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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육조단경 우리말 - 우학스님 - 한국불교대학

출처 수집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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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六祖壇經) 한글

 


편저 - 한국불교대학 교재편찬회
감수 - 無一(무일) 우학스님


略序
약서

 

대사의 이름은 혜능이다.
아버지는 노씨로서 휘는 행도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대사는 당나라 정관12년 무술년 2월 8일 자시에 태어나셨는데, 그 때에 백호의 광명이 허공에 떠오르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새벽녘에 범상치 않은 두 스님이 찾아와서 대사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밤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하면 위에 자는 혜로, 아래 자는 능으로 하십시오.” 하였다.
아버지가“어찌하여 혜능이라 합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이 말씀하기를 “<혜>라는 것은 법으로써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고, <능>이라하는 것은 부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말을 마치고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대사가 젖을 먹지 않았는데 밤이 되면 신인이 와서 감로를 먹여 주었다.  
자라나서 나이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아 황매로 가서 인가를 구하였더니, 오조가 법기로 여기시어 가사와 법을 전하시며 조사의 자리를 잇게 하시니, 때는 용삭 원년 신유년(당 고종 12년) 이었다. 

남으로 되돌아가 은둔하신지 16년이 되는 의봉 원년 병자년 정월 8일에 인종법사와 만났는데 인종이 대사의 종지를 깨달아 모든 면에서 뜻이 서로 잘 맞으므로 이달 15일에 사부 대중을 널리 모아서 대사의 머리를 깎고 2월 8일에 여러 이름 있는 대덕스님들을 모아서 구족계를 주시었다.
서경의 지광율사는 수계사가 되고 소주의 혜정율사는 갈마사가 되고 형주의 통응율사는 교수사가 되고 중천축의 기다라율사는 설계사가 되고 서국의 밀다삼장은 증계사(證戒師)가 되었다.
그 계단은 송나라 때의 구나발다라 삼장이 처음 세우실 때 비를 세우며 이르시길 「후일에 육신보살이 여기에서 계를 받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양나라 천감 원년(서기502년)에 지약삼장이 서축국(서인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그 땅에서 가져온 보리수 한 그루를 이 단가에 심으시며 미리 예언하기를「170년 뒤에 육신보살이 이 나무 아래에서 가장 훌륭한 법을 열고 연설하여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할 것인데 참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법의 주인이시다.」하시더니, 대사가 이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으며 또 사부대중과 더불어 단전(깨달음은 언어나 문자로 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밖에 전할 수 없다는 뜻)의 법지를 열어 보이시니 한 결 같이 예전에 예언하신 바와 꼭 같았다.

다음해 봄에 대사가 대중을 하직하고 보림사로 돌아가시니 인종화상이 재가자 및 출가자 천여명과 함께 전송하였다.
바로 조계산으로 가셨는데 그 때 형주의 통응율사가 학인 수백 명과 함께 대사를 의지하여 머물렀다.
대사가 조계산의 보림사에 이르러 보니 당우가 너무 좁아서 대중을 수용하기엔 부족함을 보시고는 넓히시려고, 마을 사람인 진아선을 찾아가 만나 말씀하시길 “노승이 단월에게 이르러 좌구 깔 땅을 구하고자 하는데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시니 진아선이 말하기를 “화상의 좌구가 얼마나 넓습니까?” 하므로 조사가 좌구(앉거나 누울 때 까는 방석)를 내어 보이시자 진아선이 허락하므로 조사가 좌구를 한번 펴니 조계의 사방경계를 다 덮었는데 사천왕이 몸을 나타내어 사방에 앉아 눌렀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천왕령은 이때의 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진아선이 말하기를 “화상의 법력이 크고 넓으신 것을 알겠습니다마는 저의 고조의 분묘가 이 땅에 있으니 후일 사찰을 지으시더라도 그대로 남겨두실 것을 바라며 나머지는 원 대로 모두 드리니 영원히 절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땅은 생룡(살아있는 용)과 백상(흰 코끼리)이 뻗어 내린 맥이므로, 높고 낮은 데로 지을지언정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짓지는 마십시오.” 하였기에 뒤에 절을 지을 때 한 결 같이 그 말대로 하였다.
대사가 경내를 다니시다가 산수가 뛰어난 곳에 번번이 머물러 쉬시다가 13개의 난야(수행처소)를 세우셨는데 오늘날 화과원이라는 이름으로 절 문에 써 놓은 곳이다. 
이 보림 도량은 역시 이보다 앞서 서국(인도)의 지약삼장이 남해로부터 와서 조계의 어귀를 지날 때에, 물을 한 모금 움켜 마시고 향기로운 맛을 이상히 여기어 그 제자에게 일러 말씀하시길 「이 물이 서천의 물과 다르지 않으니 시냇물 저 위에는 반드시 뛰어난 땅이 있을 것이고 도량을 세울만할 것이니라.」하시며 흐르는 물을 따라가 그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과 물이 감아 돌고 산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므로 감탄을 하며 말씀하시길 「완연히 서천의 보림과 같구나.」하시며 조후촌의 사람들에게 「이 산에 절을 하나 지으십시오. 170년 뒤에 마땅히 위없는 법을 이곳에서 연설하고 교화하여 도를 얻는 자가 수풀과 같을 것이니 응당 보림이라 이름 하시오.」 하셨다.
그때 소주 목사인 후경준이 그 말씀을 표로 갖추어 왕에게 상주하니 임금이 그 청을 옳게 여겨서 <보림>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시어 절을 지었는데 양나라천감삼년(서기503년)에 낙성을 하였다.
절의 전각 앞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용이 항상 그 속에서 출몰하여 숲의 나무를 흔들어 꺾어 놓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아주 큰 형상으로 나타났기에, 물결이 솟아오르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어 대중들이 모두 두려워하므로 대사가 꾸짖으시며, “네가 큰 몸으로만 나타날 수 있지 작은 몸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이구나. 만약 신령스런 용이라면 마땅히 변화하여 작은 몸을 크게 나타내고 큰 몸을 작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니 그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조금 있으니 다시 작은 몸으로 나타나 못 위에 뛰어 나오므로, 대사가 발우를 펴 보이시면서 “네가 감히 노승의 발우 속에는 들지 못할 것이다.” 하시니 용이 나르다시피 헤엄쳐 앞에 이르므로 대사가 발우에 담으시니 용이 움직이지 못하였다.
대사가 발우를 법당에 가지고 가서 용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니 용이 마침내 뼈를 벗고 사라졌다. 
그 뼈의 길이가 칠촌이나 되고 머리와 꼬리와 뿔과 발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절에 전해져 오고 있다. 
대사가 후에 흙과 돌로 그 못을 메우셨는데 지금의 전각 앞 좌측에 철탑으로 누른 곳이 바로 그 곳이다. 

 


第一 行由品 
제일 행유품

 

그때에 대사께서 보림에 이르시자 소주의 위 자사가 관료들과 함께 산에 들어와서 대사께 대범사의 강당에서 대중을 위하여 인연을 열어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주시기를 청하므로 대사가 자리에 오르시니 자사와 관료30여명과 유교의 선비 30여명과 비구와 비구니와 도를 닦는 이와 속인 등 천 여명이 다 같이 절을 하고 법문 듣기를 원하므로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보리의 자성이 본래 맑고 깨끗하니 다만 이 마음만 쓰면 바로 성불 할 것이니라.
선지식아! 또 나의 행적과 법을 얻은 내용을 들어보아라. 
나의 선친은 본관이 범양인데, 좌천되어 영남으로 내려가 신주의 백성이 되셨다.
이 몸이 불행하여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늙은 어머니와 외롭게 남았는데, 뒤에 남해로 와서 가난한 살림에 쪼들리어 고생을 하며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서 객점으로 갖다 달라 하시므로 손님에게 갖다 드리고 돈을 받아서 문밖으로 나오다가 어떤 손님이 경 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경을 잠깐 들으니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하므로 마음이 곧 열리고 깨쳐서 
「손님께서 무슨 경을 외우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손님이 「금강경입니다」하시므로, 다시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지니고 계십니까?」 하였더니 손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기주의 황매현 동선사에서 왔습니다. 그 절에는 오대조인 홍인 대사가 계시면서 교화를 하시는데 문인이 천여 명이나 됩니다. 저도 그 곳에 가서 예배하고 이 경을 듣고 받아 왔습니다. 대사께서는 항상 스님들과 속인들에게 권하시기를, ‘다만 금강경만 받아 지니면 스스로 견성하여 바로 성불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숙세에 인연이 있었는지 그 손님이 은 열 냥을 나에게 주시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을 마련해 놓고 바로 황매에 가서 오조에게 예배하라 하시므로 나는 어머니를 편안히 모셔놓고 하직하여 30여일이 못되어 황매에 다다랐느니라.
오조께 예배하니 나에게 물으시기를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물건을 구하고자 하는고?」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의 신주에 있는 백성인데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부처님 되기를 구할 뿐 나머지 물건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조사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영남 사람이라면 곧 오랑케인데 어떻게 부처님이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시므로 내가 말씀드리기를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습니다만,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케의 몸이 화상과는 같지 않습니다만 불성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하였더니 오조께서 다시 말씀을 하시려다가 대중들이 좌우에 모여 있음을 보시고 이내 「대중을 따라가서 일이나 하라.」 하시므로 내가 말씀드리기를 「혜능이 화상께 여쭙겠습니다. 제자는 자기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이 곧 복전이라고 아는데, 화상께서는 무슨 일을 하라 하시는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오조가 말씀하시기를 「이 오랑캐가 근성이 너무 날카롭구나. 너는 여러 말 하지 말고 방앗간에나 가 있거라.」하시었다.
내가 물러 나와 후원에 이르니 한 행자가 나에게 나무를 쪼개고 방아를 찧게 하였는데, 8개월 정도가 지나서 어느 날 오조가 나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견해가 쓸 만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거친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워서 결국은 너와 함께 말하지 못하였는데 알고 있었느냐?」 하시므로 「제자도 역시 대사님의 뜻을 알았으므로 감히 당 앞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오조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내가 너희들에게 설하리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큰데 너희들은 날마다 온종일 복전만 구하고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는 일은 구하지 않는구나. 자성이 만일 미혹하다면 복으로 어찌 구원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각자 가서 스스로 지혜를 살펴보고 자기의 본심인 반야의 성품을 취하여서 각자 게송을 하나씩 지어서 나에게 갖고 와 바쳐 보이어라. 만일 대의를 깨달았으면 너희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여 제 육대조로 삼으리니 어서 빨리 돌아가되 지체하지 말아라.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맞지 않을 것이니라. 
견성한 사람은 말 아래에 모름지기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사람은 칼을 휘두르는 전쟁터에서 나가더라도 역시 볼 수 있을 것이다」하셨느니라.
대중들이 분부를 받고 물러나와 수군거리며 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생각을 다하여 게송을 지어 화상에게 바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신수상좌가 현재 교수사이시니 반드시 이분이 그것을 얻을 것인데 우리가 부질없이 게송을 짓는 것은 마음만 헛되이 수고할 뿐이다」 하므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다 마음을 놓으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후에 신수에게 의지할 것인데 어찌 번거롭게 게송을 지으리오.」라 하였다.  
신수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저희들의 교수사가 된 때문이니 내가 모름지기 게송을 지어서 화상에게 바쳐야겠다.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화상이 어떻게 내 마음속의 견해가 깊은지 옅은지를 아시겠는가?  
내가 게송을 바치려는 뜻은 법을 구하는 것이며 좋은 일이나 조사의 자리를 찾는데 있다면 나쁜 일이며 도리어 범부의 마음과 같아서 그 성인의 자리를 빼앗음과 어찌 다르겠느냐.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결국은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니 크게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였다.
오조의 당 앞에는 복도가 세 칸 있었는데, 공봉(재주와 기예가 있는 사람에게 준 벼슬 이름)인 노진을 청하여 능가경의 변상도와 오조의 혈맥도를 그려서 전하여 내려가며 공양하게 하도록 하려는 중이었다. 
신수가 게송을 바치려고 여러 번 당 앞에까지 갔었는데 마음이 황홀하고 온 몸에 땀이 흐르는지라 바치려는 생각을 못 내어 전후 4일 동안 열 세 번이나 게송을 바치지 못하였다.
신수가 이에 생각하기를 ‘복도 아래에다 적어두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화상이 다니시다가 보시고, 만일 좋다고 말씀하시면 곧 나아가 예배하며, 이 신수가 지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만일 마땅치 못하다고 말씀하시면 헛되이 산중에 들어와서 여러 해 동안 다른 사람의 예배만 받은 것이니 다시 무슨 도를 닦겠다고 하겠느냐’ 하며 이날 밤 삼경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직접 등을 잡고 남쪽 복도의 벽 사이에 게송을 써서 마음의 소견을 바쳤다.
게송에 이르기를, 

몸은 곧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들어붙지 않도록 할지어다.  
 
신수가 게송을 다 쓰고 곧 방에 돌아왔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알지 못하였는데, 신수가 다시 생각하기를 ‘오조가 밝은 날 게송을 보시고 기뻐하시면 법과 내가 인연이 있는 것이지만 만일 잘 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 나 자신이 미혹한 것이며 숙세의 업장이 두꺼워 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성인의 뜻은 헤아리기가 어렵구나.’하며 방안에서 이런 생각으로 앉았다 누웠다하며 불안해하였는데 바로 오경이 되었고, 조사께서는 신수가 자성을 보지 못하여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음을 이미 아시고 계셨다.
날이 밝자 오조께서 노 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의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시려다가 홀연히 그 게송을 보고 공봉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될 것이네. 그대가 멀리 오느라 수고만 하시었네. 경에 이르시기를 ‘무릇 모양 있는 바는 모두 다 허망하다.’ 하였으니 이 게(偈)만 두어서 사람들에게 외우고 지니게 하겠네.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고,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큰 이익이 있을 것일세.」하시고는 문인으로 하여금 향을 사르게 하고 예경하게 하시며 「이 게송을 다 외우면 곧 견성하게 되느니라.」하시니 문인들이 이 게송을 외우며 모두 다 훌륭하다고 찬탄하였느니라. 
오조께서 삼경에 신수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게송을 네가 지었느냐?」 라고 물으시니 신수가 말하기를 「실로 제가 지었으나 감히 망령스럽게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로 살펴주십시오. 제자에게 조금마한 지혜라도 있습니까?」하므로 오조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다만 문 밖에 이르렀을 뿐 문 안에는 들지 못한 것이니라. 
이와 같은 견해로는 위없는 보리를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라. 
위없는 보리는 모름지기 말 아래에 자기의 본심을 알고 자기의 본성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임을 알아서 어느 때라도 만법이 막힘이 없으므로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참되어 만 가지 경계가 스스로 여여(성품에 어긋남이 없고 영원불변한 진실의 모습)한 것임을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보아야 한다. 
여여한 마음이 곧 진실이니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곧 위없는 보리의 자성이니라.
너는 가서 하루 이틀 더 생각하여보고 게송을 다시 지어서 나에게 가져와 보여라. 너의 게가 만일 문에 들어 왔으면 너에게 가사와 법을 맡기겠노라.」
신수가 예를 갖추고 물러나와 며칠을 보냈지만 게송을 짓지 못해 마음이 혼란하고 정신과 생각이 불안하여 마치 꿈속과 같았으며 앉거나 움직이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다시 이틀이 지난 뒤에 어떤 동자가 방앗간을 지나면서 그 게송을 소리 내어 외우기에 내가 한번 들어보니 이 게(偈)는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가르침은 받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큰 뜻을 알았기에 동자에게 묻기를 「외우는 것이 무슨 게송입니까?」하였더니 동자승이 말하기를 「너 이 오랑캐야 그것도 모르느냐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부탁하여 전하려 한다.’ 하시며 문인들로 하여금 ‘게송을 지어 와서 보여라.  만일 큰 뜻을 깨달았다면 곧 가사와 법을 맡기고 제 육조를 삼으리라.’ 하셨기에 신수상좌가 남쪽 복도의 벽 위에 무상게송을 쓰셨는데 대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이 게송을 외워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스님, 내가 이 방아를 밟은 지가 8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당 앞에 가 보지 못하였으니 스님께서 게송 앞으로 인도해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하였더니 동자가 게송 앞에 이르러서 예배하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능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청컨대 스님께서 읽어주십시오.」 하였다.  
그때에 강주의 별가(자사의 다음벼슬)가 성은 장이요, 이름은 일용이라 하는 이가 문득 큰소리로 읽기에 내가 듣고서 말하기를 「내게도 게(偈)가 하나 있으니 별가께서 써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더니 별가가 말하기를 「오랑캐야, 너도 게송을 짓겠다 하니 그 일이 희유하구나.」하므로, 내가 별가에게 말하기를 「위없는 보리를 배우고자 하는데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낮고 낮은 사람이라도 높고 높은 지혜가 있을 수 있고 높고 높은 사람이라도 생각과 지혜가 없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을 가볍게 여기면 곧 한량없고 가없는 죄가 될 것입니다.」
별가가 말하기를 「너는 다만 게송을 외워라 내가 너를 위하여 써 주리라. 네가 만약 법을 얻으면 나부터 꼭 제도하여 주어라. 이 말을 잊지 말아라.」 하므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보리수 본래 없고 
명경 또한 대가 아님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 앉고 때가 끼겠는가!

