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마르크스 철학의 종교이론 소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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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哲學의 宗敎理論 小考
지도교수 : 김순금
제 출 자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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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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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
3. 카우츠키의 宗敎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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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마르크스의 宗敎理論 |
Ⅳ. 마르크스주의 宗敎理論이 社會主義 國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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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마르크스주의(marxism)자들의 다양한 |
의 宗敎政策에 미친 影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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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點들 |
1, 北韓의 宗敎政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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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엥겔스의 宗敎觀 |
2. 主要 社會主義 國家들의 宗敎政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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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닌의 宗敎觀 |
Ⅴ. 맺음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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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 리 말
마르크스는 宗敎를 매우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대체로 宗敎의 發生과 分類에 關心을 갖고 宗敎를 分析하였지만, 때로는 分析, 批判, 說明을 하기 위해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은 특정 宗敎에 關心을 가지기도 하고, 혹은 原始宗敎나 부르주아 계급의 宗敎와 같은 특정한 단계의 宗敎를 다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가톨릭 敎意와 封建的 農耕社會 또는 프로테스탄티즘과 政治 經濟學의 關聯性에 注目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공정한 比較에 만족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는 성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宗敎의 搾取的 性格과 欺瞞性을 들추어 낸다거나 矛盾性을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宗敎의 洞察力 또는 迷信性을 提示하기 위하여,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성서를 곧 잘 인용하였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宗敎理論에 대해서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宗敎的 信念, 行爲, 制度에 대해 혹독하리만큼 적대적이었으나 이것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일뿐 宗敎를 강제적으로 없애버릴 전략을 주창하거나 실천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스스로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면공격을 하지 않아도 오히려 무시와 기능의 상실로 인해 宗敎는 소멸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둘째, 마르크스는 그 어떤 宗敎的 敎理도 眞理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종교 가운데는 더 발전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宗敎와 迷信, 진정한 宗敎와 거짓된 宗敎를 區分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信仰의 대상을 “宗敎的 幽靈” 또는 “안개로 둘러싸여진” 지역의 거주자라고 지칭하였다.
세째, 마르크스는 항상 宗敎를 附隨的인 現相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종종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宗敎的 世界를 “實際 世界의 反映”이라고 하였다. 때때로 그는 이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를 세속적인 실재에서 안개로 뒤덮인 宗敎의 世界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나오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때로는 이 점을 좀더 婉曲히 表現해서, 封建 시대의 下部構造가 가톨릭 교의를 설명해 준다거나 부르주아 계급의 宗敎와 자유경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네째, 마르크스는 宗敎적 信念體系가 밖으로부터 인간을 통제하는 객체로 기능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서 생긴 산물이 인간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통제한다고 말하였다.
다섯째, 마르크스는 宗敎的 信念의 대상이 인간을 지배할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하시키고 노예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이 “양의 근성”을 지니고 있다고 諷刺的으로 지적하였고, 영국의 프롤레타리아가 “기독교적인 노예근성”을 지니고 있다고 批判하였으며, 힌두교가 인간을 비하시키고 자연에 대한 정당한 지배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을 네번째의 주장과 관련하여 다시 말한다면, 후기의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疏外라는 槪念을 별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宗敎的 人間은 疏外의 狀態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意味한다고 하겠다.
여섯째, 마르크스는 항상 宗敎的 制度의 이해 관계와 동산이나 부동산과 같은 세속적 재산의 이해관계는 密接한 關聯性이 있다고 主張하였다. 이 양자는 同一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매우 類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곱째, 마르크스는 宗敎가 사회적으로 保守的 機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認定하였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잔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인도의 宗敎意識이 그 社會를 유지시켜주는 구실을 한다는 것을 시인하였으며, 社會的 混亂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宗敎, 財産, 家族, 秩序의 벽들은 무너진다고 지적하였다.
여덟째, 마르크스는 모든 宗敎적 倫理를 相對的이라고 믿었다. 그는 宗敎가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며, 經濟的인 構造가 변하면 이데올로기적 요소도 변한다고 하였다.
아홉째, 마르크스는 프로테스탄티즘과 政治經濟學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자는 각각 抽象的 人間을 崇拜하고 있으며, 또 서로를 지지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역사적으로 자본의 축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그 어떤 宗敎보다도 부르주아 사회에 適合한 宗敎라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유경쟁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열번째, 마르크스는 유태인을 고리대금업자로 간주하였다.
열한번째, 그는 종종 宗敎와 經濟를 유비시켰다. 그는 이와같은 유비를 통해 경제적인 신비를 풀어나갔다.
열두번째, 마르크스는 결국에는 宗敎가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백년동안 宗敎의 권위는 점차 사라져 왔으며, 인간들의 실제적인 관계가 완전히 理性的이 되면 宗敎는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위와같이 마르크스는 宗敎가 어떻게 發生하는 것인지, 앞으로 宗敎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지, 나아가 宗敎가 社會 안에서 어떤 役割을 하는지에 관해 주로 論議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닌,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宗敎에 대한 그들의 觀點을 어떤식으로 주장하는지, 그들 각각의 共通點과 差異點에 대해 論議해보고, 그들의 宗敎理論이 주요 사회주의국가들의 宗敎政策立案에 있어서 어떠한 影響을 미치는지에 대해 살펴도록 하겠다.
