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허큰스님 연기(緣起)의 정의와 의의
-
아라마
- 16
- 0
출처 | 아라마제작 |
---|
연기(緣起)의 정의와 의의
불교(佛敎)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연기(緣起)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곧 "연기법(緣起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法)은 여래(如來)가 출세(出世)하거나 출세(出世)치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있는 것이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분별(分別) 연설한다.(잡아함경 권12),, "만약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法)을 보면 곧 연기(緣起)를 본다.(중아함경 권7),, "오직 석가모니불 뿐만 아니라 비바시불 등 과거 6불(六佛)도 모두 이 연기(緣起)를 증득하여 정각(正覺)을 이루시었다. (아함경 권15) 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은
1.부처님께서나 혹은 어느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법계(法界)에 항상 있는 것이며.
2.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다시 말하면 성도(成道)하신 내용이며.
3.부처님의 모든 교설(敎說)은 이로부터 나왔으며
4.이것은 법(法) 정법(正法)이며.
5.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 법(法)을 깨달음으로서 정각을 성취(成就)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먼저 연기의 정의를 알아본 다음에 의의를 새겨보자. 경전상에는 이 연기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일어난다.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잡아함경 권12)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나므로 저것이 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인차유피 무차무피 차생피생 차멸피멸 (因此有彼 無此無彼 此生彼生 此滅彼滅) (잡아함 권472)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젓이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상응부경 12.) 등으로 설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뜻의 문구는 실로 여러 곳에 나온다. 이들 중 우리가 흔히 연기의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차유고피유 차유고피기(此有故彼有 此有故彼起)인데 이것을 연기의 정의라 부르는 이유는 나머지의 것은 위의 의미를 부연한 것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연기의 정의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위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문구가 서로 그 의미하는 바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는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1. 이것이 있으모로 저것이 있다. 라는 것은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의 공간적 상의성 관계( 空間的 相依性 關係)를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
2.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것을 내포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의 시간적 상의성 관계(時間的 相依性 關係)를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이것을 종합하여 볼 땐 이것과 저것이 나타내는 말은 어떤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서로간의 상의성(相依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것인 이상 모든 만유(萬有)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이 없어 서로 서로가 인(因)이 되고 또 연(緣)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로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것 중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독립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모든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한다는 이 연기법(緣起法)은 실로 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진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만고불변의 진리인 연기법은 과연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석존(釋尊)께서 출가(出家)하시어 입산수도(入山修道)하신 동기가 하나의 진리를 찾자는 것이 아니고 중생에게 주어진 생사(生死)의 고통을 여의고자 함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연기법이고 이것으로 인하여 정각(正覺)을 성취, 생사(生死)의 모든 고통을 떠나셨다면 우리는 이 연기법이 하나의 단순한 개념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모든 고통을 떠나셨다면 우리는 이 연기법이 하나의 단순한 개념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모든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크나큰 의의를 가진 진리임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에게도 그가 갈구하던 바 모든 고뇌의 해탈(解脫)을 이 연기법을 깨달으므로서 성취하셨다면 이보다 더 큰 진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경에 의하여 그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자.이를테면 상응부경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1.< 무슨 까닭에 생사(生死)가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는가>
