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

일제침략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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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과 불교

제1절 한말(韓末)의 불교
1. 전통사상의 혼미
한국불교의 호국적 성격은 불도들로 하여금 생사를 초월하여 구국의 대열에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은 수다한 호국적 사례에도 불구하고 척불숭유를 국체로 삼은 조선 왕조에선 여전히 불교를 배척하여 불교에 대한 학대와 압박은 일층 격심해졌다. 몇 가지 예만 들더라도 인조 때에는1)승려의 입성을 강력히 금지 시켰고, 현종 때에는 양민으로서 승려가 됨을 일체 엄금하였으며, 이에 위배하는2)자는 죄과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어서 성내의 불사를 헐어 서당으로 고쳤으며,3)영조 때에는 사찰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4)이와 같이 왕조의 군신들은 불교를 한 없이 학대했으나 불도들을 일거에 박멸하려는 박해까지를 가하지 못하였다. 천민의 자격으로 무방비한 자연적 생활은 허용하였던 것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불교 자체내에 호국충 정의 전통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것을 소극적으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의 이유는 왕실 중심으로 상류층의 내실에서는 불교의 신봉이5)면면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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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조≫ 실록 권1 인조(仁祖) 즉위 원년 3기유(己酉)조
2) ≪현록(顯錄)≫ 권1 현종(顯宗) 즉위 원년 12월 을묘(乙卯)조
3) ≪조선왕조실록≫ 권4 현종 2년 6월 경진(庚辰)조
4) 동 권102 영조(英祖) 39년 8월 갑신(甲申)조
5) 유병덕(柳炳德) ≪일제시대의불교≫ 숭산(崇山) 박길진 박사(朴吉眞博士) 화갑기념(華甲紀念) (한국불교사상사1975. 10) p.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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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관료 양반들이 정책적인 면에서 배불의 입장을 고수한 데 대하여 여성들의 불교에의 귀의는 불교 본래적인 성격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된 양상은 조선왕조 말에 극화된 느낌이었으니 남존여비의 기풍에 억눌려 지대한 유교 사회 하에서의 여성들의 가련한 생활은 오히려 불사가 유일한 위안처가 되었다.
그 당시 유력 가문에서의 부녀자들은 문 밖의 사회를 내다 볼 수 없었으며 그들은 오직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나 것이 큰 최악이라 느끼며, 이 죄를 소멸하기 위하여 사원을 찾아가는 기회를 찾고, 혹은 내세 생남을 기원하며, 혹은 현세의 고뇌를 다소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장소로서 불사를 택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의 신분계층의 분해는 봉건적 신분 관계가 동요되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19세기에 들면서 왕조 외척에 의한 문벌 정치는 종래의 정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유교는 이게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사회 질서나 정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부 양반들은 유교를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6)
이와 같은 유교 정치의 파탄과 유교의 권위 실추는 국민을 사상적인 혼돈 속에 몰아넣었으며, 따라서 당시의 사회 정세는 국민 전반에 걸친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에 전통적 봉건 질서에 집요하게 도전한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으니 서세 동점(西勢東漸)의 결과 나타난 천주교가 그것이다. 봉건적인 남존여비의 사회가 가족 제도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부녀자들에게 천주교는 분명 하나의 새로운 활로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져 가고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될 수 없었던 과도적 조류라 하더라도 외래의 새로운 종교가 모든 만중에게 영함되어질 수는 없었다. 오히려 19세기 후반기의 어수선한 동아의 정세는 조야를 막론하고 이념의 문제보다 현실적인 문제로서 위기 의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교적인 입장에서의 ‘척사론(斥邪論)’ 으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 하나의 종교적 반발인’동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몰락 양반의 후예인 경주의 최제우(崔濟愚)는 양반 사회의 모순과 파탄 속에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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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우근(韓㳓劤) ≪한국통사≫ (을유문화사 1970)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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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퇴폐상을 절감했다. 그는 또 조선에서 천주교 교세가 팽창하여 가는 상황에서 서양인의 중국 침략의 소식을 전하여 듣고, 국가 운명에 대한 위기감을 의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전통사상을 지양하고 서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서양 세력의 정신적 기반으로 보이는 천주교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힘에 기대해야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창도한 것이 동학이다.
그러나 동학 역시 위정자들의 눈에는 사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교 윤리와 양반적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인 성격이 보임에 양반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부패가 극에 달한 사회와 국운을 위협하는 외세에 항거하여 농민의 고난 극복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동학 농민 봉기이다.
그러나 대세는 오히려 불리하여 동학 농민 봉기를 계기로 하여 발생한 청일전쟁, 그 후의 노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침략 세력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와 같은 국난의 위기 속에서 민중의 사상적 혼돈은 격심해 갔고, 사회 불안은 민중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2. 일본 불교의 상륙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편승한 일제의 한국식민지화 과정을 살펴보면 정교(政敎) 양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가 취한 식민 정책의 수법이다.
즉 세계사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식민지 정책이란 정치적인 침략 이전에 외교적 보호, 또는 협력이라는 미명하에 종교가 먼저 침투한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종교야말로 민중을 사로잡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침략자들은 언필칭 종교의 본질인 희생, 봉사, 계몽, 각성 등의 구호를 내세워 민중에게 일단 호응을 얻은 다음 정신적인 흥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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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법은 일제의 한국식민지화 과정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즉 일제는 우선 종교적으로 민중의 호응을 얻기 위하며 그들의 신도와 불교를 가지고 접근하여 왔다. 그러나 간교한 일제는 한국인들의 심중에 불교 이념이 전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를 앞세워 사상적 침투를 이루고자 발분하였다. 예컨대 1876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 직후 진종 일련종(眞宗日蓮宗) 등 일본 불교가 한국에 상륙한 것이라든지 일련종의 좌야전려(佐野前勵)라는 승려가 입경하여 한국불교를 일련종으로 개종시키고자 계획한 것 등등은 바로 일제의 사상적 침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제 일본 불교의 상륙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일본 불교가 한국 상륙에 성공한 것은 승려입성 금지령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유교적 봉건사회에선 승도들의 호국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배불 정책을 강력히 고집하여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인조 때 내려진 이 금령은 근 3백 년간 계속하여 왔다. 그러던 중 처음 한국에 발을 부친 일본 일련종의 좌야전려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불교계 침투의 좋은 계기로 착안하고 각 사찰의 승려들에게 입성해금 운동을 하여 호응을 얻는 한편, 총리대신 김굉집(金宏集)에게 상서를 올리고 각 대신들을 찾아다니는 등 분주한 활동을 하여 1925년 마침내 입성 해금을 실현시켰던 것이다.7)이것을 계기로 일본 불교 세력은 우리나라에서 급진적으로 진출하였다.
한국에 상륙한 일본종교는 불교 외에도 신도(神道) 기독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일본종교가 처음 내세운 명목은 한국이 거주하는 인본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한다는 것 이었다. 그러더니 일본인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포교에 기반이 잡히면서 그들은 한국인 포섭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아니 본래부터 그들의 목표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강화되면서 그들 일본종교들은 정책적인 보호를 받아 급성장하였으며 그 중 가장 세력을 떨친 것이 불교였다.
일본불교는 종파 불교 성격 그대로 한국에 이식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포교활동을 전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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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교형(高橋亨) ≪이조불교≫ p.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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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한국에 상륙한 일본 불교는 진종 대곡파(大谷派)였다. 즉 병자수호조약(1876년) 직후 일본외무경 사도종칙(寺島宗則)의 권고에 의해 1877년 대곡파가 부산에 별원을 설립하고 포교 사업을 사작한 것이 일본 불교가 한반도에 침투하게 된 시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1881년 일련종 정토종(淨土宗)등이 차례로 들어 왔던 것이다.8)
오촌원공(奧村圓公)을 중심으로 부산에 별원을 설립한 진종 대곡파 본원사는 그후 1880년 원산별원 1884년 인천별원, 1890년 경성별원, 1897년 목포별원 등을 세웠고, 이어서 군산, 진남포, 개성, 신의주 등지에도 포교소가 세워졌다. 이렇게 교세의 발전을 보인 진종 대곡파는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 자제에 대한 교육 사업을 펴는 한편, 부산에 자선교화의 빈민구호사업단체 및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원산에 설교소, 경성별원내에 행로병원 구호소 등 각 방면의 신설에 손을 대었고 감옥 교회에도 착수하는 등 교세의 확장에 힘썼다.
한편, 일련종은 1881년 부산에 입정산(立正山) 묘각사(妙覺寺)를 세운 후 다음에 원산에 정각사(頂覺寺)를 인천에 묘각사(妙覺寺)를 각각 지어 일련종 포교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서 서울에 호국사와 경왕사(經王寺), 진남포에 최승사(最勝寺), 군산에 안국사(安國寺), 함흥에 일운사(日運寺)를 건립하는 등 급진적인 포교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진종본파 본원사는 대곡존보(大谷尊寶)를 개교총감으로 하여 많은 승려들이 내한하여 서울에 불교고등학원을 창립하고 서울, 충무, 평양 등지에 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이 방면의 활동을 개시하였고, 그리고 진언종은 서울에 광운사(光雲寺)를 창립하였다. 또한 정호종은 1893년 별개교사(別開敎使) 2명과 함께 내한하여 서울에 종무소를 세워 포교에 착수하는 한편 한국인 신도를 포섭하여 종지를 전하기에 주력하였다. 교세를 더듬어 볼 때 경술국치 당시에 이미 일본 불교는 전국에 폭 넓게 침투해 있었다. 1911년 일련종은 한국내에 11개의 사찰을 보유하였으며, 진종본파 본원사는 20개의 포교소 및 출장소와 부속사업으로 10개의 교육기관 및 청년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조동종(曹洞宗)은 5개의 사찰과 3개의 포교소, 진언종(眞言宗)은 1개의 사찰과 2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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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길천문태랑(吉川文太郎) ≪조선의종교≫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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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소, 정토종은 21개의 사찰 및 출장소와 한국인 포교를 위해 4개의 출장 설교소를 설치하고 있었다.9)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침투한 일본 불교는 그들의 식민정치 부식에 크게 이용되었다. 때문에 일본 당국에는 포교사업을 위해 집중적으로 후원해 주었으며, 그 일선에 나선 진종 대곡파는 더욱 한국 포교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898년 대곡파 본원사에서는 포교의 목적 및 방법에 대하여
① 식산 흥업을 장려하여 가능한 한 물질적 개발에 힘쓸 것
② 승속을 불문하고 지방 저명 인사에게 일본을 시찰케 함으로써 일반인의 개발 보급을 도모할 것.
③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을 계발할 것 등을 경도 본산에 제출하였다.
이 결과로 진종 대곡파는 일본외무성으로부터 찬조 및 보조금을 받았던 것이다.10)
그 후 1910년에도 일본의 대곡파 본원사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대거 전도계획을 결정하였다. 또한 이 때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인들이 한국사찰을 일본종파에 예속시키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승려들은 진종 정토총 등 일본 불교에 대한 경계심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후 한국에 건너온 일본 불교는 16개 종파에 달하였으며 1930년대까지의 그들의 포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표 1. 조선총독부 시정 30년사에 게시된 것.
년 도
포 교 소
교 포 사
신 도
일 본 인
한 국 인
합 계
1916
204
245
104,104
6,470
10,574
1920
236
337
137,063
11,054
148,117
1930
373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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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삼보학회론(三寶學會論) ≪한국불교최근백년사≫ 제44 pp.25∼29.
10) 상게서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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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사 찰 수
포교소수
승 수
니(尼)수
포교자수
신도수
한국불교
일본불교
1,335
125
322
603
6,275
613
999
51
319
789
194,879
309,740
현황을 살펴보면 식민지 정책 속에서의 일본 불교의 증가율이 어떠하였는가를 실증해 주고 있다. 표 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30년도 말 대중포교의 면에선 일본 불교가 한국불교를 월등히 앞서고 있다.
친일 매불(買佛) 운동의 전개
구한말의 급변하는 국내의 정세는 일본 불교의 활동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본 불교의 활동은 정적 속에 잠겨 있던 우리나라 불교계에 대해서도 빈감한 반응을 나타내게 하였다. 그 반응은 두 개의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니 하나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호국 원리의 새로운 자각이요, 또 하나는 대세를 이용 일본 불교에 동조하여 승단의 관리권 장악을 위한 움직임이었으니, 1908년 이회광(李晦光) 의 원종언명운동(圓完誾明運動)은 그 대표적 실례이다.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이 원종 종교원을 세운 것은 1906년에 설립된 불교연구회와의 관계에서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즉 1906년 2월 홍월초(洪月初), 이보담(李寶潭) 등이 세운 불교연구회에선 초대 회장으로 홍월초를 선임하였다. 이어서 이보담, 이회광으로 그 전통을 잇게 하였다. 원흥사(元興寺)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둔 불교연구회에선 명진(明進)학교를 세우는 등 전국 사찰에 흥학을 자극하였다. 일본의 각 종파 특히 정토종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이들은 불교연구회의 종지를 정토종으로 선포하고 일본 정토종과 상호의 교섭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였다. 이 교섭 관계가 깊어지자 그들 불교연구회의 간부들은 일본 정토종의 정상진현(井上眞玄)과 결탁하여 한국불교를 그 일본 정토종에 합병시킬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각처에서 심한 반발이 일어나자 그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여세를 타고 나타난 것이 원종(圓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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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불교연구회는 원종종무원으로 탈바꿈하고 등장하였던 것이다.11)
1908년 3월 6일 전국승려자대표 2인이 원흥사(元興寺)에 모여 총회를 열고 종명을 의립(議立)하여 원종(圓宗)이라 선포하고, 원종종무원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원종이란 원융무애(圓融無碍)를 뜻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대체로 선(禪)과 교(敎)를 원수(圓修)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12)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추대하여 종무를 집행게 한 이원종이 당시 한국불교계에 있었던 일종의 통일 기관이었음은 사실이다. 갑오경장 이래의 행정 기구의 개편 문물 제도의 큰 전환은 이들 승려 조직에도 새로운 자각을 촉구한 것이다.