Ⅱ. 마르크스의 宗敎理論
마르크스는 그의 著書인 “資本論”에서 다음과 같이 著述하고 있다.
宗敎는 現實世界의 反映物에 불과하다. 상품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상품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을 商品으로서 그리고 價値로서 取扱하는 社會的 生産關係를 맺고 따라서 자신들의 私的 勞動을 同質的 人間勞動의 次元으로 還元시켜 버리는 社會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에 가장 알맞는 宗敎의 형태는 抽象的 人間을 예찬하는 기독교이며 특히 그것의 부르조아적 변신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이신론이 가장 안성마춤이다.
古代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다른 古代的 생산양식에서는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인간의 상품생산자로의 轉化는, 비록 그들 社會가 崩壞되어 가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기는 했어도 아직까지는 부차적 현상에 불과했었다. 본래 상업민족이란 에피큐로스의 신들이나 폴란드 사회 안에서 깨알처럼 산재해 있는 유태인들과 같이 오직 古代世界의 틈바구니에서만 존재했다. 고대사회의 생산조직들은 부르조아적 생산조직에 비하자면 극히 단순하고 간단하였다. 古典的 政治經濟學은 불완전하게나마 가치와 가치의 크기를 분석하였고 또 이러한 형태들 속에서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왜 이러한 내용이 저러한 형태를 취하는가, 예컨데 왜 勞動이 勞動生産物의 가치로 표시되고 또 노동시간이 노동생산물 가치의 크기로 표시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문제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생산과정이 인간에 의해 통제받지 않고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공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못박아 버린 古典經濟學은 부르조아 지식인들에게는 마치 생산적인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의해 주어진 명백한 自然法則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전의 여러 宗敎들이 敎夫들에 의해 다루어졌던 것처럼 부르조아지 사회 이전의 생산양식들은 부르조아지들에 의해 처분되고 있다. 예를들어 교부들은 자신들의 宗敎는 神의 啓示이며 그 이외의 것들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 낸 迷信이라고 치부했다. 마찬가지로 부르조아지들에게 있어 封建制는 人爲的 制度이며 부르조아 階級의 制度는 필연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서 여겨진다.
宗敎는 인간의 投射이고 인간의 생산품이며 인간의 소외를 의미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발견된다.
“천국의 환상적 실재 안에서 초인간적 존재로 찾았으나 자신의 반영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참된 현실을 찾아야 하는 곳에서 자신의 유사체만을, 즉 비인간적 존재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超인간적 존재, 즉 하느님을 찾을 때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한다고 마르크스는 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영상이고 투사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宗敎는 인간의 생산품이고 인간의 소외이다.
마르크스는 그리스도교의 信仰體系와 하느님 같은 것들은 인간의 創造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과 떨어져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의 자의식과 자부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인간이 가진 熱望의 投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또한 마르크스는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미 자신을 喪失한 사람의 자의식이 바로 宗敎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熱望을 투사해서 宗敎와 하느님을 만드는 조건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또한 불의하고 비인간적이며 냉혹한 사회, 인간에게 사회적 소외와 고통을 안겨주는 사회에서 宗敎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소외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소망을 투사하고 宗敎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宗敎는 하나의 의식인데 사회에 의하여 생산되는 사회의 산물이라고 한다. 즉 좋은 사회와 인간적인 사회에서는 宗敎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勞動의 産物이 시장에서 交換되는 商品으로 생산되는 사회에서는 그 생산품이 물신의 특성을 필연적으로 갖게 되고 崇拜의 對象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經濟的 소외가 계속되고 상품의 物神 崇拜가 지속되는 한, 宗敎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個人主義를 표방하는 改新敎는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와 노동자의 고립을 초래하는 資本主義 사회에 매우 적합한 宗敎形態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宗敎의 消滅과 社會的 役割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宗敎를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宗敎를 힘으로 말살시킬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사회조건이 변해서 經濟的 소외가 사라지면, 宗敎에 대한 요구, 즉 소망을 투사하는 요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共産主義 社會가 導入되고 그 곳에서 인간성이 진정으로 실현되면 宗敎意識은 슬그머니 소멸할 것이다.”
그는 宗敎의 사회적 역할에 관하여, 宗敎는 항상 불가피하게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중립적인 사상체계나 의식구조가 아니다. 반대로 이데올로기는 항상 거짓된 어떤 것이고, 권력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사회악을 정당화하며 지배층의 권력과 특권을 옹호하는 사상체계이다.
