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우리말 ①

0

육조단경(六祖壇經) 한글
편저 – 한국불교대학 교재편찬회
감수 – 無一(무일) 우학스님
略序
약서

대사의 이름은 혜능이다.
아버지는 노씨로서 휘는 행도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대사는 당나라 정관12년 무술년 2월 8일 자시에 태어나셨는데, 그 때에 백호의 광명이 허공에 떠오르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새벽녘에 범상치 않은 두 스님이 찾아와서 대사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밤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하면 위에 자는 혜로, 아래 자는 능으로 하십시오.” 하였다.
아버지가“어찌하여 혜능이라 합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이 말씀하기를 “<혜>라는 것은 법으로써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고, <능>이라하는 것은 부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말을 마치고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대사가 젖을 먹지 않았는데 밤이 되면 신인이 와서 감로를 먹여 주었다.
자라나서 나이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아 황매로 가서 인가를 구하였더니, 오조가 법기로 여기시어 가사와 법을 전하시며 조사의 자리를 잇게 하시니, 때는 용삭 원년 신유년(당 고종 12년) 이었다.

남으로 되돌아가 은둔하신지 16년이 되는 의봉 원년 병자년 정월 8일에 인종법사와 만났는데 인종이 대사의 종지를 깨달아 모든 면에서 뜻이 서로 잘 맞으므로 이달 15일에 사부 대중을 널리 모아서 대사의 머리를 깎고 2월 8일에 여러 이름 있는 대덕스님들을 모아서 구족계를 주시었다.
서경의 지광율사는 수계사가 되고 소주의 혜정율사는 갈마사가 되고 형주의 통응율사는 교수사가 되고 중천축의 기다라율사는 설계사가 되고 서국의 밀다삼장은 증계사(證戒師)가 되었다.
그 계단은 송나라 때의 구나발다라 삼장이 처음 세우실 때 비를 세우며 이르시길 「후일에 육신보살이 여기에서 계를 받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양나라 천감 원년(서기502년)에 지약삼장이 서축국(서인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그 땅에서 가져온 보리수 한 그루를 이 단가에 심으시며 미리 예언하기를「170년 뒤에 육신보살이 이 나무 아래에서 가장 훌륭한 법을 열고 연설하여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할 것인데 참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법의 주인이시다.」하시더니, 대사가 이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으며 또 사부대중과 더불어 단전(깨달음은 언어나 문자로 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밖에 전할 수 없다는 뜻)의 법지를 열어 보이시니 한 결 같이 예전에 예언하신 바와 꼭 같았다.

다음해 봄에 대사가 대중을 하직하고 보림사로 돌아가시니 인종화상이 재가자 및 출가자 천여명과 함께 전송하였다.
바로 조계산으로 가셨는데 그 때 형주의 통응율사가 학인 수백 명과 함께 대사를 의지하여 머물렀다.
대사가 조계산의 보림사에 이르러 보니 당우가 너무 좁아서 대중을 수용하기엔 부족함을 보시고는 넓히시려고, 마을 사람인 진아선을 찾아가 만나 말씀하시길 “노승이 단월에게 이르러 좌구 깔 땅을 구하고자 하는데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시니 진아선이 말하기를 “화상의 좌구가 얼마나 넓습니까?” 하므로 조사가 좌구(앉거나 누울 때 까는 방석)를 내어 보이시자 진아선이 허락하므로 조사가 좌구를 한번 펴니 조계의 사방경계를 다 덮었는데 사천왕이 몸을 나타내어 사방에 앉아 눌렀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천왕령은 이때의 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진아선이 말하기를 “화상의 법력이 크고 넓으신 것을 알겠습니다마는 저의 고조의 분묘가 이 땅에 있으니 후일 사찰을 지으시더라도 그대로 남겨두실 것을 바라며 나머지는 원 대로 모두 드리니 영원히 절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땅은 생룡(살아있는 용)과 백상(흰 코끼리)이 뻗어 내린 맥이므로, 높고 낮은 데로 지을지언정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짓지는 마십시오.” 하였기에 뒤에 절을 지을 때 한 결 같이 그 말대로 하였다.
대사가 경내를 다니시다가 산수가 뛰어난 곳에 번번이 머물러 쉬시다가 13개의 난야(수행처소)를 세우셨는데 오늘날 화과원이라는 이름으로 절 문에 써 놓은 곳이다.
이 보림 도량은 역시 이보다 앞서 서국(인도)의 지약삼장이 남해로부터 와서 조계의 어귀를 지날 때에, 물을 한 모금 움켜 마시고 향기로운 맛을 이상히 여기어 그 제자에게 일러 말씀하시길 「이 물이 서천의 물과 다르지 않으니 시냇물 저 위에는 반드시 뛰어난 땅이 있을 것이고 도량을 세울만할 것이니라.」하시며 흐르는 물을 따라가 그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과 물이 감아 돌고 산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므로 감탄을 하며 말씀하시길 「완연히 서천의 보림과 같구나.」하시며 조후촌의 사람들에게 「이 산에 절을 하나 지으십시오. 170년 뒤에 마땅히 위없는 법을 이곳에서 연설하고 교화하여 도를 얻는 자가 수풀과 같을 것이니 응당 보림이라 이름 하시오.」 하셨다.
그때 소주 목사인 후경준이 그 말씀을 표로 갖추어 왕에게 상주하니 임금이 그 청을 옳게 여겨서 <보림>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시어 절을 지었는데 양나라천감삼년(서기503년)에 낙성을 하였다.
절의 전각 앞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용이 항상 그 속에서 출몰하여 숲의 나무를 흔들어 꺾어 놓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아주 큰 형상으로 나타났기에, 물결이 솟아오르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어 대중들이 모두 두려워하므로 대사가 꾸짖으시며, “네가 큰 몸으로만 나타날 수 있지 작은 몸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이구나. 만약 신령스런 용이라면 마땅히 변화하여 작은 몸을 크게 나타내고 큰 몸을 작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니 그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조금 있으니 다시 작은 몸으로 나타나 못 위에 뛰어 나오므로, 대사가 발우를 펴 보이시면서 “네가 감히 노승의 발우 속에는 들지 못할 것이다.” 하시니 용이 나르다시피 헤엄쳐 앞에 이르므로 대사가 발우에 담으시니 용이 움직이지 못하였다.
대사가 발우를 법당에 가지고 가서 용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니 용이 마침내 뼈를 벗고 사라졌다.
그 뼈의 길이가 칠촌이나 되고 머리와 꼬리와 뿔과 발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절에 전해져 오고 있다.
대사가 후에 흙과 돌로 그 못을 메우셨는데 지금의 전각 앞 좌측에 철탑으로 누른 곳이 바로 그 곳이다.