불교계의 총합 운동은 이보다 앞서 정부에 의해서도 시행된 바 있었으니, 즉 조야 일각에서는 전국의 승려와 사찰을 방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호 보도함이 국정에 낫겠다는 의론이 일어나, 1899년 전국 사사 통일안을 발의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이를 한국의 수사찰로 하고 각도의 사찰을 관장케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 승정(僧政)의 제도와 흡사한 것으로서, 1902년에는 궁내부 소속으로 사사관리서를 두고, 이어서 전문 36조로 된 사사관리 현행 총칙을 칙령으로 발표토록 하여 전국 사찰을 통관하게 하였다. 이회광은 이러한 그간의 불교통합 기운을 적절히 활용하여 원종 종무원 산하에 8개의 부서를 두고, 행정력을 강력히 추진토록 하였다. 즉 그는 그의 밑에 총무·교무부장·학무부장·서무부장·인사부장·재무부장·고등강사 등의 간부를 선정하였다.13)
또한 당시의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 승려를 고문으로 삼았다.
1910년 원종종무원에서는 전국 승려들에게서 의무금을 걷어 서울 수송동에 각황사(覺皇寺)를 건립하고 이를 조선불교중앙회의소 겸 중앙 포교소로 운용하는 한편 기관지 ≪원종≫을 창간하였다.
동년 8월 한국이 일본에 합방되자 이회광은 좋은 기회라 여기고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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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광호(鄭珖鎬) ≪한국불교주요사건기≫ 법륜(法輪) 제1집
12) 이능화(李能和) ≪조선불교통사≫ (하) p. 937.
13) 이능화≪조선불교통사≫ (하) p.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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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탄책을 비밀리에 도모하였다. 10월 이회광은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과의 연합을 위해 원종의 종정 자격으로 도일하였다.
동경에 도착한 이회광은 조동종 관장 석천소동(石川素童)을 만나 협의하고 양종의 연합맹약에 합의한 후 조동종 종무대표자와14)다음과 같은 7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전문
1. 조선 전체의 원종사원중(圖宗寺院衆)은 조동종과 완전 또 영구히 연합 맹약하여 불교를 할장할 것.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을 위촉할 것.
-.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원종 종무원 설립 인가를 얻음에 알선의 노(勞)를 취할 것.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圖)할 것.
-.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으로부터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수사(各首寺)에 배치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을 위탁하고, 또한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하는 때는 조선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하는 곳의 수사(首寺) 또는 사원에 숙사를 정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에 종사케 할 것.
-. 본체맹(本締盟)은 쌍방의 의견이 불합하면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할 것.
-. 본체맹은 기관할처(其管轄處)의 승인을 얻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함.
명치 43년 10월 6일
조선원종대표자 이회광(李晦光) 인
조동종 종무대표자 홍진열삼(弘津說三) 인
일찌기 국내 교계와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단독으로 이러한 맹약을 체결하고 귀국한 이회광은 귀국하자 곧 식민일제로부터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얻기에 노력하는 한편 원종 산하의 모든 사찰이 대동 단결하여 조동종과의 맹약을 지지하도록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대사찰을 역방하면서 조동종과의 약조문은 보여 주지 않고, 다만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협력이라고 선전하였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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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능화≪조선불교사≫ (하) 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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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는 이를 찬성하였으며 종무원에서는 조동종과의 연합에 찬성하는 날인을 받았다.
그러나 원종 종무원 서기에 의하여 조약 전문이 누설되자15)승려들 사이에는 심한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합방이라고 하는 정치적 대세에 편승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연합시키려 한 것은 한일 합방과 같은 매불행위이며, 이회광 자신의 지위를 좀더 확고히 하려는 야심에서 나온 수작이라고 분개하였다.16)
사실 맹약 중에 불교 확장 운운을 내세운 것은 명목에 불과한 것이며, 전체의 성격은 한국불교의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두려는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불교는 원래 임제종·선풍(禪風)을 이어 받고 있었다. 따라서 승도들은 조동종과의 연합은 곧 개종역조(改宗易祖)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조동종과의 맹약 체결에 대한 반대 운동은 구국 의식과 함께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으로 전개 되었다.
1911년 정월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한용운·오성월(吳惺月) 등을 필두로 전라·경상 양도의 사찰이 맹약하여 임제종을 표방하고 맹렬한 반대 운동을 펴니 결국 이회광의 맹불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족의 호국 불교사에서 볼 때 이는 하나의 커다한 오점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애초부터 불교를 일본 식민 정책의 한 도구로 삼고자 한 일제는 다음 장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은 강경한 사찰령으로 한국불교를 탄압하는 한편 불교의 어용화(御用化)에 광분하였다. 즉 합방 직후부터 일제는 성스러운 불사 본존 앞에 일본천황 성수 만세의 패를 새워 매일 축찬(祝讚)을 드리도록 강요하는 한편 일본의 축제일을 법식일로 정하여 재를 열게 하여 승도들의 마음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였다. 또 사찰령의 시행은 한국 사찰 고래의 관습을 파괴하여 갔고, 승단 내부의 분열을 조장, 일본 불교의 한국 포교를 용이하게 하여 주었다. 예컨대 일본 불교의 제종파에서는 사찰령으로 주지와 신도간에 불화가 일어나고 있는 틈을 타서 한국의 사찰을 자종(自宗)의 말사(末寺)로 편입하려고 암약하며, 어떤 사찰에 있어서는 한국본산과 일본본산과 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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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교형≪이조불교≫ p.925.
16) 정광호≪한국불교주요사건기≫ 법륜 제1집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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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사 관계를 맺게 되는 기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불교중앙교무원으로 하여금 전국에 지시하여 3일간이나 일본 천황의 병이 회복하도록 하는 특별기도식을 거행토록 강요하였으며, 일본의 대륙 침략을 강행하여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을 때에는 승려를 지원병에 나서게 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적국 항복 기도 법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포교사 연성대회를 열고 국체명징(國體明徵)이니, 인고단련이니, 흥법보국이니 하는 취지를 내걸고 전국 사찰에서 승려들을 붙잡아다가 놓고 “석존이 6년 고행에 보리수 밑에서 무상 대도를 터득한 것처럼 용맹 정신을 가행하여 황민으로서의 진정신을 터득하라”고 식민정치의 어용화를 강요하였다.17)
물론 그와 같은 일제의 식민 정책에 대다수의 불도들은 내심으로 전면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민족의 불교사에서 이 때 만큼 불도들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를 겪었던 때는 없었다. 그러나 호국의 전통을 이어 받은 불도들의 애국심은 잔인한 일제라 하여도 어쩔 수 없었으니 이제부터 살펴보는 바와 같이 불교의 자주화 내지 구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전장에서 살펴본 호국의 원리를 바로 새김에 주저하지 않았다.
제2절 불교도의 자주자강운동
1. 임제종 운동의 전개
한말에서일제 침략하에 이르는 기간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대내 대외적으로 큰 변동이 있던 때였다. 국가가 그 위력을 잃어 감에 따라 사회는 점차 혼란하여 졌으나 반면 불교계에는 조선 5백 년의 억불 정책의 사슬이 풀어지게 되는 때였다. 또 서구의 기독교가 민족 운동을 도우면서 그 세력이 확장되어 수백 년 이상이나 뿌리를 박고 있던 불교를 앞지르고 민중과 지식층을 파고 든 상황도 당시로서는 빼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이와 아울러 동학 및 각종의 신흥 종교가 일어나 구세도중(救世度衆)을 부르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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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득황(金得榥) ≪한국종교사≫ (한국사상연구소) 1973.3)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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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또한 한국 침략을 획책한 일제는 그 사상적 침투를 위한 어용 도구로 불교를 교묘히 악용하여 앞서 서술한 바 이회광의 매불 운동 매변불교(買辨佛敎)의 책동 등을 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명 무명의 선각자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 는 자주 운동, 나아가 구국 운동을 펼쳤으니 근대 불교사에서 자주 운동의 시초는 임제종 운동임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제종 운동은 이회광의 매불 운동인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의 통합 계획에 반대하여 분연히 궐기한 운동이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의 정통은 임제종이었기 때문이다.
1911년 정월 박한영·한용운·진진응 등은 이 운동의 선두에 서서 전라·경상 양도의 사찰을 이끌고 맹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18)
즉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어 임제종 임제종 무원을 설립하고 초대 관장(管長)으로 김경운(金擎雲)을 추대하였다. 이 때 백용성(白龍城)은 조선불교의 정종은 임제종이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종지수호에 힘썼다.
종지 수호 운동 즉 불교의 자주화운동은 한용운이 임제종 무원 관장 대리역을 맡으면서 보다 적극화되었으니 한용운은 송광사·쌍계사·범어사 등으로 종무원을 옮기며 광주(光州)·부산·대구·서울 등지에 임제종 포교소를 설치하고 임제종지를 선양하는 등 북쪽의 원종(圖宗)과 대치하였다.19)일본 조동종을 배경으로 한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은 이렇게 양립하여 종론이 엇갈린 가운데 서로 한국불교의 종권을 견지하려고 문필 언론으로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분류에도 조선 통독부에서는 아무런 간섭 없이 방관만 할 뿐 오히려 분열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어 이들의 싸움은 헛된 일이 되었으며, 원종과 임제종은 모두 그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임제종 운동이 성공한 것이었으니 이회광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일본불교로부터 종지를 수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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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유병덕(柳炳德) 전계 논문 p.1164.
19) 이능화[불교통사] (하) pp.935~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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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종지 수호와 관련하여 한국불교가 극복하여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불교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는 한국 통치를 위한 어용 도구로 불교를 교묘히 이용하여 탄압 간섭을 마구 자행하였다. 이에 대해 한용운 등의 선각자는 정교를 분립하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일제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촉구하였다.20)
한국불교의 종지를 수호하고 정교분립의 자주화를 지켜 나가는 문제는 사찰령의 반포로 인해 일단 성공은 하였으나 일제에 의한 간섭은 사찰령으로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2. 사찰령과 그 철폐 운동
한말에 불교가 5백 년만에 억압정책에서 해방되어 승직이 합법적으로 자유로운 포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기는 하였으나, 일본 승직자들을 앞세워 한국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제는 마침내 1910년 강압으로써 한일합병조약을 체결, 한국민은 그의 무단 통치하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일제에 의하여 도성내에 각황사(覺皇寺)를 지어 왕도(王都)에서 범종을 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조국을 일본에 넘겨 주게 되어 법렬(法悅)보다도 망국의 슬픔이 앞섰다.
경술국치 다음해 조선총독부는 불교의 보호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제령 제7호로 사찰령을 공포하였다. 이 영은 전국의 모든 사찰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전문 6조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각 사찰이 병합·폐지·이전 또는 명칭의 변경시는 총독의 허가를 얻을 것, 사찰의 포교활동외 사용시는 지방장관의 허가를 얻을 것, 각 본사는 사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을 것, 각 사찰에 주지를 두어 토지·삼림·건물·불상·석불·고문서 등의 귀중품을 관리하되 그 처분은 총독의 인가를 얻을 것, 그리고 이영을 위반하는 자는 2년이하의 징역 또는 5백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한다는 것 등이 주요 골자로 되어 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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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교≫지 1931년 9월 87호
21)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6월 3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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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찰령과 동시에 전문 8조로 된 사찰령 시행 규칙이 제정되어 그해 9월 10일부터 본령은 시행되었다. 사찰령시행 규칙서는 30본산제를 규정하고 있으며, 그 30본산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며, 각 말사를 통어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30본산제의 실시를 이유로 하여 한국의 전 사찰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해 11월부터 각 본산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받았다.
일제의 불교 탄압의 도구로써 시행된 이 30본산제는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일본인들의 충동에 의해 마련되었던 국내 사찰 현행 세칙의 대범산 중범산 13개소를 확충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22)
당시 30본산으로 지정된 사찰은 다음과 같다.
수원의 용주사(龍珠寺)
함천의 해인사(海印寺)
강화의 전등사(傳燈寺)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양주의 봉선사(奉先寺)
동래의 범어사(梵魚寺)
광주(廣州)의 봉은사(奉恩寺)
달성의 동화사(桐華寺)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영천의 은해사(銀海寺)
보은의 법주사(法住寺)
외성의 고운사(孤雲寺)
해남의 대흥사(大興寺)
문경의 금룡사(金龍寺)
전주의 위봉사(威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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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광무(光武) 3年에 논의된 전국사원(全國寺院) 통일안(統一案)은 서울의 원흥사(元興寺)를 총본산(總本山)으로 하며 도섭리(都攝理) 1인 내산섭리(內山攝理) 1인을 두고, 13도에 도사(道寺)를 두어 도내사찰(道內寺刹)을 통괄토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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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지림사(紙林寺)
금산의 보석사(寶石寺)
간성의 건봉사(乾鳳寺)
간성의 유점사(楡岾寺)
평원의 법흥사(法興寺)
평창의 월정사(月精寺)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신천와 패엽사(見葉寺)
안변의 석왕사(釋王寺)
황주의 성불사(成佛寺)
함흥의 귀주사(歸州寺)
평양의 영명사(永明寺)
이것은 1902년에 지정한 전국 13개소의 대법산 중법산제에 비하여 배로 늘인 것인데 단일종인 한국에서 무엇을 표준으로 하여 본산을 지정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는 이와 같이 전국, 1백 3십여의 사찰을 30본산으로 구분하여 지휘 감독하였던 것이다.
30본산은 후일 1924년 사찰령시행 규칙이 개정되어 구례의 화엄사가 본산으로 승격됨으로써 31본산으로 되었다.
이와 같은 사찰령의 시행은 그것이 곧 한국인에 대한 종교탄압정책의 하나임으로 대다수의 승려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니 예컨대 후술하는 바와 같은 사찰령 철폐운동은 바로 그러한 예증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럴수록 불도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으니 1911딘 9월에는 조선 승려의 법류범위(法類範圍)를 밝히고, 이어서 1912년 3월에는 조선승려 법계품승려 법계품승례(法階稟承例)를 공포하였다. 또한 이해에 전국 30본산 주지회의를 소집하여 사찰령에 따른 사법(寺法) 제정에 대하여 논의하도록 하였다.23)
이에 동년 7월 전일의 매불논자이며 해인사주지였던 이회광이 최초로 사법의 승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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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삼보학회(三寶學會) ≪편한국불교최근백년사≫ 제4회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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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었다.
