓相似라.
彦沖은 却無許多勞攘이나 只是中得毒深이라. 只管外邊亂走하야 說動說靜하며 說語說黙하며 說得說失하며, 更引周易內典하야 硬差排和會하니 眞是 爲他閑事 長無明이로다.
9-13
殊不思量 一段生死公案을 未曾結絶하면, 臘月三十日에 作麽生折合去리요. 不可眼光 欲落未落時에 且向 閻家老子 道호대 “待我澄神定慮少時코사 却去相見현이니 得麽아.” 當此之時하야는 縱橫無礙之說이라도 亦使不着이며 心如木石이라도 亦使不着이라. 須是當人의 生死心을 破하야사 始得다. 若生死心을 破하면 更說甚麽澄神定慮며 更說甚麽縱橫放蕩이며 更說甚麽內典外典이리요.
9-14
一了一切了하며 一悟一切悟하며 一證一切證호미 如斬一結絲에 一斬一時斷이라. 證無邊法門도 亦然하야 更無次第리니, 左右- 旣悟狗子無佛性話하니 還得如此也未아. 若未得如此인댄 直須到恁麽田地라사 始得다 若已到恁麽田地인댄 當以此法門으로 興起大悲心하야 於逆順境中에 和泥合水하야 不惜身命하며 不怕口業하고, 拯拔一切하야 以報佛恩이니 方是大丈夫의 所爲라. 若不如是면 無有是處니라.
9-15
彦沖이 引孔子- 稱 “易之爲道也屢遷”하야 和會佛書中에 “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爲一貫이라하며, 又引 “寂然不動”을 與“土木無殊”라하니, 此尤可笑也로다.
向渠道하노라. 欲得不招無間業인댄 莫謗如來正法輪이라하니, 故로 經에 云호대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라”하시니 謂此廣大寂滅妙心은 不可以色見聲求라.
9-16
應無所住는 謂此心이 無實體也요. 而生其心은 謂此心이 非離眞而立處라 立處卽眞也니라. 孔子- 稱易之爲道也屢遷은 非謂此也라. 屢者는 荐也오 遷者는 革也라. 吉凶悔悋이 生乎動하나니 屢遷之旨는 返常合道也어늘 如何與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合得成一塊리요.
彦沖이 非但不識佛意라 亦不識孔子意로다. 左右- 於孔子之敎에 出沒을 如游園觀하며, 又於吾敎에 深入閫域이라. 山野의 如此杜撰이 還是也無아.
9-17
故로 圭峯이 云호대 “元亨利貞은 乾之德也니 始於一氣하고, 常樂我淨은 佛之德也니 本乎一心이라. 專一氣而致柔하고 修一心而成道라”하니 此老의 如此和會라사 始於儒釋二敎에 無偏枯하며 無遺恨이어늘
彦沖이 以應無所住而生其心이 與易之屢遷大旨로 同貫은 未敢相許로니, 若依彦沖差排인댄 則孔子與釋迦老子를 殺着買草靴하야사 始得다. 何故오 一人은 屢遷하고 一人은 無所住일새니라.
想讀至此에 必絶倒也리라.
유보학 언수에게 답하다
9-01
요즘 후덥지근한데 살피지 못했습니다. 편안한 곳에서 느긋하게 소요자재하고 다른 마구니에 휘둘리지는 않습니까? 평소 행주좌와 사위의 내에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구자무불성 화두와 하나가 됩니까? 움직이거나 고요한 두 경계에서 분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꿈꾸거나 깨어서나 합치합니까? 이와 사의 경계가 회통합니까? 마음과 경계가 모두 한결같습니까?
9-02
방거사가 말했습니다.
“마음이 한결같으면 경계도 한결같아서 실재함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얽매임 없으니, 성현도 아니라 일대사를 마친 범부이다.”
참으로 깨달아서 일 마친 범부라면 석가세존과 달마대사가 무엇이겠습니까? [하찮은] 진흙 뭉치 흙덩이입니다.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12분교의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쓸데없이] 달궈진 그릇 우는 소리입니다.
9-03
그대가 이미 이 문중에서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데,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설은 것은 익게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해야만이 비로소 이 일에 조금이나마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따금 사대부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언뜻 보는 경계를 얻다가도, 도리어 순경계에서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그대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경계에 있으면서도 때때로 뜻대로 되지 않던 시절을 염두에 두고 잠시라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9-04
다만 근본을 깨달을 뿐 꼬투리를 근심하지 말며, 다만 부처 되기를 깨달을 뿐 부처님 말씀 모른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의 승패를 결정짓는] 오직 이 한 수는 얻기 쉬워도 지키기 어려우니, 절대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시작도 바르고 끝도 바르게 해야합니다. [깨달아] 탁 트여서 채우고 난 후에야 자신의 여력을 밀어붙여 만물에 미치게 해야합니다.