이 게송을 써 놓으니 대중이 다 놀라며 감탄하거나 의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서로에게 말하기를 「기특하다. 사람은 모양만으로는 알 수가 없구나. 어찌하여 오랫동안 저 육신보살을 부렸던가.」
조사께서는 대중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김을 보시고 사람들이 해칠까 두려워하시어 마침내 신발로 게송을 문질러버리며 말씀하시기를 「역시 성품을 보지 못하였다.」하시니 대중들이 그런 줄 알았다.
다음날 조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내가 돌을 허리에 달고 쌀을 찧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하시며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하시기에 「쌀을 찧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체로 치지를 못 했습니다.」 하였더니, 조사가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시고 나가시므로 곧 조사의 뜻을 알아 치리고 삼경에 방으로 들어가 뵈오니 조사께서 가사로 주위를 막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시고 금강경을 설하여 주셨는데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하는 구절에 이르러 그 말씀 아래 일체 만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크게 깨닫고서 조사께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기약(때를 정하여 약속함)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나고 멸하지 않음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내는 줄 기약했겠습니까?」
조사께서 내가 본성을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본심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 무슨 이익이 있으랴.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곧 장부, 천인사, 불이니라」하셨다.
삼경에 법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돈교(말 아래에 대번에 깨치는 것)와 가사와 발우를 전하시면서 「네가 이제 제 육대조가 되었으니 스스로 잘 보호하고 지켜서 널리 유정(有情)을 제도하고 장래에 유포하여 단절되지 않게끔 하여라.」하시며 게송을 하셨다. 

유정이 와 종자를 내리니
인지(因地)에서 결과가 다시 나도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는지라. 
성품도 없고 태어남도 없도다.

조사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달마대사가 처음 이 땅에 오시니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 가사를 전하며 믿음의 바탕으로 삼아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것인데 법은 곧 마음으로 마음을 전해서 누구나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이 오직 본체를 전하시고 조사와 조사가 은밀히 본심을 부탁하신 것이다.
가사는 다툼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니 너에게서 그치고 전하지 말아라. 만일 이 가사를 전하면 목숨이 실에 달린 것과 같으리라. 너는 속히 떠나거라.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렵구나.」하시므로, 
내가 「어느 곳으로 가면 좋겠습니까?」하였더니 「회(懷)를 만나면 머물고 회(會)를 만나면 숨어라.」하셨다.
내가 삼경에 의발을 받아들고 「저는 본래 남쪽 사람이라서 이 산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강가에 까지 갈 수 있습니까?」 하였더니,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기 직접 너를 보내어 주겠노라.」하셨다. 
조사가 배웅하시기 위해 구강나루에 이르시니, 배가 한 척 있으므로 조사께서 나를 배에 오르게 하시고 직접 노를 잡고 저으시기에 내가 「청컨대 화상께서는 앉으십시오. 제자가 노를 젓겠습니다.」 하였더니 「내가 너를 건네어 주겠노라.」하시므로 「제가 미혹 했을 때에는 스님께서 건네 주셨지만, 깨닫고 나서는 스스로 건너는 것이 옳은가 합니다. 건넌다는 이름은 비록 하나이나 쓰는 곳은 같지 않습니다. 혜능이 변방에서 태어나 말조차 바르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법을 받아 이제 깨달음을 얻었사오니 다만 자성으로 스스로 건너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압니다.」 
하였더니 조사가「옳고도 옳도다. 이후에 불법이 너를 말미암아 크게 번성하겠구나. 네가 가고 삼년이 지나면 내가 바야흐로 세상을 버리리니 너는 이제 잘 가거라. 남으로 향하여 가되 마땅히 설하려고 서두르지 말아라. 불법의 난이 일어나느니라.」하셨다.
내가 조사와 하직하고 남쪽으로 걸어 두 달 반쯤이 지나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수백 명이 의발을 빼앗으려고 쫓아왔다.
그 가운데 혜명이라는 스님이 속성이 진씨이었는데 본래는 장군이라서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사나웠다. 온갖 힘을 다하여 찾으며 대중들의 맨 앞에서 나를 쫓아 왔으므로 나는 바위 위에 올려놓고「이 가사는 믿음의 표시인데 힘으로 다툴 수 있겠느냐?」하고는 풀 속에 숨어 있었다. 
혜명이 이르러서 잡아 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자 큰 소리로 「행자여, 행자여,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지 가사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하므로 
내가 나와서 반석 위에 앉으니 혜명이 절을 하고 「바라건대 행자는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해서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법을 위해 왔으므로 가히 모든 인연을 막아 쉬어서 한 생각도 내지 마십시오. 내가 그대를 위하여 설하겠습니다.」하고는 조금 있다가 혜명에게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 면목입니까?」하였더니, 혜명이 그 말 아래에 크게 깨닫고 다시 묻기를 「처음의 조사 이래로 내려오는 비밀한 말씀과 비밀한 뜻 이 외에 또다시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하므로 내가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대가 만일 돌이켜 비추면 비밀이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하였더니 혜명이 말하기를 「혜명이 비록 황매에 있었으나 실로 자기의 면목을 살피지 못 하였는데 이제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부아야 차가운지 더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행자께서는 혜명의 스승이십니다.」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이와 같다면 나와 그대는 함께 황매를 스승으로 삼은 바이니 깨달음 그 마음을 놓치지 말고 보호하여 지녀야 하느니라.」하였다.
혜명이 또 묻기를 「혜명은 이제 어느 곳으로 가야 되겠습니까?」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원(袁)을 만나면 머무르고 몽(蒙)을 만나면 그 곳에 서 살아라.」하였더니 혜명이 절하고 하직하였느니라.

내가 뒤에 조계에 이르렀으나 또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는 바가 되어서 사회현으로 피난하여 사냥을 하는 사람들 틈에 무릇 15년을 지냈다. 
때로는 사냥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함을 따라 법을 설하였는데 사냥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물을 지키게 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놈만 보면 다 놓아주었으며 언제나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채소를 고기 삶는 냄비위에 얹어서 익혀먹었는데 혹 누가 물으면 「고기 곁의 채소만 먹는다.」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생각하기를 마땅히 법을 펼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어 있는 것은 옳지가 않겠다 싶어 산에서 나와 광주의 법성사에 이르렀는데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 한 스님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 하시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시며 의논을 그치지 않으므로 내가 나아가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하였더니 모여 있던 대중들이 놀랐으며 인종이 상석으로 맞아 들여 깊은 뜻을 추궁하여 물었는데 나의 말이 간략하고 이치가 합당하며 문자에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보고 인종이 말하기를 「행자는 보통사람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오래전에 듣기를 황매의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왔다 하던데 행자님이 아니십니까?」하기에 내가 「부끄럽습니다.」하였더니 인종이 제자의 예를 갖추며 전해져 내려오는 의발을 대중에게 내어 보이기를 청하고는 다시 묻기를 「황매께서 부촉하시면서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가르쳐 주신 것은 없습니다. 오직 견성만을 의논하였을 뿐 선정과 해탈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더니 인종이 「어찌하여 선정과 해탈을 의논하시지 않았습니까?」하므로  「그렇게 되면 두 가지 법이 되어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은 두 가지 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인종이 다시 묻기를「어떤 것이 불법의 둘이 아닌 도리입니까?」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법사께서 열반경을 강의하시여 밝게 불성을 보는 것이 불법의 둘 아닌 도리입니다. 열반경에서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사중금계(살생, 투도, 사음, 망어)를 범한 자와 오역죄를 지은 자와 일천제(선근이 아주 끊어진 자)들은 마땅히 선근과 불성을 끊은 것이 옵니까?’ 하였더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근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常)이요, 둘은 무상(無常)인데 불성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둘이 아니다 하시며 하나는 선한 것이고 둘은 선하지 않는 것인데 불성은 선한 것도 아니고 선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 하여 둘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오온과 십팔계(육근, 육경, 육식)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닌 줄을 꿰뚫어 아나니 둘 없는 성품이 곧 불성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합장하며 말하기를 「제가 경을 강의 하는 것은 오히려 깨진 기와조각과 같은데 인자께서 논의 하시는 것은 마치 순금과 같습니다.」 하였느니라.
이에 나의 머리를 깎아 주고 스승으로 섬기기를 원하였으므로 내가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동산법문을 열게 된 것이니라. 
내가 동산에서 법을 얻고 나서 갖은 고생을 모두 받아 목숨이 마치 실낱과 같았는데 오늘날 위사군과 관료들과 비구와 비구니와 도를 닦는 사람과 세속의 사람들과 더불어 이와 같은 모임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누 겁(累劫)의 인연이 아닐 수 없구나.
또한 과거 생 가운데에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여 같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와 같은 돈교와 법 얻은 인연을 듣게 된 것이니라. 
가르침은 옛 성현들께서 전하신 것이지 나의 지혜가 아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듣고 싶은 사람은 각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듣고 나서는 각자가 궁금함을 없애어 옛 성인과 다름이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대중이 법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第二 般若品 
제이 반야품

 

다음날 위사군이 다시 청하므로 대사께서 자리에 오르셔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두 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생각하여라.” 하시며 대사가 다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게 되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 있는 사람이나 불성은 차별이 없는데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느니라. 이 때문에 어리석음이 있고 지혜로움이 있는 것이니라. 내가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로 하여금 각각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선지식아, 세상 사람들이 온종일 입으로는 반야를 말하지만 자성의 반야를 알지 못하니 마치 밥 먹는 것을 이야기로만 하면 배는 부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겁이 지나더라도 견성할 수 없으니 결국은 아무 이익도 없느니라.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인데 여기 말로는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는 모름지기 마음으로 행할 것이지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느니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환(幻)과 같고 화(化)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할 것이다.
본성이 곧 부처이므로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 하는가 하면 마하는 곧 크다는 뜻이다. 마음의 양은 크고 넓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나 가가 없으며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거나 작지 않으며, 또 푸르거나 누렇거나 붉거나 희지도 않으며, 위와 아래와 길거나 짧은 것이 없으며 또한 성낼 것도 기쁠 것도 없으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나 꼬리가 있는 것도 아님이라.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다 허공과 같음이니 세상 사람들이 묘한 성품은 본래 공(空 ) 하여서 한 가지도 얻을 게 없으니 자성의 진공(眞空)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내가 설한 <공>을 듣고 공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제일 먼저 공에 걸리지 말아라. 
만일 마음을 비우고 앉아 있기만 하면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선지식아, 세계의 허공이 삼라만상을 다 가질 수 있어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강과 대지와 샘과 개울과 풀과 나무와 숲과 악인과 선인과 악법과 선법과 천당과 지옥과 일체의 큰 바다와 수미산을 비롯한 모든 산들이 모두 다 이 허공중에 있다.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공>한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자성은 능히 만법을 머금을 수 있으므로 큰 것이다.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으니 만일 모든 사람들의 악과 선을 보더라도 모두 다 취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하여 마음이 허공과 같음을 이름 하여 크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하>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 어떤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백가지 생각을 없앤 것으로 스스로를 크다고 말하지만 이런 사람들과는 함께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삿된 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선지식아, 마음의 크기는 넓고 커서 법계에 두루 하며 그 작용이 아주 분명하니 그 쓰임새에 바로 일체를 알며 일체가 곧 하나고 하나가 곧 일체여서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롭고 마음자리에 막힘이 없는 것이 곧 반야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반야지혜는 모두 다 자성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뜻을 그릇되게 쓰지 않는 것을 참된 성품을 스스로 쓰는 것이라 한다.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참되느니라.
마음으로 큰 일만 헤아리고 작은 도라도 행하지 아니하면서 입으로 종일토록 공을 말하지 말라. 
마음으로 이 행을 닦지 않으면 마치 범부가 스스로는 국왕이라 칭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런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선지식아, 무엇을 <반야>라 하느냐? 
반야는 당나라 말로 지혜이며 어는 곳 어느 때라도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아니하여 항상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생겨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반야를 보지 못하므로 입으로만 반야를 말하고 마음속은 언제나 어리석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반야를 닦는다.」하며 생각 생각에 공을 말하지만 진공(眞空)은 알지 못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으며 지혜로운 마음이 곧 이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이해를 하면 이것이 곧 반야지혜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이름 하는냐? 이것은 서국의 말인데 당나라 말로 하면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고 생멸을 떠난다는 뜻이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나니 물에 물결이 있는 것과 같은 이것이 곧 이 언덕이고,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어지므로 물이 잠잠함이 곧 저 언덕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는지라 외울 때는 망령됨이 있고 그릇됨이 있지만 생각 생각에 만일 행을 하면 이것이 참된 성품이니라.
이 법을 깨닫는 것이 곧 반야법이요, 이 행을 닦는 것이 곧 반야행이니라.
닦지 않으면 범부요, 일념으로 수행하면 자신들이 부처님이니라.
선지식아, 범부가 곧 부처님이며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다.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곧 번뇌고 뒷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곧 보리니라.
선지식아, 마하 반야바라밀이 가장 높고 가장 위이며 가장 으뜸이다. 
머무름도 없고 지나가는 것도 없으며 또 오는 것도 없어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여기에서 나오느니라.
마땅히 큰 지혜를 써서 오온의 번뇌와 망상을 타파하여라.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반드시 불도를 이루며 삼독이 변하여 계, 정, 혜가 되리라.
선지식아, 이 법문은 하나의 반야에서 팔만 사천의 지혜를 내는데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팔만사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니라.
만일 번뇌가 없으면 지혜가 항상 나타나서 자성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을 깨닫는 자는 곧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함도 없어서 미친 망령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자기의 진여성(참되고 참된 성품)을 쓰므로 지혜로써 미루어 보아 일체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견성하여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선지식아, 만일 매우 깊은 법계와 반야삼계에 들고자하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고 금강반야행을 지니고 외워야 되느니라. 그러면 견성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공덕이 한량없고 끝없다는 것을 경 가운데에서 분명히 찬탄하였는데 말로써는 다할 수가 없느니라.
이 법문은 곧 최상승이고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라. 
근기가 낮고 지혜가 얕은 사람이 들으면 믿지 않는 마음이 생기리라.
왜냐하면 비유하건대, 큰 용이 염부제에 비를 내리면 도시와 마을이 모두 다 떠내려가는 것이 대추 나뭇잎이 떠내려가는 것과 같지만 만일 큰 바다에 비를 내리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대승인과 최상승인이 금강경을 들으면 마음이 열리어 깨닫느니라.
그러므로 본성에는 원래 반야의 지혜가 있으며 스스로 지혜를 써서 항상 관조하므로 문자를 빌리지 않는 것임을 아느니라.
비유하건대 비와 물이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용이 일으켜서 일체 중생과 일체 초목과 유정과 무정들을 모두 다 윤택하게 하고, 백가지의 강으로 흐르다가 마침내는 큰 바다에 들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과 같이 중생의 본성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근기가 낮은 사람이 이 돈교를 들으면 뿌리가 약한 작은 초목이 만약 큰비를 만나게 되면 뿌리가 뽑히고 뒤집혀져서 자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근기가 낮은 사람도 역시 이와 같이 원래 반야의 지혜가 있으며 지혜가 큰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어찌하여 법을 듣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가하면 삿된 소견으로 업장이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인데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릴 때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햇빛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도 역시 크거나 작은 것이 없는데 일체의 중생이 자신의 마음에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하여 밖으로만 보고 닦으며 부처를 찾으려 할 뿐 자성을 깨닫지 못하나니 이것은 곧 근기가 낮기 때문이니라.
만일 돈교를 깨달아서 밖으로 닦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항상 정견을 일으켜서 번뇌와 세속 일에 대한 괴로움이 항상 물들지 못하게 하면 이것이 곧 견성이니라.
선지식아, 안과 밖에 머무르지 말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면 일체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며, 능히 이 행을 닦으면 반야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수다라와 문자로 되어 있는 대, 소 이승의 십이부경이 모두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 사람이 없다면 일체 만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만법은 본래 사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일체의 경서는 사람이 설하므로 있는 것이니라.
그 사람을 인연하는 가운데에 어리석음이 있고 지혜로움이 있어서 어리석음을 소인이라 하고 지혜로움을 대인이라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법을 설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깨달아서 마음이 열리면 곧 지혜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선지식아, 깨닫지 못하면 부처님이 곧 중생이요, 한 순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님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만법이 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신의 마음 가운데로부터 진여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본원 자성은 원래 청정하니 만일 자기의 마음을 알아서 자기의 성품을 보면 모두 다 불도를 이룬다.」하였으며, 정명경에서는 「즉시에 확 트이면 다시 본심을 얻는다.」하였느니라.
선지식아, 내가 홍인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번 듣고 말씀 아래에 문득 깨달아서 진여의 본성을 보았기에 이 교법을 널리 펴서 도를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단번에 보리를 깨달아서 각자 스스로 마음을 살피고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려 하는데 만일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이해하는 큰 선지식을 찾는 것이 바른 길을 봄이니 이 선지식이 큰 인연 있음이라.
이른바  교화하고 인도해서 견성을 얻게 하는데 일체 선법이 선지식으로 인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니라.
삼세제불의 십이부경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있으며 본래 스스로 갖춰 있건마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여야 바야흐로 보게 되느니라.
만일 스스로 깨닫는 자는 밖으로 구함을 빌리지 않느니라.
만일 한쪽만 고집하며 모름지기 다른 선지식을 의지하여 해탈을 얻음을 희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 안에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인데 만일 삿된 미혹을 일으켜서 망령된 생각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비록 가르쳐 주더라도 구원되지 못하리라.
만일 바르고 참된 반야를 일으켜 관조하면 한 찰나 사이에 헛된 생각이 모두 다 없어질 것이며 만일 자성을 알아서 한번 깨달으면 곧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리라.
선지식아, 지혜로 관조하면 안과 밖이 분명하게 통하여 자기의 본심을 알게 된다.
만일 본심을 알면 본래 해탈이요, 만일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무념이니라.
무엇을 무념이라 하는가 하면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이것을 무념이라 하느니라.
작용하여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으로 하여금 육문(육근)을 나오더라도 육진 가운데 물들지 않고 섞이지 않아 오고 감이 자유롭고 통용에 막힘이 없는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 해탈이고 무념행이라 이름 하느니라.
만일 백가지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생각으로 끊으려하면 이것은 법에 얽히는 것이라서 변견(극단으로 치우쳐 집착하는 견해)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만법이 다 통하며,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선지식아, 후대에 나의 법을 얻은 자가 이 돈교 법문을 가지고 견해가 같아서 같은 행을 하는 사람에게 받아 지니도록 원을 세워 부처님 섬기는 것 같이 하며 몸이 다하도록 물러나지 않으면 반드시 성인의 지위에 들리라.
그러나 위로부터 묵묵히 전해 내려오는 분부를 다시 전해주어서 그 정법을 숨기지 말아야 하겠지만 견해가 같지 않고 행이 같지 않는 다른 법에 있는 자에게는 당부하며 전하지 말아라.
그 앞에 있는 사람을 해치어 결국은 이익이 없을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 법문을 비방하여 백겁 천생에 부처님 될 성품을 끊을까 두렵기 때문이니라.
선지식아, 내게 무상송이 하나 있으니 각자 외워 지니어 재가인이거나 출가인이거나 이것을 의지하여 닦아라.
만일 스스로 닦지 않고 나의 말만 기억하면 이익이 없을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말로 통하고 마음이 통함이여 
태양이 허공에 있는 것과 같으니, 
오직 견성하는 법만 전하여 
출세토록 삿된 가르침을 쳐부수도다.