그러나 이 사법은 일본 승정의 예를 참작하여 식민통치에 맞도록 총독부 관리가 초안한 것으로 형식상 각 본산이 만든 것처럼 꾸미고 있다. 1913년 전반까지 차례로 승인된 각 본산법은 모두 균일하게 전문 13장 100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사격(寺格)·주지·직사(職司)·회계·재산(財産)·법식(布敎)·승규(僧規)·포교·포상·징계·섭중(攝衆)·잡칙(雜則)등에 대한 규제가 수록되어 있다. 사법의 제정으로 법계(法階)와 수학에 관한 것도 규정되었으니 대체로 속인 자제는 4년 수료의 보통과를 수료하여야만 승려가 되며, 4년의 보통과를 수료한 승려는 2년 과정의 사미과(沙彌科)에, 입학하여 학교의 기초학을 배우고, 그 다음에는 3년 과정의 사집과(四集料)에 진학하고, 그 다음에는 4년 과정의 사교과(四敎科)에 진학하여 주요 내경(內經)을 수학하고, 그 다음에는 수업년한 3년의 대교과(大敎科)에 입학하여 승려로서는 최후의 수업을 마치게 되어 있는데, 승려의 교육을 모두 이수(履修)하려면 15년이 걸린다. 법계(法階)에 있어서도 비구계(比丘戒)·보살계(菩薩戒)를 받고 사교과 이상을 수료한 자로서 매년 본산에서 시험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의 법계(法階)를 받고, 그 다음에는 중덕(中德)·대덕(大德) 또는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대교사 등으로 수진하게 되어 있다.
또한 동년 6월 본산주지희의에선 조선선교 양종 각 본산 주지회의원을 구성하고 원규(院規)를 정했는데24)이것은 이회광이 일본에 가서 조동종과 결탁한 원종(圖宗)과 이에 반대한 호남지방의 임제종을 통합함은 물론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내의 모든 불교 종파에 대하여 사찰회를 적용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규가 인가되고, 1915년에는 선교 양종의 포교와 강학을 연합으로 행하기 위한 조선선교양종연합회규가 인가되었다.
동년 7월에는 지방학 림의 학칙이 승인되었는데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있다. 30본산은 각기의 학림뿐만 아니라 중앙에 중앙학림을 세워 후일 3·1운동시 큰 활동을 한 인재들을 키웠으니 이 중앙학림은 바로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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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교월보≫ 6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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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의 보호육성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같이 위세를 펴던 일제는 1915년에는 또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기타의 종교에 대해서도 통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전문 19조로 된 이 포교 규칙은 포교사의 신분과 신원변경사항을 총독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포교활동은 총독에게 신고하여 인가를 얻을 것, 총독은 포교의 방법·포교관리자의 권한 및 감독방법 또는 포교의 관계자가 부적당할시 변경을 명할 수 있으며, 매년 연말에 포교자 및 각 포교당별 교세 현황을 보고할 것, 포교사의 거주이전과 종교건물 건축의 허가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동년 10월부터 시행된 포교 규칙은 한국내의 모든 종교활동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하고, 또한 사전 허가를 얻도록 한 노골적인 종교 탄압상을 보이는 등 무단 정치의 극치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종교 탄압은 날이 갈수록 가일층 강화되어 1929년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승려대회에서는 종헌(宗憲) 교무원규 등 기타 법규가 제정되고, 이듬해인 1930년에 따라 교육법 승려법, 승적법, 포교법 등이 제정 공포되었다. 즉 일제는 선교 양종 본산 주지회의의 결의로 모든 사찰을 사찰령의 범위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주지의 권한을 통제 감독하고, 포교규칙으로 모든 종교 활동을 규제하여 발전과 보호를 표방하면서 내면 적으로는 발전에 커다란 저해를 주어 일본 불교화를 확책하였던 것이다.25)
그러나 그와 같은 일제의 강화된 종교탄압은 종래 다분히 부동적 무비판적이었던 한국승단으로 하여금 점차 민족 의식 자주 의식을 각성케 했으니, 전술한 임제종 운동 그리고 3·1 운동을 전후한 민족운동은 그 대표적인 예증이다. 이제 살펴보려는 사찰령 철폐 운동도 그러한 민족 의식 자주 의식을 강력하게 대변한 것의 하나였다. 이러한 운동은 주로 계행(戒行)의 맑고 지조가 엄정하던 수행승(修行僧) 내지 청년 학승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더구나 일제를 대상으로 하는 직접적인 투쟁에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인들은 불교인으로서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게 되니 불교청년회 내지 불교유신회 등의 사찰령 폐지 운동이 그것이요, 1929년 종헌제정이 또한 그것이었다.
일제는 사찰령을 실시하여 승단을 체계화한다는 명목에서 30본산을 정하고26), 본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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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유병덕의 앞의 논문 p. 1168.
26) 1911년 7월 8일 제청된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에는 30본산의 주지 후임은 반드시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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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를 일괄적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관권으로 임면되는 주지인 까닭에 그의 안중에는 오직 총독부라는 상전이 보일뿐이있다. 그리하여 전국 30개 사찰은 각각 30개 지역으로 분열된 채 총독과의 구심적 관련성이 강인하였다. 여기에 자연 주지들의 속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왕왕 친일적 승려들이 속출하였다.27)
이렇게 되니 뜻 있는 학인 학사 선장(禪匠) 등의 구도승들은 차례차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본말 전도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승단내에서 점차로 비판의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주지 만능의 사찰령을 고쳐 보려는 여론은 이미 1920년대부터 표면화되는데 그것이 구체화된 형태가 곧 1920년 6월 20일 서울의 각황사에서 조직된 조선불교청년회였다.8)
이것은 경술 직후 한용운 등이 임제종 운동을 일으킨 이래 두 번째로 나타난 한국승려들의 조직적인 청년운동 단체이다.
청년회는 곧 활동을 개시 1920년 12월 15 일지방위원과 간부들이 모여 유신협의회를 개최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에 다음과 같은 8개조항의 건의안을 냈다.
(1) 관사를 공의에 부칠 것.
(2) 연합제규를 수정할 것.
(3) 사찰재정을 통일할 것.
(4) 교육제도를 혁신할 것,
(5) 포교방법을 개신할 것.
(6) 의식을 개신할 것.
(7) 경성에 홍교원(弘敎院)을 세울 것.
(8) 인쇄소를 만들 것.29)
얼핏 보아 지극히 당연한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나 일제에 의해 승단이 재조직 된 이래 10년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혁신 건의문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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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정광호 전계 석사 학위논문 p.76.
28) 1920년 6설 22일 ≪동아일보≫
29) ≪동아일보≫ 1921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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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에게 이것이 받아 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12월 20일 조선불교유신회가 다시 조직되어 보다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추구하였다.
이제부터는 30본산주지들 뿐만 아니라, 총독부 당국을 상대로 직접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즉 1922년 1월 5일부터 1주일 동안 2백여 명의 대표가 모여 정교 분립을 결의하고 동시에 277명의 연서를 받아 건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건의서에는 ‘자제적 사원제도는 총림청관(叢林淸觀)의 특색’이라는 전제하에 “하루 속히 사찰령을 폐지하여 불교 자체의 통제에 일임하라”는 내용의 서문을 싣고 있는데 계속하여 사찰령 시행 이후 승단내에서 발생된 여러가지 혼란과 불합리한 면을 지적하고 있다. 이 운동은 1년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러한 중에 주지 일파의 방해 공작과 또한 이 같은 종교계 분열을 오히려 기대하고 있었던 일제의 미온적 태도로 성공을 보지 못 하였다.
여기서 본산 주지들에 대한 청년 승려들의 불평은 더욱 높아지기만 했다. 불평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1922년 봄 각황사에서 열린 주지 성토 대회와 종로에서의 ‘명고축출(嗚鼓逐出)’ 사건이다. 특히 명고축출 사건이란 기상천외(奇想天外) 사건으로, 김상호(金尙昊)·강신창(美信昌) 등 1백여 명 청년 승려들이 대표적인 관권 주지 강대련(姜大蓮)을 종로 네거리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준 사건이다.30)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유신회의 활동은 총독부 당국과 관권 주지들의 압력으로 크게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은 이 혁신 운동의 의도를 착잡하였음인지 1927년 주지전횡으로 퇴색해 버렸던 산중 공외 제도를 다시금 부활시켰다. 근본적인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 하였지만 혁신 운동은 여기서일단의 성과를 본 셈이다.
그 후에도 사찰령을 개정 철폐하여 자주적인 승단을 조직해 보려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아 1929년 통일 교정의 헌장이라 할 종헌이 제정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제 침략의 식민지 조건하에 있는한 철저한 사찰령의 철폐 운동은 달성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사찰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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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922년 3월 27일≪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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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에 묶인 일제하의 한국 승단은 자율적이며 정상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불교유신운동
조선5백년간 산중 불교로서 은둔과 도피적인 경향만을 견지해 온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한국불교이지만 거기에는 삼국과 고려를 풍미했던 호국 정신과 민중성이 면면히 내재하여 계승되어 왔다.
따라서 경술국치를 전후한 민족의 수난기를 당하자 불교계는 어느 종단에 못지 않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함은 전술한 바이다.
이때에 한국불교가 당면한 과제는 일제의 침략 속에서 일제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 불교의 침투에 대해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정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급변하는 사회 정세 및 세계 조류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문제이다. 이러한 시기에 호응하듯 불교계에는 종지를 수호하고 시대와 사회에 적응하고자 노력한 유신의 거성들이 출현하였으니, 백용성(白龍城)·박한영(朴漢永)·한용운 등이 특히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러함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는 것을 불교유신의 첫과제로 삼았다. 유신에 있어서 불교의 근본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도나 운영 방법의 개선을 불필요하다고 본 것은 아니며, 전자를 강조했을 뿐이었다. 박한영은 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선종 일색의 불교 양상보다는 선교 융합의 주체성에 바탕하는 한편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서구 문물이 내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모습을 제시하려 하였다. 한용운은 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였다. 낡은 질서의 바탕 위에 세워진 한국불교를 철저히 유신하여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의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의 불교를 확립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선교를 겸한 원융(圓融)한 불교를 지향하고 있었던 만큼 박한영과는 그 입장에 공통성이 많으나 보다 근본적이고 광범한 개혁을 주장한 점이 특색이다. 이제 이들 3인을 중심하여 불교유신운동의 본체를 알아 보며 한국승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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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운동을 밝혀 보기로 한다.
4. 백용성(白龍城)과 대각교(大覺敎)
백용성은 불교유신의 방법은 제도나 운명면의 개선에도 있다고 보았지만 그보다도 불교 본연의 독자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서울에 오래 주재하였는데 당시의 여러 종교 특히 기독교의 발전을 보고 “외도교당은 종성이 쟁쟁연여림(錚錚然如林)하되 오도(吾道)는 적막 무인하니 이 누구의 허물이냐(是誰之過耶)”31)라고 탄식하며 불교가 일반 대중에게 호소력이 적음을 절감하였다.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고,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교의로서 그는 각(覺)에 착안하였으며, 또 각의 교의는 그가 오도(吾道)한 내용이기도 하였으므로 그는 드디어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수심론(修心論) 대각교지취(大覺敎旨趣)에서 진귀조사(眞歸祖師)설과 삼처전심설(三處傳心說)을 말한 후 대각 세존의 뜻이 삼처 전심에 있다고 보아 ‘대각교’를 창립했음을 밝히고 있다.32)
백용성이 이렇게 대각교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교의 면목을 새롭게 하려 함에 이에 호응한 불도의 수도 상당수에 이르렀으며, 또 그 자체로서도 각이라는 불교적 주체성을 다시 확인해 준 의의, 자못 컷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대각교라는 교명으로서 불교의 독자적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하는 한편 그는 당시의 신흥종교로 서의 기독교로와 전통 종교였던 유(儒)·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로(儒老)와 불의 차이에 대해 10종으로 구분하였다.33)
①은 시와 무시로 유(儒)·도(道)가는 태초 원시가 있음을 인정하나 불가는 무시의 인연을 말한다는 것이며,
②는 기(氣)와 비기(非氣)로 불가는 심에 위본(爲本)하나 유와 도라는 기(氣)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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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부록(附錄) p.24 만일참선결사회 창립기(萬日參禪結祉曾創立記)
32) 백용성(白龍城)의 수심론(修心論) p.29.
33) 백용성 ‘기원정종(歸源正宗)’ 불유동이난(佛儒同異難)조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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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신(爲神)한다는 것이며,
③은 3세(世)와 무삼세(無三世)이니 유·도는 일생으로 끝난다고 보나 불교는 삼세(三世)를 말하며,
④는 습(習)과 비습(非習)이니 불은 선악이 업(業)에 기인한다고 보나 유도(儒道)는 이를 말하지 않으며,
⑤는 품연(禀緣)과 품기(禀氣)이니 불은 만상(萬像)이 연생(緣生)이라 하고 유도(儒 道)는 품기에 있다고 보며,
⑥은 내(內)와 비내(非內)이니 불은 천치만물이 내식(內識)으로 변생(變生)한다하고 유와 도는 모두 하늘에서 나왔다고 하며,
⑦은연(緣)과 비연(非緣)이니 불은 모든 부허변멸(浮虛變滅)이 연(緣)에 의한다고 보는데 유와 도는 자연이라고 보며,
⑧은 천(天)과 비천(非天)이니 유와 도는 천(天)에서 안심(安心)을 구하나, 불은 수도(修道)하여 고(苦)를 멸하며,
⑨는 염(染)과 비염(非染)이니 이것은 노가(老家)와 불가(佛家)의 차이인바 노가는 불구이자득(不求而自得)하며 불위이자성(不爲而自成)을 가르치고, 불가는 이욕자(離慾者)는 필기(必起)하고 불이욕자(不離慾者)는 필회(必悔)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⑩은 귀(歸)와 이귀(異歸)이니 불가는 수도(修道)하여 열반(湼槃)으로 돌아감을 말하는데, 노가(老家)는 생사를 천도(天道)로 알고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와 노가의 미급(未及)함을 비판하는 한편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지도재자기심성(不知道在自己心性)하고 천당지옥의 화복지 망설로 무민이감세(誣民而感世)한다.34)고 보았다. 그리고 창조천지만물장(創造天地萬物章)에서는 신이 만물을 창조 했다는 것과 현실적 부조리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그는 불교유신의 방법에 대해서는 먼저
“세계사조가 년년월월히 변하고 반종교운동이 시시각각 돌진하고 있다. 오인이 이때를 당하여 교정(敎政)을 급속도로 개신치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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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백용성의 앞의 책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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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급변한 역사적 상황에 처해 교정(敎政) 개혁의 필연성은 전제한 다음, 그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첫째 선율(禪律)을 겸행할 것, 둘째는 승려 자신이 영농할 것을 말하였다. 선율의 겸행에 있어서는 ‘만일 참선결사회 창립기(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에서 “아불(我佛)의 이계위사지촉(以戒爲師之囑)하고 선율을 병운이립규(並運而立規)가 기엄(其嚴)하니 오후불식(午後不養)과 장시묵언(長時默言)과 동구불출(洞口不出)이 강규신조중난관(講規新造中難關)이요.”35)라고 하여 계율의 엄정한 실천이 어려웠던 사실까지 언급할 정도로 중시하였다.
