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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허큰스님 한국불교(韓國佛敎)의 계율사상(戒律思想)

출처 아라마제작,수집자료

한국불교(韓國佛敎)의 계율사상(戒律思想)

 

1. 고유문화(固有文化)와 불교(佛敎)

 

우리 고유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을 고대 민족사회에서 찾아본다면 대체로 일륜적(人倫的)인 요소와 함께 종교적(宗敎的)인 의미에서 짚어볼 수 있다. 혈연(血緣)을 유대로 하는 하나의 사회집단을 이루면 살았다는 점에서 인륜적이라 할 것이며, 조상신(祖上神 = 단군)을 섬기며 제()지내는 등 천신(天神)이나 자연신(自然神)을 숭상하는 생활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종교적(宗敎的)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설화에 보면 환웅(桓雄)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씨(神市를 정했으며 그는 바람과 비와 구름을 각각 맡아서 다스리는 풍사(風師).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을 거느리고 곡식과 사람의 수명(壽命)과 질병(疾病) 및 선악(善惡)을 주관 하며 모든 인간의 3백여의 갖가지 일을 관장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하였다 한다.

또 고조선(古朝鮮) 때는 이른바 팔조법금(八條法禁)을 제정하여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상해(傷害)하면 곡식으로 대신하여 위적(慰籍)했으며, 도둑질을 하면 잡혀가서 사역(使役)하거나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 겨레는 이와같이 먼 옛 옛날부터 윤리생활을 영위하는 한편으로 천신(天神)인 하늘님을 소박하게 신앙하는 종교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렇다해서 그것이 종교철학적(宗敎哲學的)으로 설명되는 경계는 아니였다.

불교(佛敎)는 바로 이러한 문화풍토(文化風土) 속으로 뛰어들어 재래적인 고대문화에 접촉하면서 서로 혼융되는 가운데 서서히 뿌리 내렸으며, 불교는 어느덧 고대적 미개(未開)를 파헤쳐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를 일깨우는 등 겨레의 문화 활동을 일으키며 윤리생활을 보다 합리적으로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흔히 말하는 민족문화(民族文化)라고 하는 것이 다만 민족 고유의 것만을 고집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민족으로 하여금 장구(長久)한 시간과 민족구성원(民族構成員) 대다수의 창조력에 의해 창출(創出)해낸 소산(所産)이라 할 때, 지금으로부터 16백년 전에 이 땅에 전래(傳來)되어 고유문화와의 융화 속에서 겨레의 의취(意趣)와 더불어 문화활동을 주도(主導)해온 불교는 실로 민족문화의 창조적 주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문화유산(文化遺産)의 태반이 불교문화재(佛敎文化財)라는 양적(量的)인 면에서도 수긍할 수 있지만, 그 불교문화재의 태반이 또한 민중들의 소박한 생활상(生活相)과 함께 중생심(衆生心)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해진다. 근엄한 자용(姿容)의 고구려 불상(佛像)이 그렇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백제불(百濟佛)에서도 그러함을 보며 또 서라벌 옛 사지(寺址)에서 발굴된 여인상(女人像)의 와당(瓦當)에서도 보지 않는가.

오늘의 불교가 큰 보람과 긍지와 함께 도리어 외경(畏敬)해야 할지언정 막연히 자랑으로 삼아 아만(我慢)할 바는 아닐 것이다.

 

 

2. 삼국(三國 = 고구려. 신라. 백제) 불교(佛敎)의 계학적(戒學的) 수용(收容)

 

인도에서 성립(成立)된 불교(佛敎)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각 지역에 널리 전포(傳布)되어 그 세()를 넓혔거니와 불교는 각기 지역이 갖는 자연환경의 특수성나 재래의 고유신앙(固有信仰) 내지는 토속적(土俗的)인 생활풍속 등에 호섭적(互攝的)으로 습합(習合)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에 따라 여러 선오방편(善圬方便)을 강구하면서 두루 섭수(攝受)하였듯이 이처럼 각 나라마다의 특성에 따른 제 각기의 모습을 드려내 보였다. 그러면 불교가 이 한토(韓土)에 비로소 상륙되면서 어떠한 계율사상(戒律思想)을 가지고 전파하였으며 또 사람들의 윤리관(倫理觀)이나 도덕생활(道德生活)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의문이 제기된다.

불교는 본시 중생이면 누구나 다 갖추어 있을 청정(淸淨)한 본성(本性)을 더욱 갈고 닦아서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으로써 그 궁극의 이상(理想)으로 삼는 종교신앙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추어 있을 이 본성청정(本性淸淨)의 마음을 갈고 닦기 위해서 먼저 계(). (). ()의 삼학(三學)을 닦아야 하는 것이니 적어도 불교가 이 땅에 유입(流入)될 시초부터 계학(戒學)에 대한 경전(經典)이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王 2년 서기 372) 백제 침류왕(枕流王1384) 신라 눌지왕대(訥祗王代)417~457)의 순으로 전래(傳來)된 삼국불교(三國佛敎)의 계학적(戒學的) 수용(收容)에 대하여 몇몇 사류(史類)가 전하는 바에 쫓아 그 개예(槪貎)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서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은 사신(使臣)과 순도(順道) 스님을 시켜 불상(佛像)과 경전(經典)을 보내왔다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의 글귀를 인용하여 적었다. 또 이로부터 약 25년 뒤에 담시(曇始)는 경율(經律) 수십권을 가지고 와서 삼귀오계(三歸 五戒)를 세워 교화(敎化)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고구려 불교의 계율(戒律)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전한다.