법은 곧 돈과 점이 없건마는
 미(迷)와 오(悟)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네.
다만 견성하는 문을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네.

말로 설하면 비록 만 가지이지만 
이치에 합하면 도리어 하나로 돌아감이니, 
번뇌로 어두운 집 가운데에 
항상 지혜의 햇빛을 낼지어다.

삿된 것이 오면 번뇌가 일어나고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사라지리니, 
삿된 것과 바른 것을 다 쓰지 않으면 
청정하여 남음이 없는데 이르리라.

보리의 근본 자성에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념이라. 
깨끗한 마음이 망념 가운데에 있으니
바르면 세 가지 장애가 없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만일 도를 닦으면 
일체가 다 방해되지 않나니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면 
도와 더불어 곧 서로 맞으리라.

모든 것은 스스로 도가 있어서 
각각 서로 방해하며 괴롭히지 않으니, 
도를 여의고 따로 도를 찾으면 
몸이 다하여도 도를 보지 못하리라.

부질없이 일생을 지내서 
눈앞에 닥쳐서야 뒤늦게 뉘우치나니, 
참된 도를 보고자 하느냐.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곧 도이니라.

스스로 만일 도의 마음이 없으면 
어둡게 행하여 도를 보지 못하나니, 
만일 참으로 도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말아라. 

만일 남의 그릇됨을 보면 
도리어 나의 그릇됨이 되느니라. 
다른 이는 그르고 나는 그르지 않다 하면 
나는 그르지 않다 하는 그것이 스스로 허물이니라.

다만 스스로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물리치고 
번뇌를 쳐부수어 없애버리고 
밉고 고운 데에 관계하지 않으면 
길이 두 다리를 펴고 누우리라.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자 하면 
스스로 모름지기 방편을 쓰라.
저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면 
곧 자성이 나타나리라.

불법이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여의고 깨달음은 없음이니, 
세간을 여의고 보리를 찾으면
마치 토끼 뿔을 구함과 같으니라.

정견의 이름이 출세요, 
사견이 곧 세간이니, 
사와 정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 성품이 완연하리라.

이 송이 바로 돈교며 
또한 이름이 대법선(大法船)이니 
미혹하여 들으면 누겁(累劫)을 지내고, 
깨달으면 곧 찰나 사이니라.

대사가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대범사에서 이 돈교를 설했으니 온 법계의 중생이 말 아래에 견성 성불하기를 원하노라.”
때에 위 사군과 관료와 도 닦는 이와 속인들이 다 함께 대사의 설법을 듣고 살펴 깨닫지 못한 이가 없었기에 함께 예를 올리고 찬탄하기를 “거룩하십니다. 어찌 영남에 부처님이 나오실 것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하였다.

 


第三 疑問品 
제삼 의문품

 

어느 날 위자사가 대사를 위하여 큰 재를 베풀었다.
재를 마치고 자사는 대사를 청하여 자리에 오르시게 하고 관료와 선비와 백성들과 함께 엄숙한 모습으로 거듭 절하고 여쭙기를 “제자가 화상의 설법을 들으니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이제 조그마한 의심이 있으니 원컨대 대자비로 특별히 해설하여 주십시오.” 하니 “의심이 있거든 바로 물어라. 내가 마땅히 설하리라.”하시므로 “화상께서 설하신 바는 달마 대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하니 “그러하니라.” 하시기에 “제자가 듣기로는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 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 무제가 여쭙기를 「짐이 일생동안 절을 짓고 스님들을 공양하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었으니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시니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알지 못하겠으니 원컨대 화상께서 설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라.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절을 짓고 공양하며 보시하고 재를 베푼 것은 이름 하여 복을 구하였을 뿐이다.
복은 공덕으로 삼을 수 없다. 공덕은 법신 가운데 있지, 복을 닦는데 있지 않느니라.”
하시며 또 말씀하셨다.
“성품을 보는 것이 <공>이요, 평등함이 곧 <덕>이다.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어서 항상 본성의 진실한 묘용을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하느니라.
안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 곧 공이요, 밖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덕이며, 자성이 만법을 세우는 것이 곧 공이요, 마음 바탕이 생각을 떠난 것이 덕이며, 자성을 떠나지 않음이 곧 공이요, 대응해 쓰되 물들지 않는 것이 곧 덕이니, 만일 공덕법신(功德法身)을 찾으려 하면 이렇게 하여야만 이것이 참된 공덕이니라.
만일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남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항상 널리 공경하여야 하느니라.
마음으로는 항상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겨서 나를 세우는 마음을 끊지 않으면 곧 스스로 공이 없고 자성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아니하면 곧 스스로 덕이 없음이니라.
나를 세우며 스스로 잘난 체하고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선지식아, 순간순간에 간격이 없는 것이 곧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이니라.
선지식아,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을 안으로 보는 것이지, 보시나 공양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복덕이 공덕과는 다른 것이니라.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또 여쭙기를 “제자가 항상 보니 승과 속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극락에 나기를 원하던데, 청컨대 화상께서 설하여 주십시오. 그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원컨대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위 사군은 잘 들어라. 내가 설하여 주겠노라. 
세존이 사위성에 계실 때에 서방으로 인도하여 교화한다고 설하셨는데 경문에 보면 분명히 이곳에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로 논하여 말한다면 거리가 십만 팔 천리다 하셨는데, 이것은 곧 몸 가운데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가리킨 것으로 멀다고 하신 말씀이다. 
멀다고 설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한 것이고 가깝다고 설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낮고 높은 두 가지가 있으나 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미혹함과 깨달음이 다르므로 견해가 더디고 빠르니라.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곳에 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토가 깨끗하다.」하셨느니라.
사군아,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만 깨끗하면 곧 죄가 없고 비록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느니라.
동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서방에 나기를 구하겠지만 서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어느 나라에 나기를 구할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을 모르므로 몸 가운데 정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동방을 원하고 서방을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를「머무는 곳마다 항상 안락하다」하셨느니라.
사군아, 마음자리가 오직 착하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은데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으면 염불을 하여도 태어나기는 어려우니라.
이제 선지식에게 권하는데 먼저 십악을 없애면 곧 십만리를 가는 것이고 다음에 팔사를 없애면 곧 팔천리를 지나가는 것이니 순간순간에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바르게 행하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면 어찌하여 다시 왕생을 원할 것이며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한다면 어느 부처님이 오셔서 맞아주실 것인가?
만일 무생(無生)의 돈법(頓法)을 깨달으면 서방이 다만 찰나에 있음을 보겠지만 깨닫지 못하면 염불하여 태어나기를 구하더라도 길이 멀 테니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혜능이 그대들에게 서방을 찰나 사이에 옮겨서 눈앞에 문득 보게 하리니 다들 보기를 원하느냐?
대중이 모두 다 큰 절을 올리며, “만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면 구태여 다시 왕생을 원하겠습니까? 원컨대 화상께서 자비로 서방을 나타내시어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하므로 대사가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세상 사람은 자기 육신이 성(城)이고,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은 문이다. 밖으로는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는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땅이며 성품은 임금이니라.
임금이 마음 땅 위에 지내는데 성품이 있으면 임금이 있고, 성품이 가면 임금이 없으며,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니 부처는 성품 가운데를 향하여 지을지언정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아라.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고 자성이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라.
자비는 곧 관세음보살이고 희사(喜捨)는 이름 하여 대세지보살이며 청정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평등하고 바름은 아미타부처님이다.
나다 남이다 하는 생각은 수미산이고 삿된 마음은 바닷물이고 번뇌는 물결이며, 독한 해를 주는 것은 악한 용이고 헛된 망상은 귀신이며, 세상살이의 괴로움은 고기나 자라이며, 탐내고 성내는 것은 지옥이며, 어리석음은 곧 축생이니라.
선지식아, 항상 십선을 행하면 천당에 곧 이르고, <나다> <남이다>를 없애면 수미산이 무너지고 사심이 없으면 바닷물이 마르고 번뇌가 없으면 물결이 잠잠해지고 독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버리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리라.
자기의 마음자리 위에 각성여래가 큰 광명을 놓아서 밖으로 육문을 청정하게 비추면 능히 육욕 제천(六欲諸天)을 깨뜨리고 자성이 안으로 비추면 삼독이 곧 없어지고 지옥 등의 죄가 일시에 소멸하여 안과 밖이 밝게 통하여서 서방과 다르지 않으리라. 이렇게 닦지 아니하면 어떻게 저 곳에 이르겠느냐.”
대중이 설법을 듣고는 자기의 성품을 똑똑히 보고 다 함께 예배하며 다 함께「거룩하시다.」라고 찬탄하고「원컨대 온 법계 중생이 듣고서 한꺼번에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만일 수행하고자 하면 재가불자라도 할 수 있다. 절에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집에 있어도 능히 행하면 동방인으로서 마음이 선한 것과 같고 절에 있어도 닦지 않으면 서방인으로서 마음이 악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만 청정하면 이것이 곧 자성의 서방이니라.”
위공이 또 여쭙기를 “집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원컨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중에게 무상송(無相頌)을 설하리니, 다만 이를 의지하여 닦으면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지만, 만일 이를 의지하여 닦지 아니하면 머리를 깎고 출가한들 도에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하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이 평등하면 어찌 계가 필요하며 
행이 곧으면 선을 닦아 무엇 하리.

은혜로 친히 부모를 부양하고 의로우면 
상하가 서로 아끼게 되며

사양하면 높고 낮은 이가 화목하고 참으면 
온갖 것이 미워해도 싸울 일이 없느니라.

능히 나무를 비벼 불을 내듯하면 
진흙에서 결정코 홍련이 피어나리라.

입에 쓴 것은 반드시 좋은 약이고, 
귀에 거슬리는 것은 반드시 충성스런 말이니라.

허물을 고치면 반드시 지혜가 나고 
흠을 덮으려 하면 마음속이 무디어 지느니

나날이 이로운 것을 행하여라. 
도를 이루는 것이 돈을 보시함에 있지 않느니라.

보리는 다만 마음을 향하여 찾을지언정 
어찌 밖을 향하여 그윽함을 구하고자 애쓰는가.

내 말을 듣고 이대로 수행하면 
극락이 눈앞에 있을 것이다.

“선지식아, 모두 다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고 자성을 보면 바로 불도를 이루리라. 법은 기다리지 않으니 대중은 이제 헤어져라. 나도 조계로 돌아가리니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누구든지 와서 물어라.”
때에 자사와 관료와 그 모임에 있던 선남자 선여인이 각각 깨달음을 얻어서 믿고 받아들이며 받들어 행하였다.