한편 선농일치(禪農一致)에 대해서는 황벽(黃蘖)·임제(臨齊)·유산(潙山)·서산(西山) 등이 친히 경작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약포건설(藥圃建說) 또는 과농(果農)에 전념할 것을 제시한다. 실제로 중국에 갔을 때 길림성에서 경작지를 매수하여 과농에 종사한 적이 있으며, 또 경남 함양의 백운산(白雲山)을 30여 정보 점유하여 감·밤 등 1만여 주를 재배하기도 하였다.36)
그는 또 사원이 산간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선종 본사만 산간에 긴조할 것이며, 각 포교당은 도시에 설치하여 대중의 공익을 위해야 한다는 선각적 견해도 가지 고 있었다.
5. 박한영의 유신사상
박한영은 불교의 대대적인 면과 대외적인 면의 허다한 유신의 과제에 앞서 그 유신 의 근본 문제를 먼저 불교인의 정신적 자각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자체를 비판의 눈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불교강사와 정문금침(頂門金針)’37)이라는 논설에서 불교인 자체의 정신적 타락을 공고(貢高)·나산(懶敢)·위아(爲我)·간인(慳忍)·장졸(藏拙)의 5면으로 분석하고 그 대책으로써 허심박학(虛心溥學) 용맹정진(精進) 망아리생(忘我利生)·희사원동(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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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용성 선사 어록 부록 p.24.
36) 앞의 책 권하 p.39.
37) ≪조선불교월보≫ 9호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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捨圓通)·호문광익(好問廣益)을 내새웠다. 나아가 이러한 자각의 실현자를 양성함에 있어 그는 불교 청년의 교육을 중시하였다. 실제 그는 서울에 40여 년간 주재하면서 중앙학림·불교전문학교·대원암(大圓庵) 강원(講院)에서 불교의 주체적인 교육과 신문명의 교육을 겸해서 교육해 왔던 것이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는 “단우유어이해(但優游於理海)하며 불매어사체(不昧事諦)하여 절충기고금(折衷其古今)하고 유기응용당세(惟其應用當世)하며 구도고해저(救度苦海底) 편언척사(片言隻詞)는 허심채청지풍기일변(虛心采聽之團紀一變)”이라하여38)도덕적인 전통과 신사상의 내용을 잘 조화해서 그 시 대에 맞게 이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주체성을 바탕으로 과감한 유신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미래 지향적인 불교관을 엿볼 수 있다.
6. 만해(萬海)의 불교유신론과 그 실제
산중의 불교를 도시로 끌어 내어 대중화하고 아울러 쇠망하는 국운을 만회하여 민주 사회를 실현하려던 큰 지도자 만해 한용운은 일찌기 박한영과 함께 이회광의 매불 운동에 반대하여 임제종운동을 펴더니, 35세 때 ≪조선불유신론≫을 저술 철저한 불교유신을 제창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사회가 문명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여 학술 정치 종교가 모두 적극적으로 유신하고 있는데 오직 한국불교만 유신할 기미가 없음을 통탄한다. 그리고 불교를 유신함에 있어서는 먼저 불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찰해서 불교의 본질 적 우위성을 파악하고 그 본질에 어긋난 점을 유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9)
먼저 종교적인 성질로 보면 불교는 신앙이라는 면에서 모든 인간에게 최대의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의 천당과 유태교의 봉신(奉神)과 회회교의 영생의 희망을 주는 사상이긴 하나 불교의 “이오위칙(以悟爲則)”과 “영중생(令衆生)으로 입불지혜해(入佛智惠海)에서 나타난 정각 정지설(正覺正智說)이 종교의 극치라는 것이다.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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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박한영(朴漢永) “신어신문(新語新文)은 호불채청(胡不采聽)” ≪조선불교월보≫ 15호 p.5.
39) ≪한용운전집(韓龍雲全集)≫ 권2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불교지특질(佛敎之特質)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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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천국과 지옥이 마음 속에서 건립되었다고 보는 지신(智信)의 종교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아(眞我)를 발견하는 종교라는 면에서 인간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불교의 철학적 본질을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을 설명하며 진여는 진아(眞我) 로서 자유를 뜻하고, 무명은 현상아(現象我)로서 무자유성(無自由性)을 뜻하는 것인데 이 무명을 극복하고 진아를 설명하는 불교야말로 철학적 종교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불교의 종교적인 성질은 지신(智信)과 철학적 성질인 진아를 근본으로 해서 그 본의에 어긋나는 점을 유신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파괴를 유신의 모(母)라고 볼 정도로 대개혁을 주장한 그는 당시의 불교가 병맥이 근원적으로 깊어졌음을 느끼고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실제 저술 활동을 통하여 혁론을 고조한 외에 3·1 운동 거사 추진에 주동적 역할을 했고, 53새 때에는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 혁신 사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호국 불교 대중 불교로 불교를 개조하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백용성·박한영·한용운을 중심으로 전환기의 어려운 시기에서 고심하던 불교유신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종합해 볼 때 당시의 선각적 불교인들은 한결같이 유신의 주체적 방법으로 우선 불교인 자체의 정신적 자각을 촉구하였다.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한 후에는 교정(敎政)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니, 교단의 통재력 확립 경제 자립 포교 방법의 시대화가 대표적인 과제로 등장되었다.
요컨대 불교유실에 있어서는 불교의 고도한 주체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하겠다.40)
불교유신운동은 상술한 선각자들의 개인적 활동과 아울러 조직적 활동도 눈부신 바 있었으니, 1920년 6월에 각황사에서 조직된 조선 불교청년회의 승단혁신운동, 1921년 12월에 구성된 조선불교위원회의 활동 특히 1922년 봄에 각황사에서 열린 관군반대성토대회와 동년 3월 19일의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 등은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유신운동 다시 말하면 주체적 자주운동은 성공하였다기보다는 선각자적 방향제시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한 구체적인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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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한중만(韓鍾萬) ≪불교유신사상≫ p.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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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실질적 결실을 보기에는 불교 자체에 너무나 전통의 뿌리가 깊었던 것이며, 또한 적극적으로 실행하기에는 불교인들의 자각이 아직 부족하였다.
사찰의 위치나 교단의 통제 경계·자립 문제 등의 예를 보더라도 불교의 시대화 대중화에는 아직도 많은 관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각적 지혜나 유신에의 열성은 불교의 미래에 훌륭한 문제의 시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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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민족운동과 불교
제1절 3·1운동과 불교
경술국치 이후의 임제종 운동은 일제 통치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는 아니었으나 침략의 선봉인 일본 불교와의 야합을 끝까지 거부하려던 항일투쟁이었다. 이 정신은 그대로 1919년에 계승되어 민족운동에 있어서 자못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에 있어서 불교계를 영도하던 총수는 일반이 아는대로 만해 한용운이었다. 한용운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독립사상가로서 하나의 커다란 산맥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은 문화 정치,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일제와의 비타협적 투쟁이며, 이 투쟁은 민족 독립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실천과정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기초는 자연히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와 평등에외 종교적 신념이며 따라서 그는 지극히 이상주의자였다.1)
그는 이와같이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사회 발전을 가로 막는 일체의 정신적 제도적 장애의 타파를 위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현실에 지극히 충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다시 말하면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속에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굳건하게 통일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진 고독과 억압 속에서도 굳건히 싸울 수 있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물흐르듯 적응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를 보다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와 활동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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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병직(安秉直)의 ‘한용운(韓龍雲)’(≪인물로본한국사≫ 197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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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해(萬海)의 사상적 배경
만해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주군에서 위전(衛前) 한용준(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시대는 조선 왕조의 관료적 봉건 제도가 그 체제의 이상인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천을 추구하던 시기의 활력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집권층인 관료 귀족들의 부패와 타락 및 체제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노쇠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왕조 정권은 한편에서 성장하던 18세기를 전후한 실학파 지식인들의 진보적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다른 한편 홍경래(洪景來)난에서 시작된 여러 차례의 민중봉기로 더욱 허약해진 상태에서 강력한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의 물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해가 출생하기 3년 전의 강화도 조약은 세계사적 규모의 세세동점(世勢東漸) 과정에 있어서 바로 그 서양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한 봉건적 후진 왕국의 굴복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얼빠진 봉건 숭배자들은 밀려드는 외세의 어느 한 가닥을 붙잡고 그것에 의지하여 민중의 항거를 억느르는 동시에 개인적 안전과 영달의 계속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난 만해는 6살 때 고향의 서당에 들어가 당시의 학문 인 한학을 배웠다. ≪소학≫·≪통감≫에서 시작하여 18세까지 소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배웠고 한편으로 틈틈이 ≪서상기≫·≪삼국지≫ 등의 희곡 소설 등에 취미를 붙였다. 이와같이 어려서부터 공부할 수 있을 만큼 가세는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으나 신분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문은 줄곧 양반의 압박을 받아왔으므로 기존 지배 질서에 대한 반발심이 강하게 작동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염원한 그의 가문은 급기야는 1894년 동학운동에 참가하여 남포와 홍주를 점거하였으나 끝내 일가몰락이라는 비운에 처하게 되었다.
만해 역시 나이가 18세 되던 1899년 전국에서 맹렬히 전개된 의병운동의 대열에 서습없이 뛰어 들어 봉건적 압제와 외세의 침투에 분연히 항거하였다. 이때의 외병의 봉 기는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미 1895년 겨울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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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에서는 1896년 2월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관하 13군의 의병을 모집하여2)홍주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김 복한의 의병 봉기에 참가하여 부패 관리와 대외 침략 세력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던 만해는 그후 전세가 역전되어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에 의해 의병의 주모자 김복한·안병찬(安炳瓚) 등이 체포되자 몸을 피해 설악산으로 은신하였다. 그리하여 그곳 오세암(五歲庵)에 정주하게 되자 불교 서적을 탐독 불교의 뜻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영환지략(瀛環地略)을 입수 우리 나라 외에도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근대적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국운이 급격히 기울어져가고, 이에 만해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고자 당시 만주·시베리아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애국지사들과 제휴하고자 시베리아를 헤매기도 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곧 귀국하여 그 길로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들어가 불승이 되었다. 이때가 1905년 1월 26일로 그곳의 연곡(連谷)스님으로부터 봉원(奉琓)이란 계명을 받았다.
그는 후에 건봉사(乾鳳寺)의 만화선사(萬化禪師)로부터 법을 이어 받아 법명을 용운(龍雲), 법호(法號)를 만해라 하였다. 그의 아명은 유천(裕天)이요, 자는 정옥(貞玉)으로써 호적에는 한 정옥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3)
출가한 그는 더욱 열심히 불전을 섭렵하여 불교 사상의 토대를 굳혀갔다.
그후 자리를 옮겨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에 몰두하였다. 이때 그는 여기서 박한영과 사귀었다. 그들은 도를 논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때로는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열띤 목소리로 개탄도 하였다.
만해가 30세경인 1908년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가 있었다. 동경과 경도를 둘러보는 동안 근대화 일로에 있는 일본의 문물에 충격을 받은 바 적지않았다. 일본 각지를 순래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한 그는 무엇보다도 불교의 근대화 내지 대중화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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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4권 p.40.
3) 염무웅(廉武雄)의, 만해 한용운론’ ≪창작과 비평≫ 26호 1972. p.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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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을 가지게 되었다. 외유중에 화천(和淺) 교수를 만나 그와 한시를 지을 기회도 있었지만 유학생 최린(崔麟)을 만난 것은 보다 커다란 수확이었다. 이는 후일 최린과 함께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귀국 이듬해 1909년 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당시 침제한 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불교유신운동의 선두에 나서서 구태의연한 한국불교의 비시대적 비사회적 풍토를 혁신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았다. 조선 불교유신론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한국불교계에 던진 폭탄이었으며, 불교근대화의 대헌장이었다.
그러나 이때 국운은 끝나가고 있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해 버린 것이다. 망국의 울분을 참을 길 없어 그는 곧 만주로 망명의 길을 내딛었다.
이때 만주 지방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항일 태세를 굳건히 하고 있었으니 이시영·김동삼·이동녕·윤세용(尹世茸)·박은식 등 수많은 혁명투사들이 그들 나름의 광복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만주로 건너온 만해도 그들과 손을 잡고 먼저 광복을 위한 사업으로 회인현(懷仁縣) 소야하(小也河)에 독립투사 양성기관을 세우고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만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민족 독립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그후 독립운동이 여의치 못하자 귀국하여 불교 정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미 전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박한영·진진응(陣縝應) 등과 함께 이 희광의 매불 운동을 준열히 비판, 임제종 운동을 펴서 한국 승려의 주체 사상을 고취한 것은 한국 근대 불교사로 볼 때 뛰어난 업적이었다.