2. <무엇이 없으므로 생사(生死)가 없는가.무엇이 멸하므로 생사(生死)가 멸하는가.>하고 생각하셨다니 이것은 연기법에 입각한 사유방법이라 연기법이 그대로 만유의 존재실상(存在實相)은 물론 중생의 모든 괴뇌를 풀어주는 열쇠로 직접 활용되었던 것임을 말해 준다. 물론 이것은 연기법을 깨달음으로서 이미 해탈을 얻으신 부처님께서 중생제도를 위하여 제2차적(第二次的)인 문제로 표현 방법을 관(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나 어쨌던 이 연기법의 의의는 생사고(生死苦)를 끊는 것만큼 더 큰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선 이에 대한 해답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비구들아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생(生)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나오던 안 나오던 법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상응부경 2)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매한 중생에게 생사를 여의는 충족한 연기법의 해답을 줄 수는 없었다.부처님께서는 <내가 채득한 이 법은 심히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적연미묘(寂然微妙)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심원하기 에 지혜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져 좋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은 인(因)이 있으므로 생겼다는 연기의 이치는 알기 어려울 것이다.(상응부경 6) 라고 한 것처럼 이런 중생들에게 이 법을 알려주기 위하여는 보다 자세하고 보다 조리를 갖춘 표현의 방법을 모색하여 이것을 일러줌으로써 생사의 험한 고통을 떠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계속 사유한 결과 그 결론적인 표현 방법을 얻었으니 이것이 곧 다음에 나오는 연기설이요 이 만고불변의 연기법에 대한 의의는 곧 우리 중생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바 모든 생사의 고통을 이 연기법에 의해 끊을 수 있다는데서 그 크나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자신있게 정벙(正法)이라고 할 수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그렇다면 연기설(緣起設)이란 어떤 것인가. 연기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연기설인데 12연기설이란 <부처님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또 다시 보리수 아래서 7일간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해탈(解脫)의 즐거움을 받고 있었다. 그 때 부처님은 초야(初夜)에 연기의 이치를 순차(順次)로 또 역차(逆次)로 억염(憶念)해 보았다. 무명(無明)의 연(緣)으로 부터 행(行)이. 행(行)의 연(緣)으로 부터 식((識)이. 식(識)의 연(緣)으로 부터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의 연(緣)으로 부터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으로 부터 촉(觸)이. 촉(觸)의 연(緣)으로 부터 수(受)가. 수(受)의 연(緣)으로 부터 애(愛)가. 애(愛)의 연(緣)으로 부터 취(取)가. 취(取)의 연(緣)으로 부터 유(有)가. 유(有)의 연으로 부터 생(生)이. 생(生)의 연(緣)으로 부터 노사(老死) 우비(憂悲) 고뇌(苦惱) 절망(絶望)이 생기고, 이와 같이 하여 모든 괴로움 덩어리의 생기(生起)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욕(離欲)의 도(道)에 의하여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滅)하고. 행(行)이 멸(滅)하므로 식(識)이 멸(滅)하고. 식(識)이 멸(滅)하므로 명색(名色)이 멸(滅)하고. 명색(名色)이 멸(滅)하므로 - - - 이와 같이 하여 괴로움 덩어리 모두의 멸진(滅盡)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중야(中夜)에도 그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억념(憶念)하였다.>(五分律 卷15) 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現實相)인 모든 고뇌를 떠나기 위해 그 발생과 소멸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지로써 풀어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는 이 12연기설이 뜻하는 바를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12지의 하나 하나를 먼저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연기설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떠나기 위한 것이니만큼 역(逆)으로 노사(老死)에서 부터 알아보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당면문제는 중생의 고통에 있었던 이상 이 노사(老死)에서 부터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이제 역(力)으로 12지의 하나 하나를 경론(經論)에 의해 간단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노사(老死) : 노사(老死)란 것은 중생(衆生)의 늙음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나 여기에서 말하는 노사(老死)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닌 노사우비고우뇌(老死憂悲苦憂惱)로서 중생의 모든 고통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이다. 즉 이것은 중생은 어쨌거나 괴롭다. 하는 모든 중생의 무상하고 변천하는 현실의 모습을 대표한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나의 관념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닌 모든 중생, 바로 나 자신에게 닥친 가장 진실한 당면 과제인 중생고(衆生苦)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2. 생(生) : 중생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노사(老死)의 모든 고통은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 중생 고통의 조건은 생(生)이라고 한다. 생(生)이란 세상에 생명체를 받아 탄생하였다는 의미로 무상한 현실속에서의 생존의 시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生)이란 한 없는 고통의 현실속에 중생으로서의 첫 시점(始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점(終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국(終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고 노사(老死)는 생(生)에 위해 있다고 하지만 생(生)과 노사(老死)는 그대로 한 묶음이 되어 중생의 일생이 되는 것으로 생(生). 노사(老死)는 바로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대표하여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병(病)을 더하여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사고(四苦)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고(衆生苦)의 대표적인 것을 일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3. 유(有) : 그러면 생(生)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 (生)을 있겠끔 하는 것은 유(有)라고 한다. 유(有)라는 것은 존재(存在)라는 뜻으로 집착에 얽매인 범부(梵夫)의 생존(生存)을 의미한다. 유(有)는 흔히 삼유(三有 = 三界)라 하여
ㄱ. 욕유(欲有 = 오욕(五欲)의 지배를 받아 생활하는 세계.
