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원법사시학도 孤山圓法師示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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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戱라 大法이 下衰에 去聖逾遠이라 披緇雖衆이나 謀道尤稀로다 競聲利로 爲己能하고 示流通을 爲兒戱하야 遂使法門으로 罕闢하고 敎網으로 將頹로다 實賴後昆인댄 克荷斯道니 汝曹는 虛心聽法하고 潔己依師하야 近期於立身揚名하고 遠冀於革凡成聖이니 發揮像法인댄 捨子而誰오 故須修身踐言하야 愼終如始하며 勤爾學問하고 謹爾行藏하야 避惡友를 如避虎狼하고 事良朋을 如事父母하며 奉師盡禮하야 爲法忘軀하며 有善에 無自矜하고 起過어든 務速改하며 守仁義而確乎不拔하고 處貧賤則樂以忘憂하면 自然與禍斯違하고 與福斯會하리니 豈假相形問命하야 諂求榮達之期하며 擇日選時하야 苟免否屯之運이리요 此豈沙門之遠識가 實唯俗子之妄情이로다 宜乎見賢思齊하며 當仁不讓하야 慕雪山之求法하며 學善財之尋師하야 名利를 不足動於懷하고 死生을 不足憂其慮니 倘功成而事遂인댄 必自邇而陟遐니라 不沽名而名自揚하고 不召衆而衆自至라 智足以照惑하고 慈足以攝人이니라 窮則獨善其身하고 達則兼善天下하야 使眞風息而再振하고 慧炬滅而復明이면 可謂大丈夫焉이며 可謂如來使矣리니 豈得身捿講肆호대 跡混常徒하야 在穢惡則無所間然이요 於行解則不見可畏하야 以至積習成性하야 自滅其身이요 始敎慕彼上賢이라가 終見淪於下惡하나니 如斯之輩는 誠可悲哉인저 詩에 云靡不有初나 鮮克有終이라하니 斯之謂矣라 中人以上은 可不誡歟아 抑又戒慧分宗하야大小異學이 悉自佛心而派出하니 意存法界以同歸어늘 旣而未曉大猷라 於是에 各權所據하야 習經論則以戒學으로 爲棄物하고 宗律部則以經論으로 爲憑虛하며 習大法者則滅沒小乘하고 聽小乘者則輕毁大法하나니 但見人師의 偏讚하고 遂執之而互相是非어니 豈知佛意常融이리요 苟達之而不見彼此하면 應當互相成濟하야 共熟機緣하리니 其猶萬派朝宗에 無非到海며 百官이 蒞事에 咸曰勤王이라 未見護一派而擬塞衆流하며 守一官而欲廢庶績커라 原夫法王之垂化也에 統攝群品하야 各有司存하니 小律은 比禮刑之權이요 大乘은 類鈞衡之任이요 營福은 如司於漕輓이요 製撰은 若掌於王言이니 在國家之百吏咸修는 類我敎之群宗이 競演이라 果明此旨하면 豈執異端이리요 當須量己才能하야 隨力演布호대 性敏則兼學이 爲善이요 識淺則顓門이 是宜니라 若然者인댄 雖各播風猷나 而共成慈濟하야 同歸和合之海하며 共坐解脫之床하리니 夫如是則眞迷途之指南이며 敎門之木鐸也라 居乎師位하야 諒無慙德이요 趣乎佛果에 決定不疑하리니 汝無矜伐小小見知하고 樹立大大我慢하야 輕侮先覺하고 熒惑後生이어다 雖云聽尋이 未補過咎나 言或有中이니 汝曹는 思之하라

오호라! 큰 법은 점차 쇠퇴하고 가신 성인과는 더욱 멀어지니 승복을 걸친 이는 비록 많으나 도를 도모하는 자는 더욱 드물다. 명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을 자기의 능사로 삼고 바른 법이 흐르고 소통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이들의 유희로 여기니 마침내 불법의 문이 드물게 열리게 함으로써 가르침의 규범이 곧 무너지려 한다. 진실로 뒤를 잇는 이에게 의뢰하려면 능히 이 도를 짊어져야 할 것이니, 너희들은 마음을 비우고 법을 들으며 몸을 깨끗이하여 스승에게 의지함으로써 가까이로는 몸을 세워 이름을 드날릴 것을 기약하고 멀리로는 범부의 품성을 개혁하여 성인의 품성을 이루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상법像法을 꽃피워 드날리고자 함에 그대가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몸을 닦고 말을 실천함에 끝까지 삼가기를 마치 처음과 같이 하라.