宗敎는 哲學이나 藝術과 마찬가지로 下部構造에 의하여 생산되고 결정되며 변경되는 上部構造의 일부로서 그 성격상 이데올로기적이며 지배층의 이권을 교묘하게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원리에 대하여도 마르크스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이라고 批判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주로 “宗敎나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 개념, 來世에 대한 믿음 信仰體系의 다른 내용,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神學과 說敎 전체가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Ⅲ. 마르크스주의(marxism)자들의 다양한 觀點들
1. 엥겔스의 宗敎觀
얼핏 보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학문적 관심은 서로 상이한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宗敎批判을 시작할 때 哲學的이고 社會, 政治的 問題를 다루는 것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經濟的 探究에 沒頭하였다. 반면 엥겔스는 經濟的 問題에서 시작하지만 宗敎에 점점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엥겔스가 宗敎 비판가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가 브레멘에 있는 동안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다는 것이다. 성서 연구에서 이책은 엥겔스에게 信仰을 버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슈트라우스를 넘어서서 觀念的인 神學과 헤겔의 절대 觀念主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청년 헤겔주의자들과 접하게 되어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즉위와 더불어 프러시아에서 反動的인 경향을 띠었던 청년 헤겔주의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들과 공동협력을 해나갔다. 가장 급진적인 청년 헤겔주의자가 된 엥겔스는 1842년 그와 관련된 論文을 썼다. 거기서 엥겔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유 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지만 기존의 국가를 고도로 神學化된 기독교 국가의 형태로 우스광스럽게 변형시키려 했다고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엥겔스에 따르면 그 당시 神學은 “아주 상반된 양극의 대립자들 적당히 중재하고 얼버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 성취했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셸링의 哲學的 神學을 공격하는 세 편의 論文들이다.셸링은 그 당시 프러시아의 삶을 특징지었던 反動的인 세력들을 막기 위해서 베를린 대학에 招聘되었다. 셸링은 정부 대변자로서 헤겔주의의 進步的인 모든 요소를 공격했다. 따라서 엥겔스는 가능한 한 헤겔을 옹호하는 동시에 셸링을 역공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엥겔스는 1842년 영국의 맨체스티로 건너갔고 도착한지 2년이 채 안 되는 해에 출판한 논문 “토마스 카알라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평”에서 엥겔스는 자신이 계속 宗敎 비판가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확신중 주목할 만한 것은 대략 7개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宗敎는 神이나 神的 幻想을 만들기 위하여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무시한다.
둘째, 宗敎는 本質的으로 거짓이며 위선이다.
셋째, 抽象的이고 哲學的인 表現을 하는 데까지 이론 기독교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다만 소멸하게 될 뿐이다.
네째, 宗敎에 대한 비폭력적 전쟁이 필요하다.
다섯째, 인간이 정확한 自我 意識을 지니게 되면 그때 宗敎는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여섯째, 無神論만이 인간 해방의 완성을 촉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일곱째, 자기 宗派의 일원들은 歷史를 진지하게 취급하며, 그들을 반대하는 시끄러운 비난에도 불구하고 반대 집단의 일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의 문구들에 비추어 볼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宗敎的인 見解는 1844년 그 유명한 공동 연구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입장으로 수렴되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게다가 엥겔스는 宗敎가 이제 곧 消滅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지지했다. 엥겔스는 처음 영국에 갔을 때 宗敎가 영국인들에게 심지어 노동 계급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영국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18세기 후반기에는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1845년 그가 《영국 노동 계급의 상황》을 출판할 당시에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 즈음 勞動者는 결코 宗敎的이지 않았으며, 聖職者는 지독한 악취를 풍길만큼 腐敗해 있었다. “下層民” 가운데에 자유로운 사상가들은 영국에서의 不可知論을 제도 교회와 거의 동등한 것으로 취급했다. 엥겔스는 “無神論은 분명히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또한 엥겔스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마르크스와 달리 성서 연구의 결과들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이득이 되도록 이용할 만큼 성서 연구에 충분히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엥겔스는 宗敎의 發生을 그의 저서 《反 듀링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처음으로 歷史 시대에 돌입했을 때 그들은 아직 반은 동물적이며 禽獸와 같았고, 自然力에 대연해서는 무력한 존재였으며, 자신들이 가진 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宗敎는 그들의 일상 생활을 통제하는 외부 세력들에 대한 인간 자신의 정신 안에 있는 幻想的 反映일 뿐이다. 이 반영 안에서 지상의 힘들은 超自然的 힘의 형태를 취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전능한 자연의 파괴 앞에서 느끼는 일종의 두려움이 인간 최초의 宗敎的 反應이라는 事實을 확인하면서, 위협적인 사회세력 역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方式으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자신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시도는 했으나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점들을 분명히 하였다.
문제의 요점은 처음에는 宗敎가 自然力에 대한 反應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따라 나중에는 사회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포이에로 바하》에서 처음으로 神, 靈魂, 不滅性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을 애니미즘이론으로 설명했다.어떤 측면에서는 엥겔스의 이러한 설명이 전혀 독특한 것이 아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다.