ㄴ. 색유(色有 = 욕유(欲有)와 같은 여러가지의 탐욕에 지배되는 세계는 아니나 아직 물질인 색상(色相)에 의해 생활하는 세계.
ㄷ. 무색유(無色有) = 색상(色相)도 없는 세계 즉 하등의 물질적 속박도 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의 세가지로 구분하여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세계보다는 생(生). 노사(老死)를 포함하는 무상(無常) 천유(遷流)의 중생세간(衆生世間)을 객관화시켜 말하는,것으로 보아야 할지니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生)은 유(有)속에 그대로 포함되는 것이라 하겠다.
4. 취(取) : 취(取)라는 것은 취착(取着)의 뜻으로 그릇된 ,집착을 말한다. 즉 번뇌(煩惱)로 덮힌 범부의 생존. 유(有)는 이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있다는 것이다. 취(取)는 흔히 넷으로 나누어 사취(四取)라고 하는데
ㄱ. 욕취(欲取 = 오욕경(五欲境)에 대한 집착.
ㄴ.견취(見取 = 그릇된 견해나 사상 학설 고집함.
ㄷ.계금취(戒禁取 = 그릇됭 계행(戒行)에 대해 진실 청정하다고 고집함.
ㄹ.아어취(我語取 =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에 사로잡힌 자기의 주장을 바른 것이라고 고집함. 의 넷이 그것이다.
5.애(愛) : 그러면 취(取)는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그것은 애욕(愛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愛)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자기 욕망의 만족을 희구(希求)하는 치열한 갈애(渴愛)를 말한다. 중생이란 누구나가 다 그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다. 이것은 결코 바른 것일 수는 없으나 중생이면 누구나가 다 이 욕망을 만족시키려 동분서주하며 괴로움의 나날을 보낸다. (물론 성불(成佛)을 향한 원(願)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중생이면 다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심이라 할 수도 있는 것으로 (중생의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12연기설 중에서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이 애욕(愛欲)이 앞으로 나올 지적(智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중요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애(愛)에는 ㄱ.삼유(三有)의 어디엔가에 대한 애욕으로서의 一.욕유애(欲有愛). 二. 색유애(色有愛). 三. 무색유애(無色有愛)의 삼유(三有)의 삼유도 있고
ㄴ. 오욕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애와 유견(有見) 상견(常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 시키려는 유애(有愛)와
ㄷ. 무견(無見) 단견(斷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무유애(無有愛)도 있다.
6. 수(受) : 그렇다면 이런 애(愛)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수(受)라고 한다. 수(受)라는 것은 받아드린다는 뜻으로 외계(外界)를 접촉하여 생기는 쾌(快). 불쾌(不快) 등의 감각 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자세히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육근 = 六根)이 각각 그 대상경계(對象境界)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접촉함에 일어나는 ㄱ. 괴로운 감각(고수 = 苦受) ㄴ.즐거운 감각(낙수 = 樂受) ㄷ.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감각(사수 = 捨受)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受)는 흔히 육수(六受)와 삼수(三受)로 나누기도 하는데
ㄱ. 육수(六受)라 함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접촉면에서 각기 따로 따로 나누어 본 것으로 안촉수(眼觸受), 이촉수(耳觸受), 비촉수(鼻觸受), 설촉수(舌觸受), 신촉수(身觸受), 의촉수(意觸受)의 여섯가지를 말하고 ㄴ. 삼수(三受)라 함은 이리하여 생긴 수(受)를 그 성질면에서 크게 나누어 본 것으로 고수(苦受), 낙수(樂受), 사수(捨受)의 세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애(愛)란 이러한 좋다던지 나쁘다던지 하는 각자 나름의 감각작용인 수(受)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7. 촉(觸) : 그러면 이러한 수(受)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위에 말한 접촉(接觸)인 것이다. 즉 모든 수(受)라는 것은 육근(六根)이 육경(六境)과 접촉하지 않으면 결코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受)가 생기는 조건으로 안근(眼根)이 색경(色境)을 접촉하고 이근(耳根)이 성경(聲境)을 접촉하는 등의 촉(觸)을 드는 것이다.