第一 行由品
제일 행유품

그때에 대사께서 보림에 이르시자 소주의 위 자사가 관료들과 함께 산에 들어와서 대사께 대범사의 강당에서 대중을 위하여 인연을 열어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주시기를 청하므로 대사가 자리에 오르시니 자사와 관료30여명과 유교의 선비 30여명과 비구와 비구니와 도를 닦는 이와 속인 등 천 여명이 다 같이 절을 하고 법문 듣기를 원하므로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보리의 자성이 본래 맑고 깨끗하니 다만 이 마음만 쓰면 바로 성불 할 것이니라.
선지식아! 또 나의 행적과 법을 얻은 내용을 들어보아라.
나의 선친은 본관이 범양인데, 좌천되어 영남으로 내려가 신주의 백성이 되셨다.
이 몸이 불행하여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늙은 어머니와 외롭게 남았는데, 뒤에 남해로 와서 가난한 살림에 쪼들리어 고생을 하며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무를 사서 객점으로 갖다 달라 하시므로 손님에게 갖다 드리고 돈을 받아서 문밖으로 나오다가 어떤 손님이 경 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경을 잠깐 들으니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하므로 마음이 곧 열리고 깨쳐서
「손님께서 무슨 경을 외우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손님이 「금강경입니다」하시므로, 다시 「어느 곳에서 오셨는데 이 경전을 지니고 계십니까?」 하였더니 손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기주의 황매현 동선사에서 왔습니다. 그 절에는 오대조인 홍인 대사가 계시면서 교화를 하시는데 문인이 천여 명이나 됩니다. 저도 그 곳에 가서 예배하고 이 경을 듣고 받아 왔습니다. 대사께서는 항상 스님들과 속인들에게 권하시기를, ‘다만 금강경만 받아 지니면 스스로 견성하여 바로 성불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숙세에 인연이 있었는지 그 손님이 은 열 냥을 나에게 주시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을 마련해 놓고 바로 황매에 가서 오조에게 예배하라 하시므로 나는 어머니를 편안히 모셔놓고 하직하여 30여일이 못되어 황매에 다다랐느니라.
오조께 예배하니 나에게 물으시기를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물건을 구하고자 하는고?」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의 신주에 있는 백성인데 멀리 와서 스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부처님 되기를 구할 뿐 나머지 물건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조사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영남 사람이라면 곧 오랑케인데 어떻게 부처님이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시므로 내가 말씀드리기를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습니다만,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케의 몸이 화상과는 같지 않습니다만 불성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하였더니 오조께서 다시 말씀을 하시려다가 대중들이 좌우에 모여 있음을 보시고 이내 「대중을 따라가서 일이나 하라.」 하시므로 내가 말씀드리기를 「혜능이 화상께 여쭙겠습니다. 제자는 자기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이 곧 복전이라고 아는데, 화상께서는 무슨 일을 하라 하시는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오조가 말씀하시기를 「이 오랑캐가 근성이 너무 날카롭구나. 너는 여러 말 하지 말고 방앗간에나 가 있거라.」하시었다.
내가 물러 나와 후원에 이르니 한 행자가 나에게 나무를 쪼개고 방아를 찧게 하였는데, 8개월 정도가 지나서 어느 날 오조가 나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견해가 쓸 만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거친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워서 결국은 너와 함께 말하지 못하였는데 알고 있었느냐?」 하시므로 「제자도 역시 대사님의 뜻을 알았으므로 감히 당 앞에 나가지 않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오조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내가 너희들에게 설하리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큰데 너희들은 날마다 온종일 복전만 구하고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는 일은 구하지 않는구나. 자성이 만일 미혹하다면 복으로 어찌 구원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각자 가서 스스로 지혜를 살펴보고 자기의 본심인 반야의 성품을 취하여서 각자 게송을 하나씩 지어서 나에게 갖고 와 바쳐 보이어라. 만일 대의를 깨달았으면 너희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여 제 육대조로 삼으리니 어서 빨리 돌아가되 지체하지 말아라.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맞지 않을 것이니라.
견성한 사람은 말 아래에 모름지기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사람은 칼을 휘두르는 전쟁터에서 나가더라도 역시 볼 수 있을 것이다」하셨느니라.
대중들이 분부를 받고 물러나와 수군거리며 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생각을 다하여 게송을 지어 화상에게 바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신수상좌가 현재 교수사이시니 반드시 이분이 그것을 얻을 것인데 우리가 부질없이 게송을 짓는 것은 마음만 헛되이 수고할 뿐이다」 하므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다 마음을 놓으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후에 신수에게 의지할 것인데 어찌 번거롭게 게송을 지으리오.」라 하였다.
신수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저희들의 교수사가 된 때문이니 내가 모름지기 게송을 지어서 화상에게 바쳐야겠다.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화상이 어떻게 내 마음속의 견해가 깊은지 옅은지를 아시겠는가?
내가 게송을 바치려는 뜻은 법을 구하는 것이며 좋은 일이나 조사의 자리를 찾는데 있다면 나쁜 일이며 도리어 범부의 마음과 같아서 그 성인의 자리를 빼앗음과 어찌 다르겠느냐.
만일 게송을 바치지 아니하면 결국은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니 크게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구나’ 하였다.
오조의 당 앞에는 복도가 세 칸 있었는데, 공봉(재주와 기예가 있는 사람에게 준 벼슬 이름)인 노진을 청하여 능가경의 변상도와 오조의 혈맥도를 그려서 전하여 내려가며 공양하게 하도록 하려는 중이었다.
신수가 게송을 바치려고 여러 번 당 앞에까지 갔었는데 마음이 황홀하고 온 몸에 땀이 흐르는지라 바치려는 생각을 못 내어 전후 4일 동안 열 세 번이나 게송을 바치지 못하였다.
신수가 이에 생각하기를 ‘복도 아래에다 적어두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화상이 다니시다가 보시고, 만일 좋다고 말씀하시면 곧 나아가 예배하며, 이 신수가 지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만일 마땅치 못하다고 말씀하시면 헛되이 산중에 들어와서 여러 해 동안 다른 사람의 예배만 받은 것이니 다시 무슨 도를 닦겠다고 하겠느냐’ 하며 이날 밤 삼경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직접 등을 잡고 남쪽 복도의 벽 사이에 게송을 써서 마음의 소견을 바쳤다.
게송에 이르기를,

