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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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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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재앙 30년 전쟁,

 

1618~1648 유럽을 황폐화한 끔직한 30년 전쟁.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것은 아직도 독일인의 가슴속에 최대의 피해자로 각인되어있는건 사실이다.프랑스인들은 반면 무관심이지만  그 전쟁은 근대 왕정 정치의 확립과 프랑스 부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폭력,약탈의 30년전쟁, 먼저 여기 30년 전쟁동안 독일의 영토에서 유럽의 강력힘 힘에 저항한 이들의 예를 보자.

Saxe 지방의 Wurzen이란 도시는 1692년에도 도시의 4분의 1이 버려졌다. Magdebourg 는 잔혹한 군대에 의해 끔찍한 약탈과 방화가 있었던 1631년 30,000명 주민 3분의 2의 죽음을 겪었다. 조금더 북쪽의 스웨덴의 장군 Baner는 1638년

“Mecklembourg는 모래와 바람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모든것이 끝까지파괴 되었다”

라고 기록했다.이러한 사건의 연속은 Lorrain jacque callot 의작품 Les malheurs de la guerre 1633 혹은 소설 Simplicissimus 1669에 차용될수 있었고 그것들은 이 분쟁이 유럽에 있어 얼마나 큰 재앙이 였는지 상기시킨다.

 

 

전지역이 강탈,사취,상업,농업의 방해를 겪었고 지나가는 모든 군대들에 의해 초토화 되어버렸다. 도망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1630년경 가장 넓게 퍼졌으며 치명적이였던 페스트는 16세기 중엽 지속적으로 유럽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멈추지 않는 군대들이 지나친 그리고 매번 비극적인 결과에 의해서 그들의 종교적 노선 을 바꿔야 했던 도시들, Mayence를 예로 들면 1631년에 스웨덴에게, 1636년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다시 1644년 프랑스에 의해 과도한 세금으로 모든것이 탕진되고 페스트에 의해 결국 도시의 그림자만 남게된 도시였다. 1666년 까지 그곳에서 도망친 주민들이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5개의 칙령이 필요했다.

독일제국의 북동쪽부터 남서쪽을 걸친 범위에 있던 독일 제국의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75% 잃고 지속적으로 주민이탈이 생겨났다.  Alsace남쪽에 위치한 Sudgau의 많은 교구들은 1656년 예배 참석자의 수가 1620년의 4분의 1에도 못미쳤다. 혹독한 30년은 전지역을 황폐화 시켰다. 누가 그것을 기억할까?

물론 30년 전쟁이 여전히 독일의 수많은 도실들의 기억들과 민간전승에 남아있는것은 사실이다.  스웨덴의 도시를 구하기 위한 일화로 유명한 Rothenburg ob der Tauber의 시장을 예를 들자면, 그는 그장화속에 든 포도주를 단숨아 마셔야 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조금더 깊게 말하자면 전쟁은 종교적 복종의 지정학적 재분포를 이끌어 냈고 지금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2 차 세계대전은 말할것도 없이 사람들의 인식에서 백년전쟁이나 나폴레옹의 전쟁보다는 의미가 덜하다. 유일하게 이 전쟁을 직접 경험한 Alsace, Lorraine 지방이 지금까지 잊지않고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이런 상대적인 무관심은 모순을 구성한다. 바로 30년 전쟁이 프랑스가 일정 기간동안 유럽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행정국가와 튼튼한 재정을 마련하는 박차를 가하는 “단계의 변화” 에 결정적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우리들에게 단순히 시련 이나 영웅적 이미지로 남는게 위선적인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이 국제적 분쟁의 중심은 프랑스가 아닌 독일이였다.

 

 

30년 전쟁의 시작 들은 사실 지방의 분쟁들이였다. 1618년 반란을 일으킨 체코 귀족들은 그들이 1526년 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1619년 카톨릭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닌 왕을 선출했다. 그러나 다른 독일의 왕가, 팔라티나지방의 왕으로 선출된 칼뱅파였던 프레드릭 5세가 그에 반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처음 분쟁은 그후 몇년동안 지속적인 혹은 간헐적인 공국의 중요한 부분 그리고 독일제국,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영국,프랑스 그리고 다른 강성한 소국들의 영토에 대한 개입을  촉진했다.

