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집백연경 삼명 육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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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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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집백연경(撰集百緣經)10권 10품 100가지 인연(因緣)을 번역하면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중에
삼명(三明) 육통(六通)과 팔해탈(八解脫)과 삼십이상(삼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였는데
차래로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삼명(三明)과 육신통(六神通)은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갖추어져 있는 자재(自在)하고 묘(妙)한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육신통(六神通)즉 육종(六種)의 부사의한 공덕 작용(功德 作用)인
1.천안통(天眼通 =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
2.천이통(天耳通 =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신통),
3.타심통(他心通 = 다른 사람의 의사를 자재하게 아는 신통),
4.숙명통(宿命通 = 지난 세상의 생사(生死)를 자재하게 아는 신통),
5.신족통神足通 = 부사의하게 경계를 변하여 나타내기도 하고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는 신통),
6.루진통(漏盡通 = 자재하게 번뇌(煩惱)를 끊는 신통
이 육신통 중에서 천안통 숙명통 루진통에 해당하는 천안명(天眼明), 숙명명(宿命明), 루진명(漏盡明)을 삼명(三明)이라 하는데 지혜가 분명히 대경(對境)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부처님에 대하여는 보통 삼달(三達)이라고 한다.
다음 팔해탈(八解脫)은 팔배사(八背捨)라고도 하는 여덟가지의 관염을 말한다. 이 관념에 의하여 오욕(五欲)의 경계를 등지고(배 = 背) 탐착 하는 바를 버림(사 = 捨)으로서 배사(背捨)라고 하며 또 이것으로서 삼계(三界)의 번뇌(煩惱)를 끊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므로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1. 내유색상관 외색해탈(內有色想觀 外色解脫) = 안으로 색욕(色欲)을 탐(貪)하는 생각이 있으므로 이 탐심(탐心)을 없애기 위하여 밖의 부정(不淨)인 퍼렇게 어혈든 빛 등을 관하여 탐심(탐心)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것).
2. 내무색상관 외색해탈(內無色想觀 外色解脫 = 안으로 색욕(色欲)을 탐(貪)하는 생각은 이미 없어졌으나 이것을 굳게 하기 위하여 밖의 부정(不淨)인 퍼렇게 어혈든 빛 등을 관하여 다시는 탐심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것).
3. 정해탈신 작증구족주(淨解脫身 作證具足住 = 깨끗한 색(色)을 관(觀)하여 탐심(貪心)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정해탈(淨解脫),이 정해탈(淨解脫)을 몸(신 = 身)안에 증득(證得)하여 구족(具足) 원만(圓滿)하여 정(定)에 들어 있음(주 = 住)을 신작증구족주(身作證具足住)라고 한다.
4.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 = 이로부터 비상비비상처해탈(非想非非想處解脫)까지는 앞의 제사선(第四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닦아야 할 수정(修定)의 순서로 되어 있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 하는 것으로 이것을 각기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이유는 능히 하지(下地)의 탐(貪)을 사리(捨離)하는 까닭이다. 대상(對象)이 될 일체의 색상(色想)을 멀리 여의고 무변(無邊)한 공간(대상 = 對象)을 대상으로 하여 이에 일심(一心)을 전주응시(專注凝視)하는 것을 말한다.
5.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 =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관(觀)이 오히려 허공(虛空)이라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것을 멀리 떠나고 주관인 식(識)이 무변하다는 것을 관(觀)하는 것이다.
6.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 = 식무변처(識無邊處)의 관(觀)이 오히려 식(識)이라는 소유감(所有感)이 있으므로 이것을 멀리 여의고 무소유(無所有)라 관(觀)하는 것이다.
7.비상비비상처해탈(非想非非想處解脫=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무한(無限)한 식(識)의 존재를 관상(觀想)하므로 유상(有想)이요 무소유처(無所有處)는 공(空)도 식(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상(觀想) 하므로 이것은 비상(非想)인데 이것은 유상(有想)을 버림으로 비상(非想)이요 비상(非想)도 버림으로 비비상(非非想)이라고 한다. 구경미세(究竟微細)의 관법(觀法)임을 말한 것이다.
8.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 =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함은 일명(一名) 멸진정(滅盡定)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감각적 작용과 사유 분별의 작용이 멸진(滅盡)하여 무심(無心)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 정(定)은 신(身), 구(口), 의(意)의 행(行)은 멸(滅)하였으나 수명(壽命)을 버린 것도 아니요 난기(煖氣)를 떠난 것도 아니며 신명(身命)이 상속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적멸(寂滅)의 삶을 뜻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