몸은 곧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들어붙지 않도록 할지어다.

신수가 게송을 다 쓰고 곧 방에 돌아왔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알지 못하였는데, 신수가 다시 생각하기를 ‘오조가 밝은 날 게송을 보시고 기뻐하시면 법과 내가 인연이 있는 것이지만 만일 잘 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 나 자신이 미혹한 것이며 숙세의 업장이 두꺼워 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성인의 뜻은 헤아리기가 어렵구나.’하며 방안에서 이런 생각으로 앉았다 누웠다하며 불안해하였는데 바로 오경이 되었고, 조사께서는 신수가 자성을 보지 못하여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음을 이미 아시고 계셨다.
날이 밝자 오조께서 노 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의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시려다가 홀연히 그 게송을 보고 공봉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될 것이네. 그대가 멀리 오느라 수고만 하시었네. 경에 이르시기를 ‘무릇 모양 있는 바는 모두 다 허망하다.’ 하였으니 이 게(偈)만 두어서 사람들에게 외우고 지니게 하겠네.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고,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큰 이익이 있을 것일세.」하시고는 문인으로 하여금 향을 사르게 하고 예경하게 하시며 「이 게송을 다 외우면 곧 견성하게 되느니라.」하시니 문인들이 이 게송을 외우며 모두 다 훌륭하다고 찬탄하였느니라.
오조께서 삼경에 신수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게송을 네가 지었느냐?」 라고 물으시니 신수가 말하기를 「실로 제가 지었으나 감히 망령스럽게 조사의 지위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자비로 살펴주십시오. 제자에게 조금마한 지혜라도 있습니까?」하므로 오조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다만 문 밖에 이르렀을 뿐 문 안에는 들지 못한 것이니라.
이와 같은 견해로는 위없는 보리를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라.
위없는 보리는 모름지기 말 아래에 자기의 본심을 알고 자기의 본성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임을 알아서 어느 때라도 만법이 막힘이 없으므로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참되어 만 가지 경계가 스스로 여여(성품에 어긋남이 없고 영원불변한 진실의 모습)한 것임을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보아야 한다.
여여한 마음이 곧 진실이니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곧 위없는 보리의 자성이니라.
너는 가서 하루 이틀 더 생각하여보고 게송을 다시 지어서 나에게 가져와 보여라. 너의 게가 만일 문에 들어 왔으면 너에게 가사와 법을 맡기겠노라.」
신수가 예를 갖추고 물러나와 며칠을 보냈지만 게송을 짓지 못해 마음이 혼란하고 정신과 생각이 불안하여 마치 꿈속과 같았으며 앉거나 움직이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다시 이틀이 지난 뒤에 어떤 동자가 방앗간을 지나면서 그 게송을 소리 내어 외우기에 내가 한번 들어보니 이 게(偈)는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가르침은 받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큰 뜻을 알았기에 동자에게 묻기를 「외우는 것이 무슨 게송입니까?」하였더니 동자승이 말하기를 「너 이 오랑캐야 그것도 모르느냐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부탁하여 전하려 한다.’ 하시며 문인들로 하여금 ‘게송을 지어 와서 보여라. 만일 큰 뜻을 깨달았다면 곧 가사와 법을 맡기고 제 육조를 삼으리라.’ 하셨기에 신수상좌가 남쪽 복도의 벽 위에 무상게송을 쓰셨는데 대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이 게송을 외워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스님, 내가 이 방아를 밟은 지가 8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당 앞에 가 보지 못하였으니 스님께서 게송 앞으로 인도해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하였더니 동자가 게송 앞에 이르러서 예배하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능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청컨대 스님께서 읽어주십시오.」 하였다.
그때에 강주의 별가(자사의 다음벼슬)가 성은 장이요, 이름은 일용이라 하는 이가 문득 큰소리로 읽기에 내가 듣고서 말하기를 「내게도 게(偈)가 하나 있으니 별가께서 써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더니 별가가 말하기를 「오랑캐야, 너도 게송을 짓겠다 하니 그 일이 희유하구나.」하므로, 내가 별가에게 말하기를 「위없는 보리를 배우고자 하는데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낮고 낮은 사람이라도 높고 높은 지혜가 있을 수 있고 높고 높은 사람이라도 생각과 지혜가 없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을 가볍게 여기면 곧 한량없고 가없는 죄가 될 것입니다.」
별가가 말하기를 「너는 다만 게송을 외워라 내가 너를 위하여 써 주리라. 네가 만약 법을 얻으면 나부터 꼭 제도하여 주어라. 이 말을 잊지 말아라.」 하므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보리수 본래 없고
명경 또한 대가 아님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 앉고 때가 끼겠는가!