 


第四 定慧品 
제사 정혜품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나의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대중은 미혹하게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아라.
<정>과 <혜>는 일체요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바탕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혜가 나타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나타날 때 혜가 정에 있다.
만일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고루 배우는 것이니라.
도 배우는 사람들은 정을 먼저 하여 혜를 일으킨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일으킨다하며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아라. 
이런 견해를 가지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을 두어서 입으로 좋은 말을 하지만 마음속이 착하지 못하니라.
공연히 정과 혜를 두어서 정과 혜가 같지 않거니와 만일 마음과 말이 다 선해서 안과 밖이 한 가지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하리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다투는데 있지 않다.
만일 선후를 다투면 곧 미혹한 사람과 같으며 승부를 끊지 못하고 <나다> <진리다>하는 것만 늘여서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의지 못하리라.
선지식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하면, 등불과 같아서 등이 있으므로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 있지만, 체는 본래 동일한 것처럼 이 정혜의 법도 그와 같으니라.
대중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길 선지식아, 일행삼매라 하는 것은 어느 곳 어느 때나(행, 주, 좌, 와) 항상 한결같이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니, 정명경에 이르시기를「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곧 정토다.」하시었듯이 마음과 행동이 아첨하고 바르지 못하여 입으로만 곧음을 말하고 입으로만 일행삼매를 말하며 곧은 마음을 행하지 않나니 곧은 마음만을 행하고 일체 법에 집착하지 말아라.
미혹한 사람은 법상(法相)에 빠져서 일행삼매에 집착하여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삼매라 하는데, 이런 견해를 내는 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과 같으며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되느니라.
선지식아, 도는 모름지기 통하고 흐르게 하여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하겠느냐.
마음이 법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도가 통하여 흐르지만 마음이 만일 법에 머무르면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이 되느니라.
만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의 꾸짖음을 당한 것과 같으니라.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앉아있게 하되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해서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아니하는 이것으로 공부를 삼게 한다고 하면,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문득 집착하여 전도됨을 이룬다.
이와 같은 자가 많고 이와 같이 가르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선지식아,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지마는 사람의 성품이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어서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깨닫게 되고 영리한 사람은 단번에 닦아 스스로 본심을 깨달으며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이니 곧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점을 세운 것은 거짓 이름이니라.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따라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다.
무상이라는 것은 상에 대하여 상을 여의는 것이고, 무념이라는 것은 생각에 대하여 생각이 없는 것이고, 무주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과 밉고 고움과 원수와 친한 이와 또 말로 주고받고 찌르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모두 <공>한 것으로 여겨서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생각하는 가운데 앞 경계를 생각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앞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생각이 생각마다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 얽매임이라 하고 모든 법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밖으로 일체의 상을 여의면 무상이라 한다.
능히 상을 여의면 곧 법체(法體)가 청정해지는데 이것이 곧 무상으로써 체를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는데 자기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서 경계 위에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모든 생각을 다 없애려고만 한다면 한 생각이 끊어질 때, 곧 죽는 것이어서 다른 곳에 몸을 받아 나리니,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도를 배우는 자는 잘 생각하여라.
만일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그르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다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해서 미혹하여 보지 못하게 하며 또 불경을 비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어떤 것을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다 하는가? 단지 입으로만 성품을 보았다고 말함이니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이 있고 생각 위에 문득 사견을 일으키는데 일체의 진로 망상이 이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다.
만일 얻을 것이 있다하여 망령되이 화와 복을 말한다면 이것이 곧 번뇌며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다.
선지식아, <무>라는 것은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이며 <념>이라는 것은 무슨 물건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무라는 것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며, 념이라는 것은 진여 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곧 생각의 체(體)요, 생각은 곧 진여의 용(用)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지, 눈, 귀, 코, 혀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라.
진여가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난다.
만일 진여자성이 없다면 눈이나 귀나 빛깔이나 소리가 곧 없어지리라.
선지식아,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 하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된 성품이 항상 스스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되 가장 으뜸가는 뜻은 움직임이 없다.」하셨느니라.

 


第五 坐禪品 
제오 좌선품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좌선이라는 이 문은 원래 마음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또 깨끗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움직이지 않는 것도 옳지 않느니라.
만일 마음에 집착한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망령된 것이어서 그 마음이 허깨비와 같음을 알 것이므로 집착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라.
만일 깨끗한 것에 집착한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인데 망상으로 인하여 진여를 덮은 것이 되느니라.
망상만 없으면 성품이 스스로 청정한 것인데, 마음을 일으켜서 청정한 것에 집착하므로 도리어 청정하다는 망상을 내는데, 망상은 있을 곳이 없음이라, 집착하는 것이 곧 망상이니라.
깨끗함도 형상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생각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 말하지만 이런 견해를 짓는 자는 자기의 본성을 막아 도리어 깨끗하다는 생각의 결박을 당하리라.
선지식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닦는다.」라고 하는 것은 일체 사람을 볼 때에 사람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과 허물과 근심을 보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곧 자성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을 열어 타인의 옳고 그름과 잘하고 못함과 좋고 미워함을 말해서 도와는 어긋나고 등진다.
만일 마음에 집착하고 청정함에 집착하면 도리어 도에 장애가 되느니라.”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하면, 이 법문 가운데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경계에 마음 가운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 하고 안으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음을 보는 것을 <선>이라 한다.
선지식아,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하면, 밖으로 상을 여의는 것이 <선>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이다.
밖으로 만일 상에 빠지면 안의 마음이 곧 어지럽고, 밖으로 만일 상을 여의면 마음이 곧 어지럽지 않으리라.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한 것인데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경계를 보되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정>이니, 밖의 <선>과 안의 <정>이 곧 선정이니라.
정명경에 이르시길,「즉시에 시원하게 깨달으면 다시 본심을 얻는다.」하셨으며 보살계경에 이르시길,「나의 본성이 원래 스스로 청정하다.」하셨느니라.
선지식아, 생각 생각가운데에 자기의 본성이 청정함을 보아서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스스로 불도를 이루리라.

 


第六 懺悔品 
제육 참회품

 

이때에 대사는 광주와 소주 두 개 군을 비롯한 사방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산중에 모여 법을 들으려하는 것을 보시고 법좌에 오르시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잘 왔다. 선지식아,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으로 일어난 것이니 어느 때나 생각 생각에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볼 것이며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제도하고 스스로 경계하여 비로소 얻게 되니 구태여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느니라.
먼 곳에서 와서 이렇게 모였으니 모두 다 인연이 있는가보다. 이제 다들 꿇어 앉아라.
먼저 자성의 오분 법신향을 전하고 다음에 무상 참회를 주겠노라.”
대중이 꿇어앉자 대사가 말씀하셨다.
“첫째는 <계향>이다.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 그릇됨이 없고 악함이 없으며 질투가 없고 탐냄과 성냄이 없으며 빼앗고 해치는 마음이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하느니라.
둘째는 <정향>이다. 곧 모든 선과 악의 경계와 모양을 보더라도 자기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을 정향이라 하느니라.
셋째는 <혜향>이다. 자기의 마음이 걸림이 없어서 항상 지혜로써 자성을 관조하여 모든 악을 짓지 아니하며, 비록 많은 선을 닦지만 마음에 두지 않고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보살피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혜향이라 하느니라.
넷째는 <해탈향>이다. 자기의 마음에 인연을 일으키는 바가 없어서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아니하여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것을 해탈향이라 하느니라.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다. 자기의 마음이 이미 선악에 인연이 일어나는 바가 없지만 공에 빠져 고요함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널리 배우고 많이 들으며 자기의 본심을 알아 모든 부처님의 이치를 통달하여 법신에 화해서 사물을 대함에 있어 나도 없고 남도 없어서 깨달음의 참된 성품이 바뀌지 않는 곳에 이르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이 향은 각자 안으로 그윽하게 익힐 것이지 밖을 향하여 찾지 말아라.
이제 너희들에게 무상참회를 주어서 삼세의 죄를 멸하고 삼업을 청정하게 해주겠노라.
선지식아, 모두 내 말을 같이 따라 하여라.

<제자들이 앞의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뒤의 생각으로 순간순간에 어리석고 미혹한데 물들지 않고, 이제까지 지은 바 악업인 어리석고 미혹된 죄를 모두 다 참회하오니, 원하옵건대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이 앞의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뒤의 생각으로 순간순간에 교만과 속임에 물들지 않고, 예전부터 지은 악업인 교만하고 속인 죄를 모두 다 참회하오니 원하옵건대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이 앞의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뒤의 생각으로 순간순간에 질투에 물들지 않고 지은 바 악업인 질투 등의 죄를 모두 다 참회하오니 원하옵건대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선지식아, 이상이 무상참회인데 어떤 것을 <참>이라 하고 어떤 것을 <회>라 하느냐하면, 참이라는 것은 그 전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으로 이제까지 지은 바 악업인 어리석음과 미혹함과 교만과 속임과 질투 등의 죄를 모두 다 뉘우쳐서 다시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참이라 하고, 회라는 것은 이후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으로 이제부터 이후에 지을 바 악업인 어리석음과 미혹함과 교만과 속임과 질투 등의 죄를 지금 미리 깨달아서 모두 다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또 짓지 않는 것을 회라고 하므로 참회라 말하느니라.
범부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다만 그 전의 허물만 뉘우칠 줄 알고 앞으로의 허물은 알지 못하여 뉘우칠 줄 모르므로 예전의 허물이 없어지지 않고 뒤의 허물이 또 생기느니라.
앞의 허물이 없어지지 않고 뒤의 허물이 다시 또 생기면 어찌 참회라 하겠느냐.
선지식아, 이미 참회를 하였으니 선지식과 더불어 <사홍서원>을 일으키자.
각각 마음을 바로 하여 잘 들어라.

내 마음의 중생이 가 없지만 기어코 제도하겠으며, 
내 마음의 번뇌가 가 없지만 기어코 끊겠으며, 
내 마음의 법문이 한이 없지만 맹세코 배우겠으며, 
자성의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겠습니다.

선지식아,「대중이 중생이 가 없지만 맹세코 건지겠습니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 혜능이 제도하는 것이 아니니라.
선지식아, 각자의 마음 가운데 중생인 이른바 삿되고 미혹한 마음, 속이고 망령된 마음, 착하지 못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악독한 마음 등 이와 같은 마음이 다 이 중생이니 각각 모름지기 자성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을 참된 제도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자성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라 하는가 하면, 즉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의 중생을 바른 견해로 제도하는 것이다.
이미 바른 견해가 있으므로 반야의 지혜로 어리석고 미혹하여 망령된 중생을 쳐부수어 각각 스스로 제도하되, 삿된 것이 오면 바른 것으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하는 이와 같은 제도를 참된 제도라 하느니라.
또 번뇌가 가 없지만 기어이 끊겠다. 하는 것은 자성의 반야 지혜로 허망한 사상(思想)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또 법문이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배우겠습니다. 하는 것은 모름지기 스스로 견성하여 항상 정법을 행하는 것이며 참된 배움이라 하느니라.
또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겠습니다. 하는 것은 항상 하심하여 참되고 바른 것을 행하고 미혹도 여의고 깨달음도 여의어서 항상 반야를 내고 참도 없애고 거짓도 없애어 불성을 보며 곧 말 아래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항상 수행을 생각하여라. 이것이 원력의 법이니라. 
선지식아, 이제 사홍서원을 일으켰으니 다시 선지식들에게 상이 없는 삼귀의의 계를 주겠노라.

선지식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며, 
올바름의 <이욕존>께 귀의하며, 
청정함의 <중중존>께 귀의하여라.

오늘부터는 깨달음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된 악마와 외도에 귀의하지 말고 자성삼보로써 항상 스스로 증명하고 선지식에게 권하여 자성삼보에 귀의하게 하라.
<불>이라는 것은 깨달음이요, <법>이라는 것은 바른 것이요, <승>이라는 것은 청정함이다.
자기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됨과 미혹함이 일어나지 않고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아서 재물과 여색에서 떠남에 양족존이라 하고, 
자기의 마음이 바른 곳에 귀의하여 생각 생각에 사견이 없고 사견이 없으므로 곧 나다 남이다 하며 잘난 체함과 탐욕과 애욕의 집착이 없음에 이욕존이라 하며, 
자기의 마음이 청정함에 귀의하여 일체의 번뇌와 애욕의 경계에 자성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음에 중중존이라 하느니라.
만일 이런 행을 닦으면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 범부는 알지 못해서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삼귀의의 계를 받는다 하는데, 만일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말하지만 부처님이 어느 곳에 계시며, 만일 부처님을 보지 못했다면 무엇을 빙자하여 귀의한단 말인가. 말이 도리어 허망함을 이루는구나.
선지식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마음을 잘못 쓰지 않도록 하여라.
경문(화엄경 정행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스스로 부처에게 귀의하라.」했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하라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는다면 의지할 곳이 없으리라.
이제 스스로 깨달았으면 각자 자기 마음의 삼보에게 귀의하여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다른 사람을 공경하여라.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니라.
선지식아, 이미 자기의 삼보에게 귀의하였으니 각각 지극한 마음을 가져라.
내가 하나의 바탕이면서 세 가지 몸인 자성(自性)불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세 가지의 몸이 뚜렷함을 보게 하고 스스로 자성을 깨닫게 하리니 따라 외워라.

<자기 육신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며, 
자기 육신의 원만 보신불에 귀의하며, 
자기 육신의 천 백억 화신불에 귀의합니다.>

선지식아, 육신은 집과 같아서 여기에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삼신(三身)불은 자성 가운데 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이 미혹하여 안으로 성품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 삼신 여래를 찾느라고 자신 가운데에 삼신불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로 하여금 자기 몸 안의 자성에 삼신불이 있는 것을 보게 하겠노라.
이 삼신불은 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것을 청정법신이라 하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만법이 자성에서 나온다.
온갖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행이 일어나고, 온갖 선한 일을 생각하면 곧 선행이 나오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가운데 있다.
하늘이 맑을 때는 해와 달이 항상 밝지마는,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지만 아래는 어둡다가 홀연히 바람이 불면 구름이 흩어져 위와 아래가 다 밝아지고 모든 것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의 성품이 항상 들떠 있음은 저 하늘의 구름과 같음이라.
선지식아, <지>는 해와 같고 <혜>는 달과 같아서 지혜는 항상 밝은데 밖으로 경계에 집착해서 헛된 생각의 뜬구름에 덮이므로 자성이 밝지를 못하다가, 만일 선지식을 만나서 참된 정법을 듣고 스스로 어리석음과 망령됨을 없애어 안과 밖이 밝게 하면 자성 가운데에 만법이 모두 다 나타나느니라.
견성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은데 이것을 청정법신불이라 이름 하느니라.
선지식아, 자기의 마음이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면 이것이 참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다.
스스로 귀의한다는 것은 자성 가운데에 있는 착하지 못한 마음과 질투심과 교만과 나라는 생각과 허황한 생각과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과 거만한 마음과 삿된 마음과 잘난 체 하는 마음 등 언제 어디서나 착하지 못한 행을 모두 없애고, 항상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보되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을 말하지 않는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니라.
모름지기 항상 마음을 낮추고 널리 공경을 행하면 곧 자기의 성품을 보고 통달하게 되어 걸리거나 막힘이 없게 되니 이것을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천 백억 화신이라 하는가 하면, 만일 만법을 생각지 아니하면 성품이 본래 허공과 같고 한 생각 헤아리면 이것을 변화라 하는데, 악한 일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며, 모진 해를 입히면 변화하여 용이나 뱀이 되고, 자비를 베풀면 변화하여 보살이 되고, 지혜로우면 변화하여 천상세계가 되고, 어리석으면 변화하여 악도가 되느니라.
자성이 변화가 매우 많은데 미혹한 사람은 살펴 깨닫지 못하고 생각 생각에 악을 일으켜서 항상 악도에 떨어지는데 한 생각 돌이켜 착해지면 지혜가 곧 생기니, 이것을 이름 하여 자성의 화신불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원만보신이라 하는가하면 비유하건대, 한 등이 능히 천년의 어두음을 없애는 것과 같아서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아라.
이미 지난 것은 얻지 못하니, 항상 후일을 생각하여 생각 생각을 뚜렷하고 밝게 하여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이니, 선과 악은 비록 다르지만 본래 성품은 둘이 아니니라.
둘이 없는 성품을 참다운 성품이라 하는데, 참다운 성품 가운데에서 선악에 물들지 않는 것을 원만보신불이라 하느니라.
자성에 한 생각 악한 것을 일으키면 만겁동안 착한 씨앗이 없어지고, 자성에 한 생각 착한 것을 일으키면 항하의 모래수 같은 악이 모두 다 없어지니, 곧 바로 위없는 보리에 이르러서 생각 생각 자성을 보아 근본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을 보신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법신에서 생각하면 이것이 곧 화신불이고, 생각 생각에 자성을 스스로 보면 이것이 곧 보신불이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는 자성 공덕이 참다운 귀의이니라.
가죽과 살은 육신이고 육신은 집이라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다만 자성의 삼신을 깨달으면 곧 자성불을 아는 것이니라.
내게 한 무상송이 있으니 만일 외우고 지니면 말 아래에 너희로 하여금 오랜 겁 동안 쌓아온 미혹한 죄를 일시에 소멸케 하리라.”

미혹한 사람은 복만 닦고 도를 닦지 아니하며
단지 말하기를 복을 닦음이 곧 도라 하나니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이 복이 많지만
마음 가운데 삼악은 원래 지었도다.

생각에 복을 닦아 죄를 없애려고 하지만
후세에 복은 받아도 죄는 도리어 있네.
다만 마음 가운데의 죄의 인연을 없애면
각각 자기의 성품 가운데 참다운 참회니라.

홀연히 대승의 참다운 참회를 깨달아서
삿됨을 없애고 바른 것을 행하면 곧 죄가 없으리.
도를 배우며 항상 자성을 관하면
곧 부처님과 더불어 한 가지가 되리라.