그대가 얻은 것을 이제 한 모퉁이에 막혀있지 않을 뿐아니라 평소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되, 일어난 마음이 좁은 소견에 매여있지 않고, 마음을 비운다고 뜻을 잊어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9-05
최근 들어와서 선의 가르침과 불법이 쇠퇴하여 심각합니다. 보통 꽉 막힌 엉터리 장로들은 근본적으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없고 업식은 아득합니다. 기댈 수 있는 바탕도 없고, 실재적인 기량도 없이 배우는 이들을 섭수합니다. 일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처럼 캄캄한 지경으로 눈을 굳게 감아버리게 하고는 “묵연히 늘 비추어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대의 아우 언충이 이 무리들에 의해 병통에 걸리고 말았으니 너무나 괴로운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만약 그대가 구자무불성 화두를 깨치지 않았다면 산승도 말할 데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 체면을 내려놓고 수단과 함께 통열하게 이 사람을 구하십시오. 지극하게 빌고 또 빌겠습니다.
9-06
그러나 한가지 사안이 있으니 또한 몰라서는 안됩니다. 언충은 청정하게 살아오며 세간의 재미에 담박하게 지낸지 몇 해나 흘렀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특이하다 여겨 집착할텐데, 만약 그를 도와주려 한다면, 동사섭의 마음으로 그에게 베풀어 그를 환희케 해야합니다. 마음에 의심을 내지 않아야 그나마[庶幾] 믿게 되고, 기꺼이 머리를 돌려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유마거사가 말했던 “우선 욕심으로 낚아서 후에 부처님 지혜에 들게 한다”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석가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선후를 관하되 지혜로 분별하며, 시비를 살펴 정하되 가르침[법인]을 어기지 말지니, 가없는 수행문을 차제에 따라 건립하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 의심을 끊게한다.”
이는 곧 만물을 위하여 세운 준칙이며, 만세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9-07
하물며 그대의 아우 언충의 근기와 성품은 그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천상에 태어남은 분명 사영운보다 앞서겠지만 부처를 이룸은 분명 사영운보다 뒤처질 것입니다. 언충은 결코 지혜로 섭수할수 있는 이가 아니라서 좋아하는 것을 따라 거두어 나날이 다달이 닦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홀연 기꺼이 버릴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기꺼이 머리를 돌리기만하면 도리어 역량을 갖춘 대장부라 할만하니, 그대도 물러나서 그가 한번 두각을 드러내도록 양보해야 비로소 얻을 것입니다.
9-08
지난번에 위 선사가 돌아오면서 언충이 자엄 거사에게 답한 서신 한편을 기록해 왔는데, 산승이 기뻐하면서 한 번 읽고 여러날을 찬탄하며 즐거워했는데, 그야말로 한편의 훌륭한 문장일 뿐만아니라 한편의 대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 끝에 근대를 내려주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9-09
옛날, 달마대사가 이조 혜가스님에게 일러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혜가 스님이 갖가지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여도 계합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루는 홀연히 달마 대사가 보여주신 법문의 핵심을 깨닫고는 대뜸 달마 대사에게 말합니다.
“제자가 이번에야 비로소 모든 반연을 쉬게 되었습니다.”
달마 대사는 그가 이미 깨달았음을 알고는 다시 캐묻지 않고 그저 말씀하십니다.
“단, 멸을 이루지는 않던가?”
“[단멸은] 없습니다.”
“그대는 어떠한가?”
“너무나 분명하여 항상 알기 때문에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전 모든 부처님들과 조사스님들로부터 전해진 마음의 본체이다. 그대가 이제 깨달았으니 더는 의심하지 말 것이다.”
9-10
언충이 말하였습니다.
“십년동안을 밤낮 꿈과 생각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단정하게 말없이 고요히 앉아 그 마음 한번 비워내어 생각들 반연할 곳 없애고, 만사 맡길 곳 없애고서야 그나마 경안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습니다. 무슨 까닭인가하면, 이미 “생각들이 반연할 곳이 없다”하였는데 어찌 달마대사가 말씀하신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림이 아니겠으며, 만사 맡길곳이 없다 하니 어찌 달마 대사가 말씀하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11
이조 혜가 스님도 처음에는 달마대사가 보여주신 방편을 알지 못했고, 밖으로 온갖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으면 심성을 말할 수 있고 도리도 말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문자를 끌어다 근거를 보이고 인가를 받으려는데, 그 때문에 달마대사가 하나하나 제하면서 마음쓸 곳이 없게되자 비로소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장벽같다는 말이 달마 대사의 실법은 아님을 사량하고서 홀연히 [꽉 막힌] 장벽 위에서 단밖에 모든 반연을 쉬게 되었습니다. 즉시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으니, 바로 또렷또렷하여 늘 알기 때문에 말로 다 할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도 또한 당시라면 달마 대사의 다그침에 의해 나온 소식이지, 이조 혜가스님의 실법은 아닙니다.