이 게송을 써 놓으니 대중이 다 놀라며 감탄하거나 의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서로에게 말하기를 「기특하다. 사람은 모양만으로는 알 수가 없구나. 어찌하여 오랫동안 저 육신보살을 부렸던가.」
조사께서는 대중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김을 보시고 사람들이 해칠까 두려워하시어 마침내 신발로 게송을 문질러버리며 말씀하시기를 「역시 성품을 보지 못하였다.」하시니 대중들이 그런 줄 알았다.
다음날 조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내가 돌을 허리에 달고 쌀을 찧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하시며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하시기에 「쌀을 찧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체로 치지를 못 했습니다.」 하였더니, 조사가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시고 나가시므로 곧 조사의 뜻을 알아 치리고 삼경에 방으로 들어가 뵈오니 조사께서 가사로 주위를 막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시고 금강경을 설하여 주셨는데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하는 구절에 이르러 그 말씀 아래 일체 만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크게 깨닫고서 조사께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기약(때를 정하여 약속함)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나고 멸하지 않음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기약했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내는 줄 기약했겠습니까?」
조사께서 내가 본성을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본심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 무슨 이익이 있으랴.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곧 장부, 천인사, 불이니라」하셨다.
삼경에 법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돈교(말 아래에 대번에 깨치는 것)와 가사와 발우를 전하시면서 「네가 이제 제 육대조가 되었으니 스스로 잘 보호하고 지켜서 널리 유정(有情)을 제도하고 장래에 유포하여 단절되지 않게끔 하여라.」하시며 게송을 하셨다.

유정이 와 종자를 내리니
인지(因地)에서 결과가 다시 나도다.
무정은 이미 종자가 없는지라.
성품도 없고 태어남도 없도다.

조사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달마대사가 처음 이 땅에 오시니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 가사를 전하며 믿음의 바탕으로 삼아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것인데 법은 곧 마음으로 마음을 전해서 누구나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이 오직 본체를 전하시고 조사와 조사가 은밀히 본심을 부탁하신 것이다.
가사는 다툼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니 너에게서 그치고 전하지 말아라. 만일 이 가사를 전하면 목숨이 실에 달린 것과 같으리라. 너는 속히 떠나거라.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렵구나.」하시므로,
내가 「어느 곳으로 가면 좋겠습니까?」하였더니 「회(懷)를 만나면 머물고 회(會)를 만나면 숨어라.」하셨다.
내가 삼경에 의발을 받아들고 「저는 본래 남쪽 사람이라서 이 산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강가에 까지 갈 수 있습니까?」 하였더니,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기 직접 너를 보내어 주겠노라.」하셨다.
조사가 배웅하시기 위해 구강나루에 이르시니, 배가 한 척 있으므로 조사께서 나를 배에 오르게 하시고 직접 노를 잡고 저으시기에 내가 「청컨대 화상께서는 앉으십시오. 제자가 노를 젓겠습니다.」 하였더니 「내가 너를 건네어 주겠노라.」하시므로 「제가 미혹 했을 때에는 스님께서 건네 주셨지만, 깨닫고 나서는 스스로 건너는 것이 옳은가 합니다. 건넌다는 이름은 비록 하나이나 쓰는 곳은 같지 않습니다. 혜능이 변방에서 태어나 말조차 바르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법을 받아 이제 깨달음을 얻었사오니 다만 자성으로 스스로 건너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압니다.」
하였더니 조사가「옳고도 옳도다. 이후에 불법이 너를 말미암아 크게 번성하겠구나. 네가 가고 삼년이 지나면 내가 바야흐로 세상을 버리리니 너는 이제 잘 가거라. 남으로 향하여 가되 마땅히 설하려고 서두르지 말아라. 불법의 난이 일어나느니라.」하셨다.
내가 조사와 하직하고 남쪽으로 걸어 두 달 반쯤이 지나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수백 명이 의발을 빼앗으려고 쫓아왔다.
그 가운데 혜명이라는 스님이 속성이 진씨이었는데 본래는 장군이라서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사나웠다. 온갖 힘을 다하여 찾으며 대중들의 맨 앞에서 나를 쫓아 왔으므로 나는 바위 위에 올려놓고「이 가사는 믿음의 표시인데 힘으로 다툴 수 있겠느냐?」하고는 풀 속에 숨어 있었다.
혜명이 이르러서 잡아 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자 큰 소리로 「행자여, 행자여, 나는 법을 위하여 온 것이지 가사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하므로
내가 나와서 반석 위에 앉으니 혜명이 절을 하고 「바라건대 행자는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해서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법을 위해 왔으므로 가히 모든 인연을 막아 쉬어서 한 생각도 내지 마십시오. 내가 그대를 위하여 설하겠습니다.」하고는 조금 있다가 혜명에게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 면목입니까?」하였더니, 혜명이 그 말 아래에 크게 깨닫고 다시 묻기를 「처음의 조사 이래로 내려오는 비밀한 말씀과 비밀한 뜻 이 외에 또다시 비밀한 뜻이 있습니까?」하므로 내가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대가 만일 돌이켜 비추면 비밀이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하였더니 혜명이 말하기를 「혜명이 비록 황매에 있었으나 실로 자기의 면목을 살피지 못 하였는데 이제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부아야 차가운지 더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행자께서는 혜명의 스승이십니다.」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이와 같다면 나와 그대는 함께 황매를 스승으로 삼은 바이니 깨달음 그 마음을 놓치지 말고 보호하여 지녀야 하느니라.」하였다.
혜명이 또 묻기를 「혜명은 이제 어느 곳으로 가야 되겠습니까?」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원(袁)을 만나면 머무르고 몽(蒙)을 만나면 그 곳에 서 살아라.」하였더니 혜명이 절하고 하직하였느니라.

