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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허큰스님 인간의 본성 - 묘허스님

출처 아라마제작,수집자료

인간(人間)의 본성(本性)

- 묘허 큰스님 -

 

1. 불성과 본성

 


 

一. 여래장

 

불교(佛敎)에서는 인간(人間)은 본래(本來)부터 청정여여(淸淨如如)한 본성(本性=佛性)을 구비(具備)하고 있다고 교(敎)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 본성은 그대로 불타(佛陀)의 본성으로서 모든 불전(佛典)에는 불성(佛性)이라 칭(稱)하고 불자가 점점(漸漸) 성장(成長)하여 불타(佛陀)라는 어른이 된다고 하며 사람은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불자(佛子)로서 출생(出生), 장차 불타(佛陀)가 된다고 한다.

인간은 수(數)많은 번뇌(煩惱)에 덮여 있는 불성(佛性)이 점점 그 형태(形態)를 나타내어 번뇌의 구곡(舊穀)을 파탈현현(破脫顯現)한다. 이것을 불타(佛陀)의 출현(出現)이라고 하였다. 불전(佛典)에는 불성(佛性)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장(藏)이란? 원의(原意)는 자궁(子宮)의 뜻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불타(佛陀) 즉(即) 여래(如來)를 잉숙(孕宿)하고 있는 자궁(子宮)이란 의미(意味)가 된다. 그러나 태아(胎兒)라고 해석(解釋)하는 불전도 있은즉, 여래장(如來藏)은 장래(將來)에 성장(成長)하여 불타가 되는 태아(胎兒)의 뜻으로 이해(理解)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불성을 비유적(譬喩的)으로 표현(表現)한 것이 여래장이라 한 것 같다.

 

二. 일체중생 실유불성

 

불전(佛典)가운데 불타(佛陀)에 대(對)하여 많은 비유(譬喩)로서 반설(詊說)한 경(經)은 가장 먼저 열반경(涅槃經)을 들 수 있다. 이 경(經)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은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곧 육도(六道)에 윤회(輪廻)하는 중생 일체(衆生一切)가 불성(佛性)을 구유(具有)한다하여 모든 중생(衆生)이 주(住)하는 세계(世界)가 다르고 형태(形態)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불성(佛性)에 있어서는 평등(平等)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불교(佛敎)의 생명관(生命觀)이다. 한문(漢文) 불전(佛典)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다 불성(佛性)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중생(衆生)은 무엇을 지칭(指稱)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對)하여 원어상(原語上) 한가지 뜻이 아니고 몇개의 다른 의미(意味)가 있음을 예(例)를 들어 설시(說示)한 바 있다.

1) 존재일반( 存在一般)을 의미하는 것.

2) 호흡(呼吸)하고 생명(生命)이 있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

3) 인류(人類)를 의미(意味)하는 것.

이와 같이 원어(原語) 의(依)하면 여러가지 다른 의미(意味)가 있고 한역(漢譯)에는 중생(衆生)이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역(漢譯)에서도 중생(衆生)을 유정(有情)으로 번역(飜譯)하고도 있다. 중생(衆生)과 유정(有情)의 표현(表現)은 의미상 다소(意味上多小) 다른 뜻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바 유정(有情)은 "마음 즉(即) 감정(感情)과 의지(意志)가 있는 것으로 의해(意解)되며, 중생(衆生)과 유정(有情)은 생물(生物)이라는 의미(意味)와 범위(範圍)의 폭(幅)에 다소(多少) 차(差)가 있는 것으로서 유정(有情)의 변(便)이 좁은 범위(範圍)를 표현(表現)하는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때 중생(衆生)을 존재일반(存在一般)의 의미(意味)에서 본다면 산천(山川), 암석(岩石) 사락등(砂礫等) 무생물(無生物)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것이고 반면(反面) 중생(衆生)을 인간(人間)을 포함(包含)하여 동물(動物) 식물등(植物等) 숨(을 쉬는 모든 생명(生命)있는 물체(物體)로 본다면 미생물(微生物)과 자연초목(自然草木) 전체(全體)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것이며 또는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人間)에게만 한정(限定)하여 중생(衆生)의 뜻을 적용(適用)시킬 경우(境遇), 사람만이 성불(成佛)할 수 있는 특성(特性)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같이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에 관(關)하여는 중생(衆生)을 어느 범위(範圍)에 한정(限定)하여 이해(理解)하는가에 따라 불성(佛性)의 해석(解釋)에도 커다란 차이(差異)가 있음을 이해(理解)할 수 있다.