1913년에는 통도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여 이를 간추려 대중 불교의 성전으로 ≪불교 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 발간하고 불교 정신의 보급에 힘썼다. 한편 1918년에는 그의 계동 자택에서 월간지 ≪유심(維心)≫을 발간 신문화 사업과 자신의 문학 창작에도 온갖 정열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거족적인 3·1운동의 그 주동적 역할을 맡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되어 활약하여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의 모습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이상이 1919년까지의 그의 약력이지란 우리는 여기서 그와 그의 가문이 자유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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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애국주의에 공명하게 되는 가족적 및 시대적 배경을 보게 된다.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계기는 그의 독서일 것이다. 그의 학문은 한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거니와 그가 신봉하고 있던 불교가 그의 사상을 토대를 이루고 있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봉건적 윤리 도덕을 극복하고 퇴폐화한 불교사상을 현대적 사상의 토대 위에 재건하는 데에는 그가 접촉한 근대사상의 역할이 컸음을 주목한다. 그는 일찌기 설악산에서 ‘영환지략(瀛環地略)’을 잃고 세계 사정에 눈을 떴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만해는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사상, 특히 칸트와 베이컨의 자유론과 인식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910년대의 후반기에는 러시아 혁명·독일 혁명 그리고 월슨의 민족자결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1930년대의 그의 글 속에 사회주의의 이론에 관한 이해가 정확함에서 알 수 있다. 그 밖에 그는 1910년대에 이미 노동가치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판되고 있는 정치·경제 및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서양 이론에도 널리 접촉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4)
끝으로 우리나라의 사회 사정이 그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민족 자본이 아주 취약하여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힘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대지주 및 대자본가는 일제에 협조하고 있었던 반면 노동계급의 성장과 농민의 궁핍화는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1926년 연초에 발표 되었던 ‘조선 사회운동 개관’5)에서는 조선에 있어서 민족자본은 심히 취약하고 노동계급의 성장과 농민의 궁핍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급속히 발전하고 사회주의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3·1운동 이후의 정세를 말하는 것이지만 3·1운동 이전에 있어서도 노동 조합이 조성되고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6)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독립의 역량으로서 대중운동에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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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병직 ‘만해 한용운의 독립사상’ ≪창작과비평≫ 19호 1970, p.765.
5) ≪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 11자.
6) 김윤환(金潤煥)의 ‘일제하 한국 노동운동의 전개과정’ (≪일제하의경제침략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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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반봉건·반식민지 투쟁을 굳세게 실천하였으며,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수립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2. 3·1운동의 주동
혁신적인 이론을 내세워 대중 불교의 실현을 위해 설중매(雪中梅)의 매운 향훈(香薰)을 아낌없이 떨치고 있던 만해는 또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호국 불교의 이념 아래 구국의 수호신답게 끈질기게 일제에 도전하였다.
서울 계동의 그의 집은 신문학운동의 산실임과 동시에 운동의 비밀 아지트로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종로구 계동 막바지에 있는 조그마한 집 43번지의 문간방에 거처 하면서 만해 한용운은 역사에 빛나는 획기적인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전야 내외의 정세는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1918년 11월 미국 월슨 대통령은 14개 조항에 달하는 평화 의견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약소민족의 민족자결 원칙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연합군의 승리로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그무렵 조선총독부에서는 토지조사 사업을 완료해 놓고 한반도 3천리 강산을 송두리째 삼키게 된 것처럼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때 저 멀리 애국지사들의 망명지인 만주에서는 여준(呂準)을 비롯한 민족의 지도급 인물 39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9년 2월 8일에는 동경 유학생 6백여 명이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제창하였다. 그뿐 아니었다.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단의 여운형·김규식 등이 독립운동 준비에 몰두하는가 하면 미국에 있는 대한 부인회에서는 한국의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독립의 불길은 나라 밖에서부터 점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생의 괴로움을 외면한 만해가 아니었다. 이미 일찌기 만주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그였고, 이제 40을 갓 넘어간 그의 혈관에서는 젊은 피가 약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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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어느날 그는 최린을 찾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도 좀 잘 살아 봐야지. 이게 대체 무은 꼴이란 말이오. 세계정세도 변하고 하니 우리 한번 들고 일어나 큰소리 쳐봅시다.”
이때는 이미 최린을 중심으로 막연하게나마 3·1운동의 모의가 싹트고 있던 때라 최린 역시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우리 천도교에서 마침 일을 진행중이니 같이 손잡고 힘써 봅시다.”
이렇게 해서 불교와 천도교와의 관계는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만해도 3·1운동의 준비 기획상 많은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표자 33인을 물색하는데 있어 우선 곡절이 생겼다. 처음에는 손병희와 윤치호·이상재, 그리고 귀족 중에서 박영효 이렇게 네 사람을 대표로 내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윤·박 세 사람은 참가하기를 거부, 할 수 없이 제2차에 교섭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물망에 오른 사람이 한규설(韓奎卨)과 윤용구(尹用求)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미지근한 태도를 보일 뿐 적극적인 언질을 꺼리는 것이 아닌가.
민중의 신망으로 보나 대외적 영향으로 보나 귀족들이 꼭 가담을 해 줘야겠는데 한결같이 모두 꽁무니를 빼는 데는 참으로 낭패였다. 이때 교섭에 나섰던 사람은 최남선·송진우 그리고 현상윤(玄相允) 등의 젊은 학자였다. 이 젊은이들로부터 그간의 경위를 듣고 있던 만해는 화가 불끈 치밀었다. 성미가 원체 급했던 그는 도저히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다. 노기에 찬 그의 얼굴에서는 마침내 욕설이 튀어 나왔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자못 마땅치 않은 기분을 억제키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또 무슨 일을 저질러 댈 수도 없는 일이요, 따라서 귀족들을 포기하고 다시금 교섭을 가진 것이 바로 각 종교단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은 모든 종교 세력의 통합 형태를 띠고 있지만 33인의 태반은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이다. 그렇다 하여도 3·1운동 전개의 핵심체는 천도교와 불교였다. 천도교의 최린과 불교의 한용운이 거사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이상재의 후퇴로 기독교계의 운동은 한때 포기상태였으나 최린의 비상한 수완으로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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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응을 얻게 되고 그에 따른 기독교측의 헌신적 봉사 정신으로 일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한편 만해는 유림을 대표해서 곽종석을 민족 대표로 추대할 생각으로 일찌기 내락을 얻은 바 있었으나 거사 전에 세상을 떠난 관계로 유교측은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결국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세 종교 단체가 연합해서 3·1운동은 전개되었다.
그런데 불교계, 다시 말해서 각 사찰 승려들이 나중에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오직 한용운에 의해서 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거사 직전 비폭력주의로 열국의 성원을 얻고, 또 일본의 동정을 얻게 되면 조선은 민족 자결에 의해 독립의 길이 열릴 것으로 내다 본 한용운과 최린은 그런 뜻에서 세계 만방에 선언서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합의하였다. 이때 천도교의 일부에서는 독립청원운동을 하던 자치권 정도는 혹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한용운은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국민임을 역사적으로 천명, 강경하게 독립선언서의 제기를 주장하여 ‘독립선언서’로 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초는 최남선이 작성하였다. 미문여구(美文麗句)이지만 그 내용은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 한용운 자신이 다시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할 수 없이 최남선이 기초한 것에 한용운이 자구 수정을 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여기서 생략) 현하의 정세를 논하고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힐 책하며 세계 평화와 동양의 안녕을 염원하며 민족 대도의 자유와 독립을 천명하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우리 겨레의 갈 길, 취할 길을, 자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해는 선언서에 불참자가 쓴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다.
그리하여 공약 3장만을 한용운 자신이 직접 써 내려갔다.
(공약 3장도 여기서는 생략한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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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2시 민족 대표는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모였다. 33인 대표중 사정으로 4명은 불참하고 29인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신쯤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흉중은 모든 세속과의 관계를 끊고 어떠한 고난인들 이겨 나갈 결의가 되어 있었다. 일동의 표정은 숙연하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렸다.
한용운이 일어나서일장의 연설을 했다. “우리는 조선 독립을 세계 만방에 엄숙하게 선포했읍니다. 우리는 기필코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것으로 믿습니다. 독립이 선포된 이상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제 독립을 선언했으니 우리가 싸우다 쓰러져도 탓할 일은 없읍니다. 보십시오. 국 제정세의 추이는 바야흐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허용하지 아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동안 간악한 일제의 철쇄를 풀고 자유 천지를 향해 궐기하려는 힘을 구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이 모임을 민족 독립의 성스러운 일을 뒷받침하는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읍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간단 명료한 연설이었지마는 한용운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던 것이다. 일동은 기립하여 한용운을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파고다 공원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만세 소리는 시시각각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갔다.
한편 1919년 2월 28일 밤 10시 손병희 자택에서 마지막으로 회합을 마치고 돌아온 한용운은 그때 계동에 있던 자기 집으로 10여 명 청년 승려들을 불렀다. 백성욱(白性郁)·김법린(金法麟) 등을 포함하는 중앙학림의 학생들이었다. 한용운은 이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였다.
“여러날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 제군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밀이 누설될까 하여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한용운은 그 동안 그가 활동한 이야기, 선언문은 최남선이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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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필을 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말한 다음 이들에게 1만 매의 선언서를 분할하여 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른다. 그러나 조국 광복을 위해 일어선 우리는 이미 아무 거리낄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오직 불조(佛祖)의 혜명(彗命)은 받들어 독립 달성에 매진하기 바란다.”
이리하여 당대 불교계의 활동은 한용운을 정점으로 움직여졌던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생과 사(死)가 둘 아님을 체득하고 있던 한용운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민족의 햇불이었던 것이다.
태화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민족 지도자들은 곧 총독부에 자진 연학하여 체포되었다. 한용운은 감옥 안에서도 굳건히 민족 정기를 보였다. 즉 감옥에 수용되자 한용운은 민족대표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냉엄한 3개 항목의 투쟁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 것.
세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역사상의 위대하다는 충신 열사들도 이만한 일의 실천은 어렵다. 그는 실로 고고(孤 高)함과 냉엄의 표상이요, 독립의 사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정신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재취해 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의 고고함 바로 그런 정신이었다.
제2절 만해(萬海)의 독립사상과 그 영향
1. 독립 사상
그의 독립사상은 그가 변기통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비지땀이 개기름처럼 휘감아 흐르는 무더위 속의 옥중에서 단 한 권의 참고 서적의 힘도 빌지 않고 작성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우리 민족 독립의 심오한 사상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는 1919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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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서로써 작성된 것인데 몰래 옥외로 반출되어 1919년 11월 4일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의 부록으로 게재되었다. 이것은 흔히들 ‘조선독립의 서(書)’ 혹은 ‘조선독립 이유서’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필자 자신이 판사의 심문에 대하여 대략 독립운동에 참가한 동기를 말하고 자세한 것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상해 ≪독립신문≫에 게재된 것이 원본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이 논문은 그의 독립사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고,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의 사상 조류와 민족운동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 주었으니 3·1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문 중에서 최량의 부분인 것임을 알 수 있다.7)
한용운은 조선독립선언의 이유를 첫째, 민족 자존성, 둘째 조국 사상, 세째 자유주의, 네째 대 세계의 의무 등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민족 자존성, 조국 사상 및 자유주의는 우리나라 독립의 원동력이며, 대 세계의 의무는 다른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지켜야 할 의무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는 당시 세계정세를 제국주의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민족의 독립 실력에 대하여 당시의 사상적 조류와는 아주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 민족의 실력이 이미 독립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든 것이 그의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인데 얼른 보면 산만해 보인다. 이것이 그의 전통적인 학자적 풍모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용운은 또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내용이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은 개소가 있어 일부 개작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였다. 이 사실은 3·1운동의 회상기와 재판 기록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바이지만 그러면 그가 독립청원이 아니고 독립선언을 주장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유 정신의 발현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반드시 달성하리라는 그의 낙관주의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는 총독 지배하의 자치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았으며 기독교측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독립할 만한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거나 일제의 지배하에서도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국가는 모든 물질문명이 완전히 구비된 후라야 꼭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한 것으로써 문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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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해 한용운 독립사상’ (≪창작과비평≫ 19호 1970) p.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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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물질에서 찾음을 칼을 들어 띠를 쪼개는 것과 같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일본인은 말끝마다 조선에는 물질문명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조선인을 어리석게 하고 야비하게 하려는 학정과 열등 교육을 폐지 않으면 문명의 실현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선인의 소질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조선은 당당한 독립 국민의 역사와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을 함께 나눌 만한 실력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우리나라는 당장 독립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철폐되지 않는 한 문명하는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용운의 독립사상은 공판정에서 담당 검사 또 재판장의 대답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1920년 9월 22일 경성지방법원 특별 법정에서 재판장은 심문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가담하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면 처벌받을 줄 몰랐던가?”
“나는 내 나라를 찾아 새로이 세우는 일을 했으므로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금후로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내 육신이 죽어진다면 정신이나 영혼이 민족운동을 쉬지 않을 것이다”고 하여 재판장이 말문을 막아 버렸다.
이 재판은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다. 워낙 역사적인 대사건이어서 공소 집행을 위한 서류만도 무려 1만 8천여 장에 달하였다. 결국 3·1운동의 주동자 48인은 각기 소정의 처형을 받았으니 한용운은 최린·이승훈 등과 함께 법정 최고형인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확실히 한용운은 민족지도자의 상징적 존재였다. 또한 한용운이 있으므로 해서 한국불교사는 근대에 와서 보였던 부끄러운 역사를 면했고, 임진왜란의 국란을 당하여 호국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泗溟大師)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이 나라의 큰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암흑 시대에 그는 불타는 기둥이었다.
2.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한용운의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한 투쟁은 불교의 근본 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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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종단적인 이념 구현에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 의의가 중요하다. 그것은 3·1 운동을 주동할 때 천도교·기독교·유교 등 종교에 구애함이 없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규합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이끌었음에서도 증명이 된다. 그것은 또한 한용운이 지극히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에서도 실증이 된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주된 이유로써,
(1) 어디에도 의존한 바 없고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민족 자존성.
(2) 근본을 잊지 않는 역사의식에 바탕으로 한 호국사상.
(3) 인생의 목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생활의 자유에 두어야 한다는 자유주의.
(4) 세계 평화의 근본 해결책은 민족자결의 실천을 위한 대 세계의 의무로 할 것 등을 내세우고 있다.8)
그리하여 전개되는 그의 철저한 독립사상은 곧 현실에 전개되어 3·1운동을 주도하게 하였고, 그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지도 후원하였으니 당시의 불도들은 민족의 횃불로써 한용운을 추종하였다.