8. 육입(六入) : 그러면 촉(觸)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육입(六入)으로 인한다고 한다. 육입(六入)은 육근(六根) 혹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는데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육근(六根)없으면 촉(觸)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9. 명색(名色) : 그러면 육입(六入)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명색(名色)이라 함은 모든 정신적 존재(存在)를 표시하는 명(名)과 모든 물질적 존재를 표시하는 색(色)과를 합친 일체의 모든 사물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위에 말한 육입(六入)에 대응하는 대상 모두를 말한다. 즉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으로서 활동 하려면 그 대상이 있어야만 하니 이것은 명색(名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10.식(識) : 그렇다면 이 감각기관인 육입(六入)과 그에 대응하는 대상(명색 = 名色)만 있으면 우리의 심적(心的) 활동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식 = 識 ) 즉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육입(六入)이 각각 그 대상을 접촉하는데 있어서 식(識)이 없다면 송장이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 육입(六入)이 명색(名色)을 접촉한다는 것은 이미 식(識)이 있다는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식(識)은 명색(名色)이 있기에 존재하고 명색(名色)은 식(識)이 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육입(六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 기관인 육입(六入)과 그 대상인 명색(名色)과 그리고 마음인 식(識)의 셋이 갖추어저 있을 때만이 사물과 접촉(촉 = 觸)하는 최초의 심적(心的) 활동을 벌릴수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즐겁고 괴롭고 하는 감각(수 = 受)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육입(六入), 명색(名色), 식(識)의 세가지는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선(先). 후(後)가 따로 없이 서로 서로 연(緣)의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추구해 볼 때 중생의 모든 괴로운 현실상은 바로 다름 아닌 중생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 추구를 멈춰도 좋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즉 그것은 마음이 어떠할 때, 다시 말하면 어떤 내용의 상대에 있을 때 이런 괴로움이 뒤따르나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이 마음의 행(行)과 무명(無明)이다.
11.행(行) : 행(行)이란 업(業)의 의미로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말하는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의업(意業)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함으로 중요한 것은 의업(意業)이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에 아무런 티끌이 없다면 그 마음은 모든 것을 진리(眞理) 그대로 인식할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작용으로 인해 물드는 것이다. 이 사량분별의 작용을 행(行)이라고 한다.
12. 무명(無明) : 그러면 이렇게 실상(實相)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대로의 안경을 만들어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며 사량분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智慧)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정법(正法). 곧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우리는 무명(無明)이라고 하는데 실로 이 무명(無明)만 없다면 온갖 중생의 마음 모두가 그대로 진리와 하나가 될지니 모든 중생고(衆生苦)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생고(衆生苦)에 대한 추구는 여기서 그칠 수 밖엔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앞에 나온 애욕(愛欲)을 정적(情的) 번뇌(煩惱)의 근본이라 함에 대하여 이 무명(無明)을 지적(智的) 번뇌의 근본이라 하는 것이며 애욕(愛欲)을 끊어 해탈(解脫)한 것을 심해탈(心解脫), 무명(無明)을 끊어 해탈한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12支의 하나 하나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12지는 어느 것도 독립됨이 없이 서로 서로가 연(緣)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끊으면 나머지 11지도 자동적으로 동시에 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12연기에 대한 <공간적 관찰> 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지중 그래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지적(智的) 번뇌의 근본인 무명(無明)과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인 애욕(愛欲)과 또 모든 번뇌는 중생 마음의 내용여하에 의한다는 점에서의 식(識)이 그것인데 연기설(緣起說)은 또한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있다.