 

 

三. 열반경에서의 불성

 

그러면 인간(人間)의 본질(本質) 즉(即) 불성(佛性)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對)하여는 모든 경전(經典)에 불성(佛性)에 대(對)한 교설(敎說)이 있지만 불성(佛性)의 설명(說明)에는 열반경(涅槃經)에 의(依)함이 가장 적절(適切)하다고 산승(山僧)은 생각한다.

이 경전(經典)에 기술(記述)한 일부(一部)를 간단(簡單)히 소개(紹介)한다면, 먼저 우리 인간자체(人間 自體)에 한(限)하여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경우(境遇), 그 불성은 사람의 어느 부분(部分), 어느 곳에 있는가?하는 의문(疑問)이 날 것이다.

경(經)에는 말씀하시기를 불성(佛性은 우리들의 신체(身體) 속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신체(身體)의 어느 부분(部分)에 있는가? 심문(尋問)한 즉 오온(五蘊) 즉(即) 신체(身體)를 구성(構成)하고 있는 색(色= 肉身). 수(受 = 感覺). 상(想 = 表象). 행(行 = 意志). 식(識 = 認識) 등 오종(五種)의 소내(素內)에 있다고 답(答)하시었다.

그러면 이 오종(五種)의 요소중(要素中) 어느 부분(部分)에 있는가 하니 여기에 대(對)하여는 아무 구체적(具體的)인 교시(敎示)가 없고 경전 제34(經典第三四)에 공후(箜篌 = 十二絃)의 수미(首尾)가 굽은 금(琴)에 비유(比喩)하여 불성(佛性)의 유무(有無) 및 위치(位置)에 대(對)하여 설술(說述)하고 있다.

즉(即) 기(其) 말씀 내용(內容)인즉 이 악기(樂器)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음색(音色)이 나오는데 그 음색(音色)은 현(絃)에서 나오는지 또는 다른 부분(部分)에서 나오는지 이 공후(箜篌)를 분해(分解)하여 탐구(探究)하여도 그 어느 부분(部分)에서도 기(其) 아름다운 음색(音色)은 발견(發見)되지 않았으며 다시 기각(其各) 부분품(部分品)을 조립(組立)하여 연주(演奏)하니 원래(元來)의 음색(音色)이 출현(出現)하였다.

음색(音色)은 공후(箜篌)에서 나옴은 분명(分明)하며 그 음색(音色)이 공후(箜篌)속에 있음이 명백(明白)하니 있다고 하면 어느 부분(部分)에 있는가 하는 의문(疑問)에 대답(對答)해야 할 것인가? 그 음색(音色)은 분해(分解)하여 본즉 그 어느 부분(部分)에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러면 없는 것일까? 그러나 다시 조립(組立)하여 보니 음색(音色)이 나오니, 그러면 있는 것일까? 따라서 공후(箜篌)에는 음색(音色)이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유무(有無) 일방(一方)에 치우쳐 주장(主張)하면 음색(音色)을 상실(喪失)할 것이다.

불성(佛性)도 이와같아서 중생(衆生)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 그런데 있다고 하면 개체(個體)를 오온(五蘊)으로 분해(分解)하여 그 어느 부분(部分)에 있는가를 검토(檢討)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境遇) 기(其) 어느 부분(部分)에도 불성(佛性)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러면 개체(個體)에는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이까? 오온(五蘊)으로부터 구성(構成)된 개체(個體)에 불성(佛性)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명확(明確)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러나 공후(箜篌)의 음색(音色)과 같이 유무(有無) 어느 변(便)에 집착(執着)하면 불성(佛成)은 파악(把握)할 수 없다. 이같이 불성(佛性)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그 불성(佛性)은 지금 살아있는 자기(自己)의 신체(身體) 속에 가지고 있으나 볼 수도 없고 감지(感知)할 수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 대(對)하여 경전(經典)에는 확실(確實)하게 답(答)하기를 "수(數) 많은 번뇌(煩惱)의 구름에 덮혀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정당(正當)한 지도자(指道者 = 善知識)의 지도(指道)에 의(依)하여 수행(修行)하고 번뇌(煩惱)를 제거(除去)하면 반드시 불성(佛性)을 보고 회득(會得)할 수 있다고 하였다.