우리 조사가 오직 이 돈법을 전하여
널리 견성을 하여 일체가 되기를 원하시네.
만일 앞으로 법신을 찾고자 하면
모든 법상을 여의고 마음을 씻어라.

힘써 스스로를 보고 한가히 지내지 말아라.
뒷생각이 홀연히 끊어지면 한 세상 쉬는 것이니
만일 대승을 깨달아 견성하려면
정성스레 합장 공경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여라.

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모두 다 모름지기 외워 이를 의지하고 수행하여 말 아래 견성하면 비록 내게서 천리를 가더라도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같고 말 아래 깨닫지 못하면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하여 멀리서 힘들여 오겠느냐? 아무쪼록 잘 가거라.”
대중들이 법을 듣고 깨닫지 않은 사람이 없어 환희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第七 機緣品 
제칠 기연품

 

대사가 황매로부터 법을 얻으시고 소주의 조후촌으로 돌아오시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선비인 유지략이 매우 두터운 대접을 하였다.
지략의 고모가 비구니였는데 이름은 무진장이었다.
항상 대열반경을 외웠는데 대사께서 잠깐 들으시고는 곧 그 심오한 뜻을 아시고 해설하여 주시니 그 비구니가 책을 잡고 글자를 묻기에 대사가 말씀하시길 “글자를 알지 못하니 뜻을 물어라.” 하시니. 비구니가 말하기를 “글자도 알지 못하는데 뜻을 어떻게 압니까?” 하므로 대사가 말씀하시길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는 문자와 관계가 없느니라.”하셨다. 
비구니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서 마을을 두루 다니며 덕이 높은 노인들에게 말하기를「이 사람은 반드시 도가 있는 선비이니 마땅히 청하여 공양하십시오.」하였기에 진무후의 현손인 조숙량과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뵈었다.
그때 보림사라는 옛 절이 수나라 말기의 병화로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이 빈터에 다시 법당을 세우고 맞이하여 지내시게 하니 얼마 안 되어 사찰이 이룩되었다.

대사가 머무신지 9개월쯤, 또 나쁜 무리에게 쫓기게 되어 대사가 앞산으로 피하시자 그들이 불을 질러 초목을 다 태웠다.
대사는 돌 틈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하셨는데 그때 대사께서 가부자 하셨던 돌에 무릎 흔적과 옷자락 무늬가 남아 있어 피난석이라고 이름 하였다.
대사는 오조께서 회(懷)를 만나면 머물고 회(會)를 만나면 숨으라고 당부하시던 것을 기억하시고 이 두 고을에 몸을 숨기셨다. 


법해라는 스님은 소주의 곡강 사람이다. 처음 조사를 참례하고 묻기를 “지금 이 마음이 곧 부처다 하는 것을 원하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앞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이요, 뒷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이며 일체의 상(相)을 이루는 것이 곧 마음이요, 일체의 상을 여의는 것이 곧 부처인데 내가 만일 이를 다 말하려면 겁이 다 하여도 다하지 못하느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 보라.

마음이 곧 혜요, 
부처가 곧 정(定)이니
정과 혜가 서로 같으면 
그 뜻이 청정하리라.
나의 이 법문을 깨달음은 
너의 습성을 말미암음이니
용(用)은 본래 나는 것이 아니므로 
쌍으로 닦음이 옳으리라.

법해가 말씀 아래 크게 깨달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지금 이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바르지 못하였는데
나는 이제 정과 혜의 원인을 알았으니 
쌍으로 닦아 모든 물건을 여의겠습니다.


법달 스님은 홍주 사람이다. 7세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조사에게 예배드릴 때에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므로 조사가 꾸짖으며 
“절을 할 때 머리가 땅에 닿지 않으니 절을 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느냐. 네 마음속에 반드시 한 물건이 있기 때문인데 무슨 일을 쌓아 익혔느냐.”
하시니 “법화경을 이미 삼천 번이나 외웠습니다.”하기에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만 번을 외워 그 경을 뜻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할 것인데 네가 지금 그 일을 자부하며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예배(禮拜)는 본래 아만의 깃발을 꺽자는 것인데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를 않는가.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허물이 생겨나고
공(功)을 잊으면 복이 한량없으리라.

대사가 다시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시니 “법달입니다.” 하므로 “너의 이름이 법달이라, 하지만 어찌 법을 통달했겠느냐.”하시며 다시 게송을 설하셨다.

네가 방금 법달이라 하였는데 
부지런히 외울 뿐 쉬지 못하니
공연히 외우면 소리만 쫓고 
마음을 밝히면 보살이라 이름 하리.

네가 이제 인연이 있으므로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다만 부처님은 말이 없음을 믿으면 
연꽃이 입에서 피어나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깊이 뉘우치며 말씀드렸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일체에 대하여 겸손하겠으며, 공경하겠습니다. 제자가 법화경을 외웠으나 경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에 항상 의심이 있었는데 화상께서는 지혜가 넓고 크시니 원컨대 간략하게 경의 뜻을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달이 법에는 잘 통달했으나 네 마음은 통달하지 못했구나. 경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인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구나. 네가 이 경을 외울 때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느냐?”
법달이 말하기를 “저는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이제까지 문자에만 의지하여 외웠을 뿐이니 어찌 근본취지를 알겠습니까?” 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문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가지고 한 번 외워보아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해설해주리라.”
법달이 곧 고성으로 경을 외워 <서품, 방편품, 비유품>에 이르렀을 때 조사가 이르시기를 
“그쳐라. 이 경은 원래 <인연 출세>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비록 여러 가지의 비유를 설하지만 이를 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인연이라 하는가 하면 경에 이르시기를 「모든 부처님 세존은 오직 일 대사 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하셨는데 일대사(한 가지 큰 일)란 곧 부처님의 지견이다. 
세상 사람들은 밖으로 미혹하여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집착하는데, 만일 상에 대하여 상을 여의고 공에 대하여 공을 여의면 곧 안과 밖이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법을 깨달아서 한 순간에 마음이 열리면 이것이 부처님의 지견이 열린 바니라.
부처란 깨달음이라는 뜻인데 나누면 네 가지가 되느니라. 
깨달음의 지견을 열고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며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 깨달음의 지견에 들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열어 보이심을 듣고 문득 깨달아 들어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인 본래의 참 성품이 나타날 것이다.
네가 경의 뜻을 잘못 알아서「열어 보이어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이지 우리들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만일 이렇게 이해하면 이것은 경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을 헐뜯는 것이다. 
자기가 이미 부처님이고 이미 지견을 갖추었는데 어찌 다시 열 것이 있겠는가. 
너는 이제 마땅히 믿어라.
부처님의 지견이라는 것은 다만 너 자신의 마음이지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느니라.
대체로 모든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육진 경계를 탐내고 애착하여서 밖으로 인연을 일으키고 안으로 흔들려서 쫓고 쫓기는 시달림을 달게 받으므로 부처님께서 수고스럽게도 삼매에서 일어나셔서 갖가지 간곡한 말씀으로 권하여 편안히 쉬게 하셨느니라.
밖을 향하여 구하지 않으면 부처님과 더불어 둘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견을 연다 하셨느니라.
나도 사람들에게 권하는데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부처님의 지견을 항상 열어라.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삿되어 어리석고 미혹하여 죄를 짓게 되며 입으로는 착하지만 마음으로는 약해서 탐내고 성내며 질투하는 마음과 아첨하고 교만함으로 남을 해치고 사물을 해롭게 하여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여느니라.
만일 바른 마음으로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부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생각 생각에 부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은 열지 말아라. 
부처의 지견을 열면 이것이 곧 세간을 떠난 것이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곧 세간이니 네가 만일 힘들여 경이나 외우고 생각을 집착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이우(길고 칼 같은 꼬리를 스스로 핥다가 죽는다는 소)가 제 꼬리를 애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법달이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뜻만 이해하고 경은 수고스럽게 외울 필요가 없습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경에 무슨 허물이 있어서 너보고 못 외우게 하겠느냐.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사람에게 있고 손해와 이익이 자기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며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이고 입으로 외우지만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이 너를 굴리고 
마음이 열리면 네가 법화경을 굴리느니라.
경을 아무리 외워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하면 
뜻과는 오히려 원수가 되리라.
생각이 없으면 생각이 곧 바르고,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와 무를 다 따지지 않으면 
오래도록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놀 수 있으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울다가 말 아래에 크게 깨달아서 조사께 말씀드리기를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의 굴림을 받았습니다.”하며 다시 말씀드리기를
“경에서는 대 성문들과 보살들이 모두 생각을 다 하여 함께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하였는데 지금 범부로 하여금 다만 자기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님의 지견이라 하시니 자신의 상근기가 아니면 의심이나 비방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경에 세 가지 수레를 설하였는데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가 흰 소가 끄는 수레와 어떻게 다른지 원하옵건대 화상께서 한 번 더 가르침을 열어 주십시오.” 하니 조사가 말씀하시길 “경의 뜻이 분명한데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등진 것이로다. 성문 연각 보살들이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하지 못하는 것도 그 병이 헤아리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을 다하고 이치를 따져 보아도 점점 더 먼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본래 범부를 위하여 설하신 것이지 부처님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 아니다.
이 이치를 만약 기꺼이 믿지 못하는 것이라면 자리에서 물러가도 좋은데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앉아 있으면서 다시 문 밖에 있는 세 수레를 찾는 것은 전혀 알 수가 없구나.
하물며 경문에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기를 ‘오직 일불승이요, 다른 이승과 삼승은 없다.’ 하였고 ‘수 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가 곧 법이며 모두 다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 하셨는데 너는 어찌 살피지 못하는가.
세 가지 수레는 거짓이고 옛날을 위한 것이며 일승은 진실하고 지금을 위한 것이다.
다만 너희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고 참다운 것에 돌아가게 함인데 참다움에 돌아가면 참다움이란 이름도 없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온갖 보배와 재물이 다 너에게 속해있고 네가 쓰기에 달려 있으니 다시는 아버지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아들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며 또 쓴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느니라. 
이것을 법화경을 지닌다고 이름 하느니라.
아득한 과거에서 먼 미래에 이르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생각지 않는 때가 없음이 되느니라.”
법달이 가르침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게송으로 찬탄하기를

경을 삼천 번 외운 것이 
조계의 일구(一句)에 없어졌다.
출세(出世)의 뜻 밝히지 못하면 
어찌 여러 생의 미친 짓을 쉴 것인가.
양과 사슴과 소를 방편으로 삼아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도 잘 설하셨네.
누가 불난 집의 속이 
원래 이 법왕의 처소인 줄 알았으랴.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야 비로소 경을 외우는 스님이라 이름 할 수 있겠구나.” 법달이 이때부터 깊은 뜻을 알았으며 경 외우기를 쉬지 않았다.


지통이라는 스님은 수주의 안풍 사람이다.
처음에 능가경 보기를 약 천 번을 하였지만 세 가지의 몸과 네 가지의 지혜를 알지 못해서 조사께 예배하고 그 뜻의 해석을 구하였다.
조사가 이르시길
“세 가지 몸이라는 것에서 청정법신은 너의 성품이고, 원만보신은 너의 지혜며, 천 백억 화신은 너의 행이다.
만일 본성을 여의고 따로 세 가지 몸을 말한다면 곧 몸만 있고 지혜가 없는 것이며, 만일 세 가지 몸에 자성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네 가지 지혜의 보리라 한다.”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자성이 삼신(三身)을 갖추었으니 
이를 밝히면 사지(四智)를 이루나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불지(佛地)에 오르도다.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설하노니 
자세히 믿고 영원히 미혹하지 말아서
허겁지겁 달리며 구하는 자가 
종일토록 떠드는 보리(菩提)는 배우지 말아라.

지통이 다시 여쭙기를 “네 가지 지혜의 뜻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이미 세 가지 몸을 알았다면 네 가지 지혜를 밝힌 것인데 어찌하여 다시 묻느냐? 만일 삼신을 떠나서 별도로 사지를 말한다면 이것은 지혜만 있고 몸이 없는 것이니 지혜가 도리어 무지(無智)를 이룬 것이니라.”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대원경지는 성품이 청정한 것이고(나, 너가 없고, 팔식)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는 것이며(혼자, 칠식)
묘관찰지는 견(見)이 공(功)이 아니요(상대, 육식)
성소작지는 둥근 거울과 같은 것이니라.(오식)

오식과 팔식은 과(果)이고 육식과 칠식은 인(因)을 굴린 것이다.
이름과 말만 있을 뿐 참 성품은 없네.
구르는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번잡히 일어나더라도 영원히 나가정(부처님의 삼매)에 있으리라.

지통이 성품의 지혜를 대번에 깨달아서 게송을 바쳤다.

세 가지 몸이 원래 나의 몸이고 
네 가지 지혜는 본래 마음의 밝음이라.
몸과 지혜가 원융하여 걸림이 없으니 
만물에 응함에 형세 따라 맡기네.

수행을 일으킴이 모두 망령된 움직임이요. 
머무름을 지키는 것도 참다움이 아니네.
묘한 뜻을 스승으로 인하여 깨달으니 
마침내 물들었다는 이름도 없어지네.


지상스님은 신주 귀계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견성하기를 바라다가 어느 날 찾아뵙고 예를 드리니 조사가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고자 하는가?” 
“제가 근래에 홍주 백봉산에 가서 대통화상을 뵈었더니 견성성불의 뜻을 보여 주시던데 의심을 풀지 못하여 멀리서 와서 예배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화상께서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그곳에서 어떤 말을 하더냐. 네가 한 번 보여 보아라.”
“제가 그곳에 이르러서 석 달이나 지났는데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므로 어느 날 저녁에 홀로 방장실에 들어가「어떤 것이 이 지상의 본래 마음이고 본래 성품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대통화상께서 말씀하시길「네가 허공을 보았느냐?」하시기에「보았습니다.」하니「네가 본 허공이 모양이 있더냐?」하시기에「허공은 형체가 없는데 무슨 모양이 있겠습니까!」하였더니 말씀하시길「너의 본래 성품도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볼 것이 없는데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마침내 한 물건도 알 것이 없음을 깨달아서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며 푸른 것, 노란 것, 긴 것, 짧은 것이 없고 다만 근본 바탕이 청정하고 깨달음의 본체가 뚜렷이 밝음을 보는 것이 곧 견성성불이며 여래의 지견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비록 이 말씀을 들었으나 확실히 알지 못했사오니 빌건대 화상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가 말씀하셨다. “그 스님의 말씀에는 아직도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남아 있으므로 너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이제 너에게 한 게송을 보이리라.”

한 법도 보지 않고 없다는 생각을 두는가. 
크게 뜬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같구나.
한 법도 알지 못해서 공한 지(知)를 지킴이여
도리어 허공에 번개가 번쩍 일어남과 같도다.

이런 지견이 잠시라도 일어나면 
잘못 안 것이니 어찌 방편인줄 알리요.
네가 마땅히 한 생각에 그릇된 줄만 알면
자기의 신령스런 광명이 항상 드러나리라.

지상이 게송을 듣고 마음이 활짝 열려 게송을 지어 올렸다.

무단히 지견을 일으켜서 
상에 빠져 보리를 구하나니
마음에 한 생각 깨달음을 두면 
어찌 옛날의 미혹함을 넘으리오.
자성의 각원체(覺源體)가 
비침을 따라 잘못 흐르니
조사의 방에 들지 못하면 
막연하게 두 가지만 키우리라.

지상이 어느 날 조사에게 여쭙기를 “부처님이 삼승법을 설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시니 제자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가르쳐 주십시오.”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기의 본심만 보고 밖의 법상에 집착하지 말아라. 법에는 네 가지 승이 없는데 사람들의 마음에 차별이 있어서 듣고 외우기만 하는 것은 소승이고, 법을 깨달아 뜻을 알면 중승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대승이고, 만법을 다 통하여 만법을 다 갖추되 일체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상을 여의어서 하나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을 최상승이라 이름 하느니라.
승이라는 것은 곧 행한다는 뜻이며 입으로 다투는데 있지 않으니 네가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아라. 언제 어느 때나 자성은 스스로 여여 하니라.”
지상이 예배드리고 조사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항상 모셨다.