내가 뒤에 조계에 이르렀으나 또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는 바가 되어서 사회현으로 피난하여 사냥을 하는 사람들 틈에 무릇 15년을 지냈다.
때로는 사냥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함을 따라 법을 설하였는데 사냥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물을 지키게 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놈만 보면 다 놓아주었으며 언제나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채소를 고기 삶는 냄비위에 얹어서 익혀먹었는데 혹 누가 물으면 「고기 곁의 채소만 먹는다.」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생각하기를 마땅히 법을 펼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어 있는 것은 옳지가 않겠다 싶어 산에서 나와 광주의 법성사에 이르렀는데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 한 스님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 하시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시며 의논을 그치지 않으므로 내가 나아가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하였더니 모여 있던 대중들이 놀랐으며 인종이 상석으로 맞아 들여 깊은 뜻을 추궁하여 물었는데 나의 말이 간략하고 이치가 합당하며 문자에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보고 인종이 말하기를 「행자는 보통사람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오래전에 듣기를 황매의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왔다 하던데 행자님이 아니십니까?」하기에 내가 「부끄럽습니다.」하였더니 인종이 제자의 예를 갖추며 전해져 내려오는 의발을 대중에게 내어 보이기를 청하고는 다시 묻기를 「황매께서 부촉하시면서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가르쳐 주신 것은 없습니다. 오직 견성만을 의논하였을 뿐 선정과 해탈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더니 인종이 「어찌하여 선정과 해탈을 의논하시지 않았습니까?」하므로 「그렇게 되면 두 가지 법이 되어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은 두 가지 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인종이 다시 묻기를「어떤 것이 불법의 둘이 아닌 도리입니까?」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법사께서 열반경을 강의하시여 밝게 불성을 보는 것이 불법의 둘 아닌 도리입니다. 열반경에서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사중금계(살생, 투도, 사음, 망어)를 범한 자와 오역죄를 지은 자와 일천제(선근이 아주 끊어진 자)들은 마땅히 선근과 불성을 끊은 것이 옵니까?’ 하였더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근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常)이요, 둘은 무상(無常)인데 불성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둘이 아니다 하시며 하나는 선한 것이고 둘은 선하지 않는 것인데 불성은 선한 것도 아니고 선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 하여 둘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오온과 십팔계(육근, 육경, 육식)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닌 줄을 꿰뚫어 아나니 둘 없는 성품이 곧 불성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합장하며 말하기를 「제가 경을 강의 하는 것은 오히려 깨진 기와조각과 같은데 인자께서 논의 하시는 것은 마치 순금과 같습니다.」 하였느니라.
이에 나의 머리를 깎아 주고 스승으로 섬기기를 원하였으므로 내가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동산법문을 열게 된 것이니라.
내가 동산에서 법을 얻고 나서 갖은 고생을 모두 받아 목숨이 마치 실낱과 같았는데 오늘날 위사군과 관료들과 비구와 비구니와 도를 닦는 사람과 세속의 사람들과 더불어 이와 같은 모임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누 겁(累劫)의 인연이 아닐 수 없구나.
또한 과거 생 가운데에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여 같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와 같은 돈교와 법 얻은 인연을 듣게 된 것이니라.
가르침은 옛 성현들께서 전하신 것이지 나의 지혜가 아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듣고 싶은 사람은 각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듣고 나서는 각자가 궁금함을 없애어 옛 성인과 다름이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대중이 법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第二 般若品
제이 반야품