 

 

四. 불성의 정체

 

그러면 불성(佛性)이란 무엇인가 그 정체(正體)에 대(對)하여 설명(說明)하기를

 

  • 1. 불성(佛性)은 달(월 = 月)과 같다.

불성(佛性)은 무엇을 원인(原因)하여 생기(生起)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계기(契機)로 하여 소멸(消滅)되는 것도 아니다. 시(始)와 종(終)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大)와 소(小)가 장(長)과 단(短)이 다소(多少)등으로 량도(量度)할 수도 없으며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의(依)하여 존재(存在)한 것도 아니다. 그 이유(理由)는 본래(本來) 구족(具足)한 것이며 상주불변(常住不變)한 것이며 시공(時空)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경(涅槃經) 제9(第九)의 교설내용(敎說內容)을 소개(紹介)하면 달이 숨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달이 없다고 말하며 달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달이 떴다고 말한다. 그러나 달은 항상(恒常)하여 생멸(生滅)함이 없건마는 자못 중생(衆生)들을 가르치는 교위(敎爲)가 생멸(生滅)로 보고 말한다 사람들은 달이 찻(만 = 滿)다느니 이즈러졌다느니 말하지만 달은 항상(恒常) 둥글게 차있어 증멸(增滅)이 없다.

불성(佛性)도 그와 같아서 항주(恒住)하여 생멸(生滅)이 없지만 다못 사람의 보는 바에 의(依)하여 생멸(生滅)이 있다고 할 뿐이다. 달은 또 모든 물체(物體)에 나타난다. 도시(都市)에도 촌락(村落)에도 산(山)에도 하천(河川)에도 바다에도 육지(陸地)에도 못(지 = 池)속에도 독 속에도 심지어 풀끝의 이슬에도 물만 이으면 나타난다. 길가는 행인(行人)이 백리(百里)를 가고 천리(千里)을 가도 달은 항시(恒時) 그 사람에게 따른다. 달 그 자체(自體)에는 변(變)함이 없지마는 달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다.

불성(佛性)도 이와같이 세상(世上)의 모든 인간(人間)에게 수(數)많은 자태(姿態)로서 나타나지만 불성(佛性)은 항주(恒住)하여 변(變)함이 없다 하였고 열반경(涅槃經) 제25(第二十五)에는 초생달 밤에는 캄캄하여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달이 이 우주(宇宙)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며, 날이 경과(經過)하면 우리들은 다시 만월(滿月)을 볼 수 있다. 만월(滿月)도 신월(新月 = 초생달)도 다 같이 그 달임에는 변(變)함이 없다.

신월(新月)의 달과 같이 불성(佛性)도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世上)에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이 그것을 볼 수 없는데 불과(不過) 할 뿐이다.

또 열반경(涅槃經) 제9권(第九卷)에 별은 대낮에는 전혀 보이지 않음으로 마치 별 그 자체(自體)가 소멸(消滅)해 버린 것 같이 생각한다. 사람은 별이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錯覺)하고 별이 없는 것으로 인식(認識)한다. 그러나 별 자체(自體)는 없어진 것이 아니고 태양(太陽)이 넘어가면 별은 그대로 나타난다. 별은 그대로 존재(存在)한 것이며 항상(恒常)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佛性)도 그 별과 같아 번뇌(煩惱)가 사라지면 불성(佛性)은 본래(本來) 모양으로 드러내어 광명(光明)을 나타낸다.

   

  • 2. 불성(佛性)은 일색(一色)이다(동색 = 同色)

 

불성(佛性)은 사람의 계급(階級) 성별(性別) 년령 등(年齡等)에 관계(關係)없이 다 같이 구비(具備)하고 그 불성(佛性)은 동일(同一)한 것이며 또한 모든 유정(有情)의 불성(佛性)도 마찬가지여서 색(色)으로 말할 때는 일색(一色) 즉(即) 동색(同色)이고 맛으로 말하면 일미(一味)인 것이다.