이러한 복잡한 연대기 안에서 30년 전쟁은 은 서로 교차된 그리고 그 국제적 분쟁을 연장시키고 확장시킨 여러번의 전쟁이였다. 애초에 그 분쟁의 본질은 신성 로마제국에 관한 것 이였다.신성 로마제국은 한세기 전에 중앙집권구조의 혁신과 실행, 그리고 각지방의 자치적인 성장을 한번에 지켜내는 해결의 본질을 찾았어야 했다.이런 제도적 타협은 신성로마제국을 이루는 많은 왕과 여러 도시들의 승낙을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그들중 대부분은 공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신성 로마제국에 강력한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정이던 사실이던 이러한 범게르만적인 자유를 침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중 가장 결정적인 역활은 1619년에 황제에 선출된 페르디난드 2세의 판단이였다.

 

 

Ferdinand II

그는 신교도 사이에서 유일한 불신을 촉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황제 즉위 전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친 카톨릭 정치를 오스트리아의 남쪽의 Styrie에서 실행했기 때문이다.이처럼 30년 전쟁은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먼저 신성 로마 제국은 1555년 이래 모두가 공존의 방법으로 카톨릭과 루터파사이의 합의에 기초한 아우스부르그 평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어느 진영도 이러한 평등이 다르게 법제화 되는걸 고려하지 않았다. 반대로 카톨릭들은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게다가 칼뱅파들은 아우스부르그 평화 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입지를 잃어버렸고 그것을 만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왕들중 하나였던 팔라티나의 왕 프레데릭5세가 1555년 이후로 칼뱅파가 된다. 그는 힘들게 얻은 종교적 질서의 개종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Frédéric V

만일 그가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받으며 전쟁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팽팽한 긴장은 각 종교적 진영에서 17세기초 정치적 군사적 연합의 형성에 다다른다.

Maximilien de bavière 의 영향아래 교체된 카톨릭 연합,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선교 연합  l’unioin évangélique  – 칼뱅파를 주도하는 프레데릭 5세

이 두진영은 외부에서 동맹국들을 찾으며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한 층더 암울한 정치를 계속 해나감을 늦추지 않았다. 실제로는 모든 유럽에서 종교적 긴장이 지속 되었다. 이교도에 반대하는 하나의 거대한 카톨릭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투쟁을 품고 있었다. 모든 강대국들은 초기에는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그 균형이 그들에게 그들이 두려워 하는쪽으로 기울기 시작할때 개입하였다.그 분쟁은 다양한 극단적 긴장 그리고 때로는 본질에 어긋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어떤 중심국가들은 종교 만큼 왕조의 연합을 위해 개입했다. 영국의 왕 Jacques 1세(1603~1625)는 예를 들어 프레데릭 5세의 양아버지였다. 그리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앙 4세왕은 이복형제였다.합스브르크 두 갈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은 그들의 몫을 위해 그들이 사촌이였다는걸 잊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네덜란드의 왕자, 스페인과 시실리의 왕 샤를 깡 은 지금의 스폐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만들며 그들의 형제와 아들 사이에서 합스브르크 왕가의 목으로 나누었다. )

 

Charles Quint

신성로마제국의 북쪽의 덴마크 혹은 모든 발틱해 연안을 지배한 스웨덴에선 오래된 영토의 야망이 종교와 결합했다.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은 30년 전쟁이 합스브르크,그들의 왕자와 스페인왕에 의해 분리된 네덜란드의 북쪽에서 1570년 이래 절때 멈추지 않았던 전쟁의 계속에 불과 했다. 스페인인들은 플랑드르로 가는 루트를 확보하길 원했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연합군을 찾았다. 결국 그 모든것들 위에서 종교개종에 근거한 유럽의 큰 도박이 꾸며지고 1640년 초 리슐리외의 그의 정치적 증언에 따르면

 

Richelieu

 

“왕은 그의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강해져야한다.”

라고 표현했다.(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사이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것은 대륙의 최고의 국가인 스페인, 그 유럽의 정신적 지주을 향한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큰 위협이였다. 스폐인의 첫째수상 Olivares 백작은 사실 1598년에 죽은 필립 2세의 지배하에 있던 네덜란드에게 독립을 주려는 야망을 가졌다. 이러한 이유들의 원인을 밝히는건 간단하지 않으며 전쟁의 당사자들에게도 그것을 중재 시키려는 이들에도 쉽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 두 노선으로 부터 모두 반대에 선다. 첫번째 해결책은 Michel de marillac가 지난 세기 동안 믿음의 단련이 필요했던, 구교와 신교의 종교 전쟁의 시련에서 살아 남은 프랑스 를 위해 가능한 차선을 루이 13세의 의회에 제출했다. 합수부르그 카톨릭의 침략을 그 결과가 프랑스가 주요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할지라도 마주한 그것에 대한 평화와 전쟁의 불참한다는 그의 해결책, 다른 해결책은 프랑스의 재상이였던 리슐리외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가문과 기나긴 투쟁에서 재회복,만회에 근거한 역사적 정치적 이유때문에  (전통적인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그 왕가의 적대) 카톨릭이 필요 하다고 해도 반대에 설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위해 신교도와 연합함을 우선시하는것이였다.