1.무명연기설(無明緣起說) : 모든 중생(衆生)의 고통(苦痛)은 무명(無明)으로 부터 연기(緣起)한다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 그것이다.
2.탐애연기설(貪愛緣起說) : 모든 중생의 고통은 치열한 갈애인 애욕(愛欲)으로 부터 연기한다는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오지연기설(五支緣起說)이다. 위의 무명연기설이 지적(智的) 번뇌(煩惱)의 근본인 무명을 중심으로 한 것에 비해 이것은 정적(情的)인 번뇌(煩惱)의 근본인 탐애(貪愛)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3. 제식연기설(齊識緣起說) : 모든 중생의 고통은 식(識)으로 부터 연기한다는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등 생사(生死)의 십지연기설(十支緣起說)이다. 이것은 위의 두가지가 번뇌의 근본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것임에 대하여 중생고(衆生苦)의 근원을 주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다보니 식(識) 이상이 없으므로 식(識) 까지를 제한(齊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것이 뜻하는 바 연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연기설은 현상계 만유의 상의성(相依性)을 나타낸 것임으로 그 지수(支數)에는 그다지 깊은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지수(支數)란 연기의 이치를 알기 위한 표현방식에 불과할 뿐 연기의 이치를 아는 사람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경전상에 12지로 한 것은 그 의의를 표현함에 무명(無明)등의 12지가 필요했던 관계상 열거했을 뿐 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열두가지라는 지수(支數)에 너무 고착(固着)하지 말고 연기의 이치를 직관하여 하루 빨리 해탈(解脫)의 경지에 오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괴롭고 쓰라렸던 현실상은 점차 바로 열락의 참다운 현실상으로 나타나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12연기설을 <공간적인 면에서> 관찰해 보았다.
그러나 이 12연기설은 또한 <시간적인 면으로>도 관찰되니
1. 위에서 말한 공간적인 면에서의 관찰은 연기(緣起)의 정의 중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공간적 상의성 관계에 의해 현실 그대로에서의 해탈의 길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고
2.다음의 시간적인 면에서의 관찰은 연기의 정의 중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시간적 상의성 관계에 의해 윤회의 과정에서 이것을 해탈(解脫)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시간적인 면에서 12연기설을 관찰해 보자.
1. 무명(無明) : 과거(過去) 세상(世上)의 번뇌(煩惱)의 근본(根本)인 무지(無知).
2. 행(行) : 무지(無知)로 인(因)하여 과거 세상에 지은 모든 선악(善惡)의 업(業).
3. 식(識) : 과거 세상의 무명(無明)과 행(行)으로 인하여 심식(心識)이 모태(母胎)중에 탁생(托生)함
4. 명색(名色) : 모태(母胎)중에 탁생(托生)은 하였으나 아직 육근(六根)이 완전히 구비되지 못함.
5. 육입(六入) : 태내(胎內)에서 육근(六根)이 완전히 구비됨.
6. 촉(觸) : 아직 심식(心識)이 발달하지 못하여 고(苦), 락(樂), 사(捨)의 삼수(三受)의 원인은 알지 못하고 다만 단순히 감각만이 움직인다.
7. 수(受) : 심식(心識)이 발달하여 고(苦), 락(樂), 사(捨)의 삼수(삼受)를 느끼는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現實相).
8. 애(愛) : 중생이 괴로운 현실을 살아가면서 또한 그 괴로운 현실이 있겠끔된 원인을 알지 못하고 순간적인 욕락(欲樂)에 만족을 찾아 탐애심(貪愛心)이 점차 성하여 의복(衣服)이나 가구 등에는 물론 색애(色愛)까지도 일으킴.
9. 취(取) : 탐애심(貪愛心)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이들을 강구(強求)함.
10. 유(有) : 애(愛), 취(取)로 인하여 여러가지 번뇌를 구사하고 다시 업을 지어감.
11. 생(生) : 위의 업(業)으로 인하여 미래의 생(生)을 받음.
12. 노사(老死) : 미래의 생을 받아 고통속에 살다가 또 다시 사멸(死滅)함.