지도라는 스님은 광주의 남해 사람이다.
법문을 청하며 말씀드리길 “제가 출가해서 열반경을 두루 본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대의를 밝히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화상께서 가르침을 주옵소서.”
조사가 “네가 어느 곳을 밝히지 못했는고?” 하시자 “「모든 현상이 무상하여 나고 죽는 법이니 나고 죽음이 없어지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는 것에 의심이 있습니다.” 하므로 “네가 어떻게 의심하는가.” 하시니 말하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 두 가지 몸이 있으니 이른바 색신(육신)과 법신입니다. 색신은 무상하여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마는 법신은 항상하여 앎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데 경(열반경)에 이르기를 「나고 죽음이 멸하여 마치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이며, 어떤 몸이 낙을 받는다는 말씀입니까? 만일 육신이라면 육신이 없어질 때에 사대가 흩어져서 아주 괴로울 뿐인데 괴로움을 낙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법신이라면 적멸하여 곧 초목이나 흙이니 돌과 같은 것인데 누가 마땅히 낙을 받습니까?
또 법의 성품은 나고 죽는 것의 체(體)이고 오온은 생멸의 용(用)이니 한 체에 다섯 작용(色, 受, 想, 行, 識)으로 나고 죽는 것은 떳떳한(常)것으로써 나는 것은 본체에서 일으킨 작용이고 죽는 것은 작용을 거두어서 본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다시 난다고 하면 곧 유정의 종류(중생살이)에서 끊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다시 나지 않는다고 하면 영원히 적멸한 곳으로 돌아가서 무정의 물질과 같을 텐데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이 열반에 묶이어 오히려 나지도 못할 것이니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찌 외도의 단(斷), 상(常)의 삿된 소견을 익혀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느냐. 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곧 육신 외에 별도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
또 열반의 항상 즐거움도 몸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는 생사를 집착하고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이 화합된 것을 자기의 근본 모습으로 삼고 일체법을 분별하여 바깥 모습으로 삼아서 나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며 생각 생각에 바뀌며 흘러가서 꿈이고 허깨비이며 거짓인줄 모르고 잘못 윤회를 받아서 항상 즐거운 열반을 도리어 괴로운 것으로 잘못 알고 종일토록 찾아 헤매므로, 부처님이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열반의 참다운 즐거움은 찰나에도 나는 상이 없으며 찰나에도 없어지는 상이 없어서 다시 생과 멸이 멸할 것도 없는 것으로 즉 적멸이 앞에 드러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니라.
앞에 드러났을 때에 앞에 드러났다는 생각도 없어야 상락(常樂)이라 하느니라.
이 낙을 받는 자도 없고 또한 받지 않는 자도 없는 것이니 어찌 하나의 체에 다섯 가지 용이라는 이름이 있겠으며 어찌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묶어서 영원히 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겠느냐. 이런 말은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헐뜯는 것이로다.”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위가 없는 대 열반이여, 
뚜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죽는다고 말하고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斷滅)을 삼으며

이승(二乘)을 구하는 모든 사람은 
하는 것 없음을 내세우네.
모두 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 
육십이견의 근본이로다.

망령되이 세운 헛된 이름이리니 
어찌 진실한 뜻이 되리요.
오직 헤아림을 초월한 사람이라야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음을 통달하여서

오온법을 알아서 
오온 가운데의 나와
밖으로 나타나는 온갖 색상과 
낱낱 음성의 상이

평등하여 꿈이고 환상인 줄 알아서 
범부다 성인이다는 소견이 나지 않고
열반의 알음알이도 짓지 않으며, 
이변(二邊)과 삼제(三際)가 끊어져서

항상 모든 근기를 맞추어 쓰지만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일체 법을 분별하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니

겁화(劫火)가 일어나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불어와서 산이 서로 부딪칠지라도
참되고 항상 적멸의 즐거움이라. 
열반의 모습 이와 같으니라.

내가 이제 굳이 말한 것은 
너로 하여금 사견을 버리게 함이니
네가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네가 조금 알았다고 허락하리라.

지도가 게송을 듣고 크게 깨달아서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행사선사의 성은 유씨이고 길주 안성 사람이다.
조계의 법석이 성황을 이룬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와서 예를 드리고 물었다.
“마땅히 어떻게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조사가 말씀하시길 “네가 일찍이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느냐?” 하시니
“성인의 진리도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하므로 “어떠한 계급에 떨어졌느냐?” 하시니 “성인의 진리도 오히려 하지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하므로 조사가 깊이 법기로 여기시고 행사를 대중의 우두머리로 삼으셨다.
어느 날 조사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마땅히 한 지방을 맡아 교화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하셨다. 행사가 이미 법을 얻었으므로 길주의 청원산으로 돌아가 법을 크게 펴고 교화하였다.


회양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에 숭산의 안국사를 뵈었는데 안국사가 조계에 가서 뵈옵고 물어보라 하므로 찾아와서 예배하였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어느 곳에서 왔는고?”
“숭산에서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하여도 맞지 않습니다.”(8년 뒤 대답)
“도리어 가히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냐?”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물들어 더럽혀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때묻지도 물들지도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하시는 바인데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가 예언하시기를 너의 발아래에 망아지가 한 마리 나와서 천하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 하셨으니 마땅히 네 마음에만 두고 모름지기 속히 설하지 말지어다.”
회양이 활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좌우에서 모시기를 15년이니 하였으며, 날로 더욱 깊고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며 뒤에 남악으로 가서 선종을 크게 드날렸다.


영가 현각선사는 온주대씨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경과 논을 익혀 천태의 지관 법문에 정통하였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마음자리를 밝히게 되었다.
우연히 조사의 제자인 현책이 찾아와서 그와 더불어 법에 대하여 깊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하는 말이 은근히 조사들의 뜻에 맞으므로 현책이 “인자에게 법을 주신 스승은 누구십니까?” 하니 현각이 말하길 “내가 방등경론을 들을 적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닫고는 아직 증명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 하였다.
현책이 “위음왕불 이전에는 그럴 수 있었지만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천연외도라 하였습니다.” 하니 현각이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현책이 말하기를 “나의 말은 가볍습니다. 조계에 육조대사가 계시는데 사방에서 모여들어 법을 받고 있으니 만일 가시겠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하였다.
현각이 드디어 현책과 같이 와서 찾아뵈었는데 조사의 주위를 세 번 돌고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으므로 조사가 “무릇 사문은 3천의 위의와 8만의 세행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덕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큰 아만을 부리는가?” 하시니, 현각이 말하길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하나이다.” 하므로 “어찌 나는 것이 없음을 체달하지 못하며 빠르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자 “체달함에는 곧 생겨남이 없고 요달함에는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 하기에 조사가 “옳다. 옳다.”하시니 현각이 바야흐로 위의를 갖추어 예배하고 곧 하직인사를 드렸다. 
조사가 “도리어 너무 빠르지 않느냐?” 하시니 “본래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조사께서 “누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 하시니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하였다.
조사께서 “네가 완전히 무생의 뜻을 얻었도다.”하시니 “무생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하므로
“뜻이 없으면 누가 마땅히 분별하겠느냐?” 하시니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조사가 이르시기를 “장하도다. 하룻밤이라도 쉬어 가도록 하라.” 하셨다.
그때의 일로 그를 일숙각(깨닫고 하룻밤 잠)이라 하였는데 뒤에 증도가를 지으니 세간에 성행하였다. 


선자 지황은 처음 오조를 참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이미 삼매를 얻었다 하며 암자에서 20년 동안이나 장좌불와를 하고 있었는데 조사의 제자인 현책이 사방을 다니다가 하삭(땅이름)에 이르러서 지황의 이름을 듣고 암자로 찾아가 “그대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십니까?”하니 황이 말하길 “정에 듭니다.”하므로 “그대가 정에 든다 하니 마음이 있어 듭니까? 마음이 없어 듭니까? 만일 마음이 없이 든다 하면 일체 무정인 초목과 돌과 기왓장도 마땅히 정을 얻을 것이오. 만일 마음이 있어 든다 하면 알음알이가 있는 온갖 중생들도 마땅히 정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 하니 “내가 바르게 정에 들 때에는 <있다>, <없다>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하므로 “있다와 없다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이 곧 항상 정인데 어찌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습니까? 만일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다면 큰 정이 아닙니다.” 하자, 황이 대답을 못하고 한참 있다가 “스님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라고 물었다.
“나의 스승은 조계의 육조대사입니다.”
“육조는 무엇으로 선정을 삼으십니까?”
“우리 스승의 설법은 묘하고 맑고 둥글고 고요하여 그 체와 용이 여여(如如)합니다.
오음(오온)이 본래 공하고 육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정(定)도 아니고 어지러운 것도 아닙니다. 
참선의 성질은 머무름이 없는지라 고요한데 머무름을 떠났고 선의 성질은 생겨나는 것이 없는지라 선이라는 관념을 내는 것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과 같다는 헤아림도 없습니다.” 황이 이 말을 듣고 바로 와서 조사를 찾아뵈니 조사가 물으셨다.
“인자는 어찌 왔는가?” 황이 지난번의 인연을 다 말씀드리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진실로 말한 바와 같다. 그대는 다만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되 비었다는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응용하여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마음이 없으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이 없어져 능(주관)과 소(객관)가 다 없어지며,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정(定)이 아닌 때가 없으리라.”
황이 이에 크게 깨달아서 20년에 얻은바 마음이 도무지 그림자조차도 없었다.
그날 밤 하북 땅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황 선사가 오늘에야 도를 얻었다.” 하였다.
지황이 뒤에 예배하고 하직하여 다시 하북으로 돌아가 사부대중을 교화하였다.


한 스님이 조사에게 “황매(5조)의 참 뜻을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라고 여쭈니 조사가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느니라.” 하시자 그 스님이 “화상께서는 얻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하노라.” 하셨다.
조사께서 하루는 전해 받으신 법의를 세탁하려 하셨는데 좋은 샘이 없어서 절 뒤로 5리쯤을 가시니 울창한 숲 속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보시고 주장자를 떨쳐 땅에 세우시니, 샘이 손을 따라 솟구쳐 올라 와 못이 되므로 무릎을 꿇고 돌 위에서 옷을 빨고 있었는데, 홀연히 한 스님이 앞에 와서 예배하며 말하기를 “저는 방변이라 하는 서촉 사람입니다. 어제 남 천축국에서 달마대사를 뵈었더니, 저에게 당부하시기를「속히 당나라로 가거라. 내가 전한 대가섭의 정법안장과 승가리가 여섯 대를 전하여 소주의 조계에 있으니 네가 가서 참배하라.」하시기에 제가 멀리서 찾아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전해져 내려오는 의발을 보여 주십시오.” 하므로 조사가 내여 보이신 다음에 물으셨다.
“그대는 무슨 일을 익혔는가?”
방변이 말하기를 “소상을 잘 합니다.” 하므로, 조사가 정색을 하여 “네가 나의 모습을 한번 만들어 보아라.” 하시니 방변이 망설이다가 수일만에 조사의 실제 모습을 만드니 높이가 7촌이고 아주 절묘하고 세밀하였다.
조사에게 바쳐 드리니 조사가 웃으시며 “네가 다만 흙을 빚는 도리만 알고 불성은 모르는구나.” 하시며 손을 펴서 방변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다.
“영원히 인간과 천상의 복전이 되어라.”


한 스님이 와륜 선사의 게송이라 하며 외우기를「와륜은 기량이 있어서 능히 백가지 사상을 끊는지라.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보리(菩提)가 나날이 자라난다.」하므로 조사가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 게는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했으니 만일 이대로 행하면 곧 얽히기만 더 하리라.” 하시며 한 게송을 말씀하셨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서 
백가지 사상을 끊지 않았네.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자주 일어나니 
보리(菩提)가 어찌 자라리오.

 


第八 頓漸品 
제팔 돈점품

 

때에 조사는 조계 보림에 계시고 신수대사는 형남 옥천사에 계셨다.
그때에 두 종이 모두 다 성대히 교화하니 사람들이 모두 남능과 북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두 종이 돈과 점으로 갈라졌는데 배우는 사람들은 근본취지를 몰랐으므로 조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한 종이건만 사람이 남북을 둔 것이다. 법은 곧 한가지인데 보는 것이 더디고 빠를 수 있다. 무엇을 <돈>이라 하고 무엇을 <점>이라 하는가 하면 법은 돈과 점이 없는데 사람에게는 영특함과 둔함이 있으므로 <돈>이고 <점>이라 한다.”
그러나 신수의 대중들은 이따금 남종의 조사는 한 글자도 모르니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느냐하며 비방하였는데, 신수대사는 말하기를 “그분은 스승이 없는 지혜를 얻어서 상승의 법을 깊이 깨달았으니 나는 그 분만 못하다. 또 나의 스승인 오조께서 친히 가사와 법을 전하셨으니 어찌 공연한 일이겠느냐. 내가 멀리 가서 친근하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의 은혜만 받고 있어 한스러우니 너희들은 이곳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조계에 가서 배우도록 하여라.” 하며 어느 날 문인인 지성에게 명하기를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에 가서 법을 듣고, 들은 법은 마음을 다하여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와서 나를 위해 설하여 달라.” 하였다.
지성이 명을 받고 조계에 이르러서 대중을 따라 참례하고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때 조사가 대중에게 “지금 법을 도적질하는 사람이 이 모임에 숨어 있다.” 하시므로 지성이 곧 나와서 예배하고 그간의 일을 다 말씀드리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옥천에서 왔으니 필시 염탐꾼이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말씀드리지 않았을 때는 그러합니다만 말씀드렸으니 그렇지 않습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을 가르치시는가?”
“항상 대중을 가르치시기를「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살피어보고 장좌하여 눕지 말라.」하셨습니다.”
“마음을 머물러서 고요함을 관하는 것은 병이지 선이 아니며, 마냥 앉아 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이니 이치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한 덩어리 냄새나는 뼈다귀가 
어찌 공과를 세우리오.

지성이 다시 절하며 말하였다.
“제자가 신수대사의 처소에 있으면서 도를 배운지 9년이 되었으나 깨닫지 못하였는데 지금 화상의 한 말씀을 듣고 문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자에게 생사의 일이 크니 화상께서 대 자비로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들으니 너의 스승은 학인들에게 계, 정, 혜의 법을 가르친다 하시던데 알지 못하겠으니 너의 스승이 계, 정, 혜를 어떻게 설하시는지 내게 말해 보아라.”
“신수대사께서는「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 이름 한다.」라고 설하시는데, 화상께서는 어떠한 법으로 사람을 가르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일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너를 속이는 것이 되느니라. 단지 경우를 따라 얽힘을 풀어줄 뿐인데 이름을 빌려 말한다면 삼매라 하느니라. 너의 스승이 말씀하시는 계, 정, 혜는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보는 계, 정, 혜와는 다르구나.”
“계, 정, 혜는 다만 한가지인데 어찌 다를 수 있습니까?”
“너의 스승의 계, 정, 혜는 대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만 나의 계, 정, 혜는 최상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깨달아 앎이 같지 않으므로 지견이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너는 내가 말하는 것이 그와 같은지 다른지 들어보아라.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체(體)를 여의고 법을 설하는 것을 상으로 설하는 것이라 하는데 자성을 항상 미혹하게 하느니라. 모름지기 알아라. 일체의 만법이 모두 다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느니라. 이것이 참된 계, 정, 혜의 법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자리에 잘못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 없는 것이 자성의 혜요,
마음자리에 어지러움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며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것이 자기의 금강이요,
몸이 가고 몸이 옴이 본래 삼매이니라.

지성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감사하며 한 게송을 바치었다.

오온의 허깨비 몸이여
허깨비가 어찌 구경(究竟)이리요,
진여로 돌이켜 나아가면
법이 도리어 깨끗하지 못하리.