엥겔스가 타일러의 애니미즘적 접근을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 것은 타일러의 입장은 마르크스를 지지할 수 없었던 엥겔스 자신의 獨特한 思想的 京鄕을 강화하고 보충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경향이란 가끔 宇宙的 次元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설명적 도구인 존재, 힘 또는 原理들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言及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 개념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엥겔스가 애니미즘적 이론을 채택한 것이라든지, 원시 기독교를 社會主義의 전조로 보고 과격한 分派主義를 지지한것 등이 마르크스의 宗敎에 대한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서 이탈한 주요한 사실들이라는 점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좀더 사소한 문제이기느 하지만 엥겔스는 宗敎的인 思考 體系와 경제적인 思想 체계간의 유비적 관계를 마르크스처럼 강조하지 않았으며, 經濟的 神秘를 규명하는 발견적인 도구로 神學的 槪念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또한 엥겔스는 마르크스처럼 宗敎를 그렇게 격렬하게 취급하지도 않았고, 宗敎的 信仰과 實踐에 의해 야기된 노예성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처럼 그렇게 예민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칼빈을 완전히 무시했던 반면 엥겔스는 성장하는 부르주아와의 관계에서 칼빈과 그의 改革運動을 어느 정도 다루었다.
이렇듯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요한 부분에서 서로 相反되었었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이 宗敎批判이 상당히 同質的인 것은 사실이다.
2. 레닌의 宗敎觀
지금까지 학자들은 레닌의 宗敎批判 자체보다는 지도적인 革命家로서 그리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가 宗敎, 敎會, 그리고 聖職者들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지녀왔다.
레닌은 宗敎가 결코 원인없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은 ‧‧‧‧ 무엇보다도 人間이 외적인 자연과 계급적인 멍에로부터 잔인하게 지배를 받음으로써 야기된 관념의 복합체이다.”라고 말하였다. 레닌은 이와같은 인간이 自然과 階級에 從屬됨으로써 인간의 두 가지 형태의 無氣力, 즉 첫째는 “자연과 싸우는 원시인”의 무기력 그리고 둘째는 지배 계급과 투쟁하는 피착취자의 무기력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첫째 형태의 무기력에서 “신, 악마 그리고 기적등”에 대한 信仰이 생겨났으며, 둘째 형태의 무기력에 의해서 지상에서 온순하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천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신앙이 생겨났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견해와 일맥 상통한다. 그리고 그가 自然 宗敎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보이고, 오히려 宗敎 現像을 階級構造와 搾取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도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유사하다. 레닌도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지배, 피지배 관계가 “인간에 대한 종교적 기만의 진정한 원천”이며 현대인들이 宗敎를 믿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포이에르바하는 宗敎를 생성시키는 데 의존과 공포의 감정, 그리고 원시인의 무지가 중요했음을 강조하였는데, 이에 영향을 받고 레닌도 원시인을 전능한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게 떨고 있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宗敎의 본질에 대해서 레닌은 宗敎는 社會 經濟的 條件의 反映이라든가, 실제로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련의 투사, 또는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라고 열거한다. 그는 宗敎를 일종의 부수 현상으로 특징짓고, 近代의 宗敎를 “中世의 곰팡이”라고 비유하였다. 즉 레닌에게서 宗敎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것들중의 하나”이고, 신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열한 존재”이다.
그는 宗敎의 진통제와 같은 역할뿐만 아니라 宗敎의 마취제와 같은 영향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그는 宗敎를 일종의 술이라고 불렀고 宗敎에 의해서 두뇌가 미혹된다고 생각하였다.이와같은 레닌의 종교에 대한 이론적인 입장은 마르크스의 宗敎 批判論과 一致하며 엥겔스의 宗敎 批判論과도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여섯가지 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두가지 宗敎原因論을 留保條項 없이 그대로 인정하였다. 레닌은 인간의 어떠한 宗敎的 能力도 믿지 않았고 사회적 삶의 그 어떤 조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공포가 原始宗敎의 주요한 원인이며 자본에 대한 두려움이 近代 宗敎의 가장 뿌리깊은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宗敎의 社會的 源泉에 주된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레닌은 現代 信仰에 내재해 있는 自然 宗敎와 모든 非社會的 恐怖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간과하였다.
둘째, 레닌은 宗敎와 迷信을 동일시하였고, 근거 없는 超自然的 存在의 客觀性을 否認하였으며, 어떤 宗敎的 敎理도 허위로 여겼으며, 모든 宗敎倫理의 普遍性을 거부하였다.
셋째, 레닌은 짐짓 客觀性을 지닌돗이 보이는 信仰의 가공성은 궁극적으로 경제적 조건에 의해 야기되, 또 그것의 반여물이기 때문에, 宗敎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넷째, 레닌은 宗敎의 機能이 기본적으로 두가지인데, 하나는 宗敎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현상유지를 도모해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피억압자들을 위안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레닌은 宗敎的 信念과 敎會 권력때문에 知的 無能力, 經濟的 搾取, 그리고 사회적인 노예상태가 야기된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서 레닌은 宗敎가 인간의 진보와 자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여섯째,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고, 또 그렇게 되면 모든 宗敎는 소멸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였다.