한용운에게 직접적인 깨우침을 받은 이들은 ‘유심회(惟心會)’를 중심으로 한 중앙 학림 학생들이었다. 당시 중앙학림 학생들은 ‘유심회’하는 ‘학생회’를 조직하여 불교 연구와 민족 사상의 교취 내지 불교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교내적으로나 교외적으로나 적극 전개시키고 있었다.9)
가장 연장자였던 신상원(申尙玩)이 회장직을 맡았었고, 김법린·김상헌(金祥憲) 정병헌(鄭秉憲) 등이 실수를 나누어 맡았던 이 유심회는 1918년 늦가을 한용운의 지도를 직접 받아 이에 영향 자극됨으로써 그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방향 의식도 굳건히 다듬어져 갔다. 그들 중앙 학림 학생들은 만해 한용운이 발간하던 ≪유심≫의 출판사인 동시에 자백이었던 계동의 유심사로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3월 1일 전일인 2월 28일 밤늦게 한용운은 평시에 아껴오던 중앙학림 학생 신상원·김상헌·정병현·백성욱·김법린·오택언(吳澤彦)·김봉신(金奉信)·김대용(金大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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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노준·인권환의 ≪한용운연구≫ (1960)
9) 안계현(安啓賢)의 ‘3·1운동과 불교계’ (≪3·1운동 50주년기념논문집≫)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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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중앙학교 학생 박민오(朴玟悟) 등을 계동에 있는 그의 유심사로 긴급히 모이게 하여 서울과 각지의 승려 및 신도들을 총동원하여 독립 만세운동 전개의 방략을 지시하였다.10)
이 자리에서 한용운은 내일 3월 1일에 거사할 독립선언과 그리고 이제까지 묵비로 하여 왔던 그간의 경위를 대강 설명하고 나서 독립선언서 수천매를 나누어 주며 전국에 살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어서 한용운은 서산(西山)과 사명(泗溟) 양 대사의 법손임을 굳게 명심하여 불교 청년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우리 불도가 다른 교도들의 앞장을 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비장한 격려를 하였다.
스승의 지시를 받은 이들은 사태가 매우 긴박한 것을 깨닫고 유심사를 나오는 길로 곧 인사동에 있었던 범어사 중앙 포교당으로 가서 비상 긴급회의를 열고 임시로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 총참모 본부를 그곳에 정하고 다음날의 일을 구체적으로 조심성 있게 계책하였다.
우선 내일에 있을 독립선언과 파고다 공원에서의 만세 시위에 대한 제반 준비와 연락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고 나서 앞으로의 일을 보다 조직적이며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신상원을 총수로 백성욱을 참모격으로 하되, 제반 사항을 서울에서 통괄키로 하고, 기타의 학생들은 내일 일이 끝나는 대로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즉 김법린과 김상헌을 범어사로 보내어 동래 지방을, 김봉신(金奉信)을 해인사에 보내어 경상남도 서부지방을, 오택언을 통도사에 보내어 양산지방을, 김대용을 상화사(相華寺)에 보내어 경상북도 지방을, 그리고 정병헌을 호남지방에 보내어 각기 해당구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도록 하였다.11)
지방으로 내려가면 곧 그곳의 연고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도내 각 사찰을 순방하여 선언서를 가능한 대로 많이 등사하여 만세 시위시에 살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한용운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은 지방으로 내려갈 학생들에게 분배하고 그 나머지는 서울 종로 북쪽 시내 동북부 일대에 뿌리기로 하였다. 종로 남쪽은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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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상호(金尙昊)의 ‘한국불교 항일투쟁 회고’ (≪대한불교≫ 1964. 8. 23)
11) 김상호 위의 책, (≪대한불교≫ 196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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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학생의 담당구역이었다. 한편 국내 각계와의 긴급한 연락을 서로 신속히 취하여 갈일에 대한 강구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날 즉 3월 1일 새벽 3시 무렵 해산한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제각기 시내 포교당과 문밖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급보하였다. 파고다 공원 만세 시위에 승려와 불교 신도들이 1만여나 참가케 된 것에는 한용운의 지시를 받은 이러한 중앙학림 학생들의 힘이 적지않게 작용했었기 때문이었다.
3월 1일 바로 그날 1만여에 달한 불교 신도은 일행과 더불어 파고다 공원 남대문을 나와서 우로 돌아서 기독교 청년회관을 지나 당시 종로에 있던 종로경찰서를 거쳐 종각을 돌고 다시 남대문 쪽으로 향하였다. 급히 한국은행 앞까지 와서 옆길로 대한문으로 빠져나와 서대문으로 향하여 미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 들이 들어서 있는 정동 거리로 거쳐 가면서 만세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3. 사찰과 만세운동
만세운동은 서울에서만 국한되지 않아 시위의 불길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예정대로 끝낸 중앙학림 학생들은 선언서를 보따리 속에 감추고 변장하여 지체없이 그날 밤으로 제각기 목적지인 지방 사찰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범어사·해인사·통도사·상화사(相華寺) 등 지방 사찰에서의 만세 시위는 이들 학생대표에 의해서 준비되어 갔다.
그 중에서는 이른바 범어사 사건은 동래고보 사건과 나란히 동래 일원의 만세시위운동의 중축을 이루었던 큰 거사였는데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동래 지구의 만세 시위 는 전후 2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제1차는 3월 7일에 거사하였다. 범어사를 중심으로 동래 지방을 담당키로 한 중앙학림 학생대표 김 법린과 김상헌은 1919년 3월 5일 경부선 물금(勿禁)역에 내려서 양산군 본면 금산리(錦山里) 뒷재를 넘어 범어사 뒷산 청련암(靑連庵)으로 잠입하였다. 김법린은 범어사 출신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서울의 사태를 그곳 청년승들에게 자세히 알리는 한편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래에서 시위 운동을 일으킬 것을 그곳 지도자 유석관(劉碩觀)과 상의하였다. 이어 김상호·차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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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相明)·김봉환(金奉煥) 등 법어사 내의 명정(明正)학교 학생을 주체로 하는 30명의 행동 결사대를 조직하고 또 수천 장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6일 오후 사찰 안에서 비밀리에 선언식을 거행하고 밤을 이용하여 뿔뿔이 흩어져 동래읍으로 모여갔다.
본래 범어사는 승병주찰(속칭 군말 사찰)로써 호국 정신이 투철한 도장이었다.
1911년(경술국치 다음해)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 조약을 체결하여 매불 운동을 일으켰을 때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호(映潮)·용운(龍雲)·진응(震應)·금봉(錦峯) 등 강사가 반대 궐기하여 임제종을 발기하고 임시 종무원을 설립 그 조약을 무효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범어사의 노덕(老德)들은 일찍부터 명정학교라는 신교육을 창설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있었다. 서울의 독립선언에 대한 중앙에서의 연락원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받자 내원(內院)의 이담해(李湛海), 청풍의 오성월(吳惺月), 단응(丹應)의 김나산(金挐山) 등 대덕들은 물론이요, 오리산(吳梨山) 배영진(裵英振)·송구해(宋九海)·유석관(劉碩觀)·이연봉(李蓮峯)등 중견 승려들도 사찰의 보호상 표면에는 나타나지 못하였지만 배후에서의 광복운동을 적극 성원하였다.
3월 7일 동래 장날은 왔다. 많은 장꾼이 모였다. 차상명과 김봉환의 영도 밑에 허영호(許永鎬)·김영규(金永奎)·윤상은(尹相段)·오병준(吳炳俊) 등 130명의 결사대는 시장 중앙에 나타나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장꾼들과 함께 시위 운동을 하여 경찰서로 가서 경관을 구타하는 등 투지 만만함을 보였다. 이로부터 동래 일원에서는 만세시위운동이 꼬리를 물었다.
바로 이 무렵 3월 10일경에 동래고보 졸업생이며, 당시 경성고 재학생이었던 곽상훈(郭尙勳)이 서울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동래고보를 찾았다. 이리하여 같은 장날인 3월 13일에 동래고보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때에도 범어사 승려들이 다수 합세하였다.
그후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제2차 만세시위운동이 또 일어났다. 역시 동래 시장날이었던 3월 18일이었다. 이때에는 명정학교 줄업생 김한기(金漢埼)가 주동이 되었는데 명정학교 학생 1백명을 중심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허영호(許永鎬)의 책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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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서 1천 장을 등사하였다. 커다란 태극기 한 장과 작은 기 1천여 장도 준비되었다. 동래 장날 3월 18일 거사키로 한 이들은 그 전날밤 범어사를 출발해서 선리(仙里) 뒷산을 넘고 다시 동래 향교 뒷산을 지나 복천등 불교 포교당에 도착된 것은 새벽 한 시였다. 허영호는 자택이 장터 부근이었으므로 선언서를 가지고 미리 가서 잠복하고 있기로 하였었다. 차차 날이 새자 시장기도 있고 해서 시장의 동정도 살필 겸 김한기(金漢琦)는 시장으로 가서 곶감 다섯 점을 사가지고 와서 모두들 조금이나마 공복을 달랬다.
이때 갑자기 일병 20여 명이 와서 김한기·차상명·김영규(金永奎)·김상기(金相琦)등 4명을 연행하고 나머지를 모두 해산시켰다.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이라는 자가 자기 선생이었던 중촌이라는 일인 교사에게 귀뜀하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산당한 그들은 그날 18일 밤 다시 몇 십명씩 때를 지어서 동래로 접근해 갔다. 허영호도 이 소식을 듣고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산허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자진하여 경찰서로 몰려 들었다. 이에 양측은 충돌이 불가피해서 결국 다음의 32명이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되었다.
차상명·김봉환·김영규·허영호·김상기·지용준(池龍俊)·윤상은(尹相殷)·양수근(梁壽根)·박정국(朴禎國)·오병준(吳炳俊)·오시권(吳時權)·박창두(朴昌斗)·최응관(催應觀)·김해관(金海管)·김지준(金智俊)·신종기(申鍾驥)·정성언(鄭聖彦)·황원석(黃元錫)·양춘도(楊春到)·박영환(朴永煥)·김충념(金忠念)·이영우(李英雨)·박영수(朴永洙)·김재호(金在浩)·김상환(金相煥)·이근우(李根雨)·황학동(黃鶴東)·손군호(孫君浩)·이달실(李達實)·김한기(金漢琦)·안경환(安敬煥, 탈주).
그러나 도중 안경환이 탈주하여 만주로 피신하였으므로 31명만이 1년 반, 1년 혹은 6개월의 형을 받고 부산·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다.12)
이들은 복역을 마치고 1922년 3월 1일에는 ‘3·1 동지회’를 조직 3·1정신의 보급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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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상호의 ‘3·1운동에서 8. 15까지’ ≪대한불교≫ 1964.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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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동래 일원에 걸친 3·1운동의 전개는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봉화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통도사 출신인 오택언이 중앙학림 학생대표로 내러갔던 것은 3월 4일이었다. 통도사 앞 신평 시장에서의 만세 시위를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당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승려들은 예정대로 3월 13일 운동을 감행했다. 때문에 오택언은 주동자로 몰려 2년형의 징역을 언도받고 말았다.
해인사에서도 만세운동이 추진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중앙학림 학생 대표 김봉신(金奉信)이 파견되어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지방 학림학생들과 손을 잡고 대구까지 2백리 길을 도보로 왕래하면서 선언서 1만매를 인쇄하고 운동의 계획을 수립하여 3월 31일 오전 11시 해인사 홍하문(紅霞門) 밖에서 군중과 더불어 선언식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자로 경상남도 지사가 총독에 관한 건은 바로 이 해인사 만세 시위에 관한 보고인 것이다.13)
그후 해인사 승려들은 보다 광범위한 시위 운동을 모의하였으니 새로 선언서를 등사한 후 결사대를 조직 3대로 나누어 활동키로 하였다. 즉 제1대는 강재호(姜在鎬)・기상섭(奇尙燮) 등이 선두가 되어 경주·양산·부산·김해 방면을 담당하였고 제2대는 송복만(宋福晩)・최범술(崔凡述) 등이 중심이 되어 합천·초계(草溪)·의령·진주·사천·곤양(昆陽)·하동 방면을 담당하며, 제3대는 박달준(朴達俊)·김장윤(金章允)등이 책임지고 거창·함양·산청·남원 방면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4월 16일에 해인사 입구에서 1만여 명이 동원되는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해인사 만세 시위로 말미암아 기상섭(奇尙燮)·임치수(林致洙)·송봉우(宋奉瑀)등이 주동자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박달준과 김봉률(金奉律) 등은 그후 만주로 망명하여 당시 봉천성 유하현 고산자(孤山予)에 새로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훈련을 받은 그들은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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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안계현 위의 논문 p.279.
14) ≪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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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해인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은 당시 인근 부락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일대를 진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해인사 학림에는 각 사찰에서 유학 온 청년승들이 운집하고 있어서 이들이 각기 자기 출신 사찰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우경조(禹敬祚) 마곡사 승=공주 일대 사찰
박윤성(법주사 승)=법주사의 본말사(本末寺)
김경환[도리사(桃李寺)] 승=선산·상주 방면
김도운[청암사(靑岩寺)] 승=김천·성주 방면
권청학(權淸學) 상화사(相華寺) 승=당성·영천 담당
신철휴(申喆休)(?)=고령·현풍·대구 방면
박근섭(朴根燮)(?)=쌍계사(雙溪寺) 화엄사·송광사(松廣寺)·선암사(仙岩寺) 등을 비롯하여 강진·보성 담당
한편 중앙에서 김대용(金大鎔)이 내려간 상화사에서도 사찰 안의 청년 승려 수십명이 궐기하여 대구 시내로 돌입하고 수만의 군중을 회집시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대구의 기미운동 발단도 종래 범어사의 경우처럼 상화사 청년 승려 등의 창도에 유래한 것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사찰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만세운동은 그 규모가 컸던 작았던 이루 헤아릴 수 없다.
4월 2일 봉선사(奉先寺)승 김성숙(金星淑)·이순재(李淳載)·현일성(玄一成)·강완주(姜完珠) 등 4명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양주군 광천(光川) 시장의 만세 시위라든가 또는 4월 4일 밀양군 단양면(丹陽面) 대용리(臺龍里)에서 표충사(表忠寺) 승에 의해 지도되어 주민 1천 5백 명이 헌병 주재로 쇄도하였던 만세 운동들은 그 한 예에 불과하였다. 안면 석왕사에서도 3월 9일에서 11일에 걸쳐 3일간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었으나 사전에 제지당하였다. 즉 함경남도 지사가 정무총감에게 보낸 3월의 전문은 이를 말하여 준다. 그 전문의 내용인 즉 3월 8일 함흥군 퇴조(退潮) 부락민 2백 명이 일본인 상점 앞에서 일으킨 만세 시위를 해산시켰고, 또 석왕사에서 9일부터 3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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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회가 열리게 된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소요를 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연기시켰다는 것이다.