열반경(涅槃經) 제9(第九)에 어떤 장자(長者)가 털(모 = 毛) 색(色)이 다른 유우(乳牛)를 사양(飼養)하는데 매일(每日) 아침 유우(乳牛)에서 젖을 짜면서 항상 의아(疑訝)하게 생각한 것은 흑우(黑牛)의 젖이나 적우(赤牛)의 젖이나 백우(白牛)의 젖이나 다 백색(白色)이니 흑우의 젖이 무슨 까닭으로 백색의 젖이 나오는 것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여도 여하(如何)한 어떠한 색의 소에서도 흰색의 젖이 나오는 것이라 불성(佛性)도 우유(牛乳)와 같이 형상(形相)에는 차별(差別)이 있으나 생류(生類)는 다 불성(佛性)을 구비(具備)하고 있다는 점(點)에 있어서는 다 평등(平等)하여 불성(佛性)은 일색(一色 = 同色)이라 하였다.

열반경(涅槃經) 삼십(三十)에는 금(金)을 들어 비유(比喩)한 것이 있다. 금(金)을 가공(加工)하여 금반지 귀고리 목걸이 단추 등을 만드는데 그 형상(形相) 용도(用度)는 각각(各各) 다르지만 황금(黃金)의 금(金)빛 자체(自體)에는 동일(同一)하다. 불성(佛性)도 그 금색(金色)과 같은 것이다.

 

 


 

3. 불성(佛性)은 허공(虛空)과 같은 것이다.

 

허공(虛空)은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몸(신 = 身)으로 부딪칠 수도 없고 모양(형 = 形)도 없고 색(色)도 없고 사람의 감각(感覺)에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허공(虛空)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허공(虛空)은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불성(佛性)도 허공(虛空)과 같다고 비유(比喩)하였다.

열반경(涅槃經) 이십육(二十六)에 도공(陶工)과 화병(花甁)의 관계(關係)로서 비유(比喩)하기를 하루는 어떤 사람이 도공(陶工)을 향(向)하여 화병(花甁)을 사러왔는데 “지금(只今)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도공(陶工)은 “예 있습니다.” 하고 대답(對答)하였다. 그러나 그 주변(周邊)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화병(花甁)은 보이지 않음으로 “화병(花甁)같은 것은 전(全)혀 없지 않습니까?” 하니 도공(陶工)은 점토(粘土)와 공기(工器)있는 곳을 가리키며 "아니 저기 있지 않습니까.?“하였다.

화병(花甁)은 지금(只今) 형상(形相)을 나타내있지 않으나 화병(花甁)을 만들 사람 재료(材料) 도구(道具) 그 외((기외 = 其外) 조건(條件)은 다 갖추어 있다. 인연(因緣)을 구비(具備)하여 있으므로 과(果)는 말하지 않아도 벌써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佛敎)에는 인과(因果)라 하지 않고 인연(因緣)이라 하여 인(因)은 직접원인(直接原因) 연(緣)은 보조적 원인(補助的 原因) 또는 주변조건(周邊條件)을 말하며 인(因)과 연(緣)이 구비(具備)하면 과(果)는 결(決)코 이루어 진다고 하는 것이다.

도공(陶工)은 화병(花甁)은 있다고 서슴치 않고 답(答)한 것은 화병(花甁)이라는 형상(形相)은 없지만 이미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였음으로 형상(形相)은 없지만 화병(花甁)이 있다고 답(答)한 것이다.

불성(佛性)도 이와같이 형색(形色)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신심(信心)을 이르켜 수행(修行)할 생각을 내여 좋은 스승을 따라 실천(實踐)할 인연(因緣)을 구비(具備)하면 바로 불성(佛性)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허공(虛空)은 상식적(常識的)으로 전(全)혀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불성(佛性)은 허공(虛空)과 같이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니고 정당(正當)한 방편(方便), 정당(正當)한 스승, 정당(正當)한 신심(信心)이라는 조건(條件)이 정비(整備)되면 반드시 볼 수도 잡을 수도 있는 것이 허공(虛空)과 불성(佛性)의 다른 점(點)이다.