3. 카우츠키의 宗敎觀
카우츠키는 宗敎라는 용어보다 더 애매하고 모호한 용어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종교”라는 용어를 세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가 제시한 宗敎의 서로 다른 세가지 의미를 중심으로 宗敎의 本質的인 性格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카우츠키에 의하면 宗敎라는 용어를 가장 좋은 뜻으로 사용하자면, 그것은 이웃에 대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 다시말해서 “實踐的인 理想主義”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민주주의도 종교, 그것도 고등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사회 민주주의를 이런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카우츠키 자신은 이것을 그다지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하등의 종교를 극복할 수 있는 고등의 종교로 社會 民主主義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종교의 중요성을 高揚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階級鬪爭이지 宗敎的 鬪爭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투쟁은 이미 무미 건조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공산당 입당을 환영하면서도 카우츠키는 이들의 종교를 진정한 종교로 부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론 그는 이들의 종교가 가장 좋은 의미의 종교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둘째, 카우츠키는 “宗敎自體”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이 말은 唯心論子들이 종종 과학이 아니고 形而上學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존재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의마한다. 여기에서 論理的인 矛盾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카우츠키는 나중에 宗敎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설명하려는 개인의 바램에서 생겨난 것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억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전통적으로 종교에 의해서 해결되었던 形而上學의 지속적인 문제들은 영원 무궁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며, 자연환경을 통제하려는 욕구와 사회적인 고난을 해결하려는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카우츠키는 종교라는 용어를 가장 좋은 뜻의 종교와 “宗敎 自體”라는 의미와 함께 실제적인 종교들, 즉 역사적, 교리적으로 다양한 信仰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세계의 실제적인 종교들이 다양한 사회적인 영향의 산물이며, 인간은 이것들을 통해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靈魂의 世界를 統制하려고 한다고 생각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신관념이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形而上學的 思考體系 자체는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리고 종교는 적어도 초기에는 고상하고 윤리적인 교훈을 갈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의 사회적인 성격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카우츠키는 宗敎와 呪術을 구분하여, 宗敎는 집합적인 행동양상인데 반하여 呪術은 사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행위 형태라고 하였다. 게다가 종교의 지적인 내용과 미신을 구분하지 않고 전자를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양식으로, 후자를 지배적인 견해와 상반되는 괴이한 신앙을 발전시키려는 개인적인 시도로 보았다.
그렇다면 카우츠키의 입장과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가 특정 인간 집단안에서, 그리고 특정 인간집단을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질때 사회적 감정과 도덕, 그리고 집단적인 관심이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였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종교가 집단의 결속력을 유지시키고 증대시키는 측면을 강조하게 마련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굴한 恐怖感, 계급사회에서의 소외상태, 난폭한 생산력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능력감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개념들은 카우츠키의 종교이론에서 그다지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카우츠키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노선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다음의 여섯가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상호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생산양식이 사회 구성을 결정하는 요인이며 思想은 物質的 土臺에 의해 규정짓고, 사상의 변화는 社會經濟的인 變化의 側面에서만 완벽히 설명될수 있으며, 그리고 宗敎를 이해하려면 실제적인 상황 또는 조건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한 입장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정신적인 욕구보다는 경제적인 욕구와 관련이 있고, 宗敎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개인의 인격적인 욕구보다는 사회적인 욕구이며, 그리고 이단은 사상에 대한 괴이한 종교적 열정의 산물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카우츠키는 超自然的 觀念을 포함한 宗敎的인 敎理가 진리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였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지적인 형태나 내용면에서 迷信과 宗敎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셋째, 마르크스,엥겔스,카우츠키는 사회에서 종교가 강력하게 행하는 保守的인 機能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宗敎的倫理의 相對性을 인정하고, 宗敎的 倫理의 絶對性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하였다.
넷째, 神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킨 꿈 체험은 이제 더이상 신에 대한 믿음을 가능하게 해주지 못하고, 宗敎에 대한 본래적인 정신적 욕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科學과 産業이 점차 宗敎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카우츠키는 宗敎가 사라져 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성스러운 것을 分析하지 않고 제의의 중요성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점, 그리고 사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점이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카우츠키의 사상의 일반적인 약점이며 또한 이것은 종교에 관한 이들의 공통적인 견해를 드러내 준다.
여섯째, 이들은 모두다 宗敎와 종교제도를 냉혹하게 파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Ⅳ.마르크스주의哲學이 社會主義 國家의 宗敎에 미친 影響
1.북한의 宗敎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를 보는 見解와 立場을 略少하게나마 설명하였고 덧붙여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카우츠키의 宗敎理論에 대한 차이점이나 공통점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이론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들의 종교는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 나라의 종교 실태는 어떠한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와는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인 朝鮮 民主主義 人民 共和國, 즉 北韓의 宗敎政策이나 實態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북한 정권 초기의 종교상황을 보면,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시작된 宗敎抹殺政策은, 단순히 社會主義 理論과 相反된다는 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政治的 社會的 要因도 많이 작용하였다.