좌우간 전국에 산재한 1천여의 대소 사찰은 인근의 부락 읍촌 등을 무대로 3·1운동의 책원지가 되었음이 분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찰은 경찰 감시의 목표가 되었고, 많은 승려들이 검거 투옥 되었다. 위로는 서산(西山)과 사명(泗溟)대사의 피를 이아 받은 법손임을 자부하고 아래로는 만해 한용운의 장렬한 뜻을 받들어 전교계가 총동원 되었던 것이다.
제3절 만당(卍黨) 결사운동
한편 한용운의 영향 밑에 전개된 또 하나의 특기할 민족운동으로는 1930년대의 만장(卍堂) 결사운동이다. 많은 종교인들은 현실을 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종교에 귀의한다. 한용운을 비롯한 선각 승려들은 종교를 통해서 현실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 했다. 이러한 숭고한 이념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조직된 것이 만당(卍黨) 이었다.
만당은 불교의 비밀 결사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30년 5월경 김법린·이용조(李龍祚)·김상호(金尙昊)·조학부(曹學孚) 등이 불전에서 맹세하고 결사를 한 후 조은택 (趙殷澤)·박창두(朴昌斗)·강재호(姜在浩)·허영호(許永鎬)·최봉수(崔鳳守)·차상명(車相明)·정상진(鄭尙眞)·장도환(張道煥)·박영희(朴映熙)·박윤진(朴允進)·강유문(姜裕文)·박근섭(朴根燮)·한성동(韓性動)·김해윤(金海潤)·서원출(徐元出)·정맹일(鄭盟逸)·이강질(李康吉) 등이 결합하여 비밀리에 창당한 조직체였다. 당명을 만당(卍黨)이라 하였다.15)
만당에는 한용운이 비밀 당수로 추대되기는 하였으나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하였다. 이는 만당의 당원이 대개 한용운의 후배와 동지였기 때문에 불교계뿐만 아리라. 민족의 지도자인 그에게 누를 끼쳐 주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 취해진 방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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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용조(李龍祚)의 ‘내가 아는 卍 자당’ (≪대한불교≫ 196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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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용운은 만당을 직접 지원하였으며 크게 성원 하였다. 만당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우선 정교(正敎) 분리를 주장하여 총독 정치의 맹점을 척결(剔決)하려고 하였다. 만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정교의 분립
(2) 불교의 대중화
(3) 불타 정신의 체험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구호에 불과하고 이면에는 민족 자주독립이 그 주된 목표이었다. 이는 만당의 당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당 선언문
“보라 3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년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섰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향자는 동지요, 배자(背者)는 마권(摩眷)이다. 단결과 박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 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하고 과감히 전진할 것을 선언한다.”
만당은 경상남도 사천군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침락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만당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동경에까지 지부를 조직하였으니, 동경 지부 책임자는 김법린이었고, 허영호·장도환(張道煥)·최범술(崔凡述) 등이 지부 당원이었다.
만당은 표면 단체로 불교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경향 각지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는 당세가 확장되어 80명의 당원을 확보하면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셨다. 당시 당원으로서 엄수해야 할 서약으로써는 ‘비밀한사엄수(秘密限死嚴守)’ ‘당의 절대 복종’의 두 가지가 있었으며 모든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조직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생명으로 독립투쟁의 선봉에 나섰던 만당이었지만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말미암아 1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끝에 1938년 말 진주경찰서의 교활한 준동으로 검거선풍을 받았다. 서울과 사천을 비롯해서 진주·합천·해남·양산 등지에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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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 차례에 걸친 일경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장도환·최범술·박근섭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16)
그중에서도 최범술은 세 차례의 옥고를 치루었다.
당원들이 검속되었을 때 한용운은 대구와 진주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당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결국 면회는 거절당하였으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당원 동지들에게 무언의 위안과 활력소가 되었다.
제1차 검거 선풍으로 진주에서 최범술·장도환·박근섭 등이 경남 경찰국에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한용운은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들을 찾아 갔으나 일경은 면회를 거부하였다.
제2차 검거 선풍으로 사천군에서 최범술·김법린 등이 체포되었다.
제3차 검거 선풍은 제 2차 검거가 일어나던 해에 해인사에서 만당 당원 및 그에 관련된 40여 명이 검거되었다.
제4차 검거 선풍으로 전남 해남에서 박영희(朴映熙)가 체포되어 혹독한 시련을 당하였다.
제5차 검거 선풍으로 서울에서 최범술·김범부(金凡夫)·최윤동 등 18인이 일거에 체포되었다.
제6차 검거 선풍으로는 통도사에서 김수정 등 수명이 卍당 당원의 협의를 받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와 같이 卍당은 사상적인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어 날이 갈수록 시달림을 받았다.
결국 卍당은 해제되고 말았지만 조국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한 청년 불교도들의 뜻은 길이 빛날 것이다. 다만 그 행절이 불명한 것이 유감이다. 이는 卍당의 규약이 기록을 남기지 않고자 한 데서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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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임중빈(任重彬)의 ‘만해 한용운’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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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임시정부와 불교
3·1운동은 비단 만세시위운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방에서 운동을 선두에서 지도하였던 학생대표들은 더러는 검거되었으나, 대부분 무사히 귀경하였다. 그들은 신상원(申尙玩)의 자택을 본부로 삼아 앞으로의 운동 전개에 대한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4월 하순경에 이르러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법린·중앙학림 대표들은 안동현에 있는 이륭양행(怡降洋行)의 알선을 얻어 신상원·백성욱·김대용 등 4명을 상해로 밀파하였다. 4명은 프랑스조계에 있었던 하비로(霞飛路)로 임시정부를 심방하여 요인들과 만났다. 때마침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의 강연도 들었다.
여하튼 이들이 독립운동의 책원지 상해로 와서 망명 지사들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후 김법린과 김대용은 임시정부의 국내 파견원으로써 프랑스 조계에서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5월 중순경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그들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과 동시에 해외 소식을 보다 신속히 전달할 사명을 느끼고 ≪화신공보(華新公報)≫라는 신문을 비밀리에 발간키로 하였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까지 그 배포망의 조직을 완료하고 곧 일에 착수하였다. 박민오(朴玟悟)와 김봉선(金奉信)은 서울에서 발간의 책임을 맡고 김법린과 김대용은 만주의 안동현 육도구에서 미곡상을 가장하여 동광상점이란 간판을 걸고 상행위를 하면서 상해에 주재하고 있는 신상원과 백성욱으로부터 오는 신문과 소식 등을 국내에 전달키로 하고 김상호와 김상헌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로부터 김법린 등은 깊은 밤까지 상점 밀실에서 ≪압강일보≫ 이면에 화약품으로 ≪독립신문≫과 기타 소식 동정 등을 전재한 후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독목주(獨木舟)로 신의주로 건너와서 우체통에 집어넣고서는 다시 압록강을 건너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법린 등에 의해 전달된 자료는 김상호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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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동사판을 이곳 저곳 짊어지고 다니며 간행되어 당시 해외 소식에 자못 궁금하였던 국내 독립운동계에 적지않은 기쁨과 격려를 던져 주었다.
그후 6월 중순경에는 김법린이 서울에 잠입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명에 의하여 국내 독립운동사료를 사송(寫送)하기 위한 사료 수집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정부 시책의 하나로 1919년 7월 임정사료 편찬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 외국에 파견되는 특사에게 한국 독립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케 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안창호가 그 총재가 되고 이광수를 주임으로 하는 편집회의 기구가 확정되어 1921년 9월 23일 제1차로 한일 관계 사료 전권을 편찬하였다.
김법린의 서울에의 잠임은 이와 같은 임정 사업을 후원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수순에 걸쳐 계동에 은거하면서 1884년부터 1910년까지의 사료를 적극 수집하고 또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기타 자료 등의 초사(抄寫)를 마친 후 그것을 싸짊어지고 삼베(頭巾)을 쓰고서 전형적인 평안도 일꾼 차림으로 무사히 국외로 빠져나갔다.17)
한편 상해에 남아 있던 신상원과 백성욱 등의 요청에 의하여 국내 불교계의 노덕(老德) 가운데 대표자를 임시정부에 파견키로 되어 김상헌과 김상호 등이 동분서주한 결과 8월 중순경에는 김포광(金包光)이 밀파되었다. 이때 수행원으로 김상헌이 동행 하였었는데 국내 사찰에서는 이 대표 파견과 함께 독립 운동의 자금조달에 갸륵한 정성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은 이미 임정 수립 당시부터 임정 활등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1919년 4월 11일 월정사 승 송세호(宋世浩)가 상해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지방 선거 회의에서 강원도 대표 3인중의 1인으로 피선되었다. 이어서 송세호는 동년 6월 이후부터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 상해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18)
이와같이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락하에 국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한 장기적인 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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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법린(金法麟)의 ‘3·1운동과 불교’ (≪신천지(新天地)≫ 1권 2호 1946. 3·1)
18) 조지훈의 ‘한국 민족운동사’ (≪한국문회사 대계≫ 1) 1965. p.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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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진척되어 가는 가운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도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니 3월 이후 전국으로부터 상경했던 불교 청년들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무력 양성이 광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통감한 나머지 마침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짐을 계기로 1919년 5월 해인사의 강재호(姜在鎬)·송복만(宋福晩)·이달준(李達俊)·김봉률(金奉律) 등 10여 명과 대흥사(大興寺)의 박영희(朴映熙) 등이 속속 자진하여 지원 입교하였다.19)
그리고 1919년 4월 하순에는 국내에 한성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박한영과 월정사의 이종욱(李鍾郁)은 동년 9월 송세호·정남용(鄭南用)20)등과 함께 대동단 사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또 임정 내무부에서 선전시위의 사명을 주어 국내에 파견할 때에도 이종욱은 신상원과 함께 국내 일원 당당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아가 불교계 청년 대표들은 서울의 신 상원 자택을 근거로 하여 지방에서의 독립 운동을 분석 종합하여 연락 지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광복 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1919년대 통도사 주지였던 김구하(金九河)의 1958년 8월 17일자 친필 진정서에 의하면 1919년 1년 동안 통도사에서 상해로 들어간 것이 1만 3천원이요, 김상호의 광복운동 사적에 의하면 1919년 10월 김상호의 주동으로 범어사에서 상해에 송금한 것도 다액이라 한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이때 이 자금을 직접 휴대하고 헌납하였던 김상호에게 범어사 세 원로 이담해(李湛海)·오성월(吳惺月)·김반산(金攀山)을 임정 고문에 추대한다는 추천장을 주었다. 1920년 2월에는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하던 김상헌이 체포되어 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1921년에는 김봉률·박달준 등이 체포되었다.21)
이와같이 국내의 불도들은 3·1운동을 범국민적으로 끌어 올리는데 수훈을 세웠고 아울러 독립운동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작업을 위하여 임시 정부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가 하면 군자금을 모집하여 그 활동을 적극 후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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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계현 위의 논문 중 p.277.
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권
21) ≪동아일보≫ 1921. 3.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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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곧 불교에 내재한 호국적 원리를 서슴없이 구현한 것이요, 또 서산과 사명당이 보여준 불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제5절 불교도의 교육 구국운동
1. 국학에의 접근
조선이 일제에 이해 침탈되면서 우리의 불계도 외부 세계의 영향이 켰다.
이러한 영향 가운데서도 교계내의 변화와 각성을 크게 가져온 면은 교학적인 방향에서의 자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의 불교는 학문적으로도 침체성을 면할 수간 없었다. 선가가 그 주류를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으며 교학 방면에서는 조선조 후기에 화엄 교학이 다시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학으로서는 당시 도입된 여러 신학문과의 접근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한국불교를 외부에 알려 주는 요청 등에는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환언하면 교화에 앞서는 불교의 사상화와 또 실질적 교화에 대처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당시 ≪불교≫지 제7호에 실린 ‘교학 연구를 진흥하라’는 논설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22)
그 논설에서는 불교의 위축이 승려수나 사재(寺財) 등의 감퇴가 아니라 신심과 교학 연구의 침체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선각자들은 전문학교 내지 단과대학의 설립과 전문 강원의 부흥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불자들을 각성시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하였다.
이와 같은 각성의 결과는 여러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가장 공통된 관심사로서는 국학을 이해하고 이에 바탕하여 조선 불교의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려는 면이었다. 불교가 조선에 전개된 이후 그 흥망 성쇠의 변태를 파악하고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모습을 찾으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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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불교≫지 제7호 1908년 1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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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곧 구국의 길에 참여하는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 과업의 대표적 선각자는 ≪조선불교통사≫의 저자인 이능화(李能和)를 들 수 있다. 그의 국학에 대한 관심이 결실을 맺게 된 기록은 그가 1922년에 총독부의 위촉으로 조선사 편찬위원의 일원이 되었을 때였다. 이로부터 15년간 그는 국학의 희귀한 자료들을 충분히 수집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가 바탕이 되어 그의 저작활동은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등의 여성사와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조선기독교 및 외교사≫·≪조선 유학 및 유학 사상사≫(소실) 등 제종교의 한국적 전개에까지 이르렀다. 그밖에도 국학에 대한 그의 저서에는 다수가 있어 시대를 앞지른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불교통사≫는 그가 불교진흥회의 일을 맡았을 때 틈틈히 정리하여 1918년에 출판한 편년체의 전3편으로 된 역저이다. ≪불교통사≫ 저술에 대해 그는 ≪조선불교≫ 제16호에서 ‘자래로 해동은 3국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불법이 종교가 되었는데 무슨 연고로 민중이 불교를 망각함은 물론 승려까지도 불교 역사에 그렇게도 어두운가?’ 라고 한탄하고 불교사를 모르면 상놈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불교통사≫ 서문 에서도 그는 조선 불교의23)연혁과 역사가 묻혀짐을 염려하고 역사지체(歷史之體)와 포교지용(布敎之用)을 세우려는 뜻을 밝히고 있다.24)
권상로(權相老)도 국학을 널리 연구하고 이에 관련을 지어 불교사를 정리하려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1917년에 저술한 ≪조선불교약사≫의 서문에서 인도·중국·일본의 불교사는 있으나 조선 불교사가 없음을 통감한다고 저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25)
요컨대 그는 불자로서 조선 불교의 역사정립(歷史鼎立)의 사명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의 동학에 대한 연구는 ≪조선문학사≫·≪조선한문학사≫·≪한국지명연혁고(沿革考)≫·≪이조실록≫ 등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그의 불교사의 저서로는 ≪조선불교전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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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삼보학회편, ≪한국불교최근백년사≫ 제2책 역경장(譯經章) p.26.