배우고 묻기를 부지런히 하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에 삼갈 것이니, 못된 벗 피하기를 마치 호랑이 피하듯 해야 하고 어진 벗 섬기기를 마치 부모 섬기듯 해야 한다. 스승을 받듦에 예를 다하고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으며, 선행이 있으면 스스로 자랑함이 없어야 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속히 고칠 것을 힘써야 한다. 인의仁義를 지킴에 확연히 흔들리지 않고 빈천貧賤에 거처하되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으면 자연히 재난과는 떨어지고 복록과는 모이게 될 것이니, 어찌 관상을 보고 운명을 물음으로써 영달의 시기를 아첨하여 구할 것이며 날을 선택하고 때를 가림으로써 막히고 어려운 운세를 구차하게 면하기를 빌겠는가. 이것이 어찌 사문의 원대한 식견이리요, 실로 오직 속인의 망령된 뜻일 뿐이다. 마땅히 현인을 보면 그와 가지런해 질 것을 생각하고 어진 일을 당면해서는 양보하지 말아야 하며, 설산의 구법求法을 사모하고 선재善財가 스승을 찾던 일을 배우라.
명예와 이익은 가슴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며 삶과 죽음은 족히 근심할 바가 아니다. 만약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니, 이름을 팔지 않아도 이름은 스스로 드날려질 것이며 대중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대중이 스스로 올 것이다. 지혜가 풍족함으로써 의혹을 비출 수 있고 자비가 풍족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궁핍하면 곧 홀로 그 자신만을 착하게 하고 통달하면 곧 천하까지 겸해서 착하게 하여 잠잠하던 참된 교화의 바람을 다시 떨쳐 일어나게 하고 꺼졌던 지혜의 횃불을 다시 밝게 밝힌다면 가히 대장부라 일컬을 것이며 가히 여래의 사자라 일컬을 것이다. 어찌하여 몸은 강의하는 자리에 깃들어 있되 자취는 범상한 무리와 뒤섞여 있으며, 더럽고 추악한 곳에 있으나 조금도 그렇게 여기는 바가 없으며, 수행과 견해에 있어서도 가히 두려워할 만한 것을 볼 수 없으며, 나아가 그러한 습성을 쌓아 성품을 이루기에 이름으로써 그 몸을 스스로 멸하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저 위의 현인들을 사모하다가 결국에는 아래로 추악함에 빠짐을 보이니 이와 같은 무리는 진실로 슬플 뿐이로다.《시경》에 이르기를 「‘처음’은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능히 ‘마침’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니, 중간 근기의 사람 이상은 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계戒와 혜慧가 종파를 나누고 대승과 소승이 배움을 달리하나 모두 부처님의 마음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니 뜻을 법계法界에 두고 모두 함께 돌아가야 한다. 아직까지 큰 법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각기 근거하는 바를 고집하여, 경론을 익히면 곧 계학戒學을 쓰레기로 취급하고 율부律部를 으뜸으로 삼으면 곧 경론을 헛된 곳에 기대는 것으로 여기며, 대승을 익히는 자는 곧 소승을 멸시하고 소승을 듣는 자는 곧 대승을 업신여기며, 단지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한 이의 치우친 찬사만 보고 마침내 그것에 집착하여 서로 옳고 그르다 하고 있으니 어찌 부처님의 뜻은 항상 원융무애함을 알겠는가. 진실로 그것을 통달하여 이것과 저것을 함께 보지 못한다면 응당 서로를 구제해 줌으로써 함께 [불법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와 인연을 성숙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1만 줄기의 물줄기가 머리를 조아림에 바다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으며 문무백관이 일에 임함에 모두들 왕을 위해 힘 쓸 것이라 일컫는 것과 같다. 한 가닥 물줄기를 보호하고자 여러 물줄기를 막으려 한다거나 하나의 벼슬을 지키고자 수많은 벼슬을 폐지하려 한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본디 무릇 법왕이 교화를 드리움에 여러 종류의 중생들을 통괄하여 끌어안고자 각각에 소임所任을 두었으니, 소승의 율律은 예부와 형부의 권위에 비견되고 대승大乘은 재상의 임무와 비슷하며 복을 짓는 일(營福)은 배나 수레를 조종하는 것과 같고 서적을 찬술하는 일(製撰)은 마치 왕의 말을 관장하는 것과도 같다. 나라에서 모든 벼슬아치가 함께 자신의 직분을 닦는 것은 우리 불교의 여러 종파들이 다투어 포교하는 것과 유사하니 과연 이 취지를 밝히면 어찌 이단異端임을 고집하겠는가. 응당 모름지기 자기의 재능을 가늠하고 능력에 따라 포교할 것이니, 성품이 민첩하면 곧 겸하여 배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고 지식이 얕다면 곧 오로지 하나의 부문만 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각각 교화와 법도를 전파하더라도 함께 자비로운 구제를 이루어서 같이 화합의 바다로 돌아갈 것이며 함께 해탈의 자리에 앉을 것이니, 무릇 이와 같다면 곧 참으로 미로의 나침판이며 교문敎門의 목탁일 것이다.
스승의 지위에 자리하여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가 없으면 불과佛果에 나아가는데 결정코 의심스럽지 않으리니, 너희는 작디작은 견해와 지식을 자랑하거나 크디크게 나의 거만을 세워서 선각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뒤에 오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록 말하기를 [옛 말을] 듣고 [옛 글을] 찾아보는 것이 허물을 보완하지 못한다 하지만 말 가운데 혹시라도 맞는 것이 있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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