이러한 두 진영의 고민은 1630년 11월 11 그리고 12일 에 해결되었다. 이런 딜레마에서 루이 13세는 마리메디치 가문이던  자신의 어머니의 의견과 달리 리슐리외의 의견을 지지한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기 보다는  힘에 의해서 실행하는것이 필요했다.

여기 다른 예는 이 전쟁의 복잡합,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난 이들의 망설임을 보여준다. 간단하게 말해 덴마크는 항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먼저 1625년 그리고 1629년에는 그들의 신념에 따라 신교측에 그리고 1643년에는 스웨덴의 적대자로써 신성로마제국의 진영이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신교들의 유명한 수장 그리고 그 직함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안에서 공존 유지에 제일 권위를 끼치던  Saxe의 루터파 왕은 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과 반대 사이에서 때로는 스웨덴쪽에 때로는 그반대쪽에 서는 우회책을 쓴다. 그들의 적 그리고 혹은 자신의 동맹국이 점점더 파괴의 반복과 군비확장의 불안정한 움직임으로 다다르는것 처럼 보이는 전쟁의 논리를 지켜보는 것은 전쟁을 겪은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크나큰 불행이였다. 그래서 어느 나라도 독일은 안중에 없었던 하나의, 그리고 동시 다발적인전쟁이였다. 그리고 30년 전쟁이 필요한 이익의 변화를 실현하는 최상의 조건을 갖춤으로써 프랑스는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전쟁은 스스로도 그 양상 자체를 많이 변화하였다.군대의 규모는 커졌으며 포병이 차지하는 영향력이 커졌다.가늘고 움직임이 활발한 그리고 동시에 긴 전선 을 형성하는 공격적인 새롭고 뛰어난 전술들이 승리의 가장큰 요소로 자리잡았다.

30년 전쟁은 또한 자신의 진영 혹은 다른 진영에서 협상을 지연시키고 화폐의 발행을 통해 군비를 절약하는 지연술로 유명했던 용병대장들의 활약이 절정에 이르렀다. 최고의 순간 그리고 동시에 비극을 오고간 발렌스타인의 영웅적 초상은 이 왕들의 전쟁에서 중요한 부분중 하나이다.

 

Wallenstein

이 작은 보헤미아의 귀족은 놀랄만한 군대 (지금에도 이루기 힘든, 실제병력은 100,000 다 달았다)를 모았고 여러번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가 높은 지위에 다다르고 신성로마제국의 귀족과 왕을 만들어 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자치와 그 야망에 걱정하던 황제로부터 의심을 사게되어 1634년 2월 암살당한다. 결국 이 분쟁은 반대로 공격적인 전술과 상비,상설구조에서 에서 안정적 궤도에 오른 정부에 기초한 군대 조직력과 국가 결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었다.

먼저 스웨덴 군의 경우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는 (Gustave Adolphe) 1631년, Breitenfeld에서  그리고 이듬해 Lutzen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전 유럽을 놀라게 했다.

 

Gustave Adolphe

그리고 역시 스페인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인 그들의 군대 그리고 그 중심의 Tercios의 경이로운 보병도 1643년 로크로와 (Rocroi)에서 장차 꽁대(Condé)의 왕이 될 이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그 운명을 달리했다. 모든 군대들은 아직 18세기에나 다다를 규율과 조직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전쟁은 상당수에 다다르는 언제든 가용한 실제 병력에 대한 유지, 발전한 전쟁 수단과 군대의 규율에 따라 진행되어 졌다. (이제부터 대부분 병력은 100,000을 넘어선다)

이 변화의 전쟁은 전쟁비용의 증가를 유발했다. 군대의 재정은 정치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전쟁의 악착같은 증가는 정부의 새로운 효율성을 필요로 했고 그로 부터 전쟁은 힘을 가진 나라들과 더 이상 그러지 못한 나라들 사이에 보다 정확한 경계선을 만들어 냈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에서 전쟁돌입은 1635년, 1630년에 비해 6배나 증가하는 엄청난 국가 재정 증가의 가속화를 일으켰다. 비용지출은 예외적인 전쟁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세금 인상을 억제하던 단계에서 한단계 뛰어넘을수 있었고 전쟁은 그 경제적인 제도로 부터 이루어 졌다. 그러한 관점에서 프랑스의 이러한 변화는 차후 행정적 왕정의 단계를 위한 핵심 기관의 변화와 스스로의 강화를 위함이였다.(지방에 장관들을 보냄)