조사가 “그렇다.” 하시고 다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네 스승의 계, 정, 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고 나의 계, 정, 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일 자기의 성품을 깨닫고서 보리나 열반을 세우지 않고 또한 해탈지견도 세우지 않으면 한 법도 가히 얻을게 없어서 바야흐로 만 법을 세울 수 있느니라.
만일 이 뜻을 알면 이것을 부처님의 몸이라 하며 보리와 열반이라 하며 해탈지견이라 하느니라.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되니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을 하고 물음에 따라 답하며 널리 화신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여의지 않으므로 곧 자재한 신통과 유희하는 삼매를 얻는다. 이것을 견성이라 이름 하노라.”
지성이 다시 조사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조사가 말씀하셨다.
“자성은 그릇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어서 순간순간이 반야를 비추어 보아 항상 법이라는 생각을 여의고 자유자재하며 가로 세로 모두 얻으니 무엇을 세우겠느냐.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서 몰록 닦으면(돈오 돈수) 늦고 더딤이 없으므로 일체 법을 세우지 않느니라. 모든 법이 적멸한데 무슨 순서가 있겠는가?”
지성이 예배드리고 모시기를 원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철스님은 강서 사람이다. 본성은 장씨이고 이름은 행창인데 젊어서는 불한당이었다.
남북이 나뉘어 교화하였지만 두 종주는 네 편, 내 편이 없었는데 그 문도들은 서로 다투며 미워하였다.
그때에 북종의 문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신수대사를 육조로 삼았으며 조사에게 가사가 전해진 것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이 꺼려서 행창을 시켜 조사를 해치려 보냈는데 조사께서는 타심통으로 그 일을 미리 아시고 금 열 냥을 자리 사이에 준비하여 두고 계셨다.
밤이 깊어져 행창이 조사의 방에 들어와 해치려 하니 조사가 목을 쭉 내미시므로, 행창이 칼을 세 번이나 휘둘렀으나 조금도 다치지 않으셨는데 조사께서 “바른 칼은 삿되지 않고 삿된 칼은 바르지 못하니라. 너에게 전생에 돈을 빚졌지만 목숨은 빚지지 않았느니라.” 하시니 행창이 놀라 자빠졌다가가 한참 만에 깨어나 슬피 울며 잘못을 뉘우치며 출가를 원하였으나, 조사가 금을 주시며 말씀하시길, “너는 우선 가거라. 대중들이 도리어 너를 해칠까 걱정되니 네가 다른 날에 모습을 바꾸어 오면 내가 마땅히 받아 주겠노라.” 하셨다.
행창이 조사의 뜻을 받들어 달아났다가 다른 스님을 의탁하여 출가한 뒤, 계를 갖추어 정진하다가 어느 날 조사의 말씀을 기억하고, 멀리서 찾아와 절하고 뵈었다. 
조사께서 “내가 너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이리 늦었는가.” 하시니 “예전에 화상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덕분에 지금은 비록 출가하여 고행을 하지만, 그 은덕을 갚기가 어렵습니다. 은덕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열반경을 보았으나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깨닫지 못하겠으니 비옵건대 화상께서 자비를 베풀어 간략히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조사가 “무상이라는 것은 곧 불성이고, 유상이라는 것은 일체 선과 악의 모든 법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하시니,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경문에 크게 어긋납니다.” 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데 어찌 감히 불경을 어기겠느냐?” 그러자, “경에는 불성이 곧 상이라 하였는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무상이라 말하시며 선악의 법과 보리심이 다 무상인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틀리는 것이라 학인으로 하여금 점점 더 의심스럽게 합니다.” 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열반경은 내가 옛적에 무진장이라는 비구니가 독송하는 것을 한 번 듣고 곧 그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한 글자, 한 뜻도 경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너에게도 두 가지 말이 있을 수 없느니라.”
“제가 아는 것이 얕고 어두우니 원컨대 화상께서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네가 아느냐? 불성이 만일 상(常)이라면 다시 어떻게 선과 악의 모든 법을 설하겠느냐? 한량없는 세월을 다하더라도 보리심을 일으킬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참된 상(常)의 도리이니라. 
또 일체의 모든 법이 만일 무상(無常)이라면 곧 물건마다 모두 자기의 성품이 있어서 생과 사를 받아들이므로 참된 상의 성품이 두루 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상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참된 무상의 뜻이니라.
부처님께서 평소에 범부와 외도들은 삿된 상(常)에 빠지고 이승의 사람들은 상을 무상으로 알아서 다 같이 여덟 가지 뒤집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열반 요의교를 말씀하시는 가운데에 그런 편견을 없애고자, 진상(眞常)과 진락(眞樂)과 진아(眞我)와 진정(眞淨)을 밝혀 말씀하셨는데 네가 그 말만 의지하여 뜻을 잘못 알고 아무것도 없는 무상(無常)과 고정된 상(常)으로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최후의 미묘한 말씀을 잘못 이해하니 비록 천 번을 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행창이 그 순간 크게 깨달아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무상의 마음을 지킴으로 인하여
부처님이 유상의 성품을 설하셨는데
방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봄 못 속에 조약돌 주음과 같았다.
내가 이제 아무런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
불성이 앞에 나타나니
스승이 주신 것도 아니고
나도 또한 얻은 바가 없도다.

조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똑똑히 알았으니 마땅히 이름을 지철이라 하여라.” 
지철이 절하고 감사하며 물러갔다.


동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신회이고 양양 고씨의 자손이었다.
나이 13세에 옥천사로부터 와서 참배하니 조사가 “선지식아,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근본은 얻어 가지고 왔느냐? 만일 근본이 있다면 당연히 주인을 알 것이니 한 번 말해 보아라.” 하시니 신회가 말하기를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보는 것이 곧 주인입니다.” 하므로 조사께서 “이 사미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하셨는데 “화상께서는 좌선하실 때 보십니까? 보시지 않으십니까?” 하므로 주장자로 세 번이나 때리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나도 역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묻기를 “어떤 것이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보는 것은 항상 자기 마음의 허물만 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보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라. 네가 말한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네가 만일 아프지 않다면 나무나 돌과 같고 만일 아프다면 곧 범부와 같아서 곧 성내고 원한을 일으킬 것이니 네가 아까 보거나 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두 가지 극단이다. 아프거나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것은 생, 멸이니라. 네가 자성을 아직 보지 못하였으면서 감히 그렇게 희롱하듯이 말하느냐.”
신회가 뉘우치며 절하고 사과하였다.
조사가 또 말씀하셨다.
“네가 만일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하고 네가 만일 마음을 깨달았다면 곧 스스로 성품을 보고 법대로 수행하여야 할 것인데 너는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도리어 나에게 와서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나의 봄은 스스로 아는데 어찌 너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네가 만일 스스로 보더라도 나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는데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고 스스로 보지 못하면서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다시 백여 번 절을 하며 허물을 사죄하였고 부지런히 모시며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조사가 대중에게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등도 없고 얼굴도 없으니 너희들은 알겠느냐?” 하시니 신회가 나와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 하였는데 네가 문득 본원이며 불성이라고 하니 너는 어디 가서 지도자가 되더라도 한낱 지해종도(안다는 확신을 내세워 이름이나 글자의 집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무리) 밖에 만들지 못하겠구나.”
신회가 조사가 돌아가신 후에 서울에 들어가서 조계의 돈교를 크게 넓히고 현 종기를 지으니 세상에 유행하였다.

조사께서는 여러 종파들이 힐난하면서 모두가 나쁜 마음을 품고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일체의 착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마땅히 다 없애어서 무어라 이름 할 것이 없어야 자성의 둘이 없는 성품이라 이름 하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 하여 실다운 성품이라 하느니라. 실다운 성품 위에 일체의 교문(敎門)을 세우는 것이니 말 아래에 모름지기 스스로 볼지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다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모시기를 청하였다.

 


第九 宣詔品 
제구 선조품

 

신룡 원년(705년) 정월 보름날에 측천과 중종이 조서를 보내며 이르기를 “짐이 혜안국사와 신수 두 대사를 청하여 궁중에서 공양하며 만사를 보살피는 겨를에 언제나 일승을 연구하였더니 두 대사가 사양하며 말하기를「남방의 혜능선사가 홍인대사의 가사와 법을 받아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 받았으니 그 분을 청하여 물으십시오.」하기에 이제 내시인 설간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며 청하오니 조사께서는 자비로 살피시어 속히 서울로 오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조사께서는 아프다는 글을 올려 사양하시며 산기슭 숲 속에서 여생을 마치기 원하였다.
설간이 말하기를 “경성의 선덕들이 모두 다 말하기를「도를 알고자 하면 반드시 좌선하여 정(定)을 익혀야 한다. 선정을 하지 않고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시던데 조사께서는 어떻게 설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는데 있겠습니까. 경(금강경)에 이르시길「만일 여래가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어디로부터 온 바가 없으면 또한 갈 바도 없다.」하셨습니다.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것이 여래의 청정한 선(禪)이고 모든 법이 비어 고요한 것이 여래의 청정 좌(坐)이며 끝내 증득할 것이 없는데 어찌 하물며 앉는데 있겠습니까?” 
설간이 말하기를 “제자가 경성에 돌아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니 원컨대 조사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마음의 요점을 가르쳐 주시면 두 궁전과 경성에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아룀으로서, 비유하건대 한 개의 등이 백 천 개의 등을 켜서 어두운 것을 모두 밝게 하듯이 밝고 밝음이 영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도에는 밝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번갈아 바뀐다는 뜻입니다. 밝고 밝아 다 함이 없는 것도 역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상대로 이름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정명경에서 말씀하시길「법은 비교할 데가 없음이니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설간이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움은 번뇌에 비유한 것이니 도를 닦는 사람이 만일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리지 아니하면 비롯함이 없는 생사를 무엇을 의지하여 벗어나겠습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둘이 아니고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린다고 하면 이것은 이승의 견해이고 양과 사슴 등의 근기이지 높은 지혜의 대 근기는 다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설간이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라고 여쭈니
“밝은 것과 밝지 못한 것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요달합니다.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실다운 성품입니다. 실다운 성품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에게 있어도 줄어들지도 않고 현명한 성인에게 있어도 늘어나지 않으며 번뇌에 머물러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에 있어도 고요하지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 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중간과 그 안팎에도 있지 아니하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성품의 모습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 변천하지 않는 것을 도라고 이름 합니다.” 하셨다.
설간이 “조사께서 말씀하시는 불생불멸은 외도와 어떻게 다릅니까?” 라고 여쭈니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을 가지고 생을 멈추고 생으로써 멸을 나타내는 것이라. 멸도 오히려 불멸과 같으며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지만 내가 말한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본래 스스로 생겨남이 없는 것이어서 이제 없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도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대가 만일 핵심을 알고자 하면 일체의 선과 악을 전혀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연히 청정한 마음의 바탕에 들어설 것이며 맑고 항상 고요하여 그 묘한 작용이 항하의 모래 수 같을 것입니다.”라 하셨다.
설간이 가르침을 받고 크고 시원하게 깨달아서 절하고 하직하여 대궐로 돌아와 조사의 말씀을 글로 올렸다.
그해 9월 3일에 조서가 있었는데 조사께 감사하며 이르기를 “조사께서 늙고 병들었다고 말씀하시며 짐을 위하여 도를 닦으시니 나라의 복전입니다. 조사께서는 정명(유마힐 거사)께서 병을 들어 비야리 성에서 사양하고 대승을 명백하게 들어 나타내며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시고 둘이 아닌 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설간이 조사께서 가르쳐 주신 여래의 지견을 전하여 주니 짐은 적선을 쌓은 집에 경사가 있는 생활이 되었고 숙세에 심은 선근으로 조사의 출현하심을 만나서 높은 <승>을 몰록 깨달았으니 조사의 은혜에 감사하여 머리에 받들어 마지않습니다.” 하며 마납 가사와 수정 발우를 드리고 소주자사에게 명하여 도량을 수리하여 장엄하게 하고 조사의 옛 거처에 국은사 라는 이름을 내리셨다.

 


第十 付囑品 
제십 부촉품

 

조사께서 하루는 문인인 법해와 지성과 법달과 신회와 지상과 지통과 지철과 지도와 법진과 법여 등을 불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아 내가 멸도한 후에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리라.
먼저 삼과 법문에 의거하여 움직이고 작용하는 36가지 상대를 들것이니 나오고 들어감에 두 끝을 여의고 일체 법이 자성을 떠나지 않았음을 설하리라.
갑자기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을 모두 쌍으로 하고 모두 상대법을 취하여 오고 감을 서로 원인으로 하고 마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하여라.
삼과 법문이라 하는 것은 <음> <계> <입>을 말한다.
음은 곧 5음이니 색, 수, 상, 행, 식 이것이고, 
입은 곧 12입으로 밖의 6진인 색, 성, 향, 미, 촉, 법과 안의 6문인 안, 이, 비, 설, 신, 의 이것이며, 
계는 18계로 6진과 6문과 6식 이것이니라.
자성이 만법을 머금었으므로 함장식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생각을 일으키면 곧 의식을 굴리는 것이다.
6식을 내어 6문을 나와 6진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18계가 모두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성이 만일 삿되면 18사(邪)가 일어나고 자성이 만일 바르면 18정(正)이 일어나느니라.
만일 악하게 쓰면 중생의 용(用)이고 착하게 쓰면 부처님의 용이니라.
작용은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
자성을 말미암아 상대법이 있느니라.
바깥 경계인 물질세계에는 다섯 가지 상대가 있다.
하늘과 땅이 상대고, 해와 달이 상대고, 밝음과 어두움이 상대고, 음과 양이 상대고, 물과 불이 상대다.
법상을 나타내는 말에는 열두 가지 상대가 있다.
말과 법이 상대고, 유와 무가 상대며, 빛깔과 빛깔 아닌 것이 상대고, 모양과 모양 아닌 것이 상대며, 번뇌와 번뇌 없음이 상대고, 물질과 허공이 상대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고, 맑음과 흐림이 상대며, 범부와 성인이 상대고, 승려와 속인이 상대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고, 큰 것과 작은 것이 상대다.
이것이 열두 가지의 상대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는 열아홉 가지의 상대가 있다.
긴 것과 짧은 것이 상대고, 삿된 것과 올바른 것이 상대며,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이 상대고, 모르는 것과 앎이 상대며,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상대고, 자비로움과 독한 것이 상대며, 계(戒)와 그릇됨이 상대고, 곧은 것과 굽은 것이 상대며, 참된 것과 헛됨이 상대고, 험한 것과 평탄한 것이 상대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고, 늘 있음과 덧없음이 상대며, 불쌍히 여기는 것과 해치는 것이 상대고, 기쁜 것과 성내는 것이 상대며, 주는 것과 인색한 것이 상대고,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이 상대며,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이 상대고, 법신과 육신이 상대며, 화신과 보신이 상대다. 
이것이 곧 열아홉 가지의 상대이니라.
이 서른여섯 가지 상대법을 만일 쓸 줄 알면 곧 도가 모든 경전의 법을 꿰뚫어 출입함에 두 가지 끝을 여의어서 자성을 움직여 쓰는 것과, 사람과 함께 말함에 있어서 밖으로는 상에 대하여 상을 떠나고 안으로는 공에 대하여 공을 떠나느니라.
만일 상에 완전히 집착하면 사견을 기르고 만일 공을 완전히 집착하면 무명을 기르느니라.
공에 집착한 사람은 경을 비방하여 바로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문자를 이미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도 부당한 것이니 이런 말은 다만 문자의 모습일 뿐이다.
또 말하기를 곧은 도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우지 않는다는 두 글자도 또한 문자이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고 곧 그를 비방하기를 문자에 집착한다 하는데, 너희들은 모름지기 알아라.
스스로 미혹함을 오히려 옳지만 불경까지 비방하겠느냐, 절대 경을 비방하지 말아라.
죄의 업장이 헤아릴 수 없느니라.
만일 밖으로의 모습에 집착하여 법을 만들어서 참(眞)을 구하거나 혹은 도량을 넓게 세워서 유와 무의 허물과 근심을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몇 겁이 지나더라도 견성하지 못할 것이니, 다만 법을 듣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할 것이며, 또 백가지 물건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이 수행이라 하여 도의 성품을 막히게 하지 말아라.
만일 설법을 듣고 닦지 아니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삿된 생각을 내게 하니 다만 법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상에 머무름이 없이 법을 베풀어라.
너희들이 만일 깨닫고 이를 의지하여 말하고 이를 의지하여 쓰며 이를 의지하여 행하고 이를 의지하여 지으면 곧 근본 종지를 잃지 않으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를 물으면 무로써 대답하고, 무를 물으면 유로써 대답하며, 범부를 물으면 성인으로써 대답하고, 성인을 물으면 범부로 대답하여 두 도가 서로 원인이 되어 중도의 뜻이 나게 할 것이며, 한번 물으면 한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을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하면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고 하느냐하면 대답하기를 밝음이 <인>이고 어두움이 <연>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다. 라고 하여라.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 중도의 뜻을 이루는 것이니, 나머지 물음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라.
너희들이 후에 법을 전할 때에도 이것에 의지하여 서로 바꾸어 가르쳐서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


조사께서 태극 원년 임자년(712년) 7월에 문인에게 명하시어 신주 국은사에 가서 탑을 세우게 하시고, 일하는 사람들을 자주 독촉하여 다음해 늦여름에 낙성을 하였다.
7월 1일에 문도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8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이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빨리 물어 보아라. 
너희들의 의심을 부수어서 너희로 하여금 어리석음이 없게 하리라. 
내가 간 뒤에는 너희를 가르칠 사람이 없을 것이니라.”
법해 등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데 오직 신회만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울지도 않았기에 조사가 말씀하셨다.
“신회소사가 오히려 선과 선하지 못함이 평등함을 얻었으며, 헐뜯는 것과 칭찬하는 것에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었으며, 슬픔과 즐거움을 내지 않는 마음을 얻었구나. 
다른 사람들은 얻지 못했으니 몇 해씩 산에 있으면서 결국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데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근심하는 것이냐? 
만일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여 근심한다면 내가 스스로 갈 곳을 알고 있느니라. 
내가 만일 갈 곳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에게 미리 알려주지 못했을 것이니라.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대체로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가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슬퍼하며 울지는 않으리라.
법의 성품에는 본래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과 가는 것과 오는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모두 앉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리라.
이름은 <진가동정게>라 하는데, 너희들이 이 게송을 외워서 지니면 나의 생각과 같아질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종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스님들이 예를 올리고 조사에게 게송을 설해 주실 것을 청하자 말씀을 하셨다.