다음날 위사군이 다시 청하므로 대사께서 자리에 오르셔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두 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생각하여라.” 하시며 대사가 다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게 되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 있는 사람이나 불성은 차별이 없는데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느니라. 이 때문에 어리석음이 있고 지혜로움이 있는 것이니라. 내가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로 하여금 각각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선지식아, 세상 사람들이 온종일 입으로는 반야를 말하지만 자성의 반야를 알지 못하니 마치 밥 먹는 것을 이야기로만 하면 배는 부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겁이 지나더라도 견성할 수 없으니 결국은 아무 이익도 없느니라.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인데 여기 말로는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는 모름지기 마음으로 행할 것이지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느니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환(幻)과 같고 화(化)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할 것이다.
본성이 곧 부처이므로 성품을 떠나서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 하는가 하면 마하는 곧 크다는 뜻이다. 마음의 양은 크고 넓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나 가가 없으며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거나 작지 않으며, 또 푸르거나 누렇거나 붉거나 희지도 않으며, 위와 아래와 길거나 짧은 것이 없으며 또한 성낼 것도 기쁠 것도 없으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으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으며, 머리나 꼬리가 있는 것도 아님이라.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다 허공과 같음이니 세상 사람들이 묘한 성품은 본래 공(空 ) 하여서 한 가지도 얻을 게 없으니 자성의 진공(眞空)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내가 설한 <공>을 듣고 공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제일 먼저 공에 걸리지 말아라.
만일 마음을 비우고 앉아 있기만 하면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선지식아, 세계의 허공이 삼라만상을 다 가질 수 있어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강과 대지와 샘과 개울과 풀과 나무와 숲과 악인과 선인과 악법과 선법과 천당과 지옥과 일체의 큰 바다와 수미산을 비롯한 모든 산들이 모두 다 이 허공중에 있다.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공>한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자성은 능히 만법을 머금을 수 있으므로 큰 것이다.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으니 만일 모든 사람들의 악과 선을 보더라도 모두 다 취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하여 마음이 허공과 같음을 이름 하여 크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하>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 어떤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백가지 생각을 없앤 것으로 스스로를 크다고 말하지만 이런 사람들과는 함께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삿된 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선지식아, 마음의 크기는 넓고 커서 법계에 두루 하며 그 작용이 아주 분명하니 그 쓰임새에 바로 일체를 알며 일체가 곧 하나고 하나가 곧 일체여서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롭고 마음자리에 막힘이 없는 것이 곧 반야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반야지혜는 모두 다 자성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뜻을 그릇되게 쓰지 않는 것을 참된 성품을 스스로 쓰는 것이라 한다.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참되느니라.
마음으로 큰 일만 헤아리고 작은 도라도 행하지 아니하면서 입으로 종일토록 공을 말하지 말라.
마음으로 이 행을 닦지 않으면 마치 범부가 스스로는 국왕이라 칭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런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선지식아, 무엇을 <반야>라 하느냐?
반야는 당나라 말로 지혜이며 어는 곳 어느 때라도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아니하여 항상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생겨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반야를 보지 못하므로 입으로만 반야를 말하고 마음속은 언제나 어리석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반야를 닦는다.」하며 생각 생각에 공을 말하지만 진공(眞空)은 알지 못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으며 지혜로운 마음이 곧 이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이해를 하면 이것이 곧 반야지혜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이름 하는냐? 이것은 서국의 말인데 당나라 말로 하면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이고 생멸을 떠난다는 뜻이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나니 물에 물결이 있는 것과 같은 이것이 곧 이 언덕이고,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어지므로 물이 잠잠함이 곧 저 언덕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선지식아,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는지라 외울 때는 망령됨이 있고 그릇됨이 있지만 생각 생각에 만일 행을 하면 이것이 참된 성품이니라.
이 법을 깨닫는 것이 곧 반야법이요, 이 행을 닦는 것이 곧 반야행이니라.
닦지 않으면 범부요, 일념으로 수행하면 자신들이 부처님이니라.
선지식아, 범부가 곧 부처님이며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다.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곧 번뇌고 뒷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곧 보리니라.
선지식아, 마하 반야바라밀이 가장 높고 가장 위이며 가장 으뜸이다.
머무름도 없고 지나가는 것도 없으며 또 오는 것도 없어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여기에서 나오느니라.
마땅히 큰 지혜를 써서 오온의 번뇌와 망상을 타파하여라.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반드시 불도를 이루며 삼독이 변하여 계, 정, 혜가 되리라.
선지식아, 이 법문은 하나의 반야에서 팔만 사천의 지혜를 내는데 무슨 까닭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팔만사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니라.
만일 번뇌가 없으면 지혜가 항상 나타나서 자성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을 깨닫는 자는 곧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함도 없어서 미친 망령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자기의 진여성(참되고 참된 성품)을 쓰므로 지혜로써 미루어 보아 일체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견성하여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선지식아, 만일 매우 깊은 법계와 반야삼계에 들고자하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고 금강반야행을 지니고 외워야 되느니라. 그러면 견성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공덕이 한량없고 끝없다는 것을 경 가운데에서 분명히 찬탄하였는데 말로써는 다할 수가 없느니라.
이 법문은 곧 최상승이고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근기가 높은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라.
근기가 낮고 지혜가 얕은 사람이 들으면 믿지 않는 마음이 생기리라.
왜냐하면 비유하건대, 큰 용이 염부제에 비를 내리면 도시와 마을이 모두 다 떠내려가는 것이 대추 나뭇잎이 떠내려가는 것과 같지만 만일 큰 바다에 비를 내리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대승인과 최상승인이 금강경을 들으면 마음이 열리어 깨닫느니라.
그러므로 본성에는 원래 반야의 지혜가 있으며 스스로 지혜를 써서 항상 관조하므로 문자를 빌리지 않는 것임을 아느니라.
비유하건대 비와 물이 하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용이 일으켜서 일체 중생과 일체 초목과 유정과 무정들을 모두 다 윤택하게 하고, 백가지의 강으로 흐르다가 마침내는 큰 바다에 들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과 같이 중생의 본성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근기가 낮은 사람이 이 돈교를 들으면 뿌리가 약한 작은 초목이 만약 큰비를 만나게 되면 뿌리가 뽑히고 뒤집혀져서 자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근기가 낮은 사람도 역시 이와 같이 원래 반야의 지혜가 있으며 지혜가 큰 사람과 차별이 없는데 어찌하여 법을 듣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가하면 삿된 소견으로 업장이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인데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릴 때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햇빛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도 역시 크거나 작은 것이 없는데 일체의 중생이 자신의 마음에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하여 밖으로만 보고 닦으며 부처를 찾으려 할 뿐 자성을 깨닫지 못하나니 이것은 곧 근기가 낮기 때문이니라.
만일 돈교를 깨달아서 밖으로 닦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항상 정견을 일으켜서 번뇌와 세속 일에 대한 괴로움이 항상 물들지 못하게 하면 이것이 곧 견성이니라.
선지식아, 안과 밖에 머무르지 말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면 일체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며, 능히 이 행을 닦으면 반야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선지식아, 일체의 수다라와 문자로 되어 있는 대, 소 이승의 십이부경이 모두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 사람이 없다면 일체 만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만법은 본래 사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일체의 경서는 사람이 설하므로 있는 것이니라.
그 사람을 인연하는 가운데에 어리석음이 있고 지혜로움이 있어서 어리석음을 소인이라 하고 지혜로움을 대인이라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법을 설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깨달아서 마음이 열리면 곧 지혜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선지식아, 깨닫지 못하면 부처님이 곧 중생이요, 한 순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님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만법이 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신의 마음 가운데로부터 진여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본원 자성은 원래 청정하니 만일 자기의 마음을 알아서 자기의 성품을 보면 모두 다 불도를 이룬다.」하였으며, 정명경에서는 「즉시에 확 트이면 다시 본심을 얻는다.」하였느니라.
선지식아, 내가 홍인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번 듣고 말씀 아래에 문득 깨달아서 진여의 본성을 보았기에 이 교법을 널리 펴서 도를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단번에 보리를 깨달아서 각자 스스로 마음을 살피고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하려 하는데 만일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이해하는 큰 선지식을 찾는 것이 바른 길을 봄이니 이 선지식이 큰 인연 있음이라.
이른바 교화하고 인도해서 견성을 얻게 하는데 일체 선법이 선지식으로 인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니라.
삼세제불의 십이부경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있으며 본래 스스로 갖춰 있건마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하여야 바야흐로 보게 되느니라.
만일 스스로 깨닫는 자는 밖으로 구함을 빌리지 않느니라.
만일 한쪽만 고집하며 모름지기 다른 선지식을 의지하여 해탈을 얻음을 희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 안에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인데 만일 삿된 미혹을 일으켜서 망령된 생각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비록 가르쳐 주더라도 구원되지 못하리라.
만일 바르고 참된 반야를 일으켜 관조하면 한 찰나 사이에 헛된 생각이 모두 다 없어질 것이며 만일 자성을 알아서 한번 깨달으면 곧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리라.
선지식아, 지혜로 관조하면 안과 밖이 분명하게 통하여 자기의 본심을 알게 된다.
만일 본심을 알면 본래 해탈이요, 만일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무념이니라.
무엇을 무념이라 하는가 하면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이것을 무념이라 하느니라.
작용하여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으로 하여금 육문(육근)을 나오더라도 육진 가운데 물들지 않고 섞이지 않아 오고 감이 자유롭고 통용에 막힘이 없는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 해탈이고 무념행이라 이름 하느니라.
만일 백가지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생각으로 끊으려하면 이것은 법에 얽히는 것이라서 변견(극단으로 치우쳐 집착하는 견해)이라 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만법이 다 통하며,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닫는 자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선지식아, 후대에 나의 법을 얻은 자가 이 돈교 법문을 가지고 견해가 같아서 같은 행을 하는 사람에게 받아 지니도록 원을 세워 부처님 섬기는 것 같이 하며 몸이 다하도록 물러나지 않으면 반드시 성인의 지위에 들리라.
그러나 위로부터 묵묵히 전해 내려오는 분부를 다시 전해주어서 그 정법을 숨기지 말아야 하겠지만 견해가 같지 않고 행이 같지 않는 다른 법에 있는 자에게는 당부하며 전하지 말아라.
그 앞에 있는 사람을 해치어 결국은 이익이 없을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 법문을 비방하여 백겁 천생에 부처님 될 성품을 끊을까 두렵기 때문이니라.
선지식아, 내게 무상송이 하나 있으니 각자 외워 지니어 재가인이거나 출가인이거나 이것을 의지하여 닦아라.
만일 스스로 닦지 않고 나의 말만 기억하면 이익이 없을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말로 통하고 마음이 통함이여
태양이 허공에 있는 것과 같으니,
오직 견성하는 법만 전하여
출세토록 삿된 가르침을 쳐부수도다.