고구려 불교의 계율(戒律)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불교적 계학(戒學)은 이로써 그 시원점(始源點)을 그었다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고구려 불교는 순조롭게 홍포(弘布)되어 승랑(僧朗). 혜량(惠亮). 담징(曇徵). 혜자(惠慈)와 같은 뛰어난 학장(學匠)을 배출하여 중국 및 일본 등 동방불교(東方佛敎)에 큰 자취를 남기는 등 문화선진국 (文化先進國)의 면목을 사해(四海)에 떨치는 것이었다.

 

백제는 동진(東晋)에 속하는 남방불교(南方佛敎)인 노산(盧山)의 혜산(慧山)으로써 대표되던 계율(戒律) 중심의 불교를 수용(收容)하였으므로 처음부터 계율사상(戒律思想)이 존중되는 이른바 행의불교(行儀佛敎)의 성격을 띄고 출발하였다. 이것은 전진(前秦 = 지금의 장안(長安)인 관중(關中)에 속하는 북방계통에 접하였던 고구려와는 대조되는 특수성이라 하겠다. 북방계불교(北方系佛敎)란 당시 중원(中原) 땅을 풍미하던 노장(老莊)의 소위 무()의 사상을 빌어 반야사상(般若思想)까지도 설명되는 등 신이승(神異僧)이 환영을 받던 격의불교(格儀佛敎)의 성격이다.

이처럼 백제불교는 처음부터 계율중심적인 성격이었다.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하였던 마라난타(摩羅難陀)는 보시 인도승(印度僧)으로서 중국 동진(東晋)을 거처 백제에 왔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시 백제는 당초로부터 유리한 입장에서 높은 차원의 불교신앙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계율사상의 활발한 보급과 더불어 독창적(獨創的)이면서도 호사로운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창조하는 큰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백제불교에서 특기되어야 할 것은 율종(律宗)의 비조(鼻祖)로서 명성을 떨친 분은 겸익(鎌益)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성왕(聖王) 4(526)에 인도에 가서 불법(佛法)을 닦고 돌아올 때에는 많은 율장(律藏)을 가지고 왔으며, 이어서 모두 72권의 율부(律部)를 역간(譯刊) 하는 한편 담욱(曇旭), 혜인(惠仁)으로 하여금 36권의 율소(律疎)를 짓게 하는 등 그 활약이 대단하였다.

6세기 초에 이미 겸익(鎌益)으로 하여금 계율에 해당되는 많은 경전(經典)을 독자적으로 역간(譯刊) 유포(流布)케 하였던 사실은 한국불교사(韓國佛敎史)에 일대사(一大事)가 아닐 수 없다. 백제불교는 이처럼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먼저 계율사상의 차토적(此土的) 세계를 열어 크게 융성을 보았지만, 뒷날 신라에 의한 통일(統一)이라는 역사적 변혁에 기인(起因)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겸익 등 백제불교의 계율적 의취(意趣)는 이것을 조명(照明)할마한 어떠한 전거(典據)도 가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고대에 있어서의 한토불교(韓土佛敎)의 찬연했던 하나의 장()이 일실(逸失)되었던 사실은 한국불교적 허상(虛像)을 드러내 보이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에 대한 자책(自責)은 오늘에 경종(警鍾)으로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불교의 계율적 융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는 세계불교사(世界佛敎史)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확연해지고 있다.

가령 많은 경론(經論)을 가지고 왜()의 땅에 건너간 혜총(惠聰)은 처음부터 계학(戒學)을 일본 불교에 전수하는 선구승(先軀僧) 이었으며 이에 일본 최초의 승려인 선신(善信), 선장(禪藏), 혜선(慧善) 등은 백제에 와서 계학(戒學)을 배우고 또 구법(求法)하였더던 사실이 그러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승 관륵(觀勒)은 일본불교 최고의 영예인 승정(僧正)이 되어 승니(僧尼)를 검교(檢校)하며 단속하는 일을 맡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른바 그들의 비조문화(飛鳥文化)를 꽃피게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불교의 계율 사상을 개화(開花)케 하는 공업(功業)을 백제불교가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고대 삼국(三國) 중에서도 가장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후진성(後進性)을 보여 그 수용과정에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전포(傳布) 과정에서도 도리어 더 활발한 양상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법흥왕(法興王) 14(527)에 이르러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사(殉敎史)을 겪으면서 마침내 불교신앙(佛敎信仰)이 정식으로 공인(公認)되는가 하면 그 다음 해에는 벌써 살생금지법(殺生禁止法)이 제정되고 있다.

가장 중심적이던 백제불교에서의 살생금지령이 이보다 훨씬 뒤(588)에 내려지고 있었던 사실을 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불교적 계율사상이 하나의 국민 도덕으로 승화되는 경의적인 일면을 신라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진흥왕대(眞興王代)에 이르러서는 불교통제기관인 승관제(僧官制)를 창설하여 승니(僧尼)를 양성하고 또 신라의 승통(僧統)이 된 고구려승 혜량(惠亮)으로 하여금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八關法)을 행하여 재계(齋戒)를 펴는 등 고유의 국민사상과 구질서(舊秩序)에 대신하는 불교적 계율사상은 이로부터 점차로 국민생활 속으로 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불교에 있어서의 계율관(戒律觀)의 보편화되는 과정은 아무래도 통일기(統一期)를 전후한 일련의 대덕(大德)들에 의한 계율의 현실적인 실천행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계학(戒學)의 대승적(大乘的)인 체계화(體系化)를 통해 계율사상을 크게 발전시키고 한국불교의 대통(大統)을 세워 세계불교사상(世界佛敎史上)에 그 모습을 웅휘(雄渾)하게 솟아나게 하였던 일단(一團)의 각덕(覺德)들에 의한 빛나는 행업(行業)에서 조명(照明)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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