9-12
꽉 막힌 엉터리 무리들은 스스로 증득한 것도 없이 거리낌없이 앞다투어 계합한 듯 날조합니다. 비록 남들에게는 쉬라고 가르치지만 자기 마음은 활활 타오르기를 밤낮 그치지 않으니 [불안한 모습이] 흡사 세금 두번은 못 낸 백성 같습니다.
언충은 원래[却] 번다함은 많지 않은데, 다만 심하게 중독되었을 뿐입니다. 한결같이 밖으로만 어지럽게 내달리며 어묵동정을 말하고 득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주역이나 불교경전들을 끌어와서 다른 것들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 하니, 참으로 하찮은 일을 위해 무명만 기르는 셈입니다.
9-13
일단의 생사를 해결하는 공안을 아직 타파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납월 삼십일 임종이 닥치면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안광이 떨어질락말락 죽기직전에 잠깐이나마 염라대왕을 향해 말해보십시오.
“제가 잠시 정신을 맑히고 생각을 안정되는 때를 기다려 물러났다가 만나면 어떻습니까?”
당장 이 때가되면, 종횡으로 걸림없는 변설도 쓰지 못하고 마음이 목석같더라도 쓰지 못합니다. 모름지기 당사자의 생사심을 타파해야만이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약 생사심을 깨부수게 되면, 따로 무슨 정신을 맑히고 생각을 안정시킨다는 말을 하겠으며, 따로 무슨 종횡으로 탁트였다는 말을 하겠으며, 따로 무슨 내전과 외전을 말하겠습니까?
9-14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알고, 하나를 깨치면 일체를 깨치고,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즉득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뭉치 실타래를 자르는 것과 같아서 한번 자르면 일시에 끊어지게 됩니다. 끝없는 법문을 증득하는 것도 그러해서 별도의 순서가 없습니다.
그대가 이미 구자무불성 화두를 깨달았으니, 그렇다면 이와 같습니까? 만약 이처럼 증득하지 못했다면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미 이르렀다면 마땅히 이러한 법문으로 대비심을 일으켜서 역경계 순경계 어디서든 진창에 뛰어들어 목숨을 아끼지 말고 구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체 중생 제도하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지니, 바야흐로 이것이 대장부의 할 일입니다. 이와 같지 않다면 옳다 할수 없습니다.
9-15
언충은 공자가 “역법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을 끌어다가 부처님 말씀 가운데 “응당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것과 모아서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또한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끌어다가 “토목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이는 더욱 우습기만 합니다.
그에게 말합니다. 무간지옥의 업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부처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그렇기에 경에 말씀하십니다.
“색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라.”
이는 광대한 적멸의 묘심은 색으로 볼 수 없고 소리로도 구할 수도 없음을 말합니다.
9-16
‘응당 머무는 바 없음’은 이 마음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이 마음이 진여를 떠나서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공자가 ‘역법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도라고 한다’함은 이것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거듭한다는 뜻이고, 변한다는 것은 고친다는 뜻입니다. 길흉과 후회나 인색함이 움직임에서 생깁니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은 언제나 돌아가며 도와 하나되는 것이니, 어찌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합쳐 한덩어리가 되겠습니까?
언충은 비단 부처님의 뜻도 모를 뿐만아니라, 공자의 의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나고 듦이 마치 정원을 노닐며 관상하듯 하며, 우리 불교의 가르침에도 문지방 넘나들 듯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산승의 이렇게 꽉막힌 말들이 과연 옳다고 여겨집니까?
9-17
그러므로 규봉선사가 말하였습니다.
“원형이정은 하늘의 덕이니 한 기운에서 비롯한 것이고, 상락아정은 부처님 덕이니 한 마음이 근본이다. 한 기운 오롯이하여 지극히 부드러워지고, 한 마음 닦아서 불도를 이룬다.”
이분의 이같은 회통화합이라야 비로소 유가와 석가의 두 가르침에서 치우침 없이 여한이 없으리라.
언충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역지루변’이라는 말과 큰 뜻은 같다고 하는 것은 감히 허락할 수가 없다. 만약 언충의 분별에 따른다면 공자와 석가 어른들을 죽여 짚신이나 사재끼는 늙은이로 만든 셈이다. 어떤 까닭인가. 한 사람은 끊임없이 옮겨다니고, 한 사람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여기까지 읽고나면 필시 기가 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