당시의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형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差別政策이었다. 모든 주민은 신분 증명서에 종교를 명기케 하고,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차별대우를 받도록 만들었다.
둘째는 소위 思想 敎養事業의 하나는 어디서나 반종교 선전을 전개하는 한편 일요일의 종교의식 시간을 이용하고 회의나 강습회를 열었다.
세째는 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어린이를 중심으로 밀고 체제를 만들어 성직자들을 감시하여 활동을 제한하였다.
넷째는 일요일에 作業 基準量을 정해주어 勞動을 강요하는 方法으로 宗敎의식을 거행치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일요일을 선거일로 정한것을 들 수 있다.
각 종교별로 보면 北韓의 佛敎系에 가장 먼저 닥친 수난은 1946년 3월에 공표된 토지개혁법령에 의해 寺刹들의 財産이 몰수 당하는 것이었다. 5정보 이상의 土地를 가지고 있는 사찰들의 재산을 무상으로 몰수한 것은 北韓의 共産政權에게는 佛敎彈壓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두는 결과를 안겨 주었다. 이는 僧侶들이 寺刹에 머물 수 있는 제반 여건을 박탈하는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僧侶가 없는 寺刹에 信徒가 올 이유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僧侶들의 托鉢이나 시주 佛供같은 信仰活動이 금지되었음은 물론이고 노동하지 않는자는 먹지 말라는 共産黨의 강요로 配給을 중단시킴으로써 승려들을 노동자로 轉落시켜 나갔다. 따라서 僧侶가 없는 寺刹이 황폐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신도들은 월남하거나 지하로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天主敎에 대한 北韓의 政策은 다른 宗敎와는 다른점이 있었다. 즉, 基督敎徒 聯盟이나 佛敎徒 연맹과 같은 御用組織을 만들어 政治的 도구로 이용하거나 다른 교인들을 回遊하는데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天主敎의 勢力과, 外國人 성직자들이 않았던 점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北韓이 천주교에 댛서 첫번째로 손을 댄것이 덕원 修道院이었다. 1948년이었다. 이무렵, 北韓은 원산,고원,함흥,흥남,영흥지역의 신부 수녀등 67명을 체포하였는데, 이중에는 外國人 수녀 2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다시까지는 北韓측의 천주교에 대한 彈壓政策은 완전화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 北韓의 宗敎問題에서 北韓이 天道敎를 비록 “지난날 朝鮮에서 발생한 宗敎의 하나”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면서 “천도교 청우당”을 “우당”으로두고 있고 天道敎 中央委員會란 이름으로 對南 戰術에 이용하고 있음은 당시의 天道敎가 처해있는 시대적 상황과 특수한 교리체계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天道敎의 敎勢와 교리체계는 북한 공산당으로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영향력은 가증하는 북한의 탄압과 남북간의 심화되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남북통일을 위한 天道敎인 3.1재현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1948년3월1일을 기해 전국적인 규모의 행사로 진행하려는 서울 천도교 중앙 총본부의 계획이 북한 천도교 청우당과 종무원에 비밀리에 전해졌으나, 이를 강행하려는 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인 김달현의 반대의견이 엇갈려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킬 수가 없었다. 다만, 영변 회천등 지방에서 교인들의 연좌 시위가 있었다. 그리하여 天道敎의 정신적인 지도자 김기전을 비롯 17,000여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74명이 그들의 처형으로 殉敎하였다. 비록 기대한 바와같이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당시의 국내외적인 여건하에서도 天道敎가 내세웠던 그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북한의 宗敎政策을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의 宗敎政策에의 접근은 겉으로 나타난 宗敎現像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현상조차도 소위 김일성주석의 “교시”에 따르는 劃一的이고 악의에 찬 謀略 선전내용이거나, 외국인들에 전시용으로 공개되는 것들이어서 진실된 모습을 추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는 교회나 성당 또는 성직자들은 남아있지도 않고 양성되지도 않는다고 하며 사찰들은 “文化 遺蹟地”또는 “文化遺蹟”으로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이 집권초기에 보여준 종교인들에 대한 태도가운데 다음과 같은 발언은 여러가지로 時事해주는 바가 크다.
“일부 악질적 장로 목사들”은 信仰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美 帝國主義者들에 買收”가 되어 자신들을 반대하는 것은‧‧‧종교의 미명아래 인민 대중을 속이기가 어렵게 된 까닭“이라는 비난이다.
이것은 共産體制를 반대하는 종교인들에게 정치적인 이유 즉, 美 帝國主義者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구실을 붙여 共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反動的 장로목사들은 땅을 안가졌던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가”가 없는 부르죠아 階級이라는 것이다. 結論的으로 “종교인들은 죽여야 버릇을 고친다.”며 수많은 종교인들을 虐殺하였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6.25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표면적으로 나타난 종교인들에 대한 정책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악질적 반동적”종교인들을 처형하는 정책이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美 帝國主義者들과의 連繫”라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여 학살하는 정책은 戰後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基督敎였다. 구체적인 실재자로에 나타나는 교회나 절, 성직자에 대한 피해상황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은 전후 復舊事業과 더불어 주민들의 思想敎養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사상교양의 일환으로 전개된 소위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1958년부터 3년간에 걸쳐 북한 전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의 저항 세력, 농업 협동화 정책반대자, 전쟁중 반당행위자등과 그 가족들은 산간지역등 오지로 강제이주 시켜 주거를 제한하고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했다.