일체가 참다움이 없으니 
참이라고 보지 말지어다.
만일 참인 줄 보는 자는 
그 소견이 참되지 못하리.

만일 스스로 참다움이 있다면 
거짓을 여윈 즉 마음이 참이니
스스로 마음에 거짓을 여의지 않으면 
참은 없거니 어느 곳이 참이겠느냐.

유정은 곧 움직일 줄 알고 
무정은 움직일 줄 모르니
만일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으면 
무정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으리라.

만일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찾으려면 
움직이는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다.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무정은 부처님 될 종자도 없겠구나?

능히 상을 잘 분별하되 
제일의(구경의 진리)에 움직이지 말아라.
다만 이 같은 소견을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작용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알리니 
힘써 모름지기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지혜로 생사를 돌이켜 집착하지 말라.

만일 말끝에 서로 맞으면 
곧 불법을 같이 의논하되
만일 실답게 상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여라.

이 종은 본래 다툼이 없는 것이라. 
다투면 곧 도의 뜻을 잃어버리며
거꾸로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빠지리라.

때에 대중들이 조사께서 설하신 게송을 듣고 모두 다 절하였고 아울러 조사의 뜻을 알았다.
각각 마음을 거두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며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않았다.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무르시지 못할 것을 알고 법해상좌가 다시 절하며 여쭙기를, “화상께서 입멸하신 뒤에 가사와 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대범사에서 설법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보단경이라고 기록하여 둔 것이 유행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이것을 수호하고 번갈아 가며 서로 전해 주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다만 이 말대로만 하면 곧 정법이라 할 것이니라.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그 가사는 맡기지 않겠노라.
대체로 너희들은 믿음의 근기가 순박하고 무르익었으며 의심이 전혀 없으므로 큰일을 감당할 만하지만 선조인 달마대사께서 부탁하며 주신 게의 뜻에 의거하여 옷은 마땅히 전하지 않을 것이니라.” 하시며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구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려 함인데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려서 
열매가 자연히 맺으리라.

“선지식아, 너희들은 모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나의 설법을 들어라. 
만일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통달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언제 어디서나 상에 머물지 않아서 그 상 가운데 있으면서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또 취하거나 버리지 아니하며 이익과 성취와 무너짐 등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여 편안하고 한가로우며 아주 고요하고 허공처럼 비어 통하고, 욕심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이것을 일상삼매라 한다.
만일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더라도 순수하고 곧은 마음으로 도량을 움직이지 않고 참으로 정토를 이루면 이것을 일행삼매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삼매를 갖추면 마치 땅에 종자가 떨어져 싹이 트고 자라나서 열매가 여무는 것과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내가 지금 법을 설하는 것은 때맞춰 비가 내려 대지를 두루 윤택하게 하는 것과 같고 너희들의 불성은 비유하건대 모든 종자가 이 비를 만나 흠뻑 적셔져서 모두 다 싹이 트는 것과 같으니라.
나의 뜻을 이어 받는 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나의 행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묘한 과보를 얻을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마음의 땅이 모두 종자를 머금어서 
널리 비를 내리면 다 싹이 트리라.
몰록 깨달아 꽃의 정(情)이 다하면
보리의 열매는 절로 이루리라.

게송을 마치고 말씀하시길 “그 법이 둘이 없어서 그 마음도 또한 그러하며 그 도가 청정하여 모든 상이 또한 없으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고요함을 관하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을 비우려 하지 말아라. 
이 마음이 본래 깨끗하여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으니 각각 스스로 힘써서 인연을 따라 잘 가거라.”
이에 대중들이 절하고 물러갔다.


대사가 7월 8일에 갑자기 문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신주로 돌아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속히 배와 돛대를 손질해 놓아라.”
대중이 슬퍼하며 더 계시기를 간곡히 원하므로 조사가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열반을 보이시듯이 오면 반드시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나의 이 몸뚱이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느니라.”
“조사께서 이제 가시면 언제 돌아오십니까?”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가는 지라 올 때를 말로 할 수 없느니라.”
“정법안장은 어떤 사람에게 전하십니까?”
“도 있는 자가 얻을 것이고 무심한 자가 통할 것이다.”
“후에 난이 없겠습니까?”
“내가 죽은 후 5~6년이 되면 어떤 사람이 내 머리를 가지러 올 것이니 나의 예언을 들어라.
머리를 받들어 친히 공양하고자 함에(김대비), 입 속에 먹을 것을 구하는 장정만의 난을 만날 때 양유(양간, 유무첨)가 관이 되리라.
내가 가고 70년이 되면 두 보살(마조, 방거사)이 동방에서 오는데 한 사람은 출가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재가자인데 동시에 크게 교화하여 나의 종(宗)을 세우고 가람을 짜임새 있게 하여 법을 이을 이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위로부터 불조께서 나타나신 이래 몇 대를 전해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고불(옛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그 수가 한량없어서 가히 헤아리지 못하니 이제 7불을 처음으로 삼으면 과거 장엄겁의 비바시불과 시기불과 비사부불과 지금 현겁의 구류손불과 구나함모니불과 가섭불과 석가모니불이 7불이 되는데 석가모니불이 처음에 마하 가섭존자에게 전하셨으니, 제 이는 아난존자고, 제 삼은 상나화수 존자며,  제 사는 우바국다 존자고, 제 오는 제다가 존자며, 제 육은 미차가 존자고, 제 칠은 바수밀다 존자며, 제 팔은 불타난제 존자고, 제 구는 복타밀다 존자며, 제 십은 협 존자고, 십일은 부나야사 존자며, 십이는 마명대사고, 십삼은 가비마라 존자며, 십사는 용수 대사고, 십오는 가나제바 존자며, 십육은 라후라다 존자며, 십칠은 승가난제 존자며, 십팔은 가야사다 존자고, 십구는 구마라다 존자며, 이십은 사야다 존자고, 이십일은 바수반두 존자며, 이십이는 마나라 존자고, 이십삼은 학륵나 존자며, 이십사는 사자 존자고 이십오는 바사사다 존자며, 이십육은 불여밀다 존자고, 이십칠은 반야다라 존자며, 이십팔은 보리달마 존자이니 이 땅에 초조가 되고, 이십구는 혜가 대사고, 삼십은 승찬 대사며, 삼십일은 도신 대사고, 삼십이는 홍인 대사이니, 혜능은 삼십삼 조(祖)가 되는 것이다.
위로부터 모든 조사께서 이와 같이 각각 이어 받으셨으니 너희들도 이 뒤에 번갈아 가며 전하고 틀리거나 그르침이 없도록 하여라.


대사가 개원 원년(713년) 계축년 8월 3일에 국은사에서 재를 파하시고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각각 지위를 따라서 앉아라. 내가 너희들과 이별하리라.”
법해가 말씀드리길 “화상께서는 무슨 교법을 남기시어 후대에 미혹한 사람으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조사가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후대에 미혹한 사람이 만일 중생임을 알면 그것이 곧 불성이고 만일 중생임을 알지 못하면 만겁동안 부처님을 찾아도 만나기 어려우니라.
내가 이제 너희를 가르쳐서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게 하고 자기 마음의 불성을 보게 하리니 부처님을 보고자 하면 다만 중생임을 알아라.
중생이 부처를 미혹하게 한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니, 자성을 만일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요. 자성이 만일 어리석으면 부처가 바로 중생이니라.
자성이 평등하면 중생이 바로 부처고 자성이 삿되고 험하면 부처가 바로 중생이니라.
너희들의 마음이 만일 험하고 굽으면 곧 부처가 중생 가운데 있고 한 생각 평등하고 곧으면 곧 중생이 성불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며 자기의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일 불심이 없으면 어느 곳에서 참 부처를 구하리오.
너희들의 마음이 곧 부처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아라.
밖으로는 한 물건도 세울 것이 없다.
모두 이 본심이 만 가지 법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없어진다.」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한 게송을 남기고 너희들과 이별하리니 이름이 <자성진불게>이니라.
후대 사람이 이 게의 뜻을 알면 스스로 본심을 보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리라.”

진여자성이 참 부처요, 
사견과 삼독이 마왕이다.
삿되고 어리석을 때 악마가 집에 있고 
견해가 올바를 때 부처가 방에 있네.

성품 가운데 사견으로 삼독이 생겨나면 
곧 마왕이 집에 와서 살고
정견으로 스스로 삼독의 마음을 없애면 
마(魔)가 변하여 부처가 되며 참일 뿐 거짓은 없네.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여! 
삼신이 본래 한 몸이니
만일 성품 가운데를 향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부처를 이루는 보리의 원인이니라.

본래부터 화신은 깨끗한 성품에서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이 항상 화신 가운데 있네.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정도를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이 없으리라.

음란한 성품이 본래 깨끗한 성품의 씨앗이요, 
음란함을 없애면 곧 깨끗한 성품의 몸이니
성품 가운데에 각각 오욕을 떠나면 
견성이 찰나이고 곧 참이니라.

금생에 만일 돈교의 문을 만나면 
홀연히 자성을 깨달아 세존을 보지만
만일 수행하여 부처를 찾으려 하면 
어느 곳에서 헤아려 참을 구할지 모르겠구나.

만일 마음 가운데에 스스로 
참을 본다면 참이 곧 성불하는 원인이니라.
자성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마음을 일으킴이 다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돈교법문을 이제 남겨두니 
세상 사람을 제도할 때 모름지기 스스로 닦게 하라.
장차 도 배우는 자에게 알렸으니 
이런 소견을 짓지 아니하면 크게 유유하리라.

조사가 게송을 마치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잘 살아라. 내가 멸도한 후에 세속의 정으로 슬피 울지도 말고 사람의 조문도 받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고 또한 정법도 아니니라.
다만 자기의 본심을 알아서 자기의 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은 것도 그릇됨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가는 것도 없느니라.
너희들의 마음이 어리석어서 나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지금 다시 너희에게 당부하며 너희로 하여금 견성하게 하니 내가 멸도한 후에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는 날과 같을 것이고 만일 나의 가르침을 어기면 비록 내가 세상에 있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으리라.” 
다시 게송을 읊으셨다.

올올히(모든 것을 초월하여 태연함) 선을 닦지 않고
등등히(자재 무애하며 당당함) 악도 짓지 않는지라.
적적하여 보고 듣는 것이 끊어지고 
넓고 넓어 마음이 걸림이 없구나.

조사께서 게송을 마치시고 단정히 앉아 계시다가 삼경이 되자 홀연히 문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간다.” 하시며 조용히 돌아가시니 그때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고 흰 무지개가 땅에 꽂혔으며 숲과 나무들이 하얗게 변하고 짐승들이 슬피 울었다.


11월에 광주, 소주, 신주 세 군(郡)의 관료와 문인과 승(僧)과 속(俗)이 서로 진신을 모셔가려고 다투느라 갈 곳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향을 사르고 빌기를 “향의 연기가 가리키는 곳이 조사께서 돌아가실 곳입니다.” 하니 그때 향의 연기가 바로 조계를 향하여 곧게 뻗치므로 11월 3일에 신감(시신을 모신 관)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의발을 옮겨 돌아왔다.
다음 해 7월 25일에 신감을 꺼내어서 제자 방변이 향을 그 위에 바르고 문인들이 머리를 취하리라는 예언을 생각하여 먼저 철판과 옻칠을 한 천으로 조사의 목을 단단히 보호하여 탑에 모셨더니 홀연히 탑 안에서 흰 빛이 나와 하늘로 뻗어 올랐는데 3일 만에 비로소 흩어지므로 소주자사가 조정에 아뢰었고 칙명을 받들어 비를 세워서 조사의 도행(道行)을 기록하였다.
조사의 춘추는 일흔 여섯이었다.
스물넷에 의발을 전해 받으시고 서른아홉에 스님이 되어 설법을 하시며 중생을 이롭게 하신 것이 삼십칠 년이었다.
종지를 얻어 법을 이은 자가 마흔 세 명이고 도를 깨달아 범부를 넘어선 사람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었다.
달마가 전하신 믿음의 징표인 가사와 중종이 주신 마납가사와 보배발우와 방변이 새긴 조사의 진영과 그 밖의 도구들은 탑을 주관하는 시자가 맡아서 영원히 보림 도량에 두게 하고 단경을 유전하여서 종지를 나타내고 삼보를 일으켜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附錄 
부록 

 

조사께서 탑에 드신 후(722년) 개원 10월 임술 8월 3일 한 밤중이 되었을 때 갑자기 탑 속에서 쇠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가 나므로 스님들이 놀라서 나가보니 한 상주가 탑에서 달아나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조사의 목에 상처가 있었다.
도적이 든 사실을 고을에 자세히 알리니 현령인 양간과 자사인 유무첨이 통첩을 받고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더니 5일 만에 석각촌에서 도적을 잡았다.
소주로 보내 죄를 심문하니 성은 장이고 이름은 정만인데 여주의 양현 사람이라 하였다.
홍주의 개원사에서 신라 스님 김대비로부터 돈 2만 냥을 받았고 김대비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으로 돌아가서 공양하려 했다 하므로 유수가 이 사실을 듣고 형의 집행을 보류하고 몸소 조계에 가서 조사의 제자 가운데 제일 뛰어난 사람인 영도에게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를 물으니 영도가 말하길, “만약 국법으로 논한다면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불교는 자비로워 원수나 친한 이나 모두가 평등한데 하물며 그 사람이 공양을 하고 싶어서 한 짓이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므로, 유수가 감탄하며 “비로소 불문이 넓고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며 풀어주었다.

상원 원년(760년 - 멸도한지 47년째)에 숙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사의 의발을 대궐 안으로 가져와 공양하였는데 영태 원년 5월 5일 대종의 꿈에 육조대사가 나타나 의발을 청하므로 7일에 자사인 양함에게 분부하여 이르시길, “짐의 꿈에 혜능선사가 나타나서「법을 전하는 가사를 조계로 되돌려 주라.」하시므로 진국대장군인 류숭경으로 하여금 받들어 보낸다. 짐이 국보로 생각하니 경이 직접 본사에 가서 법대로 잘 모시고 스님 가운데 종지를 친히 이은 자로 하여금 더욱 엄중하게 수호하게 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셨다.

그 뒤에 가끔 사람들이 몰래 훔쳐 갔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찾아왔는데 이와 같은 일이 네 번이나 있었다.

헌종(806년)이 대감선사라 시호하시고 탑을 원화영조라 이름 하였다.
그 나머지 사적은 당나라의 상서인 왕유와 자사인 유종원과 자사인 류우석 등이 비문에 실었다.

탑을 지키는 사문 영도가 기록하노라.

 

-육조단경 한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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