화엄경(華嚴經) 제육권(第六卷)에 비유(比喩)하기를 산해(山海)의 진미(珍味) 속에 있으면서 먹지 않으면 아사(餓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다 못 듣고만 있으면 그와 같으며 여러가지의 약(藥)을 잘 아는 의사(醫師)도 자신(自身)의 병(病)을 구(救)하지 못하는 것이 다못 듣기만 하는 것이 그와 같으며 은행원이 밤낮으로 타인(他人)의 돈을 헤아려도 자기(自己) 것은 한푼도 없는 것이 듣기만 하는 것과 같으며 맹인(盲人)이 그림을 그려 타인(他人)을 보여도 자기자신(自己自身)은 보지 못하는 것이 듣기만 하는 것이 그와 같으며 물속에서 허덕이면서 물을 마실 줄 모르고 결국(結局) 목이 말라 죽는 것과 같이 다 못 듣기만 하는 것이 그와 같다 하였다.

 


 

4. 불성(佛性)은 존재(存在)한다.

 

열반경(涅槃經)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니 불성(佛性)은 중생(衆生)의 각각(各各) 개체(個體)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理解)하고 있으나 실(實)인즉 그와같이 이해(理解)해서는 아니 된다고 경(經)에는 가르치고 있다. 경전(經典)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骨子)는 "불성(佛性)을 중생(衆生)이다.”라고 하는 점(點)이다. 만일 중생(衆生) 가운데 별도(別途)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理解)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衆生)이 그대로 불성(佛性)이고 불성(佛性)이라 하면 바로 그대로 중생(衆生)이기 때문이라 한다. 시절(時節)의 차위(差違)에서 때로는 정(淨 = 佛性) 때로는 부정(不淨 = 衆生)으로 보이는데 불과(佛過)하다 하였다. 불성(佛性)이 중생중(衆生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본질상(本質上)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衆生)이란 번뇌(煩惱)에 덮여있는 상태(狀態)의 불성(佛性)을 의미(意味)하며 불성(佛性)이라 하면 번뇌(煩惱)의 상태(狀態)가 제거(除去)될 상태(狀態)의 중생(衆生)을 의미(意味)한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상태(狀態) 여하(如何)에서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중생(衆生)이라 하기도 하여 구별(區別)한데 불과(不過)하며 본성상(本性上) 양자(兩者)는 하나이다.

그와 같이 생각할 때 모든 존재(存在)는 그대로 불성(佛性)의 표현(表現)이라 할 수 있고 중생(衆生)의 의미 범위(意味 範圍)도 인간(人間)에서, 생물(生物)에서, 우주존재(宇宙存在) 전체(全體)로 넓혀야 할 것이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를 일체중생실유(一切衆生悉有)는 불성(佛性)이다“하여 불성(佛性)이 내재(內在)한다는 해석 대신(解釋 代身)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실유(悉有 = 全存在)는 불성(佛性)의 현현(顯現)이라 동견(同見)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전(眼前)의 제현상(諸現象)인 초목(草木), 와석(瓦石), 견마등(犬馬等)의 하나하나가 불성(佛性) 그 자체(自體),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불성(佛性)의 상(相)으로서 용(用)으로 나타난 것이고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는 할 수 없다.

열반경 삼십이(涅槃經 三十二)의 군맹평상(群盲評象)의 비유(比喩)는 이것을 이해(理解하는데 가장 적절(適切)한 비유(譬喩)라 할 수 있다. 중맹모상(衆盲模象)에 일부(一部) 일부(一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상전체(象全體)는 아니다. 그러나 상전체(象全體)는 상(象)의 일부분(一部分) 일부분(一部分)을 떠나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이와같이 일(一)과 다(多)가 상즉사입(相即上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총합체(總合體)가 불성(佛性)이다. 여하(如何)한 작은 존재(存在)도 불성(佛性)이 나타남이 아님이 없다.

불성(佛性)을 알고 불성(佛性)을 볼려거든 전존재(全存在)를 보아야 할 것이다. 즉(即) 견성(見性)을 할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보살도(菩薩道)에 전념(專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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