그 후속 조치로 1966년 4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주민 재등록사업”을 실시하여 북한의 전 주민을 51개 계층으로 분류하였는데, 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37순위는 기독교신자로써 일반 또는 특수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고, 38순위는 불교신자로서 기독신자와 같이 감시당했교 39순위는 천주교신자로써 위와같고 40순위는 유학자 및 지방유지로서 일반 감시대상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북한에도 종교적 관습의 흔적은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다고 본다.
북한의 장례식은 구소련식과 꼭 같다. 관뚜껑을 덮지않고 시신을 누구나 볼수 있게 한다든가 宗敎的인 儀式이나 종교성을 띤 음악이 없다는 점등이 그것이다. 또한 북한의 장례식은 전통적인 우리의 의식의 흔적이 없어졌다. 남아있다면 곡을 한다는 정도이다.
그들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의미에서 獻花나 焚香같은 것은 없으며, 간단한 묵념이나 관 주위를 돌아가면서 혁명가를 부르며 자신의 혁명의식을 다지는 것이 의식의 전부이다. 일반가정의 장례식도 그 예외는 아니다. 당원 이상의 특권층의 경우에는 3일장이 치뤄지지만 대부분이 1일장이다.
시골에서는 里 인민위원회에서 대여해주는 관에 들것이나 자동차로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특정적인 것은 시신만을 매장하고 관은 다시 “里 인민위원회”로 반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흔한 경우도 아니지만 깊은 산골에서는 지관이 묘 자리를 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옷가지를 지붕에 던지기도 하며, 시신에 생쌀을 넣어주는 관습도 있다.
뿐만 아니라 봉분후에 간단한 제사를 지내기도 하며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평양시는 교외에 공동묘지를 만들고 위생적인 화장을 하도록 개혁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저항이 굉장하다고 한다.
관상이나 손금을 본다든가 집터를 보는 행위도 시골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집터를 본다든가 개인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회인 까닭에 강제이주되었거나 직장을 배치받아 이사를 올 경우에는 나이가든 사람들이 비밀리에 집터를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와같이 북한은 아직 최근까지도 韓民族 固有의 傳統宗敎的 慣習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종교정책이 종교교단들에게는 어느정도의 상당한 피해를 주었지만 한 민족의 생활과 함께 면면히 이어져오는, 아니 생활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관습들은 어쩔 수 없이 다음세대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것 같다.
2. 주요 社會主義國家의 宗敎政策
지구상에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한 이래 종교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취하지 않은 국가는 없다. 다음에는 구소련, 체코 슬로바키아, 중국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구소련은 역사상 최초로 공산정권을 탄생시켰고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나라이다. 15개의 작은 공화국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 만큼 이질적인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와 구르지아 정교회, 침례교에서 이슬람교, 불교등 다양한 종교들이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구소련은 마르크스 사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종교를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있음은 그들도 인정하였다고 한다. 구소련의 헌법 52조는 그들의 종교 정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소 연방시민에게는 양심의 자유 즉 어떤 종교를 믿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든 종교의식을 거행하든, 또는 無神論을 선전할 권리가 보장된다. 종교와 신앙에 관련한 적의와 증오를 조장하는 일은 금지된다. 소 연방은 교회는 국가로부터 분리된다.” 한편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집권한 이후인 1986년2월에 개정된 공산당 강령중 無神論의 교육항에 나타난 종교정책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헌법상의 보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당은 사회와 개인을 해치기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宗敎的 偏見을 극복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인민의 노동과 사회활동을 높이고 그들을 교육하고 교정하여 새로운 소비에트관습에 적응케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구소련은 헌법 및 공산당 강령등 국가의 발현의 형식적인 면에서는 무종교의 자유까지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공고화 및 확산의 절대적 방해물로서 종교를 관념하여, 여러가지며에서 재한 탄압해왔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구소련의 태도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소련의 그들의 강력한 탄압정책을 집행하였으나 수많은 종교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1930년대에는 사상교양과 선전을 통하여 종교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부활절, 성탄절 같은 최소한의 종교의식을 묵인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구소련이 현재까지 시도해 왔던 반종교적 투쟁의 목표를 보면, 첫째, 敎會의 政治的, 經濟的 基盤을 파괴하고, 둘째, 시민들 특히 어린이에 대한 교회의 접근을 방지하고, 셋째, 국민들로 하여금 교회에 나가지 않도록 설득하고 넷째, 신도들에게 그들의 견해가 그릇되다는것을 확신시켜주고 다섯째, 국민들로 하여금 戰鬪的 無神論者와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이 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그들의 목표는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신도들의 마음에서 신앙심을 근절하는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 중의 한 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정책은 어떠한지 살펴보면 사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체코 공산당은 집권초기부터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하였다. 학교의 종교 교육을 폐지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죄를 날조하여 많은 성직자를 투옥시키거나 직위를 박탈하였다.