이상으로 우리는 "시간적인 면에서,, 12연기설의 각 지(支)를 알아 보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시간적인 관찰로서의 12연기설은 전생(前生). 현생(現生). 래생(來生)의 삼생(三生)에 걸처 중생의 괴로운 윤회의 과정을 파 헤친 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12연기의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데 이것을 흔히 혹(惑). 업(業). 고(苦)의 삼도(三道)에 의해 설명된다.
이제 이것에 따라 각 지(支)의 연결 관계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현생(現生)에 있어서 생(生)을 받아 세상에 태어나 괴로운 현실 생활을 해 나가기까지 (식(識 ~ 수(受)의 고(苦 = 과(果)는 과거 무명(無明 = 혹(惑)과 행(行 = 업(業)이란 인(因)이 있기 때문이다.
2. 내생(來生)에 있어서 또 생(生)을 받아 태어나 괴롭게살게 되는 생(生 ~노사(老死) 고(苦 ~ 과(果)는 현재(現在)의 애(愛 ~ 취(取 = 혹(惑)와 그에 따른 유(有 = 업(業)란 인(因)이 있기 때문이다.
3. 따라서 현생(現生)의 애(愛. 취(取)는 전생(前生)의 무명(無明)과 통하고 내생(來生)의 유(有)는 전생(前生)의 행(行)과 통하고 래생(來生)의 생(生)은 현생의 식(識)과 통하고 중생의 노사(老死)는 현생(現生)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와 통한다.
4. 이렇게 볼 때
ㄱ.혹(惑), 업(業), 고苦)가 남아있는 이상 전생(前生)의 전(前)에도 그래 왔고 내생(래生)의 후(後)에도 또 그렇게 괴로운 육도(六道)를 윤회하리라는 것을 쉽게 추정 할 수 있고.
ㄴ. 대로 우리가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였드라도 이 연기법을 여실히 알아 지혜(智慧)를 증장시키고 래생의 윤회를 부르는 원인을 제거하고 대신 해탈(解脫)의 인(因)을 심어간다면 지금까지 지어놓은 인(因)의 과(果)가 다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은 물론 열반(涅槃)에 안주(安住)하리라는 결론을 얻어낼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12연기설을 공간적(空間的)인 면과 시간적(時間的)인 면에서 알이보았다. 물론 여기에는 같은 12연기설이지만 비춰보는 면에 따라 설명상에 상당한 차이가 발견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면에서의 관찰이던 결국 목적은 괴로운 중생의 고통을 뛰어 넘는 것에 있는 이상 각자의 근기에 따라 어떤것을 택해 수행하던 상관은 없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를 입체적으로 직관(直觀)하여 하루 빨리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도록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12연기설은 관찰하는 데는 앞에 나온 것과 같이 또한 순역관(順逆觀)이 있으니 이것을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1.순관(順觀)
ㄱ. 설명적(說明的) 순서(順序)에 의한 순관(順觀) : 무명(無明)에 의하여 행(行)이 있고, 행(行)에 의하여 식(識)이고 .....(내지 생사(生死)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
ㄴ. 추리적(推理的) 순서(順序)에 의한 순관(順觀) : 무엇이 있으므로 생사(生死)가 있는가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내지) 무엇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는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 라고 관찰하는 것.
2. 역관(逆觀)
ㄱ. 설명적(說明的) 순서(順序)에 의한 역관(逆觀) :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행(行)이 멸하므로 식(識)이 멸하고.....(내지) 생(生)이 멸하므로 노사(老死)가 멸한다 라고 관찰하는 것.
ㄴ. 추리적(推理的) 순서(順序)에 위한 역관(逆觀) : 무엇이 멸(滅)하므로 노사(老死)가 멸하는가. 생(生)이 멸하므로 노사(老死)가 멸한다.....(내지)무엇이 멸하므로 행(行)이 멸하는가 무명(無明)이 멸하므로 행(行)이 멸한다고 관찰하는 법.
이상으로 우리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고찰을 모두 마친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관찰하고 또 이것에 따라 따라 철저히 수행(修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육도(六道) 윤회(輪廻)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귀빈(貴賓)이 되느냐는 오로지 우리의 수행에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