24) 권상노(權相老)의 ≪조선불교약사≫ 1917 서문 참고.
25)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 (상) 1968 서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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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초존(佛敎鈔存)≫ 등이 있다.
한편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逐)는 조선의 전통 속에서 조선 불교를 이해하려 하였다. 일찌기 해인사에서 강원을 마친 포광은 경성 불교 전문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후진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오랜 교육 기간을 통한 그의 연구는 정심하였고 독창적이었다. 해방 후에 발간된 ≪한국사상사≫에는 그의 주체적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기타 그의 저서로는 ≪원효전(元曉傳)≫·≪의상전(義湘傳)≫·≪해인사지(海印寺誌)≫·≪금산사지(金山寺誌)≫·≪불교요의론(佛敎要義論)≫·≪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 등이 있다.
당시 불교계의 각성은 대중의 계몽 및 불서의 대중화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중의 교화와 계몽을 위해서 선각자들은 불교 대중화를 간행하였다.
즉 권상로는 ≪조선불교월보≫(1912~1913)와 ≪불교≫지(1924~1933)를, 박한영은 ≪해동불보≫(1913)와 ≪불일≫지(1924)를, 이 능화는 ≪조선불교계≫(1916)와 ≪조선불교총보≫(1917~1920) 및 ≪불교 진흥회월보≫(1925)를 간행하였다.26)
이들 불교지를 통하여 불자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함에 힘썼으니 이 또한 민족의 간접적 독립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리 그를 통하여 선각자들은 해외의 신학문을 국내에 소개하여 새로운 불교학을 수립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2. 불자의 교육사업
조선 왕조에서 불교가 박해를 당하면서도 교맥을 이어온 것은 오로지 교학의 지속적 연구에 기인하였다고 본 선각자들은 국난의 위기 속에서 민족을 구하고 불법을 보호하는 길을 과학진흥책에서 찾으려 하였다.
1913년 한용운은 ‘조선 불교유신론’에서 한국 승려의 재래적 교육방법과 교과서 등을 개편 또는 새로운 문명에 적응할 수 있는 보통교육·사범교육·유학 등을 순차적으로 실시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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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삼보학회의 ≪한국불교최근백년사≫ 제2책 역경장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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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보다 앞서 1906년에 불교연구회의 홍월초(洪月初)·이보담(李寶潭) 등이 명진학교를 원흥사(元興寺)에 설립하고 청년 승려를 모집하여 교수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불교 종단 내의 현대식 교육의 시초라 할 것이다. 교장에는 당시 불교연구회의 도총무였던 이보담이 재직했으나 다음해인 1907년에 이회광이 피선되었다. 그러나 1910년에 이회광을 주축으로 한원종(圖宗) 종무원이 들어서므로 인하여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로 개칭되었다. 그후 불교사범학교가 다시 부진하게 되자 1914년 3본산 주지 회의소에서는 박한영을 내세워 불교사범학교의 재발족 형식으로 고등 불교강숙을 설립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한편 1912년에는 조선불교 선교양종 30본산 주지회의소의 결의로 능인(能仁) 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이능화가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이 구 북관 묘터에 설립되었는데 이해 초에 30본산 연합사무소에선 제5회 주지회의를 열고 학림의 임원을 선출하니 불교 교사에 박한영·일본 교사에 조천경장(早川敬藏)·담임교사에 김보륜(金寶輪) 등이 피임되었다. 교육 과목으로는 수신·종승(宗乘)·여승(餘乘)·종교학·철학·포교법·국어·한문 그리고 보조과목으로 수학·지리·역사 등을 채택하였는데 승종으로는 화엄·법화·방가(楞伽)·유마(維麻)·점송(掂頌)·전등(傳燈) 등으로 되고 여승(餘乘)으로는 천태사교(天台四敎)·사분률(四分律)·구사론(俱舍論) 등이요·사학으로는 조선종교사·동양불교사이요, 종교로는 종교학·종교사·인도철학·인도종교사 등이요, 철학으로는 서양철학·심리학·윤리학·교육학·논리학이며 한문으로는 주역(周易)·장자(莊子)·중용(中庸)·논어(論語) 등이니27)이것은 일본의 각 종교대학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대학 과정이었다.
1912에는 중앙교무원에서 동광학교를 설립하였고, 1922에는 중앙 총무원이 천도교로부터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는데 1925년에 총무원과 교무원이 단일화 되면서 동광(東光)·보성양교도 병합된 었다.
1926년에는 박한영(朴漢永)이 개운사(開運寺) 전문강원(專門講院)을 개원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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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선불교총보≫ 제20호 1918년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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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불교부인 선원(禪院)·조선 불교중앙선이 참구원(中央禪理參究院)·능인(能仁)유치원·금성(錦城)유치원 등의 대소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중앙뿐만이 아니라 지방 각 사찰에도 강원을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으니 1930년대를 기준으로 한 현황은 대개 다음과 같다.28)
용주사(龍珠寺)
명화학교(明化學校)
건봉사(乾鳳寺)
봉명학교(鳳鳴學校)
금룡사(金龍寺)
경흥학교(慶興學校)
동화사(桐華寺)
광명학교(廣明學校)
해인사(海印寺)
해명학교(海明學被)
대원사(大源寺)
강명학교(江明學校)
참계사(雙溪寺)
보명학교(普明學被)
범어사(梵魚寺)
명정학교(明正學校)
통도사(通度寺)
명신학교(明新學被)
위봉사(威鳳寺)
봉익학교(鳳翊學役)
선암사(仙岩寺)
승선학교(昇仙學校)


이와같이 불교계에선 교육을 통한 현실에의 극복을 꾀하여 전국 각지에 다수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적 수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도자의 양성에도 큰 공헌을 남겼으니 3·1운동 당시 주동적 역할을 하였던 신상원·백성욱·김법린·김상헌(金祥憲)·오택언(吳澤彦)·김대용·김봉신 등이 모두 학림출신이었다는 점과 또 만세시위가 지방의 학림을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쉽게 예증되는 것이다. 불교도들의 교육적 활동은 곧 교육 구국운동이었던 것이다.
3. 불교도의 외국 유학
각 사찰에선 교육비가 책정되고 학교 및 강원이 설립되어 교육열이 고무됨에 따라 장학비를 지급하여 영재들의 외국 유학을 장려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승려의 외국 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즉,
“인도에 가서는 불조의 참다운 자취를 배우고 또 동토(東土)에 전해지지 않은 많은 경론을 구하여 그 중요한 것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한다. 지나에 가서는 불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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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삼보학보회 ≪조선불교최근백년사≫ 제2책 ‘교육본산편(敎育本山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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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전해진 이래의 역사와 많은 조사(祖師)들의 훌륭한 자취와 기타 불교 관계를 낱낱이 배워야 한다. 또 구미의 문명한 여러 나라를 유학하여 종교의 연혁과 현상과 기타 여러 자료를 배워 그 장점을 취하여 보강하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지식의 교환과 문학의 상통은 명달(明達)의 길이며 영원한 방책이다. 외국 유학의 길을 실행하면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29)
라고 하여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문명의 조류 속에 종교인도 결코 뒤떨어지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1914년 현재의 일본 유학생 현황을 보면 경도의 임제종 대학원에 김지현(金智玄) 등 4인, 중학원에 2인 그리고 동경의 조동종·종무원에 이지광(李智光) 등 4인 제1중앙 학림에 4인으로 되어 있는데30)1918년에 1차로 이지광(李智光)·김창해(金昌海)·이혼성(李混性) 등 3인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당년에 곧 중용되어 이지광은 중앙학림 교원으로, 이 혼성은 조선 불교총보 주필로, 김창해(金昌海)는 용주사 법무의 직에 각각 보직되었다.
이들의 유학이 끼친 영향은 상당했으니 예컨대 이지광의 불교 교육의 위기라는 논설에 보면, “도무지 삼국시대에는 종승 불교만 실시하여 사회 지도자가 됨은 없었다. 포교의 방법으로 학술을 겸하여 외국에 전도한 일이 적지 않았다. 고대에도 이와 같았는데 현금 백과의 학술이 기명에 극하고 세계의 문화가 기고(其高)에 달함은 찬사를 다시 요하겠는가”31)라고 하여 승려들의 유학열을 고취하고 있다.
당시 유학의 대상지로는 일본이 최적이었다. 일본은 다른 문물에서도 그러하였지만 불교학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연구를 이룩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제 치하에 있는 조선인으로서는 출국이 매우 용이하였다. 일제 당국으로서도 일본에 유학하게 되면 자기들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때문인지 일본에의 유학을 권장하였다.
1926년 동경 각 대학 불교 유학생 졸업생 수는 전태흡(全泰洽) 등 9명, 1929년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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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논≫ (삼성문고) p.50.
30) ≪해동불보≫ 제 7호 p.81.
31) ≪조선불교총보≫ 제20호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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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 1928년도에 22명으로 해마다 증가 일로에 있었다.
일본 외에 지나에도 유학하였으니 1924년의 현황을 보면 북경의 문화대학·민국대학·평민대학·북경대학 등지에 김봉환(金奉煥)·김성숙(金星淑)등 6명이 유학하고 있다. 그후의 동태는 유감스럽게도 자료의 빈곤으로 알길이 없다.
한편 이상의 일본이나 중국과 같이 불교국이 아닌 불교와 관계가 적은 서구 방면으로 멀리 유학한 경우도 있다. 즉 독립운동에 있어 불교계를 대표하였던 백성욱·김법린 등이 그들이니 백성욱은 독일로, 김법린은 프랑스에 유학하였던 것이다. 구국운동에 관심이 매우 컸던 이들 양인의 불자는 이미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앞장 섰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와도 긴밀히 연락하여 조국 광복을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뜻과 같이 계획이 성사되지 않자 보다 큰 포부를 가슴에 지니고 한국의 내일을 기약하고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서구의 신지식·신사조를 흡수하려고 노력 하였다. 마침내 백성욱은 1925년에, 김법린은 1926년에 귀국하였으니 그후 그들의 활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한편 유학생들은 자신들 뜻을 강화시키고 단합된 힘으로 일제에 대항하고자 유학생 모임체를 마련하였으니 3·1운동 직후 발족을 한 조선 불교 동경 유학생회가 그것이다. 김상철(金相哲)·이동석(李東碩)·서원출(徐元出)·김태흡(金泰洽)이 주요 회원이었는데 한용운을 지도자로 모셨다.
이로써 그들의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은 전개되어 일제의 혹심한 간섭으로 표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던 당시에 내면적으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하여 국민 교화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광복운동에 있어서도 그 선구자는 한용운이었다. 민족을 구제하고자 또한 실력배양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한용운은 특히 교육을 역설하였다.
1935년 10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한인과 일본인의 공학’에 관한 그의 의견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는 논문이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개인의 개성 발휘에 있는 즉 완전한 교육을 시행하려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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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에서나 중등교육에서 모두 그 사람의 각자 개성에 따라 교육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성적 교육은 실시되기 여간 곤란하지 않으므로 실례에 있어서는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은 국민교육이라고 하여 동일한 과정을 동일한 기한 동안에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교육이 다소 다른 것은 그 나라의 풍속과 습관 때문입니다. 즉 그 나라 국민에게 가장 적당한 교육 방법을 실시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개성 발휘의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데 있읍니다.
그렇다면 조선에 있어서의 교육도 참으로 교육다운 교육을 시키려면 조선인의 개성을 잘 발휘할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라야 할 것입니다. 초등교육에 있어서 아동들이 가장 고심하는 것이 어학입니다. 그리고 공학을 하게 되면 조선어와 한문 과정이 문제며, 또 풍속과 습관이 달라서 아이들간에 의사 소통이 못되고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서 교육에 여간 지장이 많이 생기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참말로 교육은 조선인에게는 조선어 본위의 교육을, 일본인에게는 또 그들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요컨대 교육 이론상으로 보든지 풍속·습관 기타 관계로 보든지 중등교육의 공학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더구나 이것을 초등교육에 미친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된다고 믿습니다.”
이와같이 한용운은 한국인과 일본인간의 공학 문제를 계기로 민족의 개성을 강조하여 일제의 차별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에게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불도들은 교육을 자신들의 수양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요, 그를 통해서 국민교육 나 아가 조국광복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산중 불교로써 은둔과 도피적인 경향만을 견지해 온 것으로 인식되었던 한국불교였지만 그 내면에는 삼국과 고려 왕조를 풍미했던 호국의 불교정신이 면면이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술국치를 전후한 민족의 수난기를 당하자 불교계는 어느 종단에 못지않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불교가 당면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 지을 수 있으니 첫째는 경술국치라는 일제의 침략 속에서 일제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 불교의 영향에 대해 한국 불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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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을 어떻게 확립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며, 둘째는 급변하는 사회 정세 및 세계 조류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불교는 그 명맥을 유기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일면 방조, 일면 탄압이라는 일제의 간교한 정책의 결과로 자체적 분열도 겪어야 했다. 특히 30본 산의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전개된 친일적 현상은 시대가 흐를수록 심했던 것이다.
이에 민족의 이 수난을 깨달은 뜻있는 소수의 선각승들은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켜 안으로는 청년 불교도를 고무시키고 밖으로는 일제에 저항하면서 종교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순교 정신을 발휘하였다.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단에서도 민족을 보전하고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는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시켰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한 종교단체의 역량을 민족의 대궐기인 3·1운동에 잘 나타났다. 당시 일제의 강압 정책은 모든 사회 단체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 하에 서도 종교계는 천도교든 기독교든 불교든 민족과 역사와 더불어 자라간 그 전통을 최대한 수호하려는데 힘써 왔으며 또한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육영 사업이 꾸준히 영위 되어 왔기 때문에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은 비교적 그 위치를 애오라지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거족적인 자유 독립의 봉화가 올려졌던 것이다.
특히 불교계에서는 전국 각지에 산재한 사찰을 거점으로 거족적인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운동 이후에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락하에서 물심 양면으로 임정을 중심한 광복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유능한 일꾼이 특파되어 직접 독립전선 대열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일부 자각이 모자라는 인물 중에는 광복운동 참여를 기피하거나 또는 수수 방관하는 자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교계의 참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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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과정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와 대한불교조계종 표준과정을 바탕으로 한 불교학 커리큘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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