법은 곧 돈과 점이 없건마는
미(迷)와 오(悟)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네.
다만 견성하는 문을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네.

말로 설하면 비록 만 가지이지만
이치에 합하면 도리어 하나로 돌아감이니,
번뇌로 어두운 집 가운데에
항상 지혜의 햇빛을 낼지어다.

삿된 것이 오면 번뇌가 일어나고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사라지리니,
삿된 것과 바른 것을 다 쓰지 않으면
청정하여 남음이 없는데 이르리라.

보리의 근본 자성에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념이라.
깨끗한 마음이 망념 가운데에 있으니
바르면 세 가지 장애가 없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만일 도를 닦으면
일체가 다 방해되지 않나니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면
도와 더불어 곧 서로 맞으리라.

모든 것은 스스로 도가 있어서
각각 서로 방해하며 괴롭히지 않으니,
도를 여의고 따로 도를 찾으면
몸이 다하여도 도를 보지 못하리라.

부질없이 일생을 지내서
눈앞에 닥쳐서야 뒤늦게 뉘우치나니,
참된 도를 보고자 하느냐.
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곧 도이니라.

스스로 만일 도의 마음이 없으면
어둡게 행하여 도를 보지 못하나니,
만일 참으로 도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말아라.

만일 남의 그릇됨을 보면
도리어 나의 그릇됨이 되느니라.
다른 이는 그르고 나는 그르지 않다 하면
나는 그르지 않다 하는 그것이 스스로 허물이니라.

다만 스스로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물리치고
번뇌를 쳐부수어 없애버리고
밉고 고운 데에 관계하지 않으면
길이 두 다리를 펴고 누우리라.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자 하면
스스로 모름지기 방편을 쓰라.
저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면
곧 자성이 나타나리라.

불법이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여의고 깨달음은 없음이니,
세간을 여의고 보리를 찾으면
마치 토끼 뿔을 구함과 같으니라.

정견의 이름이 출세요,
사견이 곧 세간이니,
사와 정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 성품이 완연하리라.

이 송이 바로 돈교며
또한 이름이 대법선(大法船)이니
미혹하여 들으면 누겁(累劫)을 지내고,
깨달으면 곧 찰나 사이니라.

대사가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대범사에서 이 돈교를 설했으니 온 법계의 중생이 말 아래에 견성 성불하기를 원하노라.”
때에 위 사군과 관료와 도 닦는 이와 속인들이 다 함께 대사의 설법을 듣고 살펴 깨닫지 못한 이가 없었기에 함께 예를 올리고 찬탄하기를 “거룩하십니다. 어찌 영남에 부처님이 나오실 것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하였다.