반면 이러한 전쟁의 시기에 농부들은 농민반란 없다면 다음해로 넘어가는걸 모를정도였다. 매해 무거운 세금으로 인한 봉기가 귀족들의 개입없이 일어났고 정부와 재력가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분쟁의 결과는 보다 강력한 왕정을 낳을수 밖에 없었다.같은 경우에 있던 스페인이 반복된 파산으로 왕정의 힘겨움을 괴로워 할때 프랑스는 한번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영국의 왕은 이러한 재정정 방법을 의회의 동의 없이 이끌어 낼 수 없었다. 필요한 금액의 엄청난 증가에 직면한 그는 불만이였고 조금씩 그러한 문제들을 전쟁을 통해 해결해야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스튜어트 왕가의 자크1세 Jacques (1603~1625),그리고 찰스 1세 Chales(1625~1649)는 마침내 의회에 의존하기 보다 차라리 평화를 유지하는것을 선택했다.

 

Jacques I

그래서 30년 전쟁은 잠시동안 의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가장 큰 절대왕정의 군사적 효율을 증명하는것 처럼 보였다. 전쟁은 또한 분쟁의 국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의 문을 열었다.먼저 신성 로마제국에서 합스부르그 왕가의 중앙집권화를 꾀하던 이들이 실패에 머무르고 다른 제국의 모델을 촉진시켰다.신성 로마제국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제국을 구성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제부터 그들의 운명이 그들의 스스로의 보호를 확신 할 수 있는 그들 역량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군비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완강한 의지와 함께 새로운 전쟁의 비극을 뒤따르는걸 피하기 위해 제국의 보호를 위한 연구들이 전후 이루어진다.

종교적 공존의 결정적 규약 (1555년 이미 그 근간이 형성된) 이 그 예이다 – 1648년 베스트 팔렌 조약은 독일 영토 내에 지속적으로 종교적 분할을 규정한다.그로부터 한세기가 지나고 마치 최악의 전쟁 옹호자중 하나처럼, 이번엔 황실 기관을 강화하고 합스부르크에대해 충성을 보이면서 루이 14세가 프랑스에그리고 유럽에 나타난다.

 

Louis XIV

16세기 초부터 1756무렵까지 250년간의 합스부르크에 적대했던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동맹과 친화의 급변은 영국과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투쟁은 이후 약 80년동안 끊임없는 분쟁과 거의 변함없는 외교적 적대로 남는다. 이런 유럽의 긴 유럽의 질서안에서 30년 전쟁은 수십년동안 프랑스의 패권을 여는 전환점으로 자리잡는다.

왕실은 경계가 완전히 개편된 지방들을 획득하고 (Alsace지방의 한부분은 점진적 흡수의 서막), 메츠지방(Metz)의 양도를 얻어낸다. 1648년 Toul 그리고 Verdun은 1648년 l’Artois 와 le Roussillon은 1659년. 무엇보다 왕실은 재정적 자원과 군사적 조직에 있어 한단계 진전을 이루어 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차후 정복들은 그 이득을 강화할수 밖에 없었다. 반세기가 넘게 가졌던 지방연합의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결정적 승인을 바라던 스웨덴은 1648년 그획득으로 인해 유럽의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결국 30년 전쟁은 우리가 봐온것처럼 전쟁이 변화한 만큼 평화의 방법을 그리고 전쟁의 방법을 바꾸었다.외교의 특화는 그들의 왕과 그들의 국제적 의식,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어떠한일을 해나가야 하는지 일깨웠다. 이 종교전쟁은 이처럼 국제적 관계안에서 종교적 결과로 인한 상대적 중립화에 의해 마무리 되었고, 평화조약에 대한 교황의 격렬한 비판은 조용히 사라졌다.베스트팔렌 협상으로 유럽은 길고 전체적인 유럽의회의 세기를 맞이했고, 조항들과 보증은 유럽의 국가들의 관계를 긴밀하게 했다.( 스웨덴과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새로운 질서의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은밀한 외교술은 과거와 미래를 다루는 새롭고 보다 현명한 해결책을 찾는데 그 역할이 커져갔다.

La guerre de Trente ans – Christophe Duhamelle – L’histoire n263 Mars 2002


교양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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