체코는 현직목사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게하고, 건강을 이유로 파직을 종용하였으며 이 조치에 불응하거나 3개월 이내에 성직자를 교체하지 않으면 그 직위를 없애버리는 방법으로 종교지도자를 감소시켜 나갔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성직자들은 비밀조직을 만들어 나갔고 특히, 슬로바키아에서는 일반 민중들에게 전통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지면서 강력한 조직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체코정부는 종교에 대해 항상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하기 위해 고심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도 타국가들과 유사하다. 1982년 등소평 체제가 등장하면서 개정된 헌법 제 35조 2항에는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 어느 國家機關 사회단체와 개인이든지 공민이 신앙을 갖든지 혹은 신앙을 갖지 않든지간에 강요할 수가 없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종교를 이용해서 反革命活動을 진행하면 안된다. 혹은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공민의 신체건강에 해를 끼치거나, 국가 교육제도의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 종교는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중국에서 외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정부가 인정하는 종교단체로는 佛敎協會(1953년 창립), 이슬람교 협회(1963년), 基督敎3者愛國運動協會(1953), 基督敎 協會(1980), 天主敎 愛國協會(1957), 天主敎 敎務委員會(1980), 天主敎主敎團 (1980)등이 있으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의 영향이 점차 약화되도록 촉진하고 宗敎의 陣營을 축소시키며 멸망을 촉진”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정책이다. 이러한 중국의 근본적인 종교정책은 社會主義 物質文明과 思想文化의 비약적 발전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근원은 물론 사상의 根源까지도 消滅시킨다는 정책을 쓰고 있다.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社會主義, 즉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나타난 종교이론에 대해서 마르크스와 그외 그를 추종하면서 나름대로 獨特한 종교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학자들의 견해와 마르크스주의가 여러 사회주의국가들의 종교에 실제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약소하게 나마 살펴보았다.
마르크스는 종교에 관하여 상당히 獨自的인 見解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體系的으로 論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현대인에게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가 그리스도교를 중점적으로 논의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의 종교이론과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네의 종교를 이해하고 省察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종교이론에 대한 반대와 거부가 신학자들의 일차적인 반응이었으나, 최근에는 그 이론의 부분적인 정당성을 인정하며 나아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신학을 개조하고 새로운 실천을 강조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종교이론에서뿐만 아니라 哲學的 側面에서도 매우 劃期的인 理論을 主唱하였다. 그의 哲學 즉, 辨證法的 唯物論으로 대표되는 그의 주장은 실제적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국가의 수립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국가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고 자본주의국가의 현실정치에는 악용되면서도 政策的 次元에서는 마르크스의 社會主義論理가 適用되고 있을 정도로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는 매우 뛰어난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종교이론에 있어서는 너무 偏向的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 않았싶기도 한다.그는 종교를 너무나 現象的인 側面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社會的 機能面에 있어서 그당시 사회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이 매우 否定的으로만 보인 것 같고 急進主義的인 그당시 사회주의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革命 입장에서는 종교의 漸進的인 變化상을 추구하는 입장은 煽動的인 側面에서 매우 좋지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되어진다.
結論的으로 그는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종교론은 偏向的 矛盾의 難關에 부딪치고 있다.
그리고 엥겔스나 레닌, 카우츠키도 역시 마르크스의 종교이론과는 일맥상통하는 견해를 갖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 엥겔스는 처음으로 神, 靈魂, 不滅性과 같은 根本的 槪念을 애니미즘이론으로 설명했다. 레닌은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국가의 수반이었고 특히, 종교의 기원에 관한 애니미즘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엥겔스에 비한다면 宗敎의 복합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별로 알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카우츠키의 종교적 입장과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가 특정인간집단안에서, 그리고 특정인간집단을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질때 사회적 감정과 도덕, 그리고 집단적인 관심이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였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이들 역시 종교이론에 있어서는 각기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限界를 넘지 못하였다.
이렇게 종교이론에 있어 限界的 矛盾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인해 社會主義 國家들의 종교정책에 있어서도 일정정도의 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하지만 최근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종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1990년초 북한의 김일성 대학에 종교학과가 신설 되었고 같은 해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 종교 학회에서 구소련과 중국의 종교학회가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소위 자본주의 종교 이론과 사회주의 종교이론이 지구상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상호 접촉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을 포함한 社會主義 國家의 종교학자들과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종교학이 근거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宗敎 理論이나 혹은 김일성 主體思想에 대해 常識的인 수준을 넘어서는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北韓의 宗敎人들이 南韓의 宗敎人과 어떤점에서 같으며 또 어떤점에서 다른지 알아야만 한다. 즉 南北 宗敎人들은 統一을 준비하면서 서로 生産的이며 持續的인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