第三 疑問品
제삼 의문품

어느 날 위자사가 대사를 위하여 큰 재를 베풀었다.
재를 마치고 자사는 대사를 청하여 자리에 오르시게 하고 관료와 선비와 백성들과 함께 엄숙한 모습으로 거듭 절하고 여쭙기를 “제자가 화상의 설법을 들으니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이제 조그마한 의심이 있으니 원컨대 대자비로 특별히 해설하여 주십시오.” 하니 “의심이 있거든 바로 물어라. 내가 마땅히 설하리라.”하시므로 “화상께서 설하신 바는 달마 대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하니 “그러하니라.” 하시기에 “제자가 듣기로는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 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 무제가 여쭙기를 「짐이 일생동안 절을 짓고 스님들을 공양하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었으니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시니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알지 못하겠으니 원컨대 화상께서 설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라.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절을 짓고 공양하며 보시하고 재를 베푼 것은 이름 하여 복을 구하였을 뿐이다.
복은 공덕으로 삼을 수 없다. 공덕은 법신 가운데 있지, 복을 닦는데 있지 않느니라.”
하시며 또 말씀하셨다.
“성품을 보는 것이 <공>이요, 평등함이 곧 <덕>이다.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어서 항상 본성의 진실한 묘용을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하느니라.
안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 곧 공이요, 밖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덕이며, 자성이 만법을 세우는 것이 곧 공이요, 마음 바탕이 생각을 떠난 것이 덕이며, 자성을 떠나지 않음이 곧 공이요, 대응해 쓰되 물들지 않는 것이 곧 덕이니, 만일 공덕법신(功德法身)을 찾으려 하면 이렇게 하여야만 이것이 참된 공덕이니라.
만일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남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항상 널리 공경하여야 하느니라.
마음으로는 항상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겨서 나를 세우는 마음을 끊지 않으면 곧 스스로 공이 없고 자성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아니하면 곧 스스로 덕이 없음이니라.
나를 세우며 스스로 잘난 체하고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선지식아, 순간순간에 간격이 없는 것이 곧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이니라.
선지식아,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을 안으로 보는 것이지, 보시나 공양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복덕이 공덕과는 다른 것이니라.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또 여쭙기를 “제자가 항상 보니 승과 속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극락에 나기를 원하던데, 청컨대 화상께서 설하여 주십시오. 그 곳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원컨대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말씀하셨다.
“위 사군은 잘 들어라. 내가 설하여 주겠노라.
세존이 사위성에 계실 때에 서방으로 인도하여 교화한다고 설하셨는데 경문에 보면 분명히 이곳에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로 논하여 말한다면 거리가 십만 팔 천리다 하셨는데, 이것은 곧 몸 가운데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가리킨 것으로 멀다고 하신 말씀이다.
멀다고 설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한 것이고 가깝다고 설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낮고 높은 두 가지가 있으나 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미혹함과 깨달음이 다르므로 견해가 더디고 빠르니라.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곳에 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토가 깨끗하다.」하셨느니라.
사군아,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만 깨끗하면 곧 죄가 없고 비록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느니라.
동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서방에 나기를 구하겠지만 서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어느 나라에 나기를 구할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을 모르므로 몸 가운데 정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동방을 원하고 서방을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를「머무는 곳마다 항상 안락하다」하셨느니라.
사군아, 마음자리가 오직 착하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은데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으면 염불을 하여도 태어나기는 어려우니라.
이제 선지식에게 권하는데 먼저 십악을 없애면 곧 십만리를 가는 것이고 다음에 팔사를 없애면 곧 팔천리를 지나가는 것이니 순간순간에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바르게 행하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면 어찌하여 다시 왕생을 원할 것이며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한다면 어느 부처님이 오셔서 맞아주실 것인가?
만일 무생(無生)의 돈법(頓法)을 깨달으면 서방이 다만 찰나에 있음을 보겠지만 깨닫지 못하면 염불하여 태어나기를 구하더라도 길이 멀 테니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혜능이 그대들에게 서방을 찰나 사이에 옮겨서 눈앞에 문득 보게 하리니 다들 보기를 원하느냐?
대중이 모두 다 큰 절을 올리며, “만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면 구태여 다시 왕생을 원하겠습니까? 원컨대 화상께서 자비로 서방을 나타내시어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하므로 대사가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세상 사람은 자기 육신이 성(城)이고,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은 문이다. 밖으로는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는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땅이며 성품은 임금이니라.
임금이 마음 땅 위에 지내는데 성품이 있으면 임금이 있고, 성품이 가면 임금이 없으며,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니 부처는 성품 가운데를 향하여 지을지언정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아라.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고 자성이 깨달으면 곧 부처님이라.
자비는 곧 관세음보살이고 희사(喜捨)는 이름 하여 대세지보살이며 청정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평등하고 바름은 아미타부처님이다.
나다 남이다 하는 생각은 수미산이고 삿된 마음은 바닷물이고 번뇌는 물결이며, 독한 해를 주는 것은 악한 용이고 헛된 망상은 귀신이며, 세상살이의 괴로움은 고기나 자라이며, 탐내고 성내는 것은 지옥이며, 어리석음은 곧 축생이니라.
선지식아, 항상 십선을 행하면 천당에 곧 이르고, <나다> <남이다>를 없애면 수미산이 무너지고 사심이 없으면 바닷물이 마르고 번뇌가 없으면 물결이 잠잠해지고 독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버리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리라.
자기의 마음자리 위에 각성여래가 큰 광명을 놓아서 밖으로 육문을 청정하게 비추면 능히 육욕 제천(六欲諸天)을 깨뜨리고 자성이 안으로 비추면 삼독이 곧 없어지고 지옥 등의 죄가 일시에 소멸하여 안과 밖이 밝게 통하여서 서방과 다르지 않으리라. 이렇게 닦지 아니하면 어떻게 저 곳에 이르겠느냐.”
대중이 설법을 듣고는 자기의 성품을 똑똑히 보고 다 함께 예배하며 다 함께「거룩하시다.」라고 찬탄하고「원컨대 온 법계 중생이 듣고서 한꺼번에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아, 만일 수행하고자 하면 재가불자라도 할 수 있다. 절에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집에 있어도 능히 행하면 동방인으로서 마음이 선한 것과 같고 절에 있어도 닦지 않으면 서방인으로서 마음이 악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만 청정하면 이것이 곧 자성의 서방이니라.”
위공이 또 여쭙기를 “집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원컨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중에게 무상송(無相頌)을 설하리니, 다만 이를 의지하여 닦으면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지만, 만일 이를 의지하여 닦지 아니하면 머리를 깎고 출가한들 도에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하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이 평등하면 어찌 계가 필요하며
행이 곧으면 선을 닦아 무엇 하리.

은혜로 친히 부모를 부양하고 의로우면
상하가 서로 아끼게 되며

사양하면 높고 낮은 이가 화목하고 참으면
온갖 것이 미워해도 싸울 일이 없느니라.

능히 나무를 비벼 불을 내듯하면
진흙에서 결정코 홍련이 피어나리라.

입에 쓴 것은 반드시 좋은 약이고,
귀에 거슬리는 것은 반드시 충성스런 말이니라.

허물을 고치면 반드시 지혜가 나고
흠을 덮으려 하면 마음속이 무디어 지느니

나날이 이로운 것을 행하여라.
도를 이루는 것이 돈을 보시함에 있지 않느니라.

보리는 다만 마음을 향하여 찾을지언정
어찌 밖을 향하여 그윽함을 구하고자 애쓰는가.

내 말을 듣고 이대로 수행하면
극락이 눈앞에 있을 것이다.

“선지식아, 모두 다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고 자성을 보면 바로 불도를 이루리라. 법은 기다리지 않으니 대중은 이제 헤어져라. 나도 조계로 돌아가리니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누구든지 와서 물어라.”
때에 자사와 관료와 그 모임에 있던 선남자 선여인이 각각 깨달음을 얻어서 믿고 받아들이며 받들어 행하였다.

